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65
65. 영약을 얻다
두구는 오랫동안 소영의 동정이 없자 아! 하고 가볍게 탄식하고
는 품 속으로 손을 넣어 철필을 꺼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손을
써야 했던 것이다.
상팔은 힘이 부치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거들어야 했던 것이다.
이때 손을 묶은 줄이 밑으로부터 한바탕 흔들려 옴을 느꼈다.
“오!”
그는 크게 기뻐하며 손에 힘을 모아 힘껏 잡아 당기기 시작했다.
소영은 이미 두구가 강적과 대적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았
다. 위에서 힘을 주어 잡아 당기자 자기도 서둘렀다.
이때 두구의 등 뒤에서는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
려 왔다.
상팔이 어쩔 수 없이 싸움에 말려 들었으나 역부족하여 뒤로 밀
리는 꼴이 선했다.
두구는 만 가지 생각이 얽혔으나 그렇다고 뒤를 돌아다 볼 수는
없었다.
갑자기 줄이 늦추어졌다.
“두형!”
소영의 목소리였다.
두구는 크게 기뻐하여,
“형님, 올라오셨습니까?”
눈앞에 소영의 모습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원래 두구는 냉정한 듯하나 실은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형님! 괜찮습니까?”
두구는 소영을 힐끗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뒤집어 철필을
잡았다.
동시에 왼손을 품 속에 집어 넣더니 은백색의 호수권(護手圈)을
끄집어 내었다.
그는 몸을 홱 돌렸다. 철필은 어느덧 적의 앞가슴을 노렸다. 실
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이때 한 자루의 철척(鐵尺)이 비스듬히 펼쳐졌다. 적이 철필을
막아낸 것이었다.
쏴! 하는 소리와 팡팡! 하는 소리가 한데 어울렸다.
두구의 호수권이 비스듬히 돌며 연거푸 날아오는 습격을 막아냈
다. 두구는 그제서야 상대방의 힘을 헤아릴 수 있었다.
지상에 놓아 둔 등불이 여전히 빛나고 있어 모든 것이 똑똑히 보
였다. 그의 눈앞에 남색옷을 입은 네 소년이 각기 단도, 보검, 철
척, 연자창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네 종류의 무기는 각기의 특성으로 무공을 나누어 공격해 왔다.
상팔의 무공이 비록 훌륭하기는 했으나 네 사람의 공세를 막아
내기는 힘들었다.
두구의 귓전에 상팔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두제, 한바탕 막아 주게. 나는 잠시 빠져 나가 상처를 싸매야겠
네.”
두구는 오른손엔 철필, 왼손엔 호수권으로 힘껏 위기를 모면해
나갔다.
상팔은 걸음을 멈추고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형님, 천 년 묵은 돌버섯을 취하셨습니까?”
“취했소이다. 그런데 상처가 대단하오?”
소영의 나지막하면서도 걱정스런 말투였다.
상팔은 옷을 찢어 내어 왼팔의 상처를 싸맸다.
“팔은 약간 다쳤을 뿐이지만 왼쪽 넓적다리의 상처가 심한 모양
입니다.”
소영이 훑어보니 과연 상팔의 왼쪽 넓적다리에서 선혈이 끊임없
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다리 상처는 어떻소?”
“형님, 걱정 마십시오. 아직 근육까지 상하지는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순간에 두구의 아이쿠! 하는 비명소리
가 들려 왔다.
“두제도 부상을 당했군. 그 연자창을 조심하게. 몹시 흉악하고
변화무쌍하여 예측할 수가 없네.”
상팔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소리쳤다.
소영이 눈을 들어 보니 두구의 왼쪽 다리에서도 선혈이 솟구치고
있었다.
소영은 길게 한숨을 몰아쉬고 나서,
“두형, 뒤로 물러나시오. 내가 두형 대신 적을 막아 내겠소.”
그와 동시에 장검이 어느덧 칼집에서 나왔다.
두구는 그의 무공을 믿는지라 재빨리 뒤로 물러 나와 옷을 찢어
내어 상처를 싸매었다.
소영이 오른손을 흔들자 훅!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이 싸늘한 빛
을 발하며 번개같이 빠르게 나아가 네 개의 무기를 막아 냈다.
