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67
67. 시천도의 한
독수약왕은 좌우에서 비틀거리는 두 사나이는 돌아 보지도 않고
그 기세로 곧장 나머지 한 사람의 궁노수를 쳤다. 역시 그가 자랑
하는 초식 중랑첩파였다.
사나이는 칼을 뺄 여유를 얻지 못했다. 처음 물에 떨어진 궁노수
와 비슷하게 죽어 갔다. 다만 그는 입에서 피를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장풍을 면상에 맞아 그 상처가 가볍지 않은 듯 풍덩! 물
에 빠졌다.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그 순간 좌우에서 비틀거리는 두 단창의 무사가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 왔다. 그 중 한 명이 긴 창을 들어 태산을 찍어 내리는 듯한
힘으로 독수약왕의 머리를 향해 내리 갈겼다. 창이라 가까운 거리
에서 찌르기가 몹시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흥!”
독수약왕은 코웃음을 치며 왼손을 휘둘러 옆에 있는 무사를 밀어
뜨리는 것과 동시에 오른손에 내력을 모아 머리 위로 떨어지는 창
을 손으로 받았다.
“이놈 견뎌 봐라.”
약왕은 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앞으로 잡아 당겼다.
사나이는 무서운 공격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끌려 갔다. 이 순
간 독수약왕은 창을 잡은 손을 밖으로 내밀었다.
사나이는 끌려 오다가 돌연 창의 손잡이로 배를 세게 찔리고는
헉! 하고 헛바람 소리를 내지르며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곳은
바로 물 속이었다. 창을 놓친 채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이 순간, 나머지 한 명이 기회를 보아 약왕의 옆구리에 창을 들
이댔으나 그보다도 먼저 약왕의 단창이 그의 머리통을 후려 갈겼
다. 대한은 머리가 띵- 울리고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비틀거리
며 뒤로 물러났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첨벙! 물소리가 나고
물이 튀었다. 마지막 한 명도 역시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으하하하하하……”
약왕은 크게 웃어젖히고는 두 발로 각각 양쪽 뱃전을 밟고 흔들
흔들 움직여 금시 배를 엎어 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독수약왕의 몸이 훌쩍 솟구치더니 어느새 본래 타고 있던
큰 배 위로 올라 가는 것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소영은 자기
가 발을 붙이고 있는 큰 배에 칼로 큰 구멍을 내어 엎어 버리고 말
았다. 그리고 그의 몸은 공중을 날아 두 구의 배에 떨어졌다.
이때 두구는 철필을 가지고 한 대한을 거꾸러뜨렸다. 그리고는
여전히 세 사람과 어울려 싸우고 있었다.
소영이 배 위에 이르기도 전에 철필을 휘둘러 또 한 놈의 궁노수
를 물에 처 넣었다.
“하하하핫!”
그는 크게 웃어젖히고는 나머지 두 명을 노려 보았다. 한 명의
궁노수와 또 한 명의 대한은 이미 대적할 상대가 아님을 알고 뱃머
리로 쌍쌍이 물러나며 다시 짓쳐들 태세였다. 그러나 그것은 소영
이 배에 오르는 서슬에 그만 허사로 그치고 말았다.
은광이 번뜩하자 두 명은 동시에 물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두구는 다시 호쾌하게 웃고 두 개의 창을 들어 팔에 크게 힘을
주어 배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동시에 소영과 함께 재빨리 큰 배 안으로 돌아 왔다.
상팔과 함께 싸우던 대한은 자기편이 물에 빠지는 것을 거듭 보
자, 기력을 잃었다. 그는 슬며시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 헤엄쳐 달
아났다.
상팔은 금주판을 거두어 넣고는 노를 저어 큰 배 가까이에 접근
하여 쾌속선을 큰 배에 매달고 씩 웃어 보였다.
“이 쾌속선을 또 쓸 데가 있을까요?”
소영은 배의 부서진 부분을 살펴 보았다. 뱃바닥이 일부분 부서
지고 또 하나의 돛대가 타 버렸다. 심한 결투 끝에 이만큼의 손상
이란 실로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큰 배 안에 있던 배를 부리는 사람들은 소영 등이 대한 등과 싸
우는 솜씨를 본 후에 한숨을 몰아 쉬었다. 소영 등 호걸들의 솜씨
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두려움마저 느꼈다.
네 사람의 뱃사람과 활 쏘는 두 사람이 헤엄쳐 도망갔으니 반드
시 그들이 이 경과를 군주에게 알릴 것이다. 일단 지금은 우리가
승리하여 일이 잘 끝났지만 앞으로 더 맹렬한 공격이 퍼부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때 탄식하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분들이 저를 구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
를 구해 주신 것이 화근이 되어 군주와 해결지을 수 없는 원수가
되었으니 저의 마음은 몹시 아플 뿐입니다.”
