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494
494. 지금까지 한 번도 베팅에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텍사스주 댈러스 포트워스 국제공항.
매일 745편이 넘는 항공기가 오가는 허브공항답게 수시로 크고 작은 여객기들이 활주로에서 이착륙했다.
여러 대의 항공기들이 모여 있는 넓은 주기장 한쪽에 대형 전용기 두 대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바로 재성이 얼마 전 새로 인수한 두 번째 전용기인 보잉 747기와 애런 아서가 타고 다니는 보잉 757-200이었다.
꼬리날개에 이니셜만 박혀 있는 재성의 전용기와 달리 애런 아서의 757기는 성격대로 화려함 그 자체였다.
흰색과 검은색 투톤에 붉은색 굵은 선을 포인트로 가운데 넣어 동체가 도색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체 조종석 쪽에 아서라는 영문 이름을 크게 적어 넣고 꼬리 날개에도 “A”라는 글자를 그려 넣어놨다.
누가 봐도 애런 아서의 전용기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재성은 넓은 베이지색 시트에 앉아 둥근 방풍창 너머로 보이는 애런 아서의 전용기에 시선을 주었다.
“저런 걸 보면 타고난 관종이라니까. 더불어 자기를 잘 포장할 줄도 알고 말이야.”
세상에 관심받기를 좋아하는 인간은 수도 없이 많지만 저런 식으로 스스로를 내보이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일반인에겐 애런 아서가 그저 돈 많고 화제의 중심이 되길 원하는 졸부라는 이미지로 비쳐지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모든 게 계산된 행동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애런 아서의 목적은 단순히 대중에게 노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디어를 이용해서 애런 아서라는 사람 자체를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고 있었다.
실제로 애런 아서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네이밍 스폰서를 해서 상당한 수익을 거두고 있었다.
대표적인 게 바로 미국 주요 도시마다 아서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빌딩들이다.
이것들은 애런 아서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름만 빌려주는 형태였으며 그 대가로 매년 일정액의 수익을 챙겼다.
본인은 아무 일도 안 하는데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돈이 굴러들어 오는 거다.
한국에도 모 건설 회사가 애런 아서와 네이밍 스폰서십을 체결해서 지은 건물이 여러 군데 있을 정도였다.
돌발적이고 공격적인 언행들 때문에 인터넷상에선 자주 조롱을 당하지만 결코 만만히 볼 인물은 아니었다.
“단순히 운만 좋아서는 백악관의 주인이 될 수 없지.”
아직 공화당 경선 초반이라 유력 후보들에 밀려 지지율이 미약하고 아무도 대통령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지금이 애런 아서에게 목줄을 걸어둘 기회였다.
“아무리 큰 후원금을 줘도 이미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제니퍼한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할 거야.”
하지만 애런 아서는 달랐다.
개인적인 명성뿐만 아니라 워싱턴 포스트라는 유력 언론을 소유한 재성이 지지해 준다면 들러리 취급을 받는 애런 아서한테는 아주 큰 힘이 될 터였다.
남들이 보기엔 무모한 베팅 같아도 이미 대선 결과를 알고 있는 재성에게는 우승이 보장된 경주마에게 돈을 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애런 아서 씨가 도착했습니다.”
권혁재 실장이 허리를 숙여 말했다.
재성은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침 애런 아서가 딸과 함께 걸어오는 중이었다.
럭비 선수처럼 건장한 덩치를 자랑하는 애런 아서와 달리 엘레노어 아서는 날씬한 금발 미인이었다.
“경선 유세로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 회장님이 보자는데 당연히 시간을 내야죠.”
애런 아서는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특유의 제스처를 취하며 재성과 악수했다.
“이쪽은 내가 가장 아끼는 장녀, 엘레노어입니다. 똑똑한 아이라 이번 선거에서 내 참모 역할도 겸하고 있지요.”
엘레노어가 파란 눈동자에 호기심을 가득 담고 재성을 쳐다보았다.
친어머니가 프로 스키 선수 출신이라더니 그녀 역시 180이 넘는 큰 키에 날씬하면서도 탄탄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직접 뵙는 건 처음이군요.”