남색옷의 네 소년이 쓰는 무기의 묘기는 기기묘묘하였다. 단도로
치면 철척이 곧 뒤따라 이르고 또 연자창으로 뱀이 굴을 빠져 나오
듯, 수은이 땅에 쏟아지듯 공격하여 들어 왔다.
소영은 상대방의 공세가 대단히 사납고 날카로움에 놀라 심중으
로 중얼거렸다.
‘중주이고가 모두 저 연자창으로 부상을 당한 것도 이상할 게 없
군. 저 사람의 무공은 과연 괴이하고 악독하구나.’
그리고는 수중의 검을 꽉 잡았다. 왼손으로 번개같이 장법을 전
개하여 검세를 보조하고서야 네 사람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때 갑자기 독수약왕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두형, 소형이 올라왔소?”
두구는 차가운 소리로 대답했다.
“올라왔소.”
“돌버섯(石菌)을 취득했소?”
“다행히 명을 욕되게 하지는 않았소.”
독수약왕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노부는 평생 처음 강적을 만났소이다.”
상팔이 놀라며 물었다.
“아니 약왕도 부상을 입으셨소?”
“두 곳에 좀….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는 잠시 말을 흐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비록 부상은 당했지만 여전히 싸울 능력은 있소.”
소영의 반격이 비록 셀지라도 네 사람의 공세를 막기란 힘든 일
이었다.
중주이고는 상처를 살핀 다음 운기를 모아 공격해 들어 가며 나
직이 말했다.
“형님, 이놈들의 무공이 실로 대단한 것 같습니다. 조금도 사정
을 두지 마십시오.”
소영도 심중으로 생각했다.
‘그렇다. 오늘 저 몇 놈을 해치우지 않는다면 이 무산석부(巫山
石府)를 빠져 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생각을 굴리며 기묘한 재주를 연출하니 검에 한 조각 한광이 번
뜩이면서 마침내 철척을 잡은 소년이 나동그라지는 것이었다. 소영
의 장검이 그의 앞가슴을 노렸으므로 마침내 내장이 파열되어 선혈
을 흘리면서 기절해 버리더니 곧 숨을 거두어 버리고 말았다.
중주이고는 소영을 돕고자 하였으나 그의 검기에 눌리어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소영은 남의 소년 하나를 친 후에 지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너희들 주인과 나와는 원래 약속이 있었다. 한 시진(時辰) 내에
는 공격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배신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튼 너희들이 손을 멈추지 않는다면 소영의 솜씨를 계
속 보여 줄 테니 놀라지 마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번개같은 검세가 작렬하였다. 그 일검은
소년의 가슴에 적중하였다. 날랜 칼날이 앞가슴을 그대로 뚫고 나
갔다. 소년은 즉사하고 말았다.
상팔은 차디찬 눈빛으로 방관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한 일인데….. 어떻게 저들은 죽어 가면서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을까?’
그는 낮은 소리로 두구에게 물었다.
“두제,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나?”
“무엇이 잘못 됐소?”
“저 사람이 우리들과 악전고투할 때에 몇 마디 기괴한 소리를 낸
이후에는 아무 소리도 없지 않았나? 동생은 들었나?”
“못 들었는데요.”
“소형님의 검세에 상하고도 비명소리 하나 내지 않았단 말이네.”
“정말 그렇군요. 그거 이상한데요.”
그들이 말을 주고받는 동안 또 한 사람이 소영의 칼 아래 나가
떨어졌다. 네 사람의 남의 소년 중 벌써 세 사람이 상한 것이다.
소영은 연거푸 세 사람을 해치고 나니 기분이 울적하고 내키지
않아 더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상대방은 이제 연자창을 쓰는 사람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소영은 그가 사태의 불리함을 깨닫고 물러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싸울 태세로 나왔다.
상팔은 낮은 소리로 소영에게 말했다.
“형님, 이 무산석동 중에는 기괴한 일이 많습니다. 이미 독이 있
는 물건으로 음식을 삼고 무공이 또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으니
결코 좋은 사람일 리는 없습니다. 이 시각에도 우리는 험악한 지경
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됩니다.”
“사형 말이 맞소.”