독수약왕의 말소리가 잔잔히 들려 왔다.
“큰 배에 돛을 올려라.”
주순이 황급히 선실로 들어 오며 말했다.
“어느 곳으로 갈까요?”
소영이 대답했다.
“강가로 접근시키시오. 우리는 물 위에서는 실력을 발휘치 못하
니 말이오. 만일 강적이 추격해 온다면 우리들은 언덕으로 올라가
싸워야겠소.”
주순은 대답을 하고 선실에서 나와 사동을 불러 배를 출발시켰
다. 독수약왕은 소영을 힐끗 바라보면서 말을 꺼낼 듯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상팔은 계속 시청을 응시하면서,
“당신이 많은 값을 낸다고 자신있게 말씀하셨는데, 나는 이 그림
이 값나간다는 말이 도대체 믿어지지 않습니다.”
“화성 시천도(時天道)는 오직 한 폭의 그림을 세상에 남겨 놓았
습니다. 한 폭은 옥선자의 화상이었고, 또 하나는 약간 파손된 중
성봉월도입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내 줄 그림은 어느 것인지요.”
시청은 머리를 흔들면서,
“옥선자의 화상과 중성봉월도는 강호에 흘러 다녔는데 어느 곳으
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값으로 내 놓으려 하는 것은 옥선
자의 화상도 아니고 또한 중성봉월도도 아닙니다.”
두구는 쌀쌀하게,
“시천도는 다만 한 폭의 그림만 남겨 놓았는데 네 이미 두 그림
이 없다면 참말로 우리 중주이고를 조롱한 것이구나.”
상팔은 손을 흔들어 두구를 막으면서,
“그대는 시청이라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시청은 가벼운 탄식을 하고는,
“감히 여러분들을 속이지는 못하겠습니다. 시천도는 바로 저의
조부이십니다.”
두구는 냉정한 눈초리로,
“여보시오, 그런 헛된 소리는 마시오. 무림 중에 그 시천도가 평
생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 줄 아시오? 우리 중주이고
와 같은 의협적인 사나이도 아내가 없지만….. 자녀가 어찌 생길
수가 있단 말이오?”
상팔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친구, 중주이고의 눈은 조금도 속일 수 없단 말이야. 네가 옥석
을 구분할 마음이 있다면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 보시지.”
시청은 열띤 음성으로,
“여러분들은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만 알고, 그…그렇게 된 까닭
을 모르십니다. 시천도께서 비록 끝까지 장가들지 않았다 하나…”
여기까지 말하더니만 갑자기 입을 꽉 다무는 것이었다.
“아내도 없는 그에게 어찌 당신이 생겼단 말이오?”
시청은 길게 탄식하면서,
“이것은 강호에 숨겨진 하나의 큰 비밀이었습니다. 이 비밀은 백
년 간이나 감추어졌던 것이니 저를 제외하고는 온 세상 사람 아무
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상팔은 눈썹을 찌푸리면서,
“결국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그렇게 우물쭈물 넘겨 버릴 작정
인가?”
“에…. 시가(時家)의 자손이 되어 선조의 하신 일들에 대하여
는…. 비록 제위께서 저의 생명의 은인이시라 할지라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두구는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우리로서는 무턱대고 믿을 수만도 없소.”
상팔이 두구의 말에 맞장구치듯,
“백 년 전의 일을 말하는데 뭐가 어떻게 되겠소?”
시청은 겸연쩍어 하며,
“그렇다면 말씀드리지요.”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틀림없이 시천도께서는 결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위께
서도 시천도의 주위에서 있었던 일을 더러는 들으셨을 것입니다.
옥선자와의 끊을 수 없던 사랑 후, 이름도 없는 어느 여인과 정을
맺어 그 여자는 남들에게 내세우지 못하는 아내가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는 시청의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
다. 그는 울먹이면서 계속 얘기해 나갔다.
“그 여자는 별다른 재주나 인물도 갖추지 못한 촌사람이었습니
다. 그러나 그 분은 일대를 누빈 화가였으며, 독특한 재주를 지녔
었습니다.”
짤막한 몇 마디의 말에 거기 모인 군호 모두가 엄숙한 분위기 속
에 말려 들었다.
평소에 혼자서 잘난 척하던 독수약왕까지도 그 말을 듣고는 엄숙
한 표정을 지었다.
소영과 두구, 상팔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상팔은 일어나더니 차를 한 잔 따라서 시청에게 건네며,
“시형! 지금 들려 주신 값진 이야기는, 옥선자의 화상보다 우리
에겐 더 중요하군요 자! 차나 한 잔 드시면서 천천히 말씀하십시
오. 이 흥정에서는 우리가 밑진다 하여도 그리 큰일은 아닙니다.”
