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64
64. 석균의 절벽
두구가 성이 나서 소리쳤다.
“녀석 입만 살았구나! 야! 이 꼬마야, 먼저 나하고 삼백 합을 겨
루어 보자.”
그 차가운 목소리가 대답했다.
“좋다. 내가 너희들 몇이 두려워 못 나타나는 줄 아는구나.”
말이 떨어지자 얼핏 십 장 밖 구부러진 모퉁이에서 한 사람의 그
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상팔이 손을 들어 야명주를 비춰 보니 수염 하나 없는 흰 얼굴에
청삼을 두른 사람이었다.
이때 독수약왕이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마악 극독을 뿌리려 했
다. 소영이 그를 붙잡고 말했다.
“잠시 기다려 봅시다.”
그 청삼인은 육칠 척 앞에 멈춰 서서 냉랭히 말했다.
“그대들은 이곳의 지형에 생소하니 패할지라도 마음이 편치 않을
테지요.”
하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양장을 서로 부딪쳤다. 그러자 불빛이
번쩍였다.
이때 두 명의 비단 등을 받쳐 든 청의소녀가 천천히 걸어 나왔
다. 그들은 가벼운 차림새였고 등에 한 자루의 장검을 메고 있었
다. 돌길 안이 갑자기 밝아지자 모든 경물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두 명의 소녀는 청삼인의 곁으로 다가가 그 옆에 비단 등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천천히 걸어 갔다.
독수약왕이 고개를 돌려 소영을 힐끗 한 번 바라 보며 말했다.
“그대는 참을성이 많아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르나, 노부는 참을성
이 없어 그럴 수가 없소.”
하면서 갑자기 발을 들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청
삼인이 오른손을 휘두르며,
“물러가라!”
하고 소리치자 한 줄기 은광이 쏜살같이 뻗어 나왔다.
독수약왕은 재빨리 비켜서며 약간 겁먹은 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좋은 공력이다.”
이때 소영이 오른손을 뒤집는 듯하더니 번개같이 장검을 뽑아 휘
둘렀다. 한바탕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네 개의 조그마한
은침이 검광을 번쩍이며 모두 땅에 떨어졌다. 은침이 땅에 떨어지
자 어느 틈엔지 소영의 칼도 제자리에 꽂혀졌다.
독수약왕은 머리를 돌려 소영을 바라 보고 마음 속으로 칭찬을
금치 못했다.
소영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영존의 옛마음은 미루어 두고라도 그 분은 나 소영의 목숨을 구
해 주셨는데…..”
청삼인이 대꾸했다.
“선부께선 인자함 때문에 그대를 붙잡아 놓지 않아 오늘의 화근
을 만드셨소.”
“우리는 아무런 악의도 없이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형께서 파격
적으로 허락해 주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오래야 반나절이고 잘되면
반시간 이면 되니, 일이 끝나면 더 이상 머물지 않고 곧 돌아가겠
습니다.”
청삼인은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귀하의 뛰어난 검법으로 내가 허락하도록 해 보시오.”
소영은 조용히 말했다.
“나에겐 그런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청삼인이 말했다.
“흥! 나의 호승지심을 일으키게 하려고.”
이때 옆에 있던 두구가 성이 나서 소리쳤다.
“우리 큰형님께서 인의로 대하시는 게 너 따위가 두려워 그러시
는 줄 아느냐?”
상팔도 한 마디 했다.
“축하술을 안 마시고 벌주를 마시려 하는구나! 어리석은 놈!”
청삼인이 머리를 젖히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소영의 검법을 보니 혹 나와 겨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희 둘
은 주둥이로만 나불거리는 것 같구나.”
두구가 이 소리를 듣고 소영을 넘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좋다! 이 두구가 먼저 너의 가르침을 받아 보지!”
말이 떨어지자 어느 틈엔지 왼손엔 은백 손수건을 오른손엔 철필
을 꺼내 들었다.
그가 마악 몸을 날리려 할때 소영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두형, 돌아오시오!”
두구의 표정엔 격분이 서렸으나 소영의 말을 어기지 못하고 무기
를 모은 후에 천천히 돌아 왔다.
