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440
440. 산이 높았던 만큼 골도 깊을 거예요.
2014년 2월 28일.
아침이 되자 안병주 과장은 평소대로 출근 준비를 끝내고 현관에서 구두를 신었다.
“잠깐만!”
“왜?”
집을 나서려던 안병주 과장을 나원정이 불러 세웠다.
“조심해서 다녀와~!”
아내가 밝은 얼굴로 인사하며 볼에 쪽 소리를 내고 키스했다.
“신혼부부도 아닌데 뭘 이런 걸 해.”
“뭐 어때.”
안병주 과장은 쑥스러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썩 싫진 않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다녀올게.”
“응. 저녁에 자기가 좋아하는 냉이된장국 해놓을 거니까. 바로 집에 와야 돼.”
“알았어.”
안병주 과장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원래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며칠 전부턴 마치 다시 신혼부부로 돌아간 것처럼 깨가 쏟아졌다.
이유는 바로 안병주 과장이 비트코인으로 대박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환전해서 그의 계좌에 입금된 수익금은 무려 9억 3천만 원.
통장에 찍힌 잔액을 보여줬을 때 아내인 나원정이 지었던 놀란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부부는 함께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이사 갈 집을 물색했다.
그리고 마침내 강남에 있는 34평 아파트를 한 채 계약했다.
햇볕이 잘 들고 주변엔 산책을 할 수 있는 공원이 있으며 학군도 좋아서 오랫동안 자식을 키우면서 살기에 딱 적당한 자리였다.
계약서를 쓰고 나왔을 때 나원정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며 눈물까지 흘렸었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지만 없는 것보단 돈이 있는 게 삶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고 안병주 과장은 생각했다.
실제로 목돈이 생긴 이후의 생활은 그 전보다 더욱 활기차고 풍족해졌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자신과 아내만 해도 너무 행복하고 즐겁지 않은가.
아파트를 나온 안병주는 한참을 걸어가서 지하철을 탔다.
‘다음엔 차를 한 대 뽑을까.’
자리가 없어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으니 자연스레 든 생각이었다.
‘외제차는 좀 그렇고 국내 브랜드 중에 적당한 걸 하나 고르면 될 것 같은데.’
집과 자동차를 합하면 9억이란 돈을 한꺼번에 거의 다 써버리는 셈이 되지만 꼭 필요한 소비니까 괜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 좋은 상상을 하던 그는 회사까지 도착하는 동안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핸드폰으로 포털 사이트 뉴스 페이지를 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스크롤을 내리는데 무심코 국제란에 뜬 속보를 발견한 안병주가 눈을 크게 떴다.
[세계 최대 비트코인 거래소 마운트곡스 해킹사고 발생!] [마운트곡스 거래 처리 시스템 해킹으로 85만 개가 넘는 비트코인을 도난당했다고 발표. 사고 피해액만 8천억이 넘을 것으로 예상.]황급히 기사를 확인한 안병주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불과 며칠 전까지 그가 비트코인을 거래했던 곳이 바로 마운트곡스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 비트코인 거래의 70%가 이루어질 정도로 유명하고 규모가 큰 곳이었으니 당연히 믿음을 가지고 코인을 맡겨뒀었다.
그런데 해킹이라니……. 그것도 85만 개나 되는 비트코인이 털렸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비트코인을 팔지 않고 계속 들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하자 가슴이 철렁하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넋 나간 얼굴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으니 누군가 그를 툭 건드렸다.
“괜찮으세요?”
멍하니 서 있는 게 꼭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어어, 예. 괜찮습니다.”
안병주는 황급히 머리를 숙인 뒤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벼랑 끄트머리에 서 있다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상황에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욕심 안 부리길 잘했어.’
만약 하루만 더, 하는 마음에 결정을 내리는 게 늦었다면 지금쯤 생지옥을 경험하고 있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 * *
재성은 넓은 회장실 소파에 앉아 정기석 하이닉스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니 측하고 대화를 해보니 어땠어요?”