시청은 눈물을 닦으며 눈을 크게 뜨고 소영을 힐끗 쳐다 보고는,
“저와 같은 무능한 놈을 또 누가 믿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뛰어
난 재주와 무예와 모든 면에서 이름 떨친 시천도의 자손이라는 것
을……”
독수약왕은 가벼운 기침을 하면서,
“장상(將相)은 원래가 씨가 없는 것이오. 자식이 아비보다 못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자! 보십시오. 저의 이런 꾀죄죄한 모
양으로도 절세가인의 여식을 둔 것을 보십시오. 시형깨서도 그런
일로 마음 상하지 마십시오.”
“아마 그 시천도께서도 생전에 여자관계가 매우 많았던 걸 보면
여염집의 자손과 다름없소. 결국 모계의 평범하고 저능한 기질을
타고났을 뿐이지……”
상팔은 그의 말을 듣고 급급히 말을 이어,
“그 촌여자는 시형 선배의 향연(香煙)을 보존한 후예요?”
“그 여인은 하찮은 산촌에서 이름없는 나무꾼의 딸로 태어났습니
다. 시천도는 떠돌아 다니다 발걸음이 그곳에 머물게 되었지요. 한
폭의 효일냉천도(曉日冷泉圖)를 그리기 위해 바로 그 농가에 머물
게 되었습니다. 반 년을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어느날 그 촌여자는
시천도의 재주에 반하여 정을 주게 되었습니다. 반 년 후, 시천도
는 그림을 완성시켜 놓고 바람과 같이 사라져 버리고 소식도 끊어
졌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시청은 숨을 몰아 쉬고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쉬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그 촌여자는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용서받
지 못하여 실컷 두들겨 맞고는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여자는 어
린 핏덩이를 위하여 남몰래 갖은 고생을 다하며 살아 갔습니다. 고
향에서 쫓겨 나와 남의 집살이를 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자식을 잘 길러 보려는 마음에서….. 그러나 그 여자
는 잘 얻어 먹지도 못하고 혹사만 당하다 결국은 꼬치꼬치 말라 죽
었습니다. 죽을 즈음에 그의 어린 자식을 불러 놓고 이제까지의 비
밀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아울러 그 여자가 고이 간직했던 한 폭의
효일냉천도를 자식에게 주면서 그 그림을 가지고 아버지를 찾아 보
라고……”
암담하게 긴 탄식을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 불쌍해라. 그 시천도께서는 천하에 몹쓸 박정한 사람이
군.”
부드럽고 맑은 음성이었다. 독수약왕이 깜짝 놀라 머리를 돌려,
“얘야 언제 깨었느냐?”
하고 묻자 가느다란 음성으로 대답이 들려 왔다.
“저는 깨어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천도에 대한 이야기
를 모두 똑똑히 들었습니다.”
상팔이 탄식하며 한 마디 했다.
“한 폭의 효일냉천도는 이미 그들 모자가 일생의 부귀영화를 누
린 것보다 낫다. 다만 애석한 것은 그들은 그때 시천도께서 그린
그림의 가치를 조금도 몰랐다는 것뿐.”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상인은 이익만을 중하게 여기고 사람은 가볍게 여기는군요. 당
신들 중주이고는 주옥명화가 만금을 주고도 못 산다는 것만 알 뿐
가련한 촌여자의 온갖 고난은 모르는구료! 그 효일냉천도는 어떠한
비싼 값을 주더라고 팔지 마십시오. 그 그림의 애절한 사연이 얼마
나 값진 것이오. 시천도께서 한 번 가고 소식이 없었으니 그가 친
히 그린 그 명화는 그 여자의 유일한 위안물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생각나면 그림을 보고 상사의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잊었을
것입니다.”
상팔은 멍청히 듣고 있다가 한 마디 했다.
“낭자의 말이 옳군.”
“그 촌여자가 병들어 죽은 후에 그 여자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모친의 유언대로 그림을 가지고 아버지를 찾으러 나섰습니다. 이럭
저럭 십 년이 지나는 동안 소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십 년의 풍상을 겪고 난 후 몸마저 몹시 야위어졌습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어느 저자에 머물러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전에는 어머니의 유언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 찾기
를 뒤로 미루고 조그만 가게를 차렸습니다. 요행히 영업이 날로 번
창하여 아내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태기가 있어 아들
을 낳았던 것입니다.”
말소리가 가늘어지더니 잠시 그쳤다가 다시 계속되었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바로……”
상팔은 술병을 들어 시청의 잔에 부어 주며 웃으면서 말했다.