소영은 천천히 세 걸음을 내딛고 말했다.
“손을 쓰지 않고 우리가 반나절을 머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
을까요?”
“다른 좋은 방법은 없소.”
소영이 얼른 말했다.
“그럼 꼭 손을 써야만 합니까?”
청삼인은 낮게 신음을 하더니 이윽고 말을 이었다.
“방법이 꼭 하나 있소이다. 허나 그대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말하
지 않는 것만 못하오.”
소영은 즉시 대꾸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면, 결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청삼인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소영을 노려보며 한참 만에 입을 열
었다.
“그대는 악소채를 아는지…..”
소영은 갑자기 한 대 얻어 맞은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그렇습니다. 한데 그 악 아가씨는 지금 어디에 있지요?”
청삼인의 얼굴에 한 가닥 비웃음이 스쳐 갔다.
“그대는 그녀를 몹시 보고 싶어 하는군.”
소영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형께서 밝은 길을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만…..”
독수약왕이 갑자기 끼여 들었다.
“소형! 우리는 약을 구하는 일이 급하오. 노부 앞에서 한 약속을
잊지 말라!”
소영이 천천히 얼굴을 돌리자 별같은 눈에서 신광이 쏟아지며 곧
바로 독수약왕의 얼굴에 박혔다. 한참이 지난 다음 비로소 천천히
말했다.
“약왕의 말씀이 맞소이다.”
하고 다시 눈을 돌려 청삼인을 바라 보며 말을 이었다.
“악 아가씨의 일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먼저 우리가 약물
을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셨으면……”
청삼인이 어깨를 세우며 물었다.
“무슨 약물이지요?”
소영이 말했다.
“이 석부 뒤쪽에 폭포가 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하려는 약물은 바로 폭포수 아래 절벽 사이에 있습니
다. 다만 그대가 우리를 이 석부에 한시간 동안만 머물 수 있게 해
주시면 됩니다만…..”
청삼인이 물었다.
“그 돌벽 사이에 무슨 약물이 있단 말이오?”
독수약왕이 가로채서 말했다.
“그대는 너무 지나치게 묻고 있다고 생각치 않는가?”
청삼인은 나직이 신음하며 말했다.
“좋소! 이곳의 예를 깨뜨리고 허락하겠소. 그러나 한시간을 넘겨
선 안 되오.”
소영이 말했다.
“충분합니다.”
청삼인이 또 손을 들어 세 번을 두드리자, 두 명의 청의소녀가
급히 달려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공자, 무슨 분부십니까?”
“등을 들고 저 분들을 폭포 아래까지 모셔다 드려라.”
두 청의소녀는 대답을 마치자 각각 비단등을 하나씩 들고 앞서
가며 말했다.
“소비들이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청삼인은 돌연 앞서 가더니 모퉁이를 돌자 사라져 버렸다.
상팔이 낮은 목소리로 소영에게 말했다.
“큰형님! 좀 이상한데요. 저 꼬마가 형님이 악 아가씨를 안다니
까 갑자기 마음이 변해 약을 캘 수 있도록 해 주니 말입니다. 하지
만 다른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니 조심하십시오.”
이때 독수약왕이 말했다.
“조심할 필요 없소. 노부가 이미 그에게 독을 뿌렸으니 한시간
내에 반드시 극독이 발작할 거요.”
소영이 눈을 돌려 독수약왕을 바라 보며 물었다.
“정말이오?”
독수약왕이 대답했다.
“노부는 거짓말이라고는 한 일이 없소.”
그때 듣고만 있던 두 시비가 일제히 웃기 시작했다.
독수약왕은 성난 소리로 외쳤다.
“이 못된 것들아! 뭐가 좋아 그렇게 웃는 거냐?”
그러자 왼쪽의 시비가 갑자기 얼굴을 돌려 독수약왕을 노려 보며
말했다.
“이 바보같은 영감쟁이야! 말조심해! 우리가 비록 신분은 노비지
만 우리 공자님 이외의 다른 사람 말은 듣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
해!”
독수약왕의 양눈에 살기가 번쩍였으나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
일을 그르친다는 생각이 들고, 또 딸아이의 생각에 묵묵히 노기를
누르고 걸었다.
