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234
234. 본격적인 재앙이 시작됐군.
문이 양옆으로 열리자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재성은 반짝이는 천연 대리석이 깔린 빌라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현관 밖으로 나가자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존재감을 뽐내며 세워져 있었다.
정장을 깔끔하게 입은 권혁재 실장이 경호원인 문춘일과 함께 승용차 옆에 서 있다가 그를 보곤 꾸벅 머리를 숙였다.
“나오셨습니까. 회장님.”
“좋은 아침이에요.”
가볍게 인사를 받은 재성은 문춘일이 차 문을 열어주자 뒷좌석에 올라탔다.
미리 시동을 걸어둔 운전사가 부드럽게 승용차를 출발시켰다.
푹신한 시트에 몸을 기댄 재성이 앞을 보며 말했다.
“권 실장.”
“예.”
“오늘 일정이 어떻게 돼요?”
조수석에 앉은 채 몸을 뒤로 돌린 권혁재 실장이 바로 대답했다.
“11시에 임원 회의가 있고 방갑성 산업은행장님하고 점심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마곡지구에 짓고 있는 제약 연구소를 둘러보기로 되어 있습니다.”
중간중간에 다른 업무도 처리해야 되니 참 빡빡한 일정이었다.
“현장에 가서 직원들한테 줄 격려금 봉투를 따로 준비해 놔요.”
“알겠습니다.”
현장 시찰을 갈 때마다 재성이 꼭 빠뜨리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격려금이었다.
재성의 지론 중 하나가 바로 말로 격려하는 것보다 주머니에 바로 꽂아주는 현금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었다.
이건 재성이 한때 회사원 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더 몸으로 체감하고 있는 진리였다.
실제로 재성이 한 번 현장을 돌고 나면 직원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어떤 직원들은 은근히 재성이 현장 시찰을 오는 걸 기다리기도 했다.
승용차가 달리는 진동을 느끼며 시트에 앉아 있던 그는 한쪽에 놓여 있는 오늘자 조간신문을 꺼내서 펼쳤다.
1면에 쓰인 커다란 활자가 바로 시야에 들어왔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이상기후 현상에 대한 기사였다.
[엘니뇨로 인한 가뭄과 홍수에 전 세계가 몸살. 전문가들 곡물 파동 경고!미국 기후예측센터와 호주기상청에서 태평양 수온이 떨어지며 평년 상태로 돌아가고 있다고 발표하자 많은 전문가들이 엘니뇨가 6월에 소멸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로 인해 우려되던 곡물 파동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장밋빛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주요 곡창 지대가 위치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중국은 폭우가 쏟아져 큰 피해를 입었다.
남미와 미국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처럼 전 세계적인 이상기후 현상에 농산물 작황 감소가 예상되면서 지난달 잠시 진정되는가 싶던 곡물 가격이 다시 크게 뛰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되자 전문가들은 농산물 가격 상승으로 일반 물가가 오르는, 이른바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을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각국 정부는…….]
재성은 기사를 다 읽고 굳은 얼굴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재앙이 시작됐군.”
이번 곡물 파동의 주원인은 환경 파괴로 인한 이상기후와 무분별한 바이오 연료 확대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번 재앙은 천재지변이라기보단 인재라고 해야 맞을 것이었다.
‘거기다가 불행한 사태를 이용해 큰돈을 벌어들이려는 욕망도 뒤섞여 있지.’
곡물 파동으로 인해 앞으로 촉발될 수많은 혼란과 아픔을 떠올리며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가능하다면 재앙이 펼쳐지는 걸 막고 싶지만 이건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격랑에 휩쓸려 내려가지 않고 그 속에서 최선을 찾아내는 것뿐이야.’
* * *
뉴욕 내셔널 갤러리.
이사실 한가운데, 전에는 없던 큰 거울이 놓여 있었다.
사람 키보다 한 뼘 정도 더 길쭉한 거울 앞에 서서 헤이든은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았다.
“허리가 조금 늘어나신 것 같군요.”