“급히 말할 필요 없습니다. 천천히 말씀하십시오.”
시청은 침통하게 다시 이었다.
“제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부친께서는 지병이 다시 재발하여 저
를 베갯 머리에 불러 놓고는 이제까지 있었던 여러 일에 대하여 상
세한 말씀을 하시고는 이 효일냉천도를 제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그만……”
그는 말을 뚝 그쳤다가 한참 후 다시 이었다.
“부친께서 겪으셨던 일을 거울삼아 저는 곧 마음을 달리했습니
다. 먼저 한 분의 스승을 모셔다 무술을 배웠으며, 이 년 후에는
강호로 들어 갔습니다. 제가 집을 나설 때엔 약관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환갑에 이르렀습니다.”
상팔은,
“시형의 고생과 효심은 정말로 훌륭하십니다.”
시청은 머리를 흔들면서 굳은 표정으로,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어찌 훌륭하다
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볍게 탄식하고는,
“저는 수십 년의 세월을 소비하며 조부를 찾으려고 했으나 조부
는 영영 못 찾았습니다. 그러나 선조의 많은 일화를 들었지요.”
상팔은 마음 속의 생각을 추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근 백 년 전의 일이니 화성(畵聖) 시천도는 시형의 아버지가 병
석에 있을 때 이미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시형께
서 천하의 구석구석을 찾아 다닌다 한들 그를 찾을 방도가 있었겠
습니까?”
좌중은 조용하고 다만 시청이 계속하여 말하는 소리만 들렸다.
“저는 마음 속으로 선조께서 이미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셨
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혹시 하고, 요행의 생각을 가졌
던 것입니다. 선조의 기절할 만한 무공과 기정산수(奇情山水)라는
성정(性情)은 보통 사람보다 그 수명이 훨씬 길 것이라는 희망으
로….. 그리고 결국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의 시체를 매장한 곳이
라도 찾아 보려 했습니다.”
상팔은 뒤를 이어,
“내가 알기로는 시형선배가 묻힌 곳은 무이산으로 알고 있는데..
시청은 얼른 말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무이산 선자 봉우리입니다. 저는 그것을 알아낸 후
에 즉시 무이산 선자 봉우리로 달음질쳤습니다. 그러나 제가 본 것
은 다만 허허벌판과 산봉우리뿐이었습니다. 그 전설에 있는 천도화
보까지도 일체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선자봉상
에서 삼일밤을 노숙하면서 애써 찾았습니다. 조그마한 바위까지도
자세히 조사하여 보았으나 여전히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상팔이 말을 이었다.
“화성 시천도에 대하여는 내려 오는 말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
나 그것은 전설에 그칠 뿐입니다. 그는 일생 동안 사람과의 왕래가
아주 적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을 알아낼 사람이 몇이
나 되겠습니까?”
“삼 일 후에 저는 선자봉을 떠나 다시 강호를 찾아 마침내는 한
가닥의 비밀을 찾아 내고 말았습니다.”
“시노선배의 전설에 대하여 저는 오히려 들은 것이 대단히 많습
니다. 시형이 말씀하시기만 한다면 제가 자료를 제공해 드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말씀드리지요.”
띄엄띄엄 말하고는 다시 이어,
“제가 찾아 낸 비밀이라는 것은 저의 선조께서 돌아가시며 남기
신 것들에 대하여 알아 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폭의 옥선자의
화상과 반 폭의 중성봉월도를 남겨 놓으신 외에 또 직접 손으로 쓴
천도무록(天道武錄)이라는 책이 한 권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이
누구의 손에 들어 갔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러나 동정수구 방수령이
가져 갔다더군요 선조께서는 살아 계실 때 사람들 앞에 나타나시지
도 않으셨고 돌아가신 후에는 뼈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까 뼈를 묻은 분묘조차도 없는 셈이지요. 저는 한 폭의 효일냉천도
를 제 몸에 지니고 있을 뿐,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다른 유품들에 대한 소식을 들은 후에 그것들을 찾기를 희망했지
요. 그러다가 동정수구에 적을 두고 조그만 두목 자리에 앉아 버렸
지요.”
소영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물었다.
“당신 할아버지가 남겨 놓은 천도무록을 찾아 냈나요?”
이 물음에 시청은 조용히 머리를 흔들면서,
“거기에 대해서 저는 아무런 단서조차 찾아 내지 못했습니다. 다
만 한 가지 이상하게 생각되는 점이 있을 뿐이지요.”
상팔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무슨 일인데요?”
“동정수채 방채주의 무공은 해가 갈수록 강해만 갔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의 아들은 말할 수 없이 큰 실력을 가졌습니다. 물론 그
의 아버지보다 더 훨씬…. 그 소채주는 집을 떠나 무술을 배운 것
이지요. 비록 제자가 선생보다 다소 낫다 하더라도 그 차이가 현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속에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으
리라 생각됩니다.”
