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89
죽을 때까지
초록 형이 셀럽들만 참석할 수 있는 프라이빗 파티 초대장을 얻어왔다. 기존 회원의 추천을 받아야 초대장을 얻을 수 있는 형태라 구하기 어려웠다면서도 2장이나 얻어 왔다.
초록 형과 내가 참석하는 것으로 결정됐고, 다행히 스케줄도 쉽게 조정할 수 있었다.
프라이빗 파티가 열리는 호텔 연회장. 반짝이는 조명 아래 오케스트라가 잔잔한 뉴에이지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내가 주의해야 할 사항 있어?”
“이원이 넌 누가 말 걸면 적당히 웃으면서 맞장구치기만 하면 돼. 중요한 얘기는 내가 따로 할 테니까.”
“도와줘서 고마워.”
“재벌들의 상속 싸움에 참전한 것 같아서 신나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나도 그런 인간은 가만히 두기 싫기도 하고.”
초록 형은 M.com의 새로운 경영자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을 만나보는 것도 좋지만, 이 모임 자체에도 흥미가 있다고 했다.
초록 형이 가진 힘은 인맥에서 나오니 이번처럼 인맥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다할 리 없었다.
“아직 파티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니까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돼. 재미는 없어도 즐기는 척 해봐.”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잔뜩 모인 파티. 지금도 우리가 있는 쪽을 곁눈질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가 이런 모임에 참석하는 일은 드무니 이때다 싶어 말을 걸 기회를 노리는 듯했다.
“내 걱정 말고 돌아다녀도 돼. 나도 이젠 대화를 적당히 끊을 수 있는 기술이 생겼으니까.”
“하핫, 그럼 이원이 너만 믿고 가볼게?”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 초록 형은 마치 일행이었던 것처럼 그 틈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나를 데리고 돌아다닐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초록 형의 신경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초록 형이 자신의 능력을 백분 발휘하게 놔두기로 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다가 무알콜 칵테일이 든 유리잔을 하나 손에 들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니까 이러는 것 같아서.
“이런 파티에서는 처음 뵙네요?”
모델 같이 큰 키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수제 슈트로 보이는 옷은 디테일이 독특했다.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스타일이었는데 뭐 하는 사람인지 짐작이 잘 되질 않았다.
“일행을 따라서 와봤는데, 저한테 익숙하지 않은 자리라 어색하네요.”
“테오라 정도 되는 인기 아이돌이면 파티 주최자여도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죠. 하긴 테오라는 모범적인 걸로 유명하니까…. 이원 씨, 저는 이런 사람이에요.”
건네받은 명함을 보고 디자이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디자이너가 아니라 패션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피지컬인데….
“모델이신 줄 알았어요.”
“하하,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신인 디자이너 시절에는 제가 옷 만들고 제가 모델로 런웨이에 서고 그랬죠.”
불편한 정적이 흐르지 않게 시시콜콜한 주제를 꺼내줘서 어렵지 않게 대화가 이어졌다.
“이제 긴장 풀렸어요? 너무 얼어있는 것 같아서 잡담을 해봤는데.”
“네. 이런 파티는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긴장했나 봐요. 배려 감사합니다.”
“별 거 아니에요. 나도 이원 씨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한 행동이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디자이너님은 테오라 멤버들을 스페셜 모델로 쓰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전 멤버가 참여해준다면 좋겠지만, 일정상 어렵다면 한두 명이라도 좋다고 했다.
“제가 운영하는 브랜드가 영 캐주얼 쪽인데 테오라 같은 맑고 청량한 이미지를 주고 싶거든요.”
우리랑 딱 어울린다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달라고 했다. 왜 회사에 직접 제안하지 않았나 했더니 몇 번 퇴짜 맞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워낙 스케줄이 쏟아져 들어오니까 우리 귀에 들어오기도 전에 커트 당했던 모양이다.
멤버들이랑 같이 고민해보겠다는 말에 그는 꼭 다음에 보자면서 물러섰다.
그 후에도 말 상대가 부족할 일은 없었다. 디자이너님이 비운 자리는 몇 초도 되지 않아서 채워졌으니까.