두구는 독수약왕의 모습을 바라 보며 생각을 굴렸다.
‘이 독수약왕이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이렇게 참아 내다니….”
소영은 독수약왕이 몰래 독을 가한 사실에 몹시 불만을 느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두 시비를 향해 말했다.
“두 분 중 한 분만 우리를 안내하시고 다른 한 분은 곧 공자에게
달려가 그에게 운기를 해 중독되었는지 여부를 살피라 하시오.”
“그럴 필요 없이 그에게 이렇게 알려라. 우리들을 선의로 맞아
약물을 구해 이 석부를 나갈 때 공손히 전송한다면, 노부가 그때
해독약을 주겠다고.”
오른쪽에 있던 시비가 참을 수 없었던지 갑자기 소리쳤다.
“우리 공자께선 종일 독물로 식사를 하시는데 어찌 그까짓 독에
상하시겠소? 정말 웃기지 마시오.”
소영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당신 공자께서 종일 독물만 잡수신다구요?”
왼쪽 시비가 말했다.
“그래요! 공자뿐만 아니라 우리도 매일 서너 마리의 독사를 먹는
걸요!”
소영은 전신에 차가운 기운이 끼침을 느쪘다. 그는 속으로 나직
이 중얼거렸다.
“이들은 이렇게 청수한데 매일 독사를 먹을 줄이야……”
상팔이 가벼이 기침을 하며 말했다.
“뱀탕과 오독연은 모두 맛있는 요리지……”
“그런 요리가 아녜요. 그렇다면 못 먹을 사람이 없지요.”
상팔이 물었다.
“그러면 아가씨는 어떻게 먹지요?”
“손으로 잡아 그냥도 먹고 구워도 먹고 삶아서 먹기도 하죠.”
그러자 오른쪽 시비가 한 마디 했다.
“당신은 우리 무산의 오독연이 천하 제일인 줄 모르시는군요?”
소영이 말했다.
“두 분 아가씨는 모두 날로 독사를 먹나요?”
두 시비가 똑같이 대답했다.
“그게 뭐 그리 이상하지요? 당신이 믿지 못하시겠다면 당장 먹어
보일 수도 있어요.”
소영은 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볼 필요 없습니다. 두 분 아가씨를 믿지요.”
상팔이 물었다.
“두 분 아가씨는 댁의 공자를 모신 지가 오래되었습니까?”
두 시비는 똑같이 낮게 신음하더니 왼쪽의 시비가 말했다.
“삼 년밖에 안 됐어요.”
소영이 물었다.
“삼 년 전에도 아가씨들은 뱀을 날로 먹었나요?”
그러자 왼쪽의 시비가 대답했다.
“아니요. 뱀을 날로 먹기는 이곳에 와서부터예요. 공자께서 가르
쳐 주셔서 비로소 먹을 줄 안 걸요.”
소영은 가벼이 탄식하며 말했다.
“일반 가정의 계집아이들은 조그만 큰 벌레를 보아도 놀라고 땀
을 뒤집어 쓰는데 두 분 아가씨들은 독사도 날로 먹고, 호기가 이
렇듯 높으시니 정말 탄복하겠습니다.”
오른쪽에 있던 시비가 얼른 말을 받았다.
“우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독사를 보기만 해도 다른 사람들
처럼 두려워했는데, 한 번 먹은 후부터는 전혀 무섭지 않았어요.”
말하는 사이에 또 한 모퉁이를 돌았다.
그때 오른쪽 벽에서 은은히 밝은 빛이 흘러 들어 왔다.
소영은 마음이 뜨끔함을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곳이 그 병든 노인이 치료하던 곳인데. 가련하게 그 노인은
돌아가셨다니…..’
지난 일이 역력히 뇌리를 스치자 소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빛이 새어 나오는 석벽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두 시비가 막으려 했을 때는 이미 한 걸음 늦었다.
소영은 오른손으로 살짝 공력을 모아 경력을 쏟아 내며 강하게
밀었다. 그러자 괴상한 소리와 함께 돌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마
누군가가 떠날 때 매우 급한 탓으로 석문을 미처 잘 닫지 않아 불
빛이 새어 나온 것 같았다.