“동정수구 방수령은 죽은 지 이미 십 년이 넘었는데…..”
“그렇습니다. 방총타주는 십삼 년 전에 죽었습니다. 강호에서 말
하기는 그가 갑작스러운 병에 걸려 죽었다고들 하지요. 그러나 그
것은 방가(方家)가 고의로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 방노채주는 밤
중에 살해당한 것입니다. 머리까지도 실종되어 찾지를 못했지요.”
“그럼 그를 죽인 자는 누구란 말인가?”
“안타깝게도 그를 아직 찾아 내지 못하고 있지요. 다시 그를 찾
아 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상팔은 탄식을 토하며,
“사람이 죽자 기세가 떨어졌지요. 그 방노채주가 죽은 후부터 동
정호의 기업까지도 동시에 강호상에서 없어졌지요.”
시청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노채주가 죽은 후에 원래는 방소채주가 총타주의 지위를 계승했
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동정수채의 해산을 선포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실인즉 그와는 아주 반대였습니다. 그 방소채주의 뛰어난
무공은 아버지보다 훨씬 위였습니다. 분명히 동정수채를 해산한다
고는 말했지만 암암리에 실력을 확충했던 것입니다. 다만 그가 하
는 짓이 교묘하기 짝이 없어 강호에서는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있는
사람이 적을 뿐이지요.”
“그러면 방소채주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
“방소채주는 사해군주(四海君主)라 자칭하는 사람입니다.”
“아! 과연 뜻밖이군.”
“신분이 탄로나면 혹 사람들에게 해를 입을지 모릅니다. 저는 군
주의 부름을 받고 일종의 만성 독약을 복용했습니다. 만일 여러분
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저는 벌써 강 속에 빠져 버렸을 것입니다.”
“아! 그랬었군요 당신이 잘 조식하기만 하면 우리들이 힘껏 시형
을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 군주는 강제로 저에게 독물을 먹
였으며 또한 제 정신에도 간계를 꾸며 놓았습니다. 다만 그들이 저
를 죽이려 하지 않는 것은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
니다.”
이 말에 독수약왕은 단호하게,
“관계 없소. 나는 당신을 위하여 몸 속에 있는 독을 없앨 자신이
있소.”
시청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저는 그 뜻에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하며 일어나더니 독수약왕에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독수약왕은 만류하며,
“사양할 것 없소. 대체 그가 당신에게 무슨 독약을 먹였는가를
알려만 주오. 만일 모른다면 시간을 좀 허비해야 할 것이오.”
소영은 독수약왕을 힐끗 바라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아주 변한 것이 아닌가?’
시청은 다시 탄식하는 소리로,
“저는 강제로 독약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중한 상처를 입었
습니다.”
독수약왕은 담담하게 미소지으며,
“당신이 이 시각에 당장 죽지만 않는다면 나는 당신의 생명을 구
할 자신이 있소.”
이때 선실 밖에서 주순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분들,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상팔은 몸을 재빨리 일으키더니 먼저 선실 밖으로 뛰어 나가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여덟 척의 쾌선이 이곳으로 급히 오고 있습니다.”
상팔이 머리를 들고 쳐다 보니 과연 여덟 척의 쾌속선이 바람처
럼 몰려 오는 것이었다.
“법석거리지들 말아라. 사공들에게 조용히 하도록 일러라. 쳐들
어 오는 배는 우리들이 상대하겠다.”
말하는 사이에 소영, 두구, 독수약왕은 벌써 한 줄로 서서 걸어
나왔다.
여덟 척의 쾌속선은 기세를 떨치며 눈깜짝할 사이에 그들이 타고
있는 큰 배에 다가 왔다. 그러더니 둥그렇게 큰 배를 둘러 싸는 것
이 아닌가.
소영은 눈썹을 찌푸리면서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이 여덟 척의 쾌속선이 여덟 군데에서 화약을 뿜는다면 상대하
기가 좀 힘들게 생겼는걸.’
주시해 바라 보니 여덟 척 쾌속선의 갑판 위에는 각각 남빛 투구
를 쓴 네 사람의 무사가 서 있었다. 그들은 손에 긴 창을 쥐고 있
었다.
여덟 척의 쾌속선은 소영 등이 탄 큰 배를 둘러 싼 후에는 더 이
상의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무엇을 기다리는 듯-
다만 배 안에서 시청의 목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쾌속선 위에 있는 무사들이 바로 사해군주 손 아래 있는 사람들
입니다. 남색옷을 입은 패거리들이 그 중 가까운 사람들이지요.”