나이 많은 재단사가 바닥에 대고 있던 무릎을 펴며 말했다.
허리와 양쪽 다리 길이를 잰 재단사가 낮은 목소리로 치수를 불러주자 옆에 있던 조수가 수첩에 바로 기록하는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그래?”
헤이든은 손으로 허리 부분을 만져보았다.
“요즘 바빠서 운동을 좀 안 했더니 체중이 2kg 정도 늘었거든.”
눈으로 보기에 크게 변한 부분은 없었지만 역시 몸은 정직한 모양이었다.
“그럼 허리를 살짝 여유롭게 맞추겠습니다.”
헤이든은 머리를 끄덕이며 몇 가지 원하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맞추기 까다로운 부분도 있었지만 재단사는 경험이 풍부한 노인이었다.
특히 부자들의 세세한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것에는 이골이 나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치수를 재는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었을 때쯤 측근인 매클이 노크를 하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럼 일주일 있다가 가봉을 하러 다시 들르겠습니다.”
헤이든이 그러라며 고갯짓을 하자 재단사는 조수와 함께 도구를 챙겨 눈치껏 방을 빠져나갔다.
“무슨 일이야?”
손으로 소맷자락을 만지며 책상 뒤로 가서 앉은 헤이든이 매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매클은 얇은 서류철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미국 해양대기청과 미국 항공우주국 고다드 우주연구소에서 관측 결과가 나왔습니다. 지난달 지구 평균기온이 16.2도로 관측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헤이든은 눈을 반짝이며 서류철을 펼쳐봤다.
“여름이 되면서 유럽과 북미 대륙에서 40도에 육박하는 불볕더위가 시작될 거라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가뭄은 작황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에 곡물 시장에 엄청난 악재였다.
아니나 다를까 매클이 가져온 보고서에는 이상기온의 영향으로 여름 내내 전 지구적으로 폭염과 집중호우가 발생해 곡물 생산에 악영향을 줄 거라는 부정적인 의견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헤이든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곡물 시장 반응은 어때?”
“연구 발표가 나오고 언론에서 이상기후를 경고하는 기사가 쏟아지자 모든 곡물 가격이 바닥을 찍고 급등 중입니다.”
“작황이 감소하는 수준이 아니라 최악의 흉작이 기록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퍼지고 있을 테니 그럴 수밖에.”
시장에 불안감이 번지고 패닉에 빠질수록 수익이 커졌기에 헤이든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걸 보며 매클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해봐.”
“유니콘 그룹이 농업용 펌프와 굴삭기 같은 가뭄 대비 물자를 대량으로 러시아하고 우크라이나에 보냈다고 합니다.”
헤이든이 미간을 찌푸리며 책상 앞에 서 있는 매클을 봤다.
“가뭄 피해를 줄이려고 발버둥을 치는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콜라이프 항구에 있는 곡물 수출 터미널 시설을 크게 증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흥. 그래봤자 헛된 몸부림일 뿐이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카길에서는 뭐라고 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하긴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치는데 겨우 우산 하나 펼치는 꼴이니 그렇겠지.”
재성이 어떻게든 자신을 이겨보려고 발버둥 치는 것 같아 헤이든은 가소로운 기분이 들었다.
“곡물 가격 폭등과 함께 곧 엄청난 지옥을 경험하게 될 테니 그냥 내버려 둬.”
“예.”
모든 일이 착착 계획대로 진행되는 게 매우 만족스러웠다.
당연한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꽤나 기분이 좋아진 헤이든은 몸을 뒤로 기대며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넘겼다.
“제니퍼 의원한테 국무장관 취임 축하 선물은 보냈나?”
“예. 말씀하신 대로 바스키아가 그린 회화 한 점을 보좌관을 통해 전달했습니다.”
“잘했어.”
장 미셸 바스키아는 흔히 검은 피카소로 불리는 미국 국적의 유명 화가였다.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과 쌍벽을 이루며 큰 유명세를 얻었는데 헤로인 중독으로 27살의 어린 나이에 숨을 거뒀다.