오른쪽 시비는 소영이 돌문을 밀어 여는 걸 보고 깜짝 놀라 급히
소리를 지르며 칼을 뽑아 들고 달려 갔다.
“빨리 물러나시오.”
그녀는 급히 석문 안으로 달려 들어 가며 칼을 뻗어 곧장 소영을
찔렀다.
소영은 손을 들어 한 번 휘저어 장력을 쏟아 내 검세를 막으며
천천히 말했다.
“오 년 전 내가 이 석동에서 아가씨의 노주인을 뵈었을 때, 그
당시 아가씨는 아직 이 무산석부에 들어 오지도 않았었소.”
그 소녀는 자기의 검세가 소영이 휘저은 일장에 의해 저지되자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의 무공은 약하지 않구나. 말할 때는 전혀 몰랐는데.’
하고 중얼거리다가 그가 한 말을 깨닫고는 물었다.
“뭐라구요? 당신이 우리 주인을 아신다구요?”
소영이 말했다.
“아! 애석하게도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니…….”
그는 눈을 돌려 높은 대 위의 하이얀 촛불, 그리고 벽에 늘어진
흰 휘장 아래 한 구의 목관이 벽을 의지한 채로 놓여 있는 것을 보
았다.
이때 두 계집종이 모두 들어와 검을 빼어 들고 소영의 일거 일동
을 주시하고 있었다.
금산반 상팔도 얼른 그녀들을 따라 들어 왔고 밖의 돌 길에도 자
연스럽게 적을 맞는 세력이 펼쳐진 것 같았다.
소영은 눈을 돌려 그 나무관을 바라 보며 말했다.
“이 목관 속에 당신네 노주인의 유해가 있습니까?”
두 시녀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래요, 당신이 감히 이 목관 아래서 망동을 한다면 살아선 이
무산의 석부를 결코 빠져 나갈 수 없을 걸요?”
소영은 옛날 친절했던 노인의 정이 생각나 손을 모아 목관 앞에
읍하며 말했다.
“후배 다시 이 석부에 왔습니다. 노인장께서 돌아가신 줄은 생각
치 못했습니다.”
두 시비는 그가 목관 앞에서 예를 베풀자 아무 악의가 없음을 알
고 더 이상 저지하지 않았다.
소영은 길게 읍한 뒤 돌아 나올 생각이었는데, 이때 한 가지 생
각이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처음 노인을
만났을 때 한 석문으로 들어 왔었다. 만일 이 관을 놓은 곳이 옛날
에 노인께서 병을 치료하던 방이라면 저 석벽 뒤에는 반드시 두 개
의 방이 있고 침상이 하나 놓여 있을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그는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석벽을 향하
여 돌문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일장을 발출해 냈다. 과연 석벽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자 소영은 즉시 속이 비어 있음을 알았다.
이때 왼쪽에 있던 시비가 돌연히 몸을 굽혀 장검을 세우고 덮쳐
왔다.
소영은 오른손으로 일초의 휘진청담(揮塵淸談)을 떨쳐 장검의 기
세를 누르며 천천히 물었다.
“이 석벽 사이에 하나의 복실이 있는데 아가씨는 아시는지요?”
그 청의소녀는 검세가 소영의 장세에 가벼이 저지당하자 급히 칼
을 거두어 들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매우 급박해 화난 목소
리로 대답했다.
“몰라요.”
소영은 가벼이 웃으며 말했다.
“옛날 그대의 노주인께서 이 소모에게 극진히 대해 주셨으니, 오
늘 내가 다시 이곳에 왔는데 어찌 그의 영관에 배례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때 독수약왕이 가로채고 나섰다.
“지금 이 시각은 금같이 귀중한데, 여기서 쓸데없이 이렇게 시간
을 낭비할 수는 없소.”
소영은 독수약왕과 따지지 않고 다시 오른손을 휘둘러 그 돌벽
사이에다 일장을 가했다. 그 시비가 옥같은 팔을 휘두르자 장검이
다시 날아 들었다.
소영은 번개같이 장검을 피하고 소리쳤다.
