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402
402.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아.
러시아 캄차카 반도에 이어 대만에서도 규모 6.2의 강진이 발생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재작년에 있었던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일명 불의 고리라고 불리는 환태평양조산대의 지진 활동이 크게 활발해진 결과였다.
“회장님. 제일 백화점 박재경 사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노크를 하며 정효정 과장이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계열 분리가 확정되면서 재경은 얼마 전에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했다.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재성은 보고 있던 서류를 덮었다.
“들여보내요.”
잠시 뒤 흰 셔츠와 푸른색 슬랙스를 입은 재경이 손에 작은 클러치를 들고 나타났다.
언제나처럼 잡지에서 막 빠져나온 것처럼 깔끔하면서 세련된 스타일링이었다.
“어서 와.”
재성이 책상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넌 본사 사옥을 새로 지을 계획 없어?”
재경은 가볍게 눈을 흘기는 걸로 인사를 대신하곤 대뜸 그렇게 말했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들어오는데 본사 건물이 참 작구나 싶어서.”
입만 열면 실례되는 소리를 하는 재경은 느긋하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십대 그룹에서도 수위를 다툴 만큼 회사가 커졌는데 아직 강남 15층 빌딩이 본사라니. 솔직히 좀 규모에 비해서 너무 소박하지 않니?”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건물을 통째로 다 쓰는 것도 아니잖아. 듣자 하니 네오픽스인가 거기는 일산에 새 사옥을 크게 짓는다며.”
재경은 보란 듯이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바뀐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하긴 그룹 산하에 있는 다른 계열사는 번쩍거리는 새 건물로 이사 가는데 정작 본사가 더 초라한 건 좀 이상하긴 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고민하던 참이야. 직원들이 늘어나면서 사무 공간이 부족하단 말이 조금씩 나오고 있거든.”
“네 귀에 들릴 정도면 말 다 했네.”
재경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하이힐을 신은 발을 까닥였다.
원래 이런 건 밑에서 버티다 못해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경우가 많으니 재경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돈을 아주 갈퀴로 쓸어 담고 있는 사람이 뭘 꾸물거려. 본사 사옥도 새로 하나 지어버려.”
시원하게 돈 좀 써보라면서 재경이 부추겼다.
“요즘 공공기관들이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기존 부지들이 매물로 쏟아져 나오고 있잖아. 그것들 중에 하나 골라잡으면 되겠네.”
듣고 보니 마침 딱 시기도 좋았다.
“그럴까?”
“그래. 여유 자금이 있을 땐 은행보다 부동산에 묻어두는 게 최고라니까.”
재성은 피식 웃으며 등을 뒤로 기댔다.
“그건 그렇고 할 이야기가 뭔데?”
그러자 재경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너한테 도움을 좀 받았으면 하는 일이 있어.”
“뭔데?”
“우리도 중국에 진출하려는데 네가 그쪽에 연줄이 많으니까 다리를 좀 놔줬으면 해.”
“중국에 백화점을 지으려고?”
재경이 머리를 끄덕였다.
“호텔까지 동시에 투자를 진행할 생각이야. 알다시피 국내는 시장이 포화 상태잖아.”
“그래서 중국을 돌파구로 삼겠다는 거네.”
“맞아.”
이미 레드 오션이 되어버린 국내와 달리 14억이 훌쩍 넘는 엄청난 시장을 가진 중국이 탐나 보이는 건 당연했다.
‘실제로 14억 인구를 보고 많은 기업들이 너도나도 뛰어들었다가 탈탈 털리고 나왔지.’
그래도 중국에서 꽌시의 중요성을 알고 그를 찾아온 걸 보면 상당히 깊이 있게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일단 가장 큰 상업도시인 상해에 먼저 호텔과 백화점을 오픈해서 반응을 본 뒤에 투자를 늘려 나갈 계획이야.”
이야기를 다 들은 재성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아.”