원래부터 작품이 비싸게 거래되던 화가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생을 마감하게 되자 희소성이 높아져 작품 가격이 순식간에 몇 배로 뛰어 지금은 작은 판화 하나가 천만 달러를 넘겼다.
이번에 제니퍼 국무장관에게 축하 선물로 건넨 작품은 바스키아의 초기 그림으로, 당장 경매에 내놓으면 이천만 달러는 너끈하게 받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당연히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명백한 뇌물이었다.
매클이 헤이든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공을 들일 필요가 있을까요?”
위로 치켜뜬 헤이든의 시선에 매클은 잠깐 주저했지만 계속 말을 이었다.
“제니퍼 국무장관이 중요한 인물이라 신경 쓰시는 건 알겠습니다. 현재 민주당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실력자이기도 하고요.”
“잘 알고 있군. 근데 왜 물어?”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라출라 대통령의 입김이 더 세지 않습니까. 거기다 재임까지 한다면 적어도 8년은 더 대통령 자리에 있을 텐데, 너무 길게 내다보시는 게 아닌지.”
8년 뒤에도 제니퍼 국무장관이 여전히 지금처럼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자 헤이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백악관의 주인은 라출라 대통령이겠지만 지금 이 정부를 움직이는 건 그가 아니야.”
“……!”
“라출라 대통령이 왜 자신의 라이벌인 제니퍼 의원을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고 생각하나?”
매클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물음에 대답했다.
“민주당 내 각 파벌들을 아울러서 국정을 원활하게 이끌어가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바람을 타고 운 좋게 백악관에 입성했지만 민주당조차 제대로 휘어잡지 못할 만큼 정치적 기반이 약하다는 걸 스스로 내보인 것 아니겠어.”
“그래서 제니퍼 의원을…….”
헤이든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당내 가장 큰 계파를 이끄는 제니퍼 의원한테 손을 내민 거지. 국무장관이라는 큰 선물과 함께 말이야.”
“대통령 스스로 포용력을 보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어느 누가 자신이 가진 권력을 나누고 싶어 하겠어. 더군다나 전 영부인이자 당내 거물인 제니퍼 의원을 라출라 대통령이 끌어안는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제니퍼 의원은 말을 잘 듣는 애완견이 아니라 주인을 집어삼킬지도 모르는 호랑이였기에 매클은 수긍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대통령은 라출라지만 사실상 제니퍼 국무장관하고 권력을 나눈 연립정부나 마찬가지일 거야.”
작게 머리를 끄덕이는 매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영부인 시절에 남편을 제치고 뒤에서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걸 생각하면 라출라 대통령도 허울뿐인 허수아비로 전락할지도 모르지.”
실제로 제니퍼 국무장관은 역대 영부인들 가운데 가장 정치 활동을 활발하게 했었다.
그리고 영부인 시절 남편의 불륜 스캔들이 터졌는데도 이혼하지 않고 용서할 정도로 정치적 야심 역시 아주 컸다.
“허약한 대통령과 앞으로 8년간 행정부 실세가 될 것이 확실한 데다가 뒤를 이어 미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높은 제니퍼 국무장관. 두 사람 가운데 어느 쪽에 베팅을 해야 될 것 같나?”
시선을 받은 매클은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제니퍼 국무장관이 더 실속 있을 것 같군요.”
“바로 그거야.”
헤이든이 거만하게 턱을 들며 말했다.
“알아들었으면 그만 나가봐.”
“예.”
문이 닫히자 헤이든은 한쪽 입술 끝을 끌어 올려 삐딱하게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라출라 대통령을 믿고 자꾸 나대는데 이제 곧 그게 썩은 동아줄이라는 걸 깨닫게 될 거야.”
헤이든이 제니퍼 국무장관을 선택한 건 워싱턴 정가의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은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라출라 대통령이 눈엣가시 같은 재성하고 친분이 깊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기대되는걸.”
자기가 잡았던 줄이 사실은 썩은 끈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그놈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까.
라출라 대통령이 허수아비로 전락하면 덩달아 바닥에 처박힐 재성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