“아가씨! 나로 하여금 검을 뺏도록 만들지 마시오!”
“당신이 내 검을 뺏을 능력이나 있어요?”
“좋소이다. 그럼 한번 시험해 볼까요?”
소영은 오른손을 재빨리 뻗음과 동시에 다섯 손가락을 쪽 뻗어
그 소녀의 오른쪽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아가씨는 이 복실의 석문을 여는 방법을 아실 텐데요?”
그는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왼손으로 석벽을 향해 재빠르게
내력을 쏟아 탐색을 계속했다.
다른 또 한 명의 청의시비는 소영의 왼손 장력이 계속해서 벽 사
이를 움직이는 것을 보자 마음이 대단히 급했으나, 왼쪽의 시비가
소영의 장세에 억제당하고 있어 순식간에 빠져 나갈 방법이 없을
뿐더러 자기의 갈 길마저 막혀 있자 급히 손을 휘둘러 높은 대 위
에서 타고 있는 하얀 촛불을 끄려 했다.
그녀는 먼저 방 안의 촛불을 꺼 버린 후 일을 처리하려 한 것이
다. 그것을 알자 금산반 상팔은 얼른 준비하고 있다가, 오른손을
뻗어 그 청의소녀의 허리를 찌르며 재빨리 촛대를 막았다. 그 소녀
가 쏘아낸 경력은 이미 쏟아져 나가 다시 거두지도 못하고 벽에 부
딪혀 버리고 그 빈 관 앞의 촛불에는 이르지도 못했다.
두 시비의 무공은 그리 높지 않아서 소영과 상팔의 한 수에 곧
제압당했다.
“두 분 아가씨들은 얌전히 계시는 게 좋을 것이오. 그같이 성을
내다가는 이런 고통을 맛볼 테니까.”
말하는 사이 손에 경력을 넣자 두 시비는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
러지며 땀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소영의 오른손이 재빨리 석면 사이를 이동하며 드디어 흔적을 발
견했다.
앗! 하는 기합소리와 함께 이윽고 돌문이 크게 열렸다.
소영이 옛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 노인의 나무 침상이 놓였던
곳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 살피는데 갑자기 냉랭한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그 소리가 나는 곳은 바로 노인의 나무 침상이 놓였던 자리였다.
소영은 손을 돌려 지풍을 쏟아 시비의 혈도를 막은 후 몸을 도사
리며 두 손으로 가슴을 보호하고 들어 가면서 물었다.
“그대는 뉘시오?”
그의 동작은 매우 빨라 말하는 사이 이미 석실 안으로 들어와 있
었다.
석실은 대단히 캄캄했다.
소영은 비록 높은 시력을 가졌으나 촛불이 있던 밝은 곳에서 온
까닭에 복실로 들어서자 갑자기 앞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차갑고 침울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이곳은 오래 머무를 곳이 못 되오. 어서 나가시오.”
이때 소영은 한 가닥 아주 독하기 이를 데 없는 냄새가 방 안에
서 풍김을 알고 즉시 뒤로 물러서 돌문을 빠져 나왔다. 그러자 한
바탕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 돌문은 스스로 닫혀져 버렸
다.
소영은 손을 들어 두 시비의 막혔던 혈도를 풀어 주며 말했다.
“이 복실은 본래 너희 무산석부의 노주인께서 쉬시던 곳인데 이
일을 너희들이 모르고 있었다니…..”
그러자 혈도가 풀린 시비가 훅! 한숨을 불어 내더니 물었다.
“당신은 우리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아셨지요?”
소영은 눈을 돌려 상팔을 바라 보며 말했다.
“그를 놓아 주시오.”
상팔은 아직도 한 시비의 맥문을 잡고 았다가 놓아 주라는 말을
듣고 그 시비에게 말했다.
“우리 형님께선 마음이 너그러우셔서 본래 가벼이 사람을 상하게
하시지 않는다. 그 분이 만일 너희들을 수습하려 한다면 손 한 번
만 놀리면 된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으
니…. 만일 또 그를 화나게 만든다면 그 때엔 도리가 없다는 걸
명심해라.”