소영은 말을 마치고 다시 정신을 집중시켰다. 왼손의 힘을 빼고
오른손을 휘두르자 운파월광(雲破月光)하는 소리와 함께 남의 소년
의 가슴 언저리 옷자락이 찢어지면서 선혈이 흘러 내렸다.
소영은 그의 상처가 가볍지 않음을 보고 차마 다시 공격하지 못
하고 오른팔을 오므려 겁세를 거두었다.
그 찰나 남의 소년은 몸을 두어 번 흔들흔들하더니 연자창을 들
고 소영을 향해 달렸다.
소영은 그가 중상을 입은 후에도 사납게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
도 못했는지라 하마터면 창에 찔릴 뻔하였다.
소영은 화가 치밀었다. 장검을 휘둘러 곧장 중궁(中官)을 밟고
올라가 연자창을 비스듬히 떨어져 내려가게 하였다. 장검이 차디찬
빛을 발함과 동시에 선혈이 낭자했다. 남의 소년의 오른팔을 그대
로 잘라 버린 것이다.
두구는 외쳤다.
“이놈은 그래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니 그대로 놓아 줄 수 없습니
다. 후심(後心)을 찔러 완전히 죽여 버리십시오.”
소영은 머리를 내둘렀다.
“놀랐소! 이 네 사람이 이렇게도 지독하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
다니……”
상팔도 무어라고 하려다가 가벼운 기침과 함께 입을 다물어 버리
고 말았다.
두구는 몸을 번뜩 솟구치더니 그 쓰러져 있는 남의 소년을 확 밟
고 나서,
“갑시다! 독수약왕이 어찌 되었나 가 봅시다.”
소영은 검을 손에 잡고 뒤를 따르고 상팔은 그 옆에서 걸었다.
얼마를 걷다가 한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훅, 훅! 하는 권풍(拳
風)이 들려 왔다. 자세히 앞을 보니 바로 독수약왕이 백발이 나부
끼는 두 노인과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적수공권이었다.
두 노인 중 하나는 금실로 된 부채를, 또 한 노인은 검을 잡았는
데 공세가 맹렬하기 짝이 없었다.
독수약왕은 그 불진과 장검의 긴박한 공세 아래서 공수입백도,
맨주먹으로 검을 맞상대하는 수법을 전개하여 그들을 상대하고 있
어서 승부를 판가름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궁지에 빠져 공력이 줄어들었으므로 양손을 교차하여 한 수를 일변
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독을 뿌릴 힘도 없었다.
소영은 이를 주시하여 보다가 문득 장검을 비껴 세우며 소리쳤
다.
“두형은 물러나시오.”
두구는 독수약왕에 대하여 본래 감정이 좋지 않았다. 독수약왕을
도울까 망설이는 중에 소영의 말을 듣고 한 옆으로 비켜 섰다.
소영은 장검을 뽑아 가슴 앞에 대고 상승무학의 한 수인 승룡인
봉(乘龍引鳳)으로 불진의 묘기를 가볍게 막아 냈다.
“제가 약왕을 도와 한 팔의 힘이 되겠습니다.”
독수약왕은 이 말을 듣고 눈으로 암시를 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쌍수를 오그라뜨리더니 허리를 굽혀 타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괴
상한 수법으로 검을 잡고 있는 노인을 향해 재빠르게 덮쳤다.
마치 독수리가 매를 공격하는 듯 날랜 동작이었다.
독수약왕은 두 노인과 맞서 십여 합을 지탱하기 어려울 때에 소
영이 갑자기 나타나 목숨을 부지하게 된 것이다. 그는 남한테 도움
받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지라 속으로는 소영의 뜻하지 않은 출
현에 기뻐하면서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소영은 백발 노인의 묘수인 금사불진을 대적하자 즉시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할 강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공격하여 오는 백발 노인의 수는 보통 무사가 생각하기에는 아무
힘도 없는 평범한 수법 같았지만 부드러운 금사가 내뿜는 기운은
산을 가르고 바위를 깨뜨릴 만한 힘이었다.
‘이 노인의 수중의 불진이 이처럼 큰 힘을 내뿜으니, 이 검술을
가진 노인의 무공도 대단하겠지! 독수약왕이 두 사람의 협공 아래
서도 이렇게 오랜시간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쉬운 일이 아
니야.’
