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87
뒤틀리는
“뭐?!”
안전 불감증이라고, 간도 크다고 핀잔이 쏟아졌다. 그래도 나는 의견을 굽힐 생각은 없었다.
차분히 설명했더니 내 의견이 조금씩 받아들여졌다.
멤버들이 내 입장이었어도 직접 만나보고 싶지 않았을까. 내 마음을 이해해준 건지 못마땅해하면서도 끝까지 반대하진 않았다.
“안전 문제도 있으니까 준현 형이 같이 가주세요.”
“그러지.”
경호원 역할도 겸하는 준현 형이 같이 간다고 하자 멤버들이 걱정을 덜었다. 자신들이 따라갈 수 없다는 점은 이해했다.
지잉?
아까 연락했던 번호로 문자가 와 있었다. 만날 장소는 나도 아는 곳이었다. 프라이빗한 술집 겸 식당이었다.
“무슨 첩보 작전이라도 펼치나. 이 식당, 입구가 세 군데라는 건 알아?”
“…그래?”
맨날 정문으로 드나들어서 다른 입구가 있다는 사실은 처음 들었다.
“준현 형이 따라가니까 문제는 안 생기겠지만, 그래도 이상하다 싶으면 얼른 튀어. 알았지? 이원아.”
“응. 알았어.”
걱정이 과한 것 같지만 멤버들의 마음은 이해한다. 멀쩡하게 돌아오겠다고 몇 번이고 약속한 후에야 멤버들에게서 풀려났다.
“기다리고 있을게. 이원.”
지온은 든든하게 먹고 가야 한다면서 예정보다 더 엄청난 한정식 한 상을 차려버렸다.
배부른 저녁을 먹고 난 후 준현 형과 함께 약속 장소로 향했다.
* * *
약속 장소인 식당에 도착해 울트라마린 룸에 들어섰을 때, 그 안엔 이미 선객이 와 있었다. 푸들 펌에 모자를 눌러쓴 여자였다.
“왔네요.”
펑키한 스타일의 옷에 짙은 화장이 잘 어울렸는데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있었다. 단정한 목소리 때문일까?
“…안녕하세요.”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네요. 함이원 씨.”
가까이서 본 적은 없지만, 멀리서는 자주 봤다는 듯한 어감이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매니저님이 동석해도 된다고 했지만, 이야기에 끼어들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여자가 내민 명함을 받아 읽었다.
“M.com 대표님 비서세요?”
“정확히 말하자면 마석희 대표님의 수행 비서‘였’죠. 지금은 그만뒀고요.”
“그러면 USB에 들어 있는 자료들은?”
“대표님 지시로 했던 일들과 관련된 자료들을 정리해둔 겁니다.”
M.com의 대표가 이 일들의 배후라고?
가십에 별로 관심 없는 나도 현 M.com 대표가 재벌 3세라는 것쯤은 들었다. M.com의 모체는 미디어 공룡인 재벌가였다.
재벌가의 일원이 나를 노리고 있다고?
“이 자료를 이용해 고소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외부에 유출되면 제가 책임져야 하는 자료이기도 하지만, 고소한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이 자료들은 해석의 여지가 있었다. 누가 지시해서 한 일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데다 인과를 증명하기 어려웠다.
통화 내역, 녹취록, 금전 거래 내역 등의 단순한 자료였다. 코멘트가 붙어 있지 않았다면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지 명확히 보이지도 않는 그런 자료.
게다가 상대는 재벌 3세였다. 고소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처벌을 기대할 수는 없을 듯했다. 비싸고 유능한 전관 변호사를 선임할 테니까.
증거가 확실해도 쉬운 길이 아니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더라고요. 이대로 두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아서…. 은연중에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네요. 이런 자료를 모아둔 걸 보면 말이죠.”
“제보해주신 건 감사합니다.”