“저도 반갑습니다.”
“그냥 엘레노어라고 불러주세요.”
엘레노어는 처음부터 재성에게 호감을 보였다.
아마 재성의 명성과 유니콘 그룹이란 간판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상대방이 그를 잘 봐준다면 좋은 일이었다.
“전부터 꼭 만나 뵙고 싶었어요. 소문이 자자한 골드원의 소유주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거든요.”
“그럼 소원을 이루셨군요.”
재성은 살짝 미소 짓고서 엘레노어의 손을 잡았다.
“저야말로 이런 미녀분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신사적인 태도에 엘레노어는 후후, 하고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여자를 기분 좋게 할 줄 아는 분이로군요.”
두 사람 사이에 꽤 좋은 분위기가 흐르자 아서가 그 틈을 타 끼어들었다.
“우리 딸은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머리도 좋답니다. 펜실베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을 정도니까요.”
“거긴 이름 높은 명문 아닙니까. 대단하군요.”
재성이 새삼 엘레노어를 다시 쳐다보면서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미인인데 능력까지 좋다니. 신은 참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그렇죠? 하하하!”
우리 집안의 자랑이라며 애런 아서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은 별 관심도 없는 정보지만 재성이 필요 이상으로 엘레노어를 신경 쓰며 띄워주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애런 아서가 대통령이 된 이후엔 큰 언니뻘인 새어머니를 대신해 엘레노어가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하면서 국정 운영에 큰 관여를 하기 때문이었다.
‘애런 아서가 당선되자 일본 정부에서 제일 먼저 접촉해 연결 고리를 만든 사람이 바로 엘레노어였지. 정권 실세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던 거야.’
이런 걸 보면 일본 정부가 어디에 붙어야 되는지 파악하는 눈치 하나는 정말 빨랐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인사를 나눈 세 사람은 한쪽에 있는 소파로 자리를 옮겨 서로 마주 보며 앉았다.
“그건 그렇고, 솔직히 조금 의외였습니다. 설마 박 회장님 쪽에서 먼저 연락이 올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러셨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대화했을 때도 애런 아서가 일방적으로 재성에게 친근감을 표하는 모양새였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래서,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게 뭡니까?”
애런 아서는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빙빙 둘러가는 화법 따윈 모르는 성격이었다.
일부에선 화통해서 좋다고 하지만, 다른 쪽에선 교양 없다며 싫어하는 이유기도 했다.
재성은 애런 아서의 스타일을 잘 알았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받았다.
“다음 유세지로 이동하려면 바쁘실 테니 바로 용건을 말씀드리죠.”
다음 순간 재성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이번 대선에서 아서 씨를 지원해 드리려고 합니다.”
불쑥 내뱉은 말에 두 사람 모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연락을 받았을 때 조금 기대를 하긴 했지만 정말로 재성의 입에서 그를 지지하겠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중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아서 쪽이었다.
역시 노련한 사업가이자 협상가로서 쌓아온 세월이 헛된 건 아니었다는 증거다.
“박 회장님처럼 명성이 높은 분이 절 지지해 준다면 저야 고마운 일이지요.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군요.”
하지만 뒤이은 재성의 말에 애런 아서가 기껏 부리던 여유도 바로 깨져 버렸다.
“경선에서 열세를 만회하려면 자금이 필요하실 테죠.”
“그거야 말할 것도 없…….”
“우선 골드원을 통해 1억 달러 규모의 슈퍼팩을 만들어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1억 달러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옆에 있던 엘레노어 역시 깜짝 놀라 재성을 쳐다보았다.
재성이 자금을 지원해 준다고 해도 어차피 만약을 대비한 보험일 테니 많아봤자 백만 달러 내외일 거라고 예상하던 터다.
그런데 무려 1억 달러라니!
두 사람이 놀라는 게 당연했다.
애런 아서가 개인 자산만 41억 달러가 넘는 부동산 재벌이라고 해도 1억 달러는 상당히 큰돈이었다.