생각을 굴리면서도 수중의 검세는 돌연 빨라져 불진을 사용하는
백발 노인의 기선을 제압하였다.
독수약왕은 소영이 나서서 협력한 후에야 비로소 압력이 제거되
었다.
그 칼을 잡은 노인은 이러한 타법으로는 승패를 가리기 어려움을
느꼈는지 검세를 일변, 공세는 돌연 사나워졌다.
한참 격투가 치열할 즈음, 갑자기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려
왔다. 두 노인은 힘껏 무기를 휘두르더니 뒤로 물러났다.
‘이 두 놈들이 또 무슨 계교를 쓰려는 걸까?’
독수약왕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두 노인은 흰 수염을 나부끼면서 수중의 병기를 움켜 잡아 맹공
격하면서 뒤로 훌쩍 솟구쳤다. 그들은 번개같이 달아났다. 잠깐 사
이에 늙은이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독수약왕은 그들이 물러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저 놈들이 힘이 모자라서 달아나지는 않을 텐데……”
두구는 그 중얼거림을 알아 듣고 쌀쌀하게 말을 받았다.
“우리 형님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스스로 깨닫고 물러간 것이 분
명하지 뭐.”
상팔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문득 두 남의 소년이 가까운 곳
에 옆으로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백발의 두 노인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독수약왕과 대적했다가 상
처를 입은 것이라 생각되어 물었다.
“이 두 소년은 죽었소?”
“중상을 입었을 뿐이지 죽지는 않았소. 두 소년은 아까 그 노인
들보다 먼저 노부에게 협공해 왔소.”
“이들 모두가 약왕의 손에 상했소?”
“그렇소.”
“이들의 상처는 어느 정도요? 다시 행동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할걸!”
두구가 말을 가로챘다.
“그 두 노인이 급급히 물러가면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것으
로 보아 필시 무슨 음모가 있는 것 같으니 우리는 지체 말고 이곳
을 떠나야 하오.”
두구는 몸을 돌려 앞장을 섰다.
그들이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어디선지 얼음장같이 싸늘한 말
소리가 들려 왔다.
“내 부하가 명령을 듣지 않고 약속을 어겨 제멋대로 굴었소. 이
미 내가 그들을 가두었으니 여러분은 마음놓고 지나가시오. 막지
않을 테니……”
말소리는 잠시 그쳤다가 다시 이어졌다.
“두 시진의 약속은 이미 끝났으나 내 부하가 부당하게 약속을 어
겼으므로 여러분에게 한 시진을 연장시켜 주겠소. 그러나 만약 한
시진이 지나도 이 석부 중에 있을 때에는 내가 출수하여 공격해 나
갈 테니 그리 아시오.”
그러자 소영이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의 부하들은 애석하게도 모두 나에게 죽었소.”
“나는 그들을 위하여 원수를 갚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내 명
령을 어겼으니 죽었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소영이 다시 대꾸하려 하자, 얼음장같은 그 소리는 계속되었다.
“다만 한 시진이 있을 뿐이다. 여러분이 내 말을 믿거든 속히 얌
전하게 이곳을 빠져 나가고, 만일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꾸물
꾸물 시간을 늦추어도 좋다.”
소영 일행은 이 길을 빠져 나가기 전에 반드시 몇 번의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만 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결국 그들의 추측은
어긋났다. 그들이 무산석동을 나오는데 걸리적거리는 것은 아무것
도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숨을 물아 쉬면서 석동의 출입구를 빠
져 나왔다.
지금까지 활짝 열렸던 석문은 그들 네 사람을 내보내자마자 펑!
하고 닫혀 버렸다.
상팔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이상해!”
두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의아해 하며 물었다.
“무엇이 이상합니까?”
“그가 석도 중의 거대한 돌을 옮기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곳을 빠
져 나오기 힘들었을 텐데….. 석부 주인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순
순히 놓아 주었는지 알 수 없단 말이오.”
소영이 듣고는 웃으며 대꾸했다.
“그는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군자일 거요.”
상팔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어라구요? 형님은 정말 그 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시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어째서 우리들을 놓아 주었겠소? 우리를 해
칠 마음이 전혀 없었던 거지…..”