“보아하니 사해군주가 몸소 나타난 듯합니다.”
상팔은 여유있게 말했다.
“그것 참 다행한 일이로군. 도적도 잡고 괴수도 잡아야지. 사해
군주가 몸소 나타났다면 우리가 강적을 무찌를 기회가 생긴 것이로
군.”
여덟 척의 쾌속선 위에는 서른두 명의 남색옷을 입은 무사가 줄
지어 서서 눈동자를 굴리며 일제히 소영 등이 타고 있는 배 위를
주시했다.
그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쥐죽은 듯 조용히 서 있었다. 한눈에 이
들이 훌륭한 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독수약왕은 소영을 힐끗 바라 보면서,
“우리의 배는 지금 강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물 위에서 그들과
싸운다면 사실상 불리합니다. 노부의 뜻은 사해군주가 아직 도착하
지 않은 틈을 타서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배를 버리고 언덕 위로
올라 격전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소영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냉면철필 두구가 말을 가로채었
다.
“그 강안은 모두 백화산장(百花山莊)의 땅이오. 우리가 언덕으로
올라가면 그곳에 있는 무사의 공격을 받을 것이오.”
상팔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써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한 일인데….. 이 강 근처는 백화산장의
세력이 미치는 곳인데…. 그 사해군주가 이곳에 와서 깃발을 날리
는 것을 심목풍이 모를 리가 없는 일인데…. 또한 그를 그대로 내
버려 둘 리도 없고.”
독수약왕은 이 말에,
“그 심목풍의 사람됨은 사해군주가 강에서 이처럼 날뛰는 것을
보고 그냥 둘 성질이 못 되지.”
“사실이 그렇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우렁찬 각적소리가 강변의 정적을 깨뜨렸다.
소영 등은 이 각적소리로 보아 여덟 척의 쾌속선이 곧 공격해 올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여덟 척의 쾌속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배 안에서만 시청이 떠드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해군주가 나타났다.”
소영이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머리를 들어 바라 보니 과연 남쪽
강 위에 한 척의 오색 거선이 천천히 달려 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 오색 거선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속력이 더딘 듯하나 실은 대
단히 빨라서 벌써 사, 오 장에 이르렀다. 그러더니 두 척의 쾌속선
이 재빨리 양쪽으로 갈라섰다.
상팔은 거선을 힐끗 보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엄청나게 큰 배로구나.’
상팔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배 안에서 또 시청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거선 위에는 모두 다섯 개의 돛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색 거
선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지금 몇 개의 돛대 위에 기를 걸었습니
까?”
상팔이 다만 하나의 흰색 돛대 위에 흰색의 깃발 한 장만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다만 한 장의 흰색 깃발이 걸려 있습니다.”
“그러면 좋습니다.”
그 위에서 두 번의 각적소리가 난 후 잇따라 종소리와 북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두구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욕을 했다.
“빌어먹을 녀석, 진짜 군주가 온 것처럼 가장하는군.”
소영이 웃으며 두구의 말에 덧붙였다.
“그 녀석은 오히려 사해군주보다 대담하게 까부는군.”
그럴 즈음 배 문이 서서히 열리고 그 안에서 네 사람의 황의를
걸친 동자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네 사람의 황의동자 뒤에는 한
사람이 바싹 다가 오고 있었다. 몸에는 인괘도포(人卦道袍)를 걸쳤
고 손에는 불진(拂塵)을 들고 있었다.
소영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저 사람의 옷을 보니 분명 사해군주는 아닌 것 같군.’
이렇게 생각을 더듬고 있을 즈음, 그 도인은 벌써 배 위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네 사람의 황의동자는 양쪽으로 갈라섰다.
소영은 자세히 그 도인의 모습을 훑어 보았다. 소영의 눈에 들어
온 도인의 모습은 말대가리 같은 긴 얼굴에 다섯 갈래의 긴 수염을
늘어뜨렸고 인괘로 채색한 수를 놓은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 입
은 모양이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는 손에 있는 불진을 한 번 흔들어대더니 소영 등을 주시하면
서,
“여러분 중 어느 분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오. 대답해 보시오.”
상팔은 힐끗 소영을 쳐다 보았다.
소영은 약왕을 쳐다 보았다.
독수약왕은 낮은 소리로,
“저 도인의 얼굴 꼴을 보니 대단히 간교하게 생겼군. 소대협의
사람됨은 군자와 같아 말로써는 그의 적수가 안 될 테니 상형이 한
번 나아가 보시오.”
소영은 약왕의 말을 듣고 웃으며,
“좋소! 상형이 수고 좀 해 주시오.”
상팔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천천히 걸어 나가 손을 모으고는,
“도장께서는 무슨 가르치심을?”