그녀들은 서로 바라보더니 몸을 굽혀 칼을 칼집에 집어 넣고 눈
을 돌려 상팔과 소영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어서 한 시비가 물었다.
“두 분 중 어느 분이 나이가 많나요?”
상팔이 눈빛을 번쩍이며 두 시비를 쓸어 보고 말했다.
“무림에서는 무공의 강약으로 서열이 정해지는데 그게 뭐가 이상
하단 말이냐?”
목소리가 다시 작아지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대들이 고통받길 원하지 않는다면 제발 얘기를 시키지 말라.
이렇게 좌우에서 물어보면 내가 귀찮지 않느냐?”
두 시비 중 나이가 많은 듯한 시비가 차갑게 대꾸했다.
“우리들은 단지 공자의 명을 받들어 길만을 안내할 뿐입니다. 만
일 이렇게 엉뚱한 일만 물으시려 한다면 저희들은 죽는 수밖에 다
른 도리가 없습니다.”
이때 독수약왕이 차갑게 말했다.
“기한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오. 만일 약을 취하는 일이 잘
못 늦어진다면, 노부는 두 시비를 놓아 주지 않겠소.”
소영은 비록 가슴 속에 묻고 싶은 의문이 많았으나, 스스로 억누
르고 문을 나오며 말했다.
“좋소 두 분은 어서 길을 안내하시오.”
두 시비는 석실을 나와 돌문 밖에 놓여 있던 비단등을 들고 앞서
가기 시작했다.
소영은 재빨리 그 시비 뒤를 따르며 계속 눈을 굴려 양쪽 석벽
위를 살펴 보았다. 양쪽 벽 위엔 많은 문이 있었는데 모두 들어가
지 못하도록 봉해 놓았다. 오 년 전 소영이 처음 이 석실을 보았을
때도 회의를 품었었으나 지금 이 시각엔 더욱더 의심이 솟아났다.
그러나 형세가 갇힌 격이라 스스로 일어나는 의문을 눌러 버리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또 다시 두 모퉁이를 돌아서자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오
기 시작했다. 왼쪽의 시비가 재빨리 걸어가 석벽의 한 곳을 가볍게
누르자 벽이 열리며 석문이 나타났다.
시비가 멈춰서서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석문 밖이 바로 폭포수입니다.”
독수약왕이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와 머리를 들어 바라 보았
다. 과연 한 줄기 거대한 폭포수가 아득한 봉우리에서 무서운 속도
로 떨어져 내려 곧장 아래 골짜기로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머리를 숙여 아래를 살피니 천길의 협곡엔 한 조각 아득한 어두
움이 덮여 있어 그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
소영은 독수약왕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그 돌버섯은 저 폭포수 아래 돌벽의 사이에 있습니다. 옛날 이
곳에서 떨어져 꼭 죽는 줄 알았으나, 도중에 빠져 나온 돌부리에
걸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돌부리까지의 거리가 이 입구에서 얼마나 됩니까?”
소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저어…. 기억이 똑똑히 나지 않는데요.”
“대략 얼마나 되지요?”
“최소한 백 장은 될 것입니다. 그보다 길지는 몰라도 짧지는 않
을 겁니다.”
독수약왕이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그곳으로 내려갑시다.”
두구가 냉랭히 그의 말을 가로챘다.
“당연히 당신 혼자 내려갈 일이 아니오. 우리 큰형님께선 당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습니까?”
“노부와 소영이 서로 약속한 말은 영약을 얻어야만 끝나는 것이
오.”
소영이 물었다.
“약왕의 뜻은…..?”
“만일 그대 혼자 내려가도록 해, 영약을 얻은 후에 그대가 올라
오지 않는다면 노부는 헛되이 마음만 허비할 것이고…..”
상팔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러면 약왕께서 내려가면 되겠군요.”
독수약왕이 냉소하며 즉시 대꾸했다.
“만일 줄을 끊어버리면 노부는 이 천길 절벽으로 떨어져 몸이 부
서지고 뼈가 가루가 돼 버릴 게 아니오?”
두구가 말했다.