두구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 보며 입을 열었다.
“소제는 그렇게 생각치 않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 석
부 주인은 석부 중의 일류급 인물을 죄다 내세워 우리들의 실력을
시험해 본 후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우리
들을 그 속에 머물게 한다면 죽음을 무릅쓰지 않고선 제압하기 어
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찌감치 내보낸 것입니다.”
소영이 그 말을 받으려 했으나 독수약왕이 앞질러 물었다.
“소영, 취득한 천 년 묵은 돌버섯을 노부에게 보여 주시오.”
소영은 품 속을 더듬어 자루 속에 든 돌버섯을 한 움큼 꺼내 주
었다.
독수약왕은 그 버섯을 별빛에 비추어 보더니 기쁨을 감추지 못하
며,
“과연 이것이오.”
하더니 품 속에 넣고는 또 물었다.
“또 있소?”
상팔은 껄껄거리고 웃었다.
“그만큼을 가지고도 모자라서 그렇소?”
“딸의 병세가 위중한지라 이것 가지고는 효험이 없을 것 같소.”
소영은 아무 소리도 않고 또 한 움큼의 돌버섯을 내어 주었다.
독수약왕은 다시 별빛에 비추어 보고 흐뭇해 하며 더 이상 손을
내밀지 않았다.
네 사람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은 얼마 후에 쾌속선으로 올라갔다. 배 안에서는 촛불이 일
렁이고 있었고 선주는 앉아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 선주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인사를 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상팔은 선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독수약왕에게 말을 걸었다.
“약왕은 이번 길에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다행입니다. 그리
고 저의 형님과 약왕께서 맺은 언약도 이제 여기에서 그쳐야겠군
요.”
“좋소 세 분께서 노부와 같이 배에 타시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면
즉시 고별 인사를 드리고 이 배로 떠나겠습니다.”
소영은 그 말을 듣자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약왕께서 약을 취득하셨으니 이제부터
중요한 일은 영애의 병을 치료하는 일입니다.”
독수약왕은 다행이라는 듯,
“소형의 말씀이 맞소이다. 노부의 생각도 그렇소 그리고 이 선실
에서 약물을 조제하고 딸애를 치료했으면 하는데 세 분의 의향은
어떠신지요?”
두구는 쌀쌀하게,
“약왕은 어찌 이렇게 갑자기 공손해지셨소?”
소영은 두구의 말을 무시해 버리듯 재빨리 독수약왕에게,
“만일 이 배 안에서도 괜찮으시면 약왕 마음대로 착수하셔도 좋
습니다.”
“세 분이 다 허락해 주셨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상팔도 두구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적의에 찬 말투였다.
“피차간 언약은 해소되었으니 약왕은 다시는 무슨 수단을 쓰지
않는 것이 좋으실 텐데……”
“노부는 다만 세 분과 상의하고자 하는 것 뿐이오.”
“좋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아직도 우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
이 있습니까?”
소영이 진지하게 물었다.
“노부의 딸애는 아주 여러 해 동안 병마에 시달렸기 때문에 반드
시 이 선실을 빌려 써야만 되겠습니다. 그러니 세 분께서는 잠시
동안은 휴식을 취하실 수 없게 되겠지요.”
“그렇겠군요.”
독수약왕은 머리를 깊이 숙이며,
“염치없는 청입니다.”
그러나 두구는 여전히 냉정한 태도였다.
“도대체 몇 시간이나 써야 합니까?”
“지금부터 내일 해 떨어질 때까지만……”
“그 때는 우리가 배를 버리고 언덕에 올라가야 할 텐데…..”
세 분께서 허락해 주시지 않는다면 노부는 곧 딸애를 데리고 배
를 떠나 다른 조용한 곳을 찾아가야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소영은 이렇게 말하고 앞장 서서 선실을 나갔다.
중주이고도 그 뒤를 따랐다.
독수약왕은 재빨리 배 안의 문을 닫았다. 사방에 장막을 드리워
바람이 조금도 들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소영과 중주이고는 선실 뒤로 나와 갑판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날은 점점 밝아와 동방의 하늘가는 희끄무레해졌다.
사공이 달려와서 물었다.