시선을 받은 정기석 사장이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먼저 제안해 온 만큼 매각에 상당히 적극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네요.”
“맞습니다.”
정기석 사장이 말을 계속 이었다.
“그런데 요구하는 조건이 녹록지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이 뭔지 자세히 이야기해 봐요.”
“우선 나가사키 공장을 비롯한 반도체 개발과 생산 인력에 대한 100% 고용 보장입니다.”
“그거야 우리도 숙련된 인력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죠.”
“둘째로 자사 모바일 기기에 들어가는 이미지 센서 납품 보장입니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재성이 피식 웃었다.
“반도체 사업부를 매각하고 나서 부품 수급에 차질이 생기거나 우리가 납품가를 올려 버리면 곤란하니까. 안전장치를 두려는 거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당연한 조치였기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큰 납품처를 확보해 두고 있으면 우리에게도 이득이니까 그렇게 해요. 단 납품 가격과 물량은 2년 단위로 협상할 수 있게 해두고.”
재성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니의 하청업체가 되어 호구 노릇을 할 생각은 절대 없으니까.”
“저도 그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기석 사장은 차분히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조건입니다만. 저쪽에서 요구하는 인수 금액이 너무 비쌉니다.”
“얼마죠?”
“25억 달러를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재성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진짜 그렇게 말했단 말이에요?”
“예.”
25억 달러면 한화로 약 3조 원이 넘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소니 반도체 사업부는 세계 최초로 실리콘관통전극(TSV) 기술을 적용한 3D 적층 CIS를 상용화시켰을 만큼 뛰어난 기술력과 노하우를 보유했다.
거기다가 미래 성장 가능성이 큰 이미지 센서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40.3%나 됐기에 인수 가격이 싸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본사와 하이닉스에서 면밀한 검토 끝에 도출해 낸 인수 가격은 최대 2조 원이었다.
25억 달러라면 예상가를 훌쩍 뛰어 넘는 액수였다.
“우리가 이미지 센서에 관심이 많은 걸 알고 이번에 제대로 한몫 챙길 속셈인 것 같네요.”
재성은 비웃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앞으로 이미지 센서 시장의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건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만 25억 달러는 너무 비싼 것 같습니다. 그 돈이면 최신 공정을 적용한 D램 공장 두 개는 너끈히 지을 수 있는 액수인데요.”
정기석 사장은 재성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25억이라는 얼토당토않은 금액을 듣고도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침착한 모습이었다.
“차라리 시간이 조금 걸려도 이 돈으로 저희가 자체 개발을 하는 건 어떨까요?”
재성이 정기석 사장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나 역시 비싼 가격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하이닉스가 가진 기술력이라면 수년 안에 소니 제품 못지않은 이미지 센서를 개발해 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럼…….”
“하지만 그렇게 이미지 센서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이미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글로벌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보하고 매출을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일 거예요.”
“…….”
재성의 지적대로 모든 반도체 시장이 다 그렇듯 이미지 센서 역시 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국내에서도 반도체 라이벌인 사성전자가 이미지 센서를 독자 개발해 시장에 뛰어든 상태였다.
“이런 각축전 속에서 후발주자가 선두 업체를 따라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닐 거예요. 물론 전력을 기울여 노력한다면 성과를 이룰 수 있겠죠.”
정기석 사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단번에 이미지 센서 시장 1위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쉬운 길을 두고 굳이 가시밭길을 갈 이유는 없지 않겠어요?”
“…….”
“무엇보다 스마트폰 확산과 더불어서 이미지 센서 시장이 폭발하는 지금, 시장을 선점하지 못한다면 나중에는 따라가는 데 몇 배의 노력과 돈이 필요할 거예요.”
이야기를 들으며 정기석 사장은 조금씩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소니가 내부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반도체 사업부를 매각하려는 것이지 사정이 조금이라도 나았더라면 절대 내놓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우린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돼요.”
“저도 인수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정기석 사장은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저쪽에서 너무 터무니없는 금액을 부르니 조금 꺼려지는 겁니다.”
