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88
계약은 신중히
열심히 물과 영양식을 챙겨 먹인 덕인지 현이는 부쩍 기운을 차렸다. 그렇지만 아직은 혼자 두긴 불안해서 스케줄을 소화하는 동안에는 집에 맡겨두기로 했다.
“아이구, 예뻐라.”
“현이 제가 키우기로 했어요.”
“이름을 현이라고 지었구나.”
“…네.”
부모님은 ‘현’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바로 알아채셨다. 현오 형이 내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기도 하고, 부모님께도 현오 형은 남다른 기억으로 남았을 테니까.
“사흘간 일정이 타이트하게 잡혀서 그동안만 현이 돌봐주시면 될 것 같아요. 전화로 얘기했지만 먹을 것만 잘 챙겨주세요. 알아서 잘 먹기도 하고 얌전해서 크게 손 가지는 않을 거예요.”
현이를 안아서 아빠에게 넘겨주려 하자 현이가 발톱을 세워서 소맷자락에 매달렸다.
냐아악!
“현아, 형이 바빠서 3일 동안 여기에 형 아빠랑 같이 있어야 해. 널 잘 보살펴줄 분이니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숙소에서도 내 옆에 달라붙어 내내 순하게 있던 현이는 내가 떠나려는 기색을 읽었는지 신경질을 부렸다.
아빠가 워낙 동물들에게 사랑받는 편이라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아빠도 이런 적이 없어서 당황한 모습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고양이가 쓸 수 있는 물그릇, 밥그릇, 스크래처와 숨숨집, 캣타워까지 잔뜩 구해놓으셨는데. 실망하신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 계속 너랑 같이 살 거야. 그렇게 결심했어. 한동안 현이 네가 잘 먹어야 해서 아빠한테 부탁드린 거야. 너 버리고 가는 거 아니야, 절대로.”
정말 내 말을 이해하기라도 했는지 그제야 현이는 발톱을 집어넣고 바닥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그리고는 내 다리에 꼬리를 감고 한 바퀴를 돌더니 아빠 정면에 가서 섰다. 꼬리를 일자로 세우고서.
“신기하구나. 진짜 말귀를 알아듣나 싶어.”
“천재 같아요.”
“이원이가 현이한테 홀딱 홀렸구나? 아빠가 잘 돌보고 있으마. 현이 잘 지내나 궁금하면 영상 통화 걸어도 되고.”
좋은 방법이다. 현이가 나한테 유난히 의지해서 떨어뜨려 놓기가 불안했는데.
“현아. 형은 이제 가볼게. 되도록 빨리 올 테니까 잘 놀고 있어.”
머리부터 꼬리까지 쓱쓱 쓰다듬어주고 있자 아빠가 흐뭇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동생이 있었으면 이랬을까 싶기도 하고, 현이 맡기러라도 자주 오겠구나 싶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데뷔조가 되고 숙소 생활을 시작한 뒤로 집에 들른 횟수가 손에 꼽는다. 데뷔 후엔 그마저도 줄어서 한 번 왔던가.
보고 싶은 사람이 찾아가야 한다고 부모님이 가끔 숙소 앞으로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얼굴 보기도 힘들었을 거다.
“미안해할 필요 없단다. 우리 아들이 집에 오고 싶어도 바빠서 못 온다는 거 아니까.”
“그래도요.”
“TV나 뉴튜브에서 자주 볼 수 있으니까 괜찮아.”
다 챙겨보고 계시는구나. 아직 화면으로 보는 내 모습은 민망하지만 이런 점은 좋을지도 모르겠다.
“바로 스케줄 있다면서. 얼른 나가보렴.”
“잘 부탁드려요, 아빠. 잘 놀고 있어, 함현!”
시간이 빠듯해서 후다닥 인사를 하고 집에서 나왔다. 문 앞에서 나를 배웅하듯 머리를 빼꼼 내민 현이를 보고 마음이 흔들렸지만, 애써 다잡았다.
아직 보살핌이 필요한 단계라 혼자 숙소에 두고 나올 순 없었다. 아빠한테 이것저것 부탁드리느라 최대 통화 시간을 갱신할 정도였으니 괜찮겠지.
똑똑한 우리 주인님은 집사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려 줄 거다. 어쩐지 내가 안절부절못하고 틈틈이 전화하게 될 것 같지만 그건 나중 일이었다.
* * *
나우혁 배우님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드라마 ‘첫사랑은 없다’가 방영을 시작했다. 나우혁 배우님이 부른 남주인공의 테마곡은 첫 방영일부터 공개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를 마쳤다.
나우혁 배우님의 이름값을 이용한 홍보인만큼 작곡가인 내 존재가 크게 도드라지지는 않았다.
“이원아, 네가 부른 곡은 언제 나와?”
테오라에게 들어온 광고 촬영 현장에 가는 길, 초록 형이 불쑥 물었다.
“일주일은 기다려야 해.”