당연히 찬성할 줄 알았던 재경은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왜 안 좋다는 거야?”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중국이 기회의 땅처럼 생각될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이거든.”
“위험하다고?”
재경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작게 머리를 끄덕이곤 재성이 이유를 설명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낙후된 경제를 일으켜 세워야 됐기 때문에 중국 정부 차원에서 많은 지원을 해줬지만 이제는 아니야. 거기다가 가장 큰 장점이었던 인건비 역시 빠르게 상승하는 중이고 말이야.”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재경도 무턱대고 도전하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생산 시설을 돌리는 기업들 기준이지. 내가 하려는 건 서비스업인 호텔과 백화점이잖아. 중국의 소득 수준이 올라가면 오히려 더 좋은 상황인 거 아니야?”
그녀 말대로 중국인들의 소득이 높아져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그만큼 호텔과 백화점 이용객도 늘 테니 사업 여건이 좋아지는 건 맞았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야.”
재성은 깍지를 낀 손으로 턱을 받치며 말했다.
“그런데 누나가 간과하는 점이 있어.”
“뭔데?”
“외국 회사들로부터 기술을 다 빨아들인 중국 정부가 이제 자국 기업들을 우선하기 시작했거든. 그게 바로 문제야.”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재경은 미간을 좁히고 귀를 기울였다.
“누나도 알 텐데? 중국에서 사업을 시작했다가 기술은 물론이고 사업체까지 고스란히 다 빼앗겨서 빈손으로 쫓겨나는 경우가 많다는 걸. 그것도 꽤 빈번하게 말이야.”
“그거야 들어보긴 했지만…….”
“그리고 위험 요소가 한 가지 더 있어.”
재성은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바로 정치야.”
그러자 재경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 국가잖아. 그런데 무슨 정치가 불안하다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야. 정치적인 문제가 기업 활동에 심각한 영향을 주니까 하는 말이지.”
재성은 작년에 센카쿠 열도 분쟁이 벌어졌을 때를 예로 들었다.
“중국 내에서 반일 시위와 불매 운동이 크게 번져서 일본 기업들이 한동안 고생했잖아. 지금도 그 여파가 남아 있고.”
현재도 진행형인 반일 시위와 불매 운동으로 인해 중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었다.
특히 자동차 같은 경우는 매출이 45%나 급감하는 치명타를 입었다.
“더욱 심각한 건 이런 시위와 불매운동이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시작한 게 아니라는 거지. 설령 시작은 그랬을지 몰라도 중국 정부가 개입해서 부추기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잖아.”
재성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바꿔 말하면 우리 기업들도 한국과 중국 사이에 문제가 터졌을 때 똑같은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거지.”
“우린 일본하고 달리 중국하고 부딪칠 일이 없잖아.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해야 될 필요가 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재성은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를 띠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당장 서해에서 중국 어선들이 불법으로 영해를 침범해서 물고기를 다 쓸어가는 바람에 매해 문제가 되고 있잖아.”
해마다 뉴스에 나오는 일이니 재경도 모를 리가 없었다.
말문이 막힌 재경을 향해 재성이 말했다.
“그건 일부분에 불과해. 화젠민 주석이 정권을 잡으면서 처음 한 소리가 바로 중국몽이라고. 과거 화려했던 중국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거지.”
이 부분은 재성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문제라 말투가 더욱 진지해졌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주변 국가들과 마찰이 커질 수밖에 없어.”
그리고 화젠민은 야욕이 가득한 남자였다.
분명 앞으로 세계정세는 중국 때문에 시끄러워질 것이었다.
“네 말은 충분히 알겠어.”
논리적인 이야기에 재경이 수긍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넌 중국에서 사업을 계속 키워 나가고 있잖아.”
왜 너만 되고 나는 안 되냐는 거냐고 묻고 싶은 눈초리였다.
“그래서 나도 만약을 대비해 대책을 세우는 중이야.”
재성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리스크가 큰 중국보다는 차라리 제주도에 투자를 하는 게 어때?”