“여러 어르신네들. 배를 어디로 몰깝쇼?”
상팔이 대꾸하였다.
“즉각 닻을 올려라. 그리고 처음에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
“네? 다시 돌아가요?”
사공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두구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렇다.”
사공은 이상하다는 듯이 세 사람을 힐끗 바라 보더니 더 이상 묻
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뱃머리를 돌려 다시 삼협을 나왔다.
상팔은 갑판 위에 앉아서도 여전히 배 안의 동정을 살폈다. 그만
큼 그는 세심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공은 혼자 생각을 굴렸다.
‘저 사람들은 참 괴상하다. 선실에 편안히 앉아 있을 일이지 왜
갑판 위에 나와 바람과 햇빛을 쐬며 욕을 본담!’
사공은 사뭇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두구의 얼음장같이
싸늘한 모습을 보고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오정이 되었을까. 비로소 문이 열리더니 독수약왕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머리는 온통 땀투성이였고 얼굴은 일그러져 마치 금
방 일장의 고투를 겪은 사람 같았다. 걸음걸이 또한 휘청거렸다.
그는 세 사람 앞으로 오더니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두구는 그를 힐끗 바라보고,
‘저 사람을 지금 죽이려면 누워서 떡 먹기일 텐데……’
하는 생각을 하였다. 소영은 가볍게 기침을 하였다.
“약왕, 영애는 어떻소?”
독수약왕은 머리를 끄덕끄덕하면서 맥이 빠진 소리로 대답했다.
“노부는 이미 그 애의 전신의 맥을 통하게 하고 약물을 먹였소.
지금 아주 편안히 잠을 자고 있소.”
그리고는 눈을 감고 운기조식했다.
배는 물결을 따라 살같이 빨리 내달렸다. 양쪽으로 높이 솟은 층
암절벽을 뒤로 하며 앞으로 앞으로 미끄러지듯 내닫는 것이었다.
어느덧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배는 이미 삼협을 완전히 빠져 나왔다. 철썩철썩 파도가 부딪는
곳에서는 배의 그림자가 산산조각 부서졌다.
독수약왕은 내공이 깊은 사람이라 약 한 시진의 조식을 취하고
나자 정신이 맑아지고 화색이 돌았다.
그는 눈을 껌벅거리면서 세 사람을 훑어보더니,
“소형, 염치없는 청이 또 하나 있습니다.”
“염치없는 청이라면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소. 우리가 들어 줄
수 없으면 약왕에게 미안하니까요.”
두구가 딱 잘라 말했다. 독수약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노부는 호의로 세 분과 상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 분께서
만일 허락하지 않는다면… 설마 노부를 핍박하는 것은 아니겠지
요?”
소영은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딸애의 병세는 소형이 취득한 영약을 얻어 차도가 있습니다. 머
지 않아 곧 건강이 회복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 애는 수십 년
간 병마에 시달려 원기가 완전히 소모되었습니다. 귀주(歸州) 지방
은 비바람이 험하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므로 노부는 선실에서 한
이레 동안 머물러 저 애가 체력을 회복한 후에 다시 나설까 합니
다.”
상팔은 가볍게 웃어 넘겼다.
“그건 약왕의 일이니 우리와 상의할 필요가 없소.”
“세 분의 조력을 빌려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그래서 꼭 상
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을 빌려야 될 일이라면 한 번 말해 보십시오. 들어 드
릴 만한 건지 아닌지……”
“그렇지만 세 분께서 기꺼이 허락해 주시지 않는다면 노부가 말
하는 것은 헛수고가 되지 않습니까?”
두구가 나서서 싸늘하게 물었다.
“아니, 약왕은 우리들에게 허락할 것을 강요하는 거요?”
독수약왕은 허탈하게 웃었다.
“만일 허락해 주시지 않는다면 저 애로 하여금 죽음의 길을 재촉
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대협이 위험을
무릅쓰고 취득한 돌버섯을 헛되이 사용한 결과가 됩니다.”
상팔은 사방을 돌아 보고 웃으면서,
“왜 그렇게 핵심을 말하지 않고 종잡을 수 없이 빙빙 돌리기만
하오? 단도직입적으로 명백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노부가 저 애를 치료하는 중에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 만일 어
떤 적이 배에 올라타 공격해 온다면 어쩌겠습니까? 그러니 세 분께
서는 우리 부녀를 보호해 주십시오.”
