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83
기묘한 충고
M.com의 글로벌 투어 콘서트를 마치고 귀국하니 2월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
테오라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한 달의 휴식기가 주어졌다.
앨범 준비는 천천히 해도 된다고, 제발 쉬라는 당부에 작업실에 가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이때다 싶어 학교에 복학했다. 수강 신청 기간이 지나버려서 당황했지만, 이리저리 발품을 팔아서 그럭저럭 괜찮은 시간표를 만들어냈다.
3월 한 달은 학업에 충실한 대학생처럼 보냈다. 4월부터 조금 바빠지긴 했지만, 시험공부도 열심히 해서 중간고사도 잘 봤다.
5월에 드문드문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출석이 나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컴백 준비에 들어간 6월은 간신히 버텨낸 수준이었다.
성적은 나와봐야 알겠지만, 아이돌을 그만두지 않는 한 여기가 최선이었던 것 같아서 나는 만족스러웠다.
그래봤자 대학교 1학년을 마쳤을 뿐이지만….
어쨌거나! 이젠 테오라도 아이돌로서는 4년 차 선배였다. 방송국을 방문하면 병아리 같은 후배들의 씩씩한 인사를 받는 그런 선배.
“작년에도 후배는 잔뜩 있었는데 뭔가 다르지?”
“대우가 완전 딴판이네.”
“대상도 탔겠다! 우리도 선망받는 위치에 올라간 거지!”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테오라 때문에 아이돌을 꿈꾸기 시작한 애들도 잔뜩 있을 거야.”
테오라가 선배가 됐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는데, 우리를 보고 아이돌이 꿈을 키운다는 건 다른 얘기다.
내가 누군가의 롤모델이 된다고? 상상하니까 피부에 닭살이 돋을 것만 같았다.
“하하, 이원이 기겁하는 거 봐.”
“…난 선후배 사이로 만족해. 우상이 되고 싶진 않아.”
아이돌이라는 단어엔 우상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팬들에게만 우상이고 싶었다.
“아아~”
컴백 무대가 거의 마지막이라서 대기 시간이 길었다. 초록 형은 천천히 목을 풀고 있었고, 서혼 형은 새로 들어온 대본을 살폈다.
홍오란은 주식 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표정이 나쁘지 않아서 돈 벌었냐고 했더니 주식은 팔기 전엔 돈 번 게 아니라는 원론적인 얘기가 돌아왔다.
누가 그걸 모르나? 말 돌리는 거 보니까 투자 성과는 그다지 좋지 않은 모양이다.
지온은 꿈나라 탐험 중이고 박하는 옆 대기실로 놀러 간 상태였다.
“나도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 가는데?”
“다크래빗 선배님이 다른 층에서 스튜디오 촬영하고 있다는데 한번 들르라고 하시길래.”
콜라보 무대를 계기로 알게 된 다크래빗 선배님은 여전히 주여주 선배님과 알콩달콩 사귀고 있었다. 나를 부르는 걸 보면 주여주 선배님도 같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 조심히 다녀와. 시비 걸리면 나한테 재깍 이르고.”
“됐어.”
초록 형의 손속을 생각하면 알아서 처리하는 편이 낫다. 이제 나도 어엿한 어른이기도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크래빗 선배님이 있는 곳에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주여주 선배님이 같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별한 용건은 없었고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한 자리였다.
나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눈꼴신 커플의 행각은 안구 건강에 좋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긴 복도를 걸어가는데 열 살쯤 되는 아이가 혼자 반대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보호자를 찾아줘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데 그 아이가 먼저 허리를 숙여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기다란 속눈썹이 내려앉았다가 올라가는 게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느리게 깜빡이는 커다란 눈이 인상적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피부도 창백하고 말라서 연약해 보이긴 했지만, 똑똑해 보였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최근에 뜨고 있다는 아역 배우였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병약한 시한부 환자 역할을 기막히게 소화해서 눈물을 쏙 뺐던 것만 기억에 남았다.