그 도장인의 두 눈 속에서 예리한 빛이 번뜩였다.
상팔을 쳐다 보고는,
“귀하는 무어라 칭호하오?”
“저의 성은 상(商)입니다.”
“이름은?”
“일·이·삼·사·오·륙·칠·팔, 하는 팔입니다.”
“아! 중주이고 중의 노대셨군요. 빈도 실례했습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저희들이야 하찮은 장사치인데 예절을 지켜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말소리가 가늘어지더니 뚝 그쳤다가는 다시 이어,
“도장께서 저의 이름을 다 아셨으니 저도 또한 도장의 법호를 듣
고 싶습니다.”
“빈도야 강호에 있지 않았고 대산에 깊이 묻혀 있어 말씀드려도
상대협께선 모르실 겁니다. 그러니 숫제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도장께서는 이미 삼계(三界) 밖으로 뛰쳐 나오셔서 오행중(五行
中)에 계시지 않았으니 방외지인(方外主人)은 무엇 때문에 강호 안
으로 들어 오셨나를 잘 모르겠습니다.”
“군주께서 맞이하러 오시어 그 함정을 물리치기 어려워서 하는
수 없이 산에서 내려와 그의 한 팔이 되었지요.”
상팔은 여기까지 말을 듣고 손을 모으고는,
“원래 그랬었군요.”
그 도인은 왼손을 가슴에 갖다 대고 예를 올리고는,
“빈도는 강호에 들어와 중주이고의 명성과 장사 솜씨가 뛰어나다
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상형이 이곳에 계시니 또한 두형도 함께 계
시겠군요?”
두구는 이 물음에 냉랭한 목소리로,
“바로 저올시다. 도장은 무슨 가르치심을?”
그 도인은 두구를 쏘아 보며,
“빈도 대명을 앙모한 지 오래입니다.”
이 말에 두구는 같잖다는 듯이,
“송구스럽습니다.”
도인은 살짝 웃어 보이더니 눈을 소영이 있는 곳으로 돌리며,
“시주께선 누구십니까?”
독수약왕은 화난 목소리로,
“이 사람은 정말 간사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군, 우리의 내막은
샅샅이 물으면서 자기의 이름은 밝히질 않으니…. 더 이상 우리도
묻는 말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
소영도 속으로,
‘그 말은 맞는 말이로다.’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들 생각하고 있을 때,
“하찮은 무명 소졸입니다.”
도장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다시 독수약왕을 쳐다 보며,
“귀하의 형모를 빈도는 들은 듯도 한데 반드시 유명한 인물이시
지요?”
독수약왕은 이 말에 냉소하여,
“지나친 칭찬을 하시는구료.”
짤막하게 잘라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도인은 이 말은 들은 체
도 않고 다시 물어 왔다.
“시주의 칭호는 무어라 하시나요?”
“도인의 칭호는 무어라 하십니까?”
도장의 눈에서는 빛이 번쩍이더니 차갑게 독수약왕의 얼굴을 주
시했다.
“빈도는 소요자(逍遙子)입니다. 시주의 존성 대명은?”
“노부는 병을 고치는 사람입니다.”
“의원이시군요?”
“기운이 별로 좋지 않아 줄곧 약을 쓰고 있습니다.”
상팔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도장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이제 저와 이야기합시다.
우리는 장사를 해도 사람들과는 아주 사이좋게 지냅니다.”
소요자는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사람이었다. 독수약왕의 그와 같
은 심한 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담담히 웃으면서,
“빈도는 군주의 명을 받들어 상형과 한 가지 의논할 일이 있습니
다.”
상팔이 귀를 기울이며,
“매매에 관한 일입니까? 상업에 대한 일이라면 흥미거리입니다.
남느냐 아니면 손해냐 하는 것들 말입니다.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실은 저의 군주께서 이번에 강호에 출도하시어 한 가지 일을 하
시려 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도 산을 떠나기를 네 번이나 권하셨
던 것입니다.”
상팔은 통쾌하게 웃으면서,
“옛날 제갈공명 같은 분도 삼고초려에 불과했는데 도장께선 네
번이나 청을 받으셨다 하니 정말 놀랄 일이군요.”
도인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빈도는 제갈공명처럼 자거(自居)하지 않았으니 옛사람의 행실과
비교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도장의 재능과 학식은 참으로 훌륭하시니 절대로 손해 보는 장
사는 안하시겠지요. 자! 어서 말씀이나 하십시오.”
소요자는 실로 보통 사람보다는 큰 도량을 가지고 있었다.
상팔의 비웃음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원래 영웅은 오만한 풍골이 있어야 하는지라 빈도는 종래부터
오기있는 영웅 인물들을 공경해 왔습니다.”