매의 눈으로 나를 노리던 사람이 바로 자리를 차지했다가 빼앗기면서 교체됐다. 덕분에 몇 분 사이에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게 됐다.
원래 이런 식으로 인맥을 쌓는 건가?
손에는 명함이 자꾸만 쌓였다. 이 파티는 안면을 익히고 가벼운 일 얘기도 하는 사교의 장이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었구나.
평소에 일하면서 만나기 어려운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과 통성명하고 짧은 대화라도 나눠 볼 기회였다.
다들 체면을 철저하게 챙긴다는 인상이 있긴 했지만, 모임 특성상 당연한 일이었다.
잠깐 나를 찾아온 초록 형은 이야기가 생각보다 잘 풀릴 것 같다면서 중간보고를 해왔다.
나이가 어려도 야심 있는 사람이라면 M.com 대표가 흔들리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걸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초록 형이라면 티 나지 않게 은근히 부추겼을 테니 이미 M.com을 차지할 꿈에 부풀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종당한 줄도 모르고 초록 형과 의형제를 맺자고 하는 중이란다.
무서운 초록 형….
“사람은 어때 보여? 너무 쉽게 넘어왔는데 머리가 안 좋은 거 아니야?”
“똑똑한 사람이라고 사기 안 당하는 줄 알아? 자기를 맹신하는 사람이 많아서 오히려 요령만 알면 더 쉬워.”
자기가 하는 일이 사기라는 건 인정하는구나. 내가 부탁한 일이라서 그 점을 차마 꼬집을 수도 없었다.
나도 어둠의 세계에 간접적으로 발을 들인 건가….
“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오만하고, 그러면서 적당히 사람 냄새도 나고. 전체적으로는 준수해. 업무 능력은 마석희 대표보다 딸리더라도 투자자들이랑 관계는 오히려 나을 것 같으니까.”
대표는 중요한 결정을 하는 사람이면서 회사의 대외적인 얼굴. 도덕적인 결함이 있는 마석희 대표보다 한참 부족하지 않다면 그걸로 됐다.
“난 다시 가볼게.”
아직 이야기를 끝마친 게 아니라 초록 형은 왔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 후에는 파티 주최자와도 인사를 나눴다.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가진 않았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받아주면서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게 전부 어른이 되는 과정이겠지.
왠지 나도 사회생활을 톡톡히 하는 기분이라 괜히 뿌듯해하고 있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원 씨?”
살짝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가고 얼굴 근육이 경직됐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깨달았기 때문에.
“마 대표님….”
“기억해줬네요?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인연인가요? 우리.”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악연도 인연이라면.
M.com의 마석희 대표 정도라면 당연히 초대받았을 모임이었다. 젊은 셀럽들이 참석하는 파티이고, 마 대표는 젊은 축에 속하는 경영인이면서 재벌 3세라는 뒷배경을 가지고 있으니까.
“…안녕하세요.”
“이원 씨랑 친하게 지내라는 계시 같아서 기분 좋은데요? 테오라 바쁘다고 들었는데 여긴 어떻게 왔어요?”
“초대장을 얻어서요. 그러는 대표님은 더 바쁘실 텐데….”
“바쁘기야 하지만 일부러 시간 내서 왔어요. 여기 만나고 싶은 사람이 온다고 하길래.”
그 만나고 싶은 사람이 설마 나는 아니길 바라지만, 나일 것 같다는 예감이 지워지지 않았다.
함석희 대표라면 그룹 스케줄이나 내 개인 스케줄은 물론이고 갑자기 생긴 약속까지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한 사람. 나한테 사람을 붙여놨을지도 모른다는 건 괜한 생각은 아닐 듯했다.
각 업계의 셀럽들이 참석하는 파티라면 우연히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으니 급하게 왔을 수도 있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하기엔, 마석희 대표가 가벼운 파티나 모임을 즐기지 않는다는 정보를 들은 후였다.
“그럼 파티 즐기세요. 대표님.”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친근하게 접근하려는 시도도 역겹기 그지없었다.