그러자 재성은 웃으면서 정기석 사장을 달랬다.
“당장은 비싸게 느껴질지 몰라도 앞으로 커질 시장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가격이에요. 독자 개발을 선택했을 때 들어갈 연구비와 설비 비용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득일걸요.”
재성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깜짝 놀랄 말을 내뱉었다.
“소니 측에 30억 달러를 준다고 해요.”
“네?”
정기석 사장은 말도 안 된다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
가격을 깎아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5억 달러나 더 얹어주겠다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었다.
“회장님!”
“대신 소니가 보유한 이미지 센서 관련 특허를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넘기라고 해요. 그게 제일 중요한 조건이에요.”
이미지 센서 기술을 온전히 다 가져오는 것과 동시에 나중에라도 소니가 다시 시장에 진출하는 걸 완전히 막으려는 포석이었다.
그제야 재성의 의도를 알아차린 정기석 사장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특허라……. 그렇군요.”
재성은 정기석 사장과 함께 앞으로 인수 협상을 어떻게 끌어나갈지 오랫동안 논의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정기석 사장이 머리를 숙이고 회장실을 나갔다.
비서실 직원이 들어와 테이블 위의 찻잔을 치우는 동안 재성은 소파에 그대로 앉아 생각했다.
머릿속에서 정기석 사장과 방금 나눈 대화가 둥둥 떠다녔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회장님. 잠시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재성은 빈 소파를 턱으로 가리켰다.
“앉아요.”
권혁재 실장이 왼편 소파에 앉자 재성이 먼저 물음을 던졌다.
“무슨 일인데요?”
“방금 일본에서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마운트곡스가 사이트를 폐쇄하고 법원에 파산 신청을 냈다고 합니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될 걸 알고 있던 재성은 차분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그렇게 됐네요. 도난당한 비트코인이 몇 개나 된다고 했죠?”
“약 85만 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75만 개가 회원이 맡겨둔 겁니다.”
“어림잡아도 1조 원 가까운 돈을 잃었으니 수습이 불가능하겠네요.”
“그럴 겁니다. 거기다가 해킹 소식에 비트코인 가격도 급락해 현재 개당 천 달러대가 무너졌습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1,500달러를 오르내렸으니 반나절 만에 무려 3분의 1이 날아간 거였다.
“비트코인이 인기를 끈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보안인데 그게 깨져 버렸으니 투매가 쏟아질 수밖에 없겠죠.”
“맞는 말씀입니다.”
“산이 높았던 만큼 골도 깊을 거예요.”
권혁재 실장 역시 폭락세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기에 수긍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상황을 계속 주시하면서 200달러 밑으로 떨어지면 나한테 보고하도록 해요.”
“……!”
눈을 크게 뜨며 권혁재 실장이 말했다.
“비트코인이 200달러대까지 추락할 거라고 예상하시는 겁니까?”
“처음 비트코인이 나왔을 때 가치는 1센트도 안 됐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 밑으로 더 떨어져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겠어요.”
“……그렇군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권혁재 실장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걸 보며 재성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참. 권 실장이 가지고 있던 비트코인은 늦지 않게 다 팔았겠죠?”
“예.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난달에 모두 매도했습니다.”
“잘했어요. 그럼 이제 권 실장도 백만장자가 됐겠네요.”
“다 회장님 덕분입니다.”
재성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큰돈을 벌었다고 갑자기 사표를 쓰고 회사를 나가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쫓아내지만 않으신다면 오래도록 회장님을 곁에서 모실 겁니다.”
“하하하. 빈말이라도 든든한 말이네요.”
작년에 재성한테 비트코인 천 개를 받았던 권혁재 실장은 이번에 그걸 팔아 15억이 훌쩍 넘어가는 목돈을 거머쥘 수 있었다.
충성을 받으려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 된다는 평소 지론에 따라 측근인 권혁재 실장이 한몫 챙길 수 있도록 해준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를 바라보는 권혁재 실장의 눈빛에 존경심이 듬뿍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