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91
망각의 약
도수가 높은 술을 급하게 마신 탓에 마석희가 술에 취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성이 서서히 마비되어 갔다.
‘나만을 위해 노래해주는 카나리아를 원하는 게 그렇게 나빠?’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라도 인간이라면 당연한 바람이었다.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애초에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지 않은가.
능력과 재력,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욕망을 위해 자신과 비슷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석희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환경만 받쳐주면 누구라도 나처럼 할걸!’
도덕이나 양심, 규칙 같은 것들은 예로부터 아랫것들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현대에서도 사회 지도층은 상대적으로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웠다. 들키지만 않는 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들켜버렸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마석희가 한 행동들을 절대로 들키면 안 되는 사람은 바로 목소리의 주인. 예전에는 정현오였고, 이제는 함이원이 그 대상이었다.
그런데 함이원에게 모든 것이 탄로 났으니 그간 해왔던 일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 들었던 그때 데려왔어야 해.’
정현오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날 정현오를 데려왔다면 지금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때의 정현오는 혈육도 친지도 없는 혈혈단신에 소규모 소속사에서 간신히 데뷔한 아이돌이었으니까.
같은 그룹 멤버들이나 친구들이 백방으로 찾아다녀도, 실종 신고가 들어가도 자신에게 그런 시도를 무마할 능력은 충분했다.
정현오가 죽을 일도 없었다. 자신의 손에 들어온 소유물을 애지중지하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건강검진을 자주 해뒀을 테고, 검진 결과가 안 좋았대도 어떻게든 살려뒀을 터다.
전 세계를 뒤져서라도 수술해줄 의사를 찾았을 테고, 돈이 얼마나 들어가든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것’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마석희의 인생에 딱 하나, 열망하는 것이었으므로.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차 하는 사이 상황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됐다.
“죽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라….”
함이원의 그 단호한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수를 쓰든 굴복하지 않겠다고 맹세라도 하는 것 같았다.
보안이 강화되고 경호원이 붙었다는 소식을 보고받았을 때부터 이상함을 감지해야 했다. 특별한 행사가 없는데도 스케줄에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는 건 위협을 느꼈다는 의미였다.
“내가 많은 걸 원해? 그 목소리를 바로 옆에 두고 나만 듣고 싶다는 게 그렇게 과분한 소원이야?”
이제는 테오라를 건드리면 이쪽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건 누구에게 물어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 그래서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해 함이원과 친해져 볼 생각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친구가 되는 데 나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부유한 후원자이자 친구가 되어 줄 작정이었다.
함이원의 목소리가 가진 가치를 자신만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함이원의 청각도 예민하다고 하니 그 공통점으로 서서히 친해져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소박한 계획조차 물거품이 됐다. 이제는 함이원이 나오는 행사에 직접 가서 노래를 듣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내가 왜 다른 것들이랑 똑같이 기다리고 따라다녀야 해? 내가 왜…?”
게다가 M.com 대표인 마석희에게 팬들처럼 직접 따라다니면서 노래를 들으라는 건 함이원의 목소리를 포기하란 뜻과 거의 비슷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까지 오가는 테오라와 스케줄에 맞출 수 있을 리 없었다.
“왜 날 이해 못 해주니? 지저분한 목소리만 들어왔던 내가 가엾지도 않냐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위한 갈망은 충족될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마석희의 절망은 강렬한 욕망만큼이나 컸다. 몇 날 며칠을 술에 절어 회사에 출근조차 하지 못했다.
비서가 찾아와 술을 빼앗아도 봤지만, 마석희는 다시 술을 찾았다. 술에 취해있을 때만은 우울함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귀찮게 굴지 말고 내버려 둬. 놔두면 알아서 회사로 돌아갈 테니까.”
자고 일어나서 취기는 상당히 날아갔지만, 폭음한 여파인지 목이 아파서 목소리가 쉬었다.
“…일단 병가 처리해두겠습니다. 그런데 대표님, 아무래도 명예 회장님이 아신 것 같습니다.”
“…뭐?”
“오늘 오전에 대표님이 회사에 나오셨는지 확인하는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 영감…. 하….”
숙취인지, 스트레스성 두통인지 몰라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아파졌다.
명예 회장인 마석희의 할아버지는 깐깐한데다 칼 같은 성격이었다. 술에 취해서 출근도 하지 않았다는 걸 알면 무슨 잔소리를 할지 알 수 없었다.
잔소리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안 그래도 최근 M.com의 성과가 시원찮아서 자리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큼, 다른 소식은 뭐 들은 거 없고?”
“누군가가 회사 주식을 공격적으로 사들이고 있습니다. 경영권이 목적인 것 같습니다. 그것 때문에 회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걸 왜 지금 말해?”
“…며칠 전에 말씀, 아닙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개인적인 문제로도 힘든데 회사 문제까지 마석희를 괴롭혀댔다. 괴로움을 삭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주식을 매수해봤자 대주주는 큰아버지라 큰 상관은 없겠지만, 무슨 꿍꿍이지.”
“명예 회장님 비서실에서 입수한 얘긴데 명예 회장님이 요즘 자주 만나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그게 누군데?”
“마하준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방계 쪽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마하준?”
작은할아버지의 손자라 큰 행사에서나 마주치는 정도지만,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걔가 왜 할아버지를 자주 만나? 대학생, 아니지. 지금 나이가….”
마석희는 몇 년째 만나지 않았던 마하준의 나이를 따져봤다. 벌써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몇 년쯤 해봤을 나이였다.