이 말에 상팔은 움찔하며 속으로,
‘이토록 담이 큰 사람과 상대하기란 힘든 일이군.’
다시 소요자가 냉랭하게 말했다.
“삼 일 전 저의 군주께서는 이곳을 지나가셨지요. 그때 백학산장
의 심대장주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일이 있지요.”
이 사실은 소영 등이 알고 싶었던 일이라 모두 숨을 죽이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소요자는 잠깐 말을 멈추고 소영과 상팔을 쳐다 보더니,
“빈도는 좋은 얘기로 말을 시작했지요. 우리는 피차간 무림의 동
도요, 강호의 벗들인데 어찌 그런 사소한 일로 기분을 상하십니까
하고요. 그러나 심목풍은 사람을 깔보아 빈도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소. 또한 빈도의 말은 무엇이고 묵살해 버려 마침내 저희
군주를 노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싸움을 하게 됐
습니다.”
상팔은 이 말에 수긍이 가는 듯 속으로,
‘그들 배가 쾌속선을 보고 성급히 달아난 것도 이상할 것이 없구
나. 삼 일 전에 이곳에서는 싸움이 벌어졌었겠군.’
여기까지 생각을 한 상팔은,
“도장의 지략이 훌륭하시어 큰 승리를 거두셨겠군요.”
“심대장주는 물에서의 싸움이 익숙하지 못한지라 우리의 싸움은
반 나절 만에 끝났습니다. 또한 그들의 배는 크게 상하였고 백화산
장의 백에 가까운 부하들이 강물에 빠져 물결 따라 흘러 갔습니다.
심대장주는 몇몇 부하의 보호를 받으며 조그만 조각배를 타고 도망
쳐 간신히 목숨만을 건졌습니다.”
독수약왕은 심목풍과의 친분이 두터운지라 이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끼여 들며 물었다.
“그는 부상을 당했습니까?”
소요자는 담담히 웃으며,
“심대장주의 무공에 빈도는 크게 탄복했습니다. 비록 크게 부상
을 입었을망정 그는 우리의 쾌속선을 계속 격침시켰고 또한 우리열
두 명의 고수들을 다치게 한 후 강을 건너 언덕에 오르셨습니다.”
“누가 그를 다치게 했습니까?”
소요자는 이 물음에 잠깐 주춤하더니 다시 여유있는 말투로,
“맹렬한 싸움이 벌어져 서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운지라
누가 심대장주를 상하게 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심대장주
는 빈도를 깔보지 않은지라 저와 삼십 합을 교수(交手)하여…..”
“당신의 무공으로 심목풍을 이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데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삼십 합을
교환하는 동안 빈도도 또한 그에게 한 번도 지지 않았지요.”
상팔은 이 말에 크게 놀랐다.
‘아니 그의 말이 참말이라면 이 사람의 무공은 정말 놀랄 만한
솜씨가 아닌…. 이즈음 무림고수 중에서 삼십 합을 접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소요자는 독수약왕을 주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귀하께서 이처럼 심대장주에게 관심이 있는 것을 보니 두 분 사
이의 정분이 매우 두터운 모양이구료.”
“당신이 정말 심목풍과 접전하여 삼십 초를 견디었다면 마땅히
무림 중의 고수라 칭하기에 충분합니다.”
소요자는 담담히 웃었다.
“만일 심목풍이 참패하지 않았다면 저의 군주와 빈도는 벌써 이
곳에서 쫓겨나고 말았을 것이외다.”
소영은 소요자의 말이 사실일 것이라고 인정했다.
독수약왕은 가볍게 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신네들은 크게 승리를 거둔 것이로군.”
소요자는 느긋이 웃어 보였다.
“며칠 전의 싸움은 심목풍에게 운이 나빴던 싸움이라 할 수 있지
요. 만일 우리가 그에게 패하였더라면 이곳 귀주땅 강물 위에 머무
를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잠깐 그쳤다가 다시 말했다.
“심목풍이 다시 강호에 나와 거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신들
중주이고도 이미 알고 있겠지요?”
이 사람의 말이 어찌나 교묘한지 강호 일에 모르는 것이 없는 상
팔로서도 도무지 그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었다.
그는 급히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우리 형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 까닭에 폐군주께서는 스스로의 청빈한 생활을 버리고 강호
에 행도하기로 결심한 것이외다.”
상팔은 웃으며 유감이라는 듯이 말했다.
“당신네 군주께서 기왕 심목풍 때문에 강호에 출도하셨다면 이
첫 번 싸움에서는 백화산장의 우두머리들과 화합을 했어야 했을 것
이오.”
소요자 역시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맞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폐군주께서는 곧 귀주 강변에 장소를
정하고 머물고 계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