천재 배우가 될 재목이라는 찬사를 받았다는 얘기도 얼핏 들었던 것 같다.
또 천재인가? 연예계는 참 타고난 재능 같은 특별함을 너무 사랑하는 것 같다.
아무튼 드라마 촬영 일정이 있어서 방송국에 왔구나 싶어 스쳐 지나가려고 하는데 작은 손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발걸음을 단번에 멈추는 억센 손길이었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어요?”
“음. 말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말할래요. 그쪽은 들을 자격이 있으니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래도 새겨들어 주세요.”
“뭘…?”
그 순간, 눈앞의 아역 배우의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자그마한 입술을 열었다.
“인과란 마무리 짓지 못하면 다음으로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것. 아이야, 그러니 부디 네 것 아닌 은원에 연연하지 말거라. 네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이는 돌고 도는 굴레 속에서 새로운 생을 받고 행복할 테다.”
“뭐라고….”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귀신이라도 쓰인 것처럼 말투와 발성이 달라졌다. 같은 몸을 사용해서 그런지 목소리까지 달라지지는 않았는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의미심장한 발언에 소름이 다 돋았다.
지금 나를 상대로 연기 연습이라도 하는 걸까? 그럴 이유는 찾을 수 없지만, 아이들은 때로 엉뚱한 행동을 했다.
그렇지만 평범하게 건네던 인사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예고가 마음에 걸렸다.
도대체 이 아이는 뭐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귀에 내리꽂힌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인과가 어쩌구 하는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네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이’는 현오 형을 말하는 듯했다.
내 해석대로라면 이 소년은 내게 충고를 해주고 있었다. 현오 형은 행복한 후생을 살 테니 안심하고 은원에 얽매이지 말라고.
“…넌 정체가 뭐야?”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나이를 불문하고 존대하는 편인데 예의 차릴만한 여유가 없었다.
“조금은 특별한 존재라고 할까요? 사실 뭐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어요. 그런다고 해서 제가 달라지진 않으니까.”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진 소년은 블랙홀 같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해왔다.
무당이라도 되는 걸까? 신기가 있어서 막 영혼도 보이고 그러나? 혹시 현오 형에게서 무슨 얘기를 듣고 나에게 전달해주려는 걸까?
물음이 끝도 없이 생겨났다. 그 물음들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소년은 제 일을 다 했다는 듯 내 옷자락을 놓고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다.
이대로 보낼 순 없어서 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이 얘기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해주는 이야기지?”
“네. 당신이 들어야 하는 이야기예요.”
“그래…. 고마워.”
“조금 신경 쓰여서 어쭙잖게 참견했는데, 참견한 보람이 있네요. 앗! 촬영 시간 다 됐다! 전 먼저 가볼게요. 언젠가 괴로워지면 내가 했던 얘기를 꼭 떠올려요!”
타닥타닥 달려가는 소년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다시 우리 대기실로 돌아왔다.
내가 지금 꿈을 꿨나 싶을 정도로 얼떨떨했다. 감각은 생생한데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신비한 만남이었다.
내게 일어났던 일들보다 신기 있는 박수무당이 더 흔하다고 생각하니 현실감각이 조금은 돌아오는 것 같았다.
“초록 형, 그 아역 배우 이름 알아? 최근에 숙소에서 같이 봤던 드라마에서 나오던 시한부 아역 배우.”
“갑자기? 리한이라는 이름로 활동하던데. 성이 여 씨던가.”
척하면 착이다. 그 애는 리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구나. 이름은 약간 이국적인 느낌이었다.
박수무당 이름으로는 언밸런스하지만, 그 애가 갖고 있던 기묘한 분위기와는 잘 어울렸다.
“여리한! 성은 처음 듣는데 이미지랑 완전 찰떡이야! 어떻게 성도 여 씨지? 서 씨였으면 서리한, 정 씨였으면 정리한, 유 씨였으면 유리한인데!”
“그걸 지금 개그라고 치고 있냐?”