“거긴 이미 호텔이 있잖아.”
“기존 호텔을 더 크게 확장하라는 말이야.”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재성이 몸을 바로 하고는 이마를 찡그리고 있는 재경이 알아듣게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도 그랬지만 소득이 늘어나면 중국 사람들도 외국 여행을 가려고 하지 않겠어?”
“……그렇겠지.”
“14억이 넘는 중국 인구 가운데 절반, 아니, 10분의 1만 해외를 나간다고 해도 1억이 훌쩍 넘는 숫자야.”
이야기를 하면서도 중국의 인구가 얼마나 많은지 그 역시 새삼 다시 와닿았다.
“그 많은 중국 관광객들 가운데 상당수는 가까운 동남아시아와 한국, 일본으로 여행을 갈 가능성이 클 거야. 그리고 한국에 여행을 온다면 서울과 제주도로 몰리겠지.”
말뜻을 알아차린 재경이 눈에서 이채를 띠며 말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한국으로 들어오는 중국 관광객들을 잡으라는 거네.”
“맞아. 연간 천만 명만 온다고 해도 뿌리고 가는 돈이 어마어마하지 않겠어? 백화점을 운영하고 있으니까 중국 부자들의 씀씀이가 얼마나 큰지 누나가 더 잘 알거야.”
재경이 머리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손이 엄청 큰 건 확실하지.”
한창 버블 경기 때면 몰라도 일본 관광객이 돈이 안 되는 손님이 되어버린 건 오래되었다.
이것저것 구경은 하지만 꼼꼼하게 따지고 확인해서 꼭 필요한 물건만 구입하는 일본 손님과 달리 중국인들은 큰손 그 자체였다.
중국인의 특징은 여러 명이 몰려다니면서 한 명당 서너 개는 기본이고 많으면 수십 개씩 값비싼 물건들을 싹쓸이해 가는 것인데 한번 지나가면 매장이 텅텅 빌 정도였다.
게다가 중국인들은 복대나 가방에 돈다발을 넣어 다니며 바로 결제를 해주니 백화점 입장에선 이보다 더 좋은 손님이 없었다.
‘뭐, 옆에서 보면 메뚜기 떼가 따로 없지만 말이야.’
재경은 관광버스 여러 대에서 한꺼번에 우르르 내린 다음 면세점과 일반 매장을 돌아다니며 상품을 싹쓸이해 가던 광경을 떠올렸다.
매너나 기품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정도였지만 어쨌든 중국 관광객이 한번 왔다 가면 압도적인 매출이 남았다.
“국내 시장이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려운 레드 오션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
“중국 관광객이 들어올 걸 생각한다면 곧 큰 기회가 열릴 거야. 그렇다면 굳이 리스크가 큰 중국에 진출하는 것보다 홈그라운드에서 기회를 움켜잡는 것이 낫지 않겠어.”
잠시 가만히 재성의 이야기를 곱씹어보던 재경이 입을 뗐다.
“네 말도 일리가 있네.”
“어차피 제주도 호텔은 오래돼서 한번 리모델링을 할 때가 됐잖아. 겸사겸사 면세점과 같이 시설을 확충해 두면 분명히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야.”
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말을 덧붙였다.
“생각난 김에 나도 제주도에 땅을 사서 그룹 연수원이나 하나 지어야겠네.”
“연수원을?”
“그래. 은행에 돈을 넣어두는 것보다 부동산에 투자하는 게 낫다며. 중국 관광객이 몰리면 자연스럽게 땅값도 뛸 테니까 미리 사두려는 거지. 겸사겸사 직원 복지용으로도 쓰고 말이야.”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재경을 봤다.
“제일 호텔이 관리 위탁을 받아주면 더 좋을 거고 말이야.”
“방금 한 말 기억해 둘 테니까. 나중에 무르기 없기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바로 말을 받는 재경의 태도에 재성이 피식 웃었다.