“우리 형제는 약속은 반드시 지켜 왔소. 만일 실수로라면 몰라도
어찌 고의로 줄을 끊겠습니까? 사람을 그렇게 못 믿다니……”
“사람의 마음이란 측정할 수 없는 것이오.”
상팔이 말했다.
“한 시진이란 손가락 한 번 퉁기는 사이에 지나가 버리오. 약왕
께서 이와 같이 생각만 하신다면 시간이 모자랄까 두렵소.”
두구가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청삼인이 수하들을 이끌고 공격해 올 텐데,
그때 우리는 적을 맞아야 할 테니 약왕을 돌볼 수가 없습니다. 다
만 힘을 다해 싸우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약왕이 그 말을 받았다.
“정세가 그렇게 된다면 소영과 노부는 천길 절벽 아래에서 죽는
수밖에 없소.”
소영은 그 말을 듣자 한심한 생각이 들었으나 묵묵히 말했다.
“약왕!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십시오. 무슨 고견이 있거든
망설이지 마시고 어서 말씀하십시오.”
독수약왕이 대답했다.
“그대와 나 두 사람이 단독으로 내려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좋소. 제일 좋은 방법은 우리 둘이서 동시에 내려가는 것이오.”
두구가 말했다.
“우리가 준비한 줄은 두 사람이 동시에 내려갈 수 있을 만큼 질
기지 못합니다.”
“그거야 간단하지.”
두구가 말했다.
“고견을 바랍니다.”
“먼저 소영이 내려가서 그 돌부리를 찾은 후에 끈을 올려 내가
내려 가면 되지 않소?”
상팔이 고개를 들어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올라올 땐 반대로 하면 되겠군요. 먼저 약왕께서 올라오고 그
다음에 큰형께서는 약왕이 오르시기를 밑에서 기다리다가 약왕이
오르신 다음에 다시 줄을 내려서 말입니다.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
까?”
“그렇소.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두구가 말했다.
“우리들 생각을 당신에게 말씀드린다면, 먼저 내려 가고 나중에
올라 오는 것이나 나중에 내려 가고 먼저 올라 오는 것이나 모두
따질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겠는데요.”
이때 듣고만 있던 소영이 가벼이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이 어느 때이고, 이곳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약왕께서 그
렇게 기회만 따지시면 생각하다 시간을 다 보내겠습니다.”
그의 말소리는 가벼이 떨려 나왔다. 그는 다시 두구에게 말했다.
“두 형제, 끈을 주시오. 내가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두구의 안색이 순간 숙연해졌다. 차갑게 약왕의 두 눈을 응시하
며 천천히 품 속에서 바늘만한 굵기의 가느다란 비단 줄을 꺼냈다.
이 줄은 특수하게 다듬어진 것이라 매우 질겨 보통 사람을 매다
는 데는 좀 곤란하지만 소영이나 독수약왕 같은 무림인물이 의지할
때에는 아주 여유가 있는 것이다.
소영은 그 줄의 한쪽 끝을 잡아 허리에 매고 큰 걸음으로 굴 밖
을 향해 나아갔다.
금산반 상팔이 소리쳤다.
“형님, 조심하십시오.”
소영은 머리를 돌려 한 번 탄식하고 대답했다.
“내가 그를 대신해 약을 구하기로 했으니 그와 다시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상팔이 말했다.
“이 두 아가씨가 굴 입구를 지키고 있으니 좀 불안한 걸….”
하더니 그녀들 옆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두 분께선 몸에 가지신 무기를 풀었으면 합니다.”
두 시비는 자기들의 힘으로 감히 항거할 수 없음을 알고 그의 말
대로 무기를 풀어 내려 놓았다.
상팔은 그들이 풀어 놓은 장검을 집으며 말했다.
“내가 그대들의 혈도를 막는다고 오해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이 끝나자마자 오른손으로 한 줄기 장풍을 쏘아 왼쪽 시
비의 혈도를 막아 버렸다.
오른쪽 시비가 이를 보고 마악 항거하려 했으나 어느 틈엔지 독
수약왕의 지풍이 날아와 그녀의 혈도를 막아 버렸다.