“응? 아니 그냥 그렇다고….”
본인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박하는 개그 친 게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리한이? 그 애 드라마에서만 분장 때문에 초췌해 보이는 줄 알았더니 평소에도 연약해 보이더라. 어릴 때 많이 아팠다고 하더니…. 혈색도 안 좋던데 운동 팁이라도 슬쩍 알려줘야 할까…?”
서혼 형은 이름만 아는 아이 건강까지 걱정해주는 오지랖을 발휘하고 있었다. 예민한 감수성에 운동광 속성이 합쳐지면 이런 결과가 탄생하는 걸까?
“근데 이원아, 그 아역 배우 이름은 왜?”
“오다가 마주쳤는데 묘한 이야기를 해서….”
“묘한 얘기? 아, 아직 몇 작품 안 했는데 전부 대박 나서 떠오르는 신예 아역 배우로 눈도장을 단단히 찍었다고는 하더라. 대본 읽어보지도 않고 작품을 고르는데도 전부 대박 났다니 신기하지?”
“신기해! 찍신이라도 강림했나? 찍신님! 듣고 있다면 나 시험 볼 때도!”
“볼 시험도 없잖아, 박하야.”
“한국사 시험이라도 보면 되니까!”
당장이라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일정을 알아보는 박하를 두고 초록 형이 말을 이어갔다.
“사람 보는 눈도 좋고 작품 보는 눈은 더 좋다던데? 그래서 신기 있는 거 아니냐는 소리도 나오더라.”
“…신기?”
신기로 여겨질 만큼 특별한 능력을 가졌을까?
“곁에서 지켜보면 믿게 된다더라고. 애가 나이보다 어른스럽기도 하고 말투도 독특한데다 가끔 사람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나?”
여리한이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껴본 탓인지 설령 사람 마음을 읽는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초록 형에게서 여리한에 대한 정보를 들을수록 내가 들었던 말을 잘 기억해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망설이다가 호의로 충고해준 것 같으니까.
박하나 홍오란에게 아까 있었던 상황을 설명하면 플래그를 세웠다고 불길하다고 할까? 왠지 위험하다면서 나를 과보호할 미래가 그려졌다.
뭔가 닥치더라도 멤버들까지 휘말릴만한 문제는 아닐 듯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충고를 똑똑히 새겨두되, 확정되지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리한이 경고한 미래가 올지 안 올지도 확실히 모르고, 그때가 올 때까지 벌벌 떨고 있는 건 낭비니까.
그리고 우리는 아이돌. 걱정하느라 낭비할 시간에 연습 한 시간이라도 더 하는 게 이득이다.
프로 아이돌의 사고방식은 이토록 효율적이었다.
* * *
오랜만에 격렬한 댄스곡으로 컴백하게 됐다. 힘을 덜 들이면서도 ‘있어 보이는’ 동작을 적절히 배치했는데도 어렵고 힘든 안무였다.
처음 이 안무를 보고 나서 초록 형이 우리를 잡으려고 하는 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인간이 추라고 만든 안무가 아니었으니까.
중간중간 안무가 수정되면서 초인이라면 소화할 수 있는 안무로 바뀌긴 했다.
처음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쉬워지긴 했지만 한 번 추면 수명이 닳는 느낌은 여전했다.
이 춤 때문에 타이틀곡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체력 괴물인 서혼 형까지 숨차게 하는 안무를 하면서 노래까지 부르려면 노래를 대대적으로 갈아엎어야 했다.
그렇게 탄생한 싱글 3집의 타이틀 ‘Mix U’는 일렉스토닉 댄스 뮤직, EDM 곡이었다.
박하는 이 곡이 전 세계 클럽의 인기곡이 될 거라고 장담했다.
그런데 박하가 클럽에 가보긴 했나? 갈 시간이 없었을 텐데?
뭐 어쨌든 우리는 무대 아래의 팬들에게 클럽에 온 것 같다는 착각을 심어줄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