“다른 OST까지 공개되면 음원 차트에 이원 형이 작곡한 곡이 세 곡 들어갈 수도 있겠다!”
테오라의 타이틀곡 외에 OST 두 곡이 추가로 진입할 수 있을까?
OST 작업에 참여한 드라마가 흥행한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인기 드라마의 힘은 생각보다 강해서 그 드라마에 나오는 OST까지 곧잘 수혜를 입었다. 잘 만들어진 OST의 수명은 웬만한 인기 가수의 곡보다도 길었다.
“첫 방송 분위기는 좋던데? 전개가 시원시원하고 연기 구멍도 없어서 몰입도 잘 되더라. 시청률도 공중파 3사 중에 제일 높았어.”
드라마 챙겨 볼 시간도 없었을 텐데? 서혼 형은 자는 시간을 줄여서 모니터링을 했나?
연기를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보통은 하나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겠지만, 서혼 형은 괴물 같은 체력으로 장애물을 넘어버린 듯싶었다.
“일단 시작이 좋다니 기대해볼 만하네.”
드라마 쪽으로는 서혼 형의 평가를 믿을만했다. 드라마를 쓴 작가님도 베테랑 작가님이니 후반부까지 텐션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두고 봐야 알게 되겠지만.
“코티지들이 이원 형이 작업한 곡을 알아채 줘야 하는데!”
“분명히 있을걸? 함이원은 그런 분들한테 인기 있을 상이야.”
‘그런’ 분들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까. 오란의 입에서 호의적인 표현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되묻기가 꺼려졌다.
“그런 분들?”
지온이 대신 물어보는 바람에 대답을 듣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없어졌다.
“장난기 넘치고 집요한 분들? 함이원 너 각오해야 할걸. 너 놀리겠다고 대기하는 분들이 수두룩할 테니까.”
“…….”
아니라고 하기엔 코티지, 아니 초가삼간이라는 팬덤명이 지어졌던 과정이 마음에 걸린다.
“이걸 발을 잘못 들였다고 하는 거다.”
“정확해. 제톤.”
오란과 지온, 둘이서 손을 들어서 손바닥을 마주쳤다. 지금이 하이파이브가 나올 타이밍이 아닐 텐데?
근심이 생긴 나를 놔두고 둘은 실실거리기 바빴다.
“오란 형이랑 지온 형, 못됐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그건 그렇지만…!”
박하마저 동의하다니. 초록 형도 서혼 형도 오란의 발언이 틀렸다고는 해주지 않았다. 형들도 팬들의 성향이 짓궂으리라 예상하는 듯했다. 낭패였다.
뭐, 나 개인을 좋아하는 분들은 소수일 테니까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원이 괴롭히면 우리도 팬분들한테 혼날걸? 조심해야 해.”
“서혼 형마저….”
다들 나 놀리는데 재미를 붙여버렸나. 이런 흐름이 계속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테오라의 멤버가 된다고 결정됐을 때, 나는 이 그룹의 기둥이자 숨은 기여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찮은 역할을 맡게 됐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러는데 누가 멈출 수 있겠어?”
“내가 뭘 어쨌는데?”
초록 형은 설명도 해주지 않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눈동자가 보일락말락 할 정도로 얇게 뜨고서 한쪽 입술을 끌어올렸다. 자세한 설명은 바라지도 말라는 뜻인가.
“우리 애기가 테오라 멤버가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나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 일러버릴 거야.”
이를 사람도 없지만 강하게 엄포를 놔봤다.
그렇지만 내 허풍이 고스란히 드러났던 걸까. 나를 제외한 멤버들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백미러로 운전대를 잡은 매니저 형의 입술이 씰룩거리는 모습도 목격했다.
왜 내 편은 아무도 없지…?
한바탕 웃은 서혼 형이 ‘다들 너 귀여워서 그래.’하고 위로해주긴 했다.
이걸 믿어야 해, 말아야 해?
* * *
테오라로 데뷔하고 나서 처음 찍는 광고는 게임 광고가 되었다. 광고 기획자님은 테오라의 자체 콘텐츠 ‘야! 타! 테오라!’를 보고 섭외 요청을 보냈다고 했다.
게임 제목은 .
우리는 그냥 평소대로의 모습을 보여줬을 뿐인데 그 모습이 게임 속의 캐릭터와 비슷하다나?
“난 아직도 기획자님이 어떤 포인트에서 우릴 추천하셨는지 모르겠어!”
‘스마일 팜 빌리지!’는 캐주얼 힐링 모바일 게임. 기본적으로는 다른 유저와 만나서 커뮤니티를 만드는 소셜 네트워크 게임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다양한 성격을 가진 캐릭터를 선택해 집을 짓고 작물을 기르고 때로 모험을 떠나는 컨텐츠를 포함한.
말로 설명하자면 복잡하지만, 직접 해보니까 인터페이스도 조작법도 간단했다. 전체연령가 게임이라 아기자기하게 귀여운 동물 캐릭터에 발랄한 효과음이 귀를 사로잡았다.