“뭐야. 계열 분리하면 이제 자기 거라고 벌써 매출을 챙기는 거야?”
“난 너처럼 한 해에 수조 원씩 이익을 남기는 회사 오너가 아니거든. 이런 걸 놓칠 순 없단 말이지.”
재경은 턱을 치켜들며 대꾸했다.
“어쨌든 충고는 잘 들었어. 일단 회사 임원들하고 다시 논의해 볼게.”
“그래. 잘 생각해 보고 판단 내려. 결국 마지막 결정은 누나가 하는 거니까.”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줬으니 어느 쪽으로 결정을 내릴지는 재경의 몫이었다.
‘내 회사도 아닌데 더 간섭하는 건 아무리 친남매 사이라도 오지랖이지.’
그러면서 아까 재경이 말한 대로 이제 슬슬 높아진 위상에 맞는 새 그룹 사옥을 하나 지을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때쯤 삼성동에 있는 한전 본사 부지 매각이 이루어졌던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재경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내 말 듣고 있어?”
“아, 미안. 뭐라고 했는데.”
“너 가끔씩 사람 앞에 두고 엉뚱한 생각 하더라.”
재경은 눈을 흘기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조금 있으면 내 생일이잖아. 알지?”
“그랬나?”
이걸 죽일까 말까 하는 표정으로 노려본 재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으이구, 내가 뭘 바래. 아무튼 생일 때 지인들을 불러서 파티를 열 생각이거든. 그래서 말인데 네 요트 좀 빌려줘.”
안 그래도 화려하게 생긴 미인이 거만하게 손가락을 까딱이면서 말하니 꼭 일진에게 삥 뜯기는 기분 같았다.
“내 요트?”
“그래. 아영이 걔가 얼마 전에 호텔 연회장에서 생일 파티를 했거든. 하필이면 생일도 비슷한 시기라 빡친다니까.”
재경은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런데 똑같이 호텔을 빌려서 하면 모양새가 빠지잖아.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참에 네 요트가 생각나지 뭐야.”
“아니, 그걸 갑자기 말하면…….”
“엄청나게 화려한 선상 파티를 열어서 아영이 고 계집에 콧대를 꺾어주는 거지. 샴페인 타워랑 케이크에 잘 나가는 DJ까지 불러 모으려면 할 일이 많아.”
재경은 손가락을 일일이 꼽으며 어휴 바쁘다 바빠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사성 그룹 외동딸인 손아영은 재경과 오랜 라이벌 관계라 저렇게 의식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둘 다 비슷한 재벌가에다 나이도 똑같고 미모 또한 출중해서 어릴 때부터 많이 비교됐다.
“멋있는 계획이긴 한데 난 빌려준다고 허락한 적 없거든.”
“뭐야. 그래서 안 빌려주겠다고?”
“솔직히 맨입으로 가져가기엔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좋아. 대여료 줄게.”
재경은 선심 쓰듯 가볍게 대꾸했다.
“얼마나?”
“오늘 점심 약속 따로 잡은 거 없지? 밥 사주면 되잖아.”
“와…… 양심 어디 갔어?”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요트 하루 운용비가 얼만데 밥값으로 퉁 치려고 해?”
“아, 그럼 생일 선물 대신 요트 빌려주는 걸로 하자. 내가 미리 받았다 칠게.”
“진짜 말이 안 통한다니까.”
재성은 머리를 절레 흔들었다.
“휴, 점심 비싼 걸로 먹을 거니까 각오해.”
“역시 우리 동생뿐이라니까.”
꺄악 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안아주려고 하자 재성이 기겁하며 떨어졌다.
“저리 가! 떨어져!”
재경은 질색하는 재성의 모습이 오히려 재밌는지 깔깔 웃어댔다.
“어쨌든 약속한 거다? 무르기 없기!”
“알았다니까. 밥이나 먹으러 가자.”
재성은 또 재경이 끌어안을까 봐 한껏 경계하며 옷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