소영의 별같은 눈에서 번쩍 신광이 쏟아지며 두구와 독수약왕을
쓸어 보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약왕께서 내려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들이 저 두 시비의
혈도를 막았지만, 만일 이곳 주인이 화를 내게 된다면 말할 필요도
없이 이곳에선 악투가 벌어질 것이오. 약왕께선 이곳에 머물러 계
시다가 두 분 형제가 적을 맞았을 때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아래
에서 천 년 묵은 돌버섯을 취했을 때 제가 줄을 흔들 테니 다시 나
를 끌어 올리시기 바랍니다.”
독수약왕은 홀연히 가벼운 탄식을 하며 말했다.
“소형! 몸을 보중하시오.”
하고는 중주이고를 돌아 보고 말을 이었다.
“두 분께선 그대들의 큰형님을 잘 보살피십시오. 노부는 저 돌길
의 모퉁이에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만일 이곳의 주인이 습격해 들
어 오면 제가 막아 내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방법이 있겠지요.”
독수약왕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했으나 몸을 돌려 가 버렸
다. 두구가 소영을 보며 근심스레 입을 열었다.
“큰형님께서 위험스럽게 가실 것이 아니라 소제가 대신 가겠습니
다.”
소영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상관 없습니다.”
말을 마치자 소영은 곧 굴 입구를 향해 걸어가서 벽 아래에 서서
벽호공을 펼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구는 두 손으로 줄을 꼭 잡고 조심스럽게 수중의 줄을 풀어 내
렸다.
소영이 마악 두 장 가량 내려 왔을 때였다. 갑자기 독수약왕의
큰소리가 들리며 동굴 속의 분위기가 긴장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시간이 다 되었소. 그대는 약속을 잊으셨소?”
소영은 일이 급함을 느끼고 운기 행공하여 쌍장을 벽에 붙이고
큰 소리로 말했다.
“두 형제! 줄을 빨리 늘이시오.”
이때 상팔은 가슴에서 금산반을 꺼내어 들고 두구에게 말했다.
“두제, 방심하지 말게, 형님을 잘 살피고 줄을 꼭 잡게. 나는 가
서 독수약왕을 도와 적을 막겠네.”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려 달려갔다.
두구는 잔뜩 긴장하여 상팔의 말에 대답도 못하고 머리를 숙여
아래를 보았다. 성난 폭포는 사납게 쏟아져 내리고, 물방울은 마치
안개처럼 뿌우연한 데다가 밤마저 깊어 도저히 멀리는 볼 수가 없
었다. 그는 단지 수중의 줄이 빨리 풀어지고 있는 걸로 소영이 이
미 위험을 무릅쓰고 떨어져 내려가고 있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줄을 풀어 내렸다. 그러나 내리면 내릴수록 점점
빨라져 이미 백 장 가까이 풀었는데도 멈추어지지 않았다.
이제 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두구는 속으로 크게 놀라 중얼거렸다.
‘줄이 모자라니 이걸 어쩐다……’
그는 줄을 당겨 멈추게 하려 했으나 만일 그 가는 줄이 소영이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는 힘 때문에 끊어져 버리면 더욱 큰일이므로
어찌할 줄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갑자기 수중의 줄이 멈추어졌다.
소영이 내려 가다가 갑자기 멈춘 것 같았다. 뒤에서는 욕지거리
와 독수약왕의 성난 부르짖음이 들려 오고 이어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레 들려 왔다.
두구는 강호상의 경험이 풍부하여 그 칼 부딪치는 소리와 목소리
를 듣고 거리가 다름을 느끼자, 즉시 누군가자 독수약왕의 방어선
을 뚫고 넘어서서 상팔과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
머리를 돌려 바라 보니 단지 상팔의 금산반에서 비치는 보광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고전을 치르면서도 자기가 놀랄까 염려하여 말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두구는 매우 긴장했다. 생사를 가름하는 격투의 소용돌이로 말려
들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마에선 구슬같은 땀방울이 끊이지 않고 흘러 내리고 있었다.
이때 뒤에서 누군가 상처를 입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는 상팔이 다쳤을까 돌아 보지도 못한 채 수중의 줄에만 희망을 걸
고 기다렸으나 소영의 소식은 마치 바다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오래
도록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