“아니요. 저한테 감사할 필요는 없어요. 아니, 감사하지 말아 주세요. 마음이 약해져서 알리긴 했지만, 제가 마석희 대표 명령으로 해왔던 일들이 없어지진 않으니까.”
“…….”
나는, 우리 테오라는 큰 피해를 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파일에 기록된 것들이 사실이라면 현오 형은 눈앞의 이 사람과 마석희라는 재벌가의 인물 때문에 꿈이 좌절됐다.
“USB에 현오 형 자료도 있던데 그건 왜 넣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준현 형에게 보냈던 USB에는 현오 형과 관련된 자료는 없었다. 그러니 내게 보여줄 의도가 있어서 넣은 자료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왜 같이 넣어뒀지?
마석희 대표의 취미가 아이돌 하나를 찍어 괴롭히는 거라고 해도 같이 보여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정현오 씨랑 함이원 씨 둘 사이에 연관이 있어서예요. 아시죠? 정현오 씨 목소리랑 그쪽 목소리가 똑같다는 거.”
“네. 그런데요?”
마석희에게 목소리 페티시라도 있는 걸까? 그렇다고 치면 맥락은 이해된다.
그렇다고 해도 찾아보면 비슷한 목소리 정도는 이 세상에 넘칠 텐데 왜 굳이 다루기 번거로운 대상을 골랐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마 대표는 청각이 예민하고 다른 사람이 못 듣는 소리도 듣는다고 해요. 자세한 건 모르지만 일반인이 못 듣는 주파수의 소리까지도 듣는다고 하더라고요.”
청각이 예민하다면 듣는 소리에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나도 비슷해서 어느 정도 공감 가는 부분도 있었다.
다른 사람이 못 듣는 주파수까지 듣는다면 나보다 더 특이한 케이스였다.
“그런 대표님이 처음 꽂힌 목소리가 정현오 씨였습니다. 정현오 씨 목소리를 원했지만, 끝내 얻진 못했고, 그러다 함이원 씨 목소리를 듣게 됐죠. 대표님이 함이원 씨 목소리를 들었을 때가 버츄얼 가왕을 하던 시기였는데 정현오 씨 목소리라고 백 퍼센트 확신하셨어요.”
마석희 대표가 얼마나 소리에 민감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현오 형과 내 목소리가 비슷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확신하진 못한다. 유사도가 높으면 거의 똑같이 들린다는 걸 본인들도 아니까.
그런데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다면? 미세한 차이도 가려낼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대표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에 단둘만 가지고 있는 노이즈가 끼지 않은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라고 해요. 지금은 정현오 씨가 없으니 함이원 씨가 가진 목소리가 세상에 유일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내 목소리는 현오 형에게서 받은 것. 그러니 현오 형의 목소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유일무이했다.
마석희 대표는 청력으로 이것까지 알아챈 것이다.
“마석희 대표는 목소리에 집착해요. 그쪽이랑 정현오 씨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저는 모르지만, 알아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정현오 씨 자료도 넣었어요.”
임 비서라는 여자는 마석희 대표가 내게 벌이는 일들이 현오 형에게 벌였던 일의 연장선에 있다고 설명했다.
“마 대표의 인내심은 진즉에 닳아 없어졌으니까 조심해야 해요. 사실 원하는 건 뭐든 이룰 수 있었던 사람이 지금까지 참은 것만으로도 대단할지도요.”
현오 형의 목소리를 가지지 못했고, 내 목소리도 여전히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이젠 내가 진실을 알게 됐으니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마석희 대표에게 굴복할 일은 결코 없다.
“설명해야 하는 내용은 전부 설명한 것 같네요. 써볼 만한 방법은 전부 써봤는데도 원하는 걸 얻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나올까요. 예전처럼 온건한 방식은 아니겠죠.”
온건? 지금까지 마 대표와 비서가 함께 해온 너저분한 일들이 온건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가?
이전의 방식들이 상대적으로 온건한 축에 속한다면, 온건하지 않은 방식은 얼마나 과격하다는 거지?