“…어디 가요? 여기 만나고 싶은 사람 따로 있어요? 그럼 내가 소개해줄 수 있는데.”
“아뇨. 그런 사람은 없어요.”
“그럼 나랑 대화 더 나누다 가요.”
권유 같이 들리지만, 거기엔 은근한 강요가 들어가 있었다. 거절을 못 하는 사람이라면 계속 붙잡혀 있지 않았을까.
나도 마석희 대표의 실체를 알지 못했더라면, 비는 시간을 기꺼이 나눠줄 수도 있었겠지.
“마석희 대표님.”
“네. 이원 씨.”
“저랑 친해지고 싶으세요?”
“네, 물론 친해지고 싶죠. 아이돌이 아니었어도 난 이원 씨랑 친해지고 싶었을 거예요.”
“정확히는 아이돌이 아니었으면 더 좋았겠죠?”
원래는 마 대표와 다시 만나더라도 아무런 티도 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내가 진실을 알게 됐다는 걸 알려서 도움 될 일은 없을 것 같아서.
그런데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걸 보면서 불현듯 깨달았다. 이 사람에게 가장 끔찍한 일이 무엇인지를.
그건 아마도 자신이 바라던 일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임을 절감하게 되는 것.
“무슨….”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지 말끝을 흐리던 마석희 대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 표정을 살피는 시선이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내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제가 솔로로 활동하는 사람이었다면 대표님께는 좋았겠죠?”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름도 없는 소속사에서 가수를 꿈꾸는 가난한 연습생이었다면 더 좋았을 테고요.”
“이원 씨, 뭔가 오해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다급하게 내 팔을 잡으려는 손을 뿌리쳤다. 그 손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오해일까요? 오해라고 보기엔 너무 흔적이 많은데요. 저를 노리고 테오라를 음해하려고 한 흔적이요.”
“아니, 내가 한 게 아니에요! 난 그냥 이원 씨 팬일 뿐이라고요!”
팬이라는 말로 모든 것이 용납되지 않으냐는 듯한 태도였다. 그렇게 따지면 안티도 팬일 테고, 사생도 팬이겠지.
자신의 소유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석희 대표가 한 짓들은 팬이라는 말로 넘어가기엔 너무나 지독한 것들이었다.
나 혼자만의 문제였다면 단순히 무시하고 지나갔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 멤버들과 현오 형까지 얽혔으니 가만히 둘 수 없었다.
합당한 고통과 좌절을 되돌려받을 수 있기를, 가슴 깊이 바랐다.
“팬이요? 마 대표님이 설마 제 팬이실리가요. 제 목소리를 좋아하실지는 몰라도 제 팬은 아니시죠. 팬들을 모욕하지 말아주세요.”
“목, 목소리? 그걸 어떻게….”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어떤 과정으로 나에게 정보가 흘러 들어갔는지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임 비서…? 그 여우 같은 게 말도 안 되는 음해를 한 거예요! 이원 씨도 이젠 알잖아요.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는 난다는 걸!”
때로는 근거도 없이 비방을 일삼는 사람이 있다. 아이돌로 연예계에서 활동하면서 그런 시도를 여러 번 겪었다. 그렇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한번 해봤던 탓인지 우리를 향한 음해 시도들은 교묘해져서 해석의 여지가 있었지만, 현오 형과 클리어리에게 벌였던 짓들은 증거가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글쎄요. 현오 형과 클리어리에게 한 행동들도 전부 음해라고 하실 건가요?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있는데?”
“그건…!”
“제 목소리나 현오 형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면 팬이 되어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랬다면 독점할 순 없었어도 가끔 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현오 형이라면 자기 목소리를 사랑하는 팬을 외면하지 못했을 테니까.
마석희 대표는 입술을 짓씹었다. 얼마나 강하게 짓씹었는지 입술에는 핏빛까지 비쳤다.
“아이돌을 그만둘 일도, 당신의 소유물이 될 일도 절대 없을 겁니다. 제가 죽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
“네. 죽을 때까지.”
단호하게 나간 대답에 주먹을 꽉 쥔 채로 부들부들 떨던 마석희 대표는 몸을 돌려 호텔 연회장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