독수약왕은 말을 마치고 세 사람의 얼굴을 힐끗 바라 보았다.
두구는 싸늘하게 웃고 말했다.
“약왕은 처음부터 모조리 부탁할 일만 생각하고 있으니 우리 형
제는……”
독수약왕은 손을 흔들어 두구의 말을 가로막았다.
“뱀은 대가리가 없으면 기지를 못하고 새는 날개가 없으면 날지
를 못하는 법입니다. 세 분 중에 한 분이 일을 주관하셨으면 좋겠
습니다.”
상팔이 나섰다.
“그야 우두머리는 소형님이죠.”
독수약왕은 두구와 상팔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두 분께서는 이미 자신의 신분을 알고 계시는군요. 따라서 더
이상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옳음을 알 것입니다. 또한
그래야만 장법(章法)을 어지럽히는 일을 면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조용히 있던 소영이 나섰다.
“약왕은 우리를 핍박하는 거요, 아니면 도움을 청하는 거요?”
“글쎄요. 노부는 평생 남에게 도움을 청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약왕이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면 결국 핍박하는
것이니…..”
“허락하시는 겁니까?”
소영은 단호히 잘라 말했다.
“난 아직 대답하지 않았소.”
독수약왕은 의미있는 웃음을 띄우고 나서,
“소형이 지금 손을 써서 이 노부의 혈도를 점한다면….. 그건
정말 쉬운 일일 텐데……”
두구가 참지 못하고 말을 받았다.
“우리들은 이미 당신을 죽여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수고 하기 싫어서 그만 둔 것이다.”
“그랬소? 노부는 실로 세 분을 대신하여 애석하게 생각하오.”
“대장부로서 어찌 상대방의 위급한 때를 노리겠는가? 지금도 늦
지는 않지만.”
“늦었습니다. 만일 세 분께서 그때 노부를 쳤었더라면 이제 와서
상의하고 말 것도 없었을 텐데…. 세 분께서는 애석하게도 좋은
기회를 그냥 지나치신 것입니다.”
상팔은 비웃는 말투로,
“약왕의 말투는 우리를 이곳에 잡아 두려는 것 같군.”
하고 독수약왕을 노려 보았다.
“세 분께서는 이미 실책을 범하셨습니다. 결코 내 곁에 앉아 있
어서는 안 되는데…..”
독수약왕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소영은 크게 눈을 떴다.
“당신은 벌써 우리 몸에 독을 썼단 말이오?”
“노부는 이미 세 분에게 알렸습니다. 내가 가진 물건으로 독을
퍼뜨릴 수 있다고.”
“나는 믿어지지 않는데……”
“믿어지지 않는다면 한번 운기해 보시구려.”
상팔은 운기해 보고 중독되었음을 알았다.
“좋다. 네가 벌써 우리 몸에 독을 썼으니 이젠 우리의 수단이 악
랄하다고 욕하지 마라.”
두구가 재빨리 몸을 일으키더니 오른손으로 철필을 뽑아내 재빠
르게 선실로 향했다.
“멈춰라!”
독수약왕이 큰 소리로 외쳤다.
상팔은 몸을 비스듬히 하여 그를 막으면서,
“약왕, 자신이 있다면 일격에 우리를 쓰러뜨리고 네 딸을 구해
봐라.”
소영 또한 냉소하면서 중얼거렸다.
“약왕의 사람됨이 이처럼 비열한 줄은 정말 미처 몰랐소. 도무지
군자의 기개란 없군.”
말을 마치고 돌연 오른손을 휘둘러 독수약왕의 왼쪽 허리를 찔렀
다. 독수약왕은 소영의 욕설에 얼굴을 붉히다가 갑작스런 공격에
얼떨떨했으나 재빨리 뒤로 두어 발짝 물러나 위기를 모면했다.
그는 숨을 몰아 쉬면서 품 속에서 옥병 하나를 끄집어 냈다.
“이 병 속에는 해독하는 약물이 있으니 세 분이 복용하시면 즉시
독이 풀릴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