“…B급 감성이 가미된 광고라서 조금 당황스럽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테오라 여러분들은 평소대로 행동해주시면 됩니다.”
광고 콘티를 하나하나 짚어주면서 설명해주셨다.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 CG를 배경으로 들어가는 촬영을 해봤기에 그건 괜찮았다. 문제는 각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였다.
“…이게 대사야? 우리 사기당하는 중 아니지?”
박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혹시나 있을 실마리를 찾아내려고 했다. 사기라고 보기엔 으리으리한 촬영장과 수십 명의 관계자가 설명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앗!’이라던가 ‘으윽!’, ‘힝!’ 같은 감탄사만 가득한 콘티를 보면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데리고 뭘 찍으시려는 걸까…?”
게임 속 동물 캐릭터들은 짧은 감탄사나 울음소리만 낼 수 있긴 했다. 그래서 광고에서도 문장으로 말하지 못하는 건가?
콘티에는 각종 동물 울음소리와 감탄사로 가득 적혀 있었다.
“시키는 대로 하긴 하겠는데. 대사가….”
돈이 걸린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오란 마저 망설임을 품다니. 우리가 컨셉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걸까?
“내가 슬쩍 물어보고 올게.”
리더인 초록 형이 선봉으로 나서서 담당자님께 다시 질문을 하고 오기로 했다.
무슨 느낌을 원하시는지 정확히 감이 오지 않았다. 멤버들 모두 최대한 상황에 어울리는 방식을 찾아내려고 모두 집중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멤버들 모두 각자 맡은 동물이 있었고, 내가 맡은 동물은 고양이 캐릭터였다.
역시 나는 고양이와 인연이 있나 보다 생각하며 야옹거림과 단어조차 되지 못한 감탄사를 연습했다.
“냥? 냥~? 야↗옹↘. r↑!”
열심히 연습하는데 질문을 하고 돌아온 초록 형이 우리를 보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큭, 진짜 너무 큽, 귀여워 죽겠다. 우리 멤버들.”
귀엽다기보단 웃긴 거겠지만. 어쨌거나 웃는 초록 형을 보고 덩달아 기분이 유쾌해졌다.
누군가를 웃게 만든다는 것은 숭고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웃음을 주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까다롭기도 했다. 아무나 자신을 내려놓고 웃음을 주진 못하니까.
현오 형은 망가짐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서 그렇다고 했지만.
부정적인 의미의 웃음거리로 만든다면 모를까, 이런 상황은 어이가 없으면서 웃기기만 했다.
“하, 배 아파. 담당자님 말씀으로는 우리가 실제 게임에 있는 동물 캐릭터에 빙의하는 컨셉이래. 그래서 게임 캐릭터들처럼 소리 내는 거라고. 나중에 나레이션 들어갈 수도 있다고 하시더라.”
우리 몸 위로 캐릭터 CG를 입힌 후에, 게임 속으로 들어가서 탐험한다는 스토리구나! 드디어 콘티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혼자 다양한 높낮이의 야옹을 연습하는 내 옆에는 오란이 목을 가다듬고 ‘꺄르륵!’을 연습하고 있었다.
오란이 담당하는 토끼 캐릭터는 경박한 성격인가…?
얼굴에 철판이 아니라 비브라늄 합금을 깐 오란도 이번만큼은 골치 아픈 듯했다. 현실에서 낼 리 없는 효과음을 육성으로 내야 하는 작업이 쉬울 리가 없었다.
“목소리 연기가 이렇게 어려웠어? 성우님들이 존경스러워.”
광고 촬영장이라 한층 오란의 말투가 부드러웠다.
평소였으면, ‘목소리 연기 개어렵네. 성우 아닌 이상 B급 감성으로 나오겠는데…. 하! 그래, 돈 벌려면 해야지.’라고 하지 않았을까.
“우리보단 전문 성우를 섭외해서 촬영하는 게 나았을 텐데.”
광고 기획자님이 게임 캐릭터와 우리가 닮았다고 하니 믿는 수밖에….
연습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촬영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광고 담당자님이 가져온 어떤 물건을 보고 뒷걸음쳤다.
“…CG 넣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우리 사기당했어?”
뼈를 때리는 지온의 물음에 시선은 저절로 매니저 형에게 향했다. 매니저 형은 온화하게 웃음과 함께 대답을 내놨다.
“그러니까 내용도 안 듣고 무턱대고 광고 받아들이면 안 된다. 얘들아.”
“……!”
“계약할 때는 꼼꼼히 따져봐야 하는 거다. 이번은 운 좋게 페이도 넉넉하고 신인에게는 후한 조건이다.”
순간적으로 놀라버렸다. 아무리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잘못된 계약을 하게 할 리 없는데.
“단, 부끄러움만 견딜 수 있다면.”
“그 조건이면 기꺼이 구를 수 있죠.”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자본주의적 인간 오란이 명쾌한 대답을 내놨다.
난 홍오란과 달리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