더군다나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한 평판 탓에 무슨 돈만 많은 코미디언이 대통령 후보로 나오냐는 비아냥을 받고 있어 후원금 역시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자신의 계좌에서 1,080만 달러를 인출해 선거 캠페인 자금으로 쓰고 있었다.
그리고 낮은 지지율에 선거 캠프에서도 본선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경선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지도 회의적인 상황이었다.
이런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1억 달러나 되는 후원금을 내놓겠다니.
단순한 보험 차원이라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재성이 애런 아서를 진심으로 밀어주겠다는 뜻이다.
“진심이신가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엘레노어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재성은 무릎 위에 깍지를 낀 손을 올리고 엘레노어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를 닮아 푸른 눈동자에 의심스럽다는 눈빛이 깃들어 있었다.
“후원을 해주신다니 감사하지만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되네요.”
“뭐가 말이죠?”
“박 회장님 정도면 어느 캠프에서도 환영받을 텐데요. 그런데 굳이 저희 아버지를 선택하신 게 의문스러워서요.”
엘레노어는 재성의 표정을 살피며 신중하게 대답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저희 아버지는 공화당 경선 후보들 가운데 제일 지지율이 낮아요. 앞으로 전망도 밝다고 할 수 없죠. 그런데도 저희 아버지를 진심으로 밀어주시려고 한다는 건가요?”
옆에서 애런 아서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입술만 씰룩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본인이 선택된 것에 의문을 품고 있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의외로 애런 아서는 상황 판단을 잘하는 인간이다.
당연히 재성이 아무 의도도 없이 가능성이 낮은 패에 돈을 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당첨 확률이 낮다고 해서 아무런 장점이 없는 건 아니죠. 불리한 상황을 뚫고 승리를 거둘 수만 있다면 배당금도 몇 배로 커지니까요.”
“단순히 그것 때문에?”
엘레노어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도박을 하고 싶으면 라스베가스 카지노에 가는 게 더 빠를 텐데요.”
쉽게 물러서지 않는 엘레노어에게 재성이 문득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월가에서 날 부르는 별명이 뭔지 압니까.”
“미다스의 손이죠. 만지면 뭐든지 황금으로 만드는 손을 가진 사나이.”
“맞아요.”
재성은 정답을 맞춘 학생에게 칭찬이라도 하는 것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스스로 금칠을 하는 것 같아서 조금 쑥스럽긴 하지만, 지금까지 난 한 번도 베팅에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옆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리자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애런 아서의 얼굴이 보였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자신합니다.”
“저희 아버지가 대통령에 당선될 거라는 말씀이세요?”
“그렇죠.”
재성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게 아니라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 말에 아서가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역시 박 회장님이로군요! 무모한 도전이라느니, 관심을 끌기 위한 개수작이라고 하면서 비아냥대는 머저리들하고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안목이라니까요.”
최고의 베팅을 한 거라면서 아서가 너스레를 떨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재성이라는 최고의 돈줄을 잡았으니 횡재를 한 듯한 기분일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거, 모처럼 도움을 받았으니 꼭 보답을 해야겠는데요. 만약 당선돼서 백악관에 입성하게 된다면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 순간 재성이 눈을 빛냈다.
물고기가 확실히 미끼를 물었음을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딱히 바라는 게 있어서 하는 일은 아닙니다.”
재성은 짐짓 겸손한 척하며 얌전한 태도를 보였다.
“그저 앞으로 아서 씨와는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합니다. 서로 돕고 도울 수 있는 그런 사이 말이죠.”
“친구? 그거 좋군요. 하하!”
친구라는 단어 아래에 숨겨진 뜻을 눈치챘는지 아서 또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대화를 모두 끝낸 애런 아서 부녀가 수행원들과 함께 전용기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시트에 앉아 방풍창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성은 고개를 돌려 권혁재 실장을 불렀다.
“권 실장.”
“예. 말씀하십시오.”
“데이비드한테 연락해서 이야기해 둔 대로 애런 아서한테 1억 달러를 후원하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권혁재 실장이 물러나자 재성은 푹신한 시트에 몸을 기대고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확실한 패라고 해도 바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미리 대비를 해둬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