경계심이 확 올라갔다.
“내 경고를 흘려듣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공범인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나는 함이원 씨가 오래오래 꿈을 이뤄갔으면 하니까.”
가벼운 인사를 남긴 여자는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면서 홀연히 사라졌다. 어딘가로 몸을 피하려는 게 아닐까.
머리가 복잡했다. 일단 숙소에 가서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다리 힘이 풀렸다.
“이원아.”
재빨리 잡아준 준현 형 덕분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준현 형은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돌아가기 전, 준현 형은 아무 말 없이 내 어깨를 꽉 잡아주었다. 나를 위로해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숙소 현관문 앞에서 깊게 심호흡을 한 후에 안으로 들어섰다. 멤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를 맞이했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안 다쳤어. 그냥 대화만 하고 왔어.”
이곳저곳을 살피는 서혼 형은 다친 곳이 없어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얘기했어? 그래서 배후가 누구라는데?”
“M.com 대표 짓이래. 그 사람 비서가 제보한 거였어.”
“…M.com 대표 말이야? 마석희? 나도 사람 보는 눈 더 길러야겠다. 사람 속은 모른다지만 마석희 대표 평판은 나쁘지 않았거든. 요즘 자꾸 삐끗한다는 소문이 들리긴 했다만.”
“나도 그 사람 얘기는 들었었어. 유능하고 보상 확실해서 직원들이 좋아한다는 얘기였는데…. 역시 한 면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거였어.”
한 회사의 대표로서 충분한 능력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걸로 사생활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밖에서는 친절해 보이는 사람도 집에만 들어가면 폭군이 되기도 한다니까.
“근데 그 사람이 왜 함이원 너를? 스폰이라도 하고 싶었나?”
“스폰?”
“밑바닥으로 떨어뜨린 다음에 동아줄을 내밀면 그 동아줄을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진 않을걸. 연예계에서 흔히들 쓰는 수법이지.”
“옛날부터 유구하게 사용된 수법이긴 하지. 이원이한테 쓰기엔 적절하지 않지만.”
“함이원은 무슨 수를 써도 스폰 안 받을 놈이지. 굳이 스폰이 필요한 환경도 아니고.”
“그래서 이원아, 뭐 때문이었다는데?”
“내 목소리를 가지고 싶어 한대.”
“목소리?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 들을 수 있지 않나?”
“음반이나 영상 속 목소리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듣는 내 목소리를 독점하고 싶은가 봐.”
“뭔….”
“이상한 사람이야!”
“이원이 목소리가 좋긴 한데, 나만 듣겠다는 심보는 조금 그렇네. 세상은 넓고 취향은 다양하다더니.”
“다른 사람이었으면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을 텐데. 자기가 원하는 상황을 현실로 만들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골치 아프네.”
현오 형과 관련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골치 아플 텐데 더 복잡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잘 해결해왔으니까 이대로만 하면 되지 않을까?”
지금의 테오라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무너뜨리기 어려운 힘을 가지게 됐다. 앞으로 마석희 대표가 다른 시도를 한다면 그건 테오라를 향한 게 아니라 나 개인을 향한 것일 가능성이 컸다.
“무슨 짓을 벌일지 지금으로선 예상이 안 되네. 일단 인맥 동원해서 예의 주시하는 걸로.”
“이원아. 혼자 다니지 말고 경호원분들이랑 꼭 붙어 다녀. 알았지?”
“응. 걱정 마.”
걱정하는 멤버들을 위해서라도 한동안 혼자 돌아다닐 일은 없을 듯했다.
피곤해서 쉬어야겠다면서 방에 들어와 문을 닫은 후에야 괜찮은 척하던 연기를 그만둘 수 있었다.
나는 다 괜찮았다. 내게 벌이려던 일들은 미수로 그쳤고, 나에게는 든든한 우리 멤버들이 있다.
그렇지만 현오 형은…?
조심히 다가오던 현이를 품에 안아서 뒤틀리는 속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