별 관심이 없어서 최근 모습이 업데이트되어 있지 않았다. 서른이 갓 된 듯했다.
그 나이쯤 됐으면 회사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싶을 만했다. 그게 대표 자리라면 꿈도 큰 거지만.
“앙큼하다고 넘어가기엔 시기가 안 좋은데. 왜 하필….”
하필 자신이 하락세일 때 할아버지를 만나는 걸까.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가볍게 넘겼다가는 대표 자리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석희는 술에 절여진 몸을 일으켰다. 며칠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니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씻고서 당장 갈 테니까 차 대기시켜둬. 마하준에 대해 조사는 해뒀고?”
“네. 요기할 거라도 준비해드릴까요?”
“됐어. 서두르기나 해.”
욕실로 들어선 마석희는 푸석해진 얼굴을 보다가 거울에 물을 뿌렸다. 슬퍼하는 제 얼굴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 * *
명예 회장실에서 나오던 마석희는 고가의 핸드백을 내던져 버렸다. 핸드백 안에서 화장품과 소지품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비서가 물건들을 주워 핸드백 안에 넣고 마석희 뒤를 따랐다.
“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
“대표 자리 반납하라네. 나 대신 마하준을 대표 시킨다고. 씨X, 노망난 영감탱이가! 실수 한두 번 누가 안 해?”
비서는 누가 들을까 무서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명예 회장실로 불리는 집무실 앞에 있는 비서들에게도 들렸을 크기였지만, 모르는 척해주는 듯했다.
“아직 이사회 전이지 않습니까.”
“하? 이사회? 원래라면 이사회에서 대표 이사 정하겠지만 우리 할아버지가 누군지 몰라?”
재벌 기업의 창업주이자 노령인 지금까지도 인사권 놓지 않은 권력의 화신.
이사회까지는 며칠 걸리겠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보였다. 회장인 큰아버지는 할아버지 뜻대로 대표에 마하준을 올릴 터다. 그건 이미 확정된 결과였다.
“왜 저런 노인네는 아프지도 않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지하 주차장을 걷는 걸음이 거칠었다. 하이힐이 또각거리는 소리에 화가 묻어 있었다.
“하….”
마석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집으로 가. 쉬어줘야지. 쉬라고 아예 해임까지 해주는데!”
집으로 향한 마석희는 다시 술잔부터 들었다.
* * *
절망감은 술로도 전부 희석되지 않았다.
마석희는 미칠 것만 같았다.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좌절에 한꺼번에 시달려야 했다.
손을 뻗어도 점점 멀어지기만 하는 빛을 마냥 바라보기만 하면서 주저앉아야 했다.
대표 이사 자리에서 내려온 것 자체는 평소라면 그렇게 큰 타격은 아니었을 것이다. 반성한다는 듯이 숨죽이고 있으면 다른 계열사 임원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석희에게 무력감을 더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집이 엉망이었다. 어두운 실내엔 술병이 굴러다니고, 비서가 가져다준 듯한 안주는 상해서 이상한 냄새를 풍겼다.
술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누구라도 만나서 이 괴로움을 토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평일 애매한 시간에 만나줄 친구는 없었다.
결국 마석희는 이른 시간에 연 바를 찾아 들어갔다. 바텐더를 잡고서라도 푸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여기까지만 드시죠. 과음하셨어요.”
“힘들어서 그래. 죽을 것 같아….”
“그렇게 힘드세요?”
“네가 뭘 알겠어?”
픽 웃은 마석희는 지갑 안에서 오만원권을 잡히는 대로 꺼내 한참 어려 보이는 바텐더 앞에 내밀었다.
“가져.”
“…원하시는 술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가끔 팁이라고 기분 내키는 대로 뿌리는 손님들이 있어서 대뜸 돈을 내민 것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너희는 돈만 있으면 행복해지지? 날 이해할 리가 있겠니.”
바텐더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가 다시 풀렸다.
“…다 잊고 싶은데 술로는 부족한 것 같고. 넌 이런 기분일 때 뭘 해?”
“평범하게 맛있는 거 먹고 영화도 보고 자죠.”
“평범하고 지루한 방법이네. 쯧.”
마석희는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텐더는 유리잔을 닦던 손을 멈췄다.
“특별한 방법을 원하시나 봐요.”
“특별하면 좋지. 내가 모르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 봐?”
“알면서 모르는 척하시는지, 아니면 모르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해외 유학 다녀왔다는 분들은 다들 경험이 있으시던데.”
“뭐야, 그거 말하는 거야? 유학 가서 약쟁이 되는 것들이 드물진 않지만, 난 그런 스타일 아니었어. 모범생이었지.”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나요?”
“글쎄.”
“팁도 주셨으니 서비스를 드릴까 하는데.”
고민하는 척했지만, 바에서 나올 때 마석희의 핸드백 안에는 없던 것이 생겼다.
평생 하지 않을 거라 여겼던 일탈이지만, 괴로움을 잊을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할까 싶었다. 이런 발버둥을 쳐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내가 바라마지 않던 목소리보다 더 아름답고 깨끗한 소리라도 들려주는 약은 없나.”
자기가 말하고도 우스워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진즉에 중독자가 되고도 남았을 터였다.
“너도 이걸 경험하면 망가져 줄까?”
약 때문에 나락에 떨어진 연예인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상 속에서도 함이원은 얕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마석희는 손안에 바스락거리는 비닐을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