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Life White Paper RAW novel - Chapter 75
75. 첫 삽이라도 제대로 뜨면 다행일 테니까 걱정하지 마.
대형 아울렛을 그가 먼저 제안한 건 맞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사업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면 어떠냐는 제안에 가까웠다.
그런데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재경이 갑자기 찾아와 대형 아울렛 이야기를 꺼내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사뭇 진지한 재경의 표정에 뭔가 일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재성은 자세를 바로 하고는 차분히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뭐가.”
“내가 제안한 걸 그리 탐탁지 않아 했잖아.”
“너무 갑작스런 이야기라 조금 고민했던 것뿐이야.”
“아니잖아. 그 정도 눈치도 없는 줄 알아.”
“…….”
그러자 재경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사성 백화점이 파주에 대형 아울렛을 만들 예정이야.”
뜻밖의 소식에 재성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사성 백화점은 한참 뒤에나 아울렛 사업에 진출할 텐데?
“그게 정말이야?”
깜짝 놀라 묻자 재경이 고운 이마를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래. 내일이나 모레쯤에 공식 발표가 나올 거야.”
공식 발표도 나오지 않은 걸 어떻게 알고 있냐는 바보 같은 질문은 안 했다.
치열하게 1, 2위를 다투는 유통업계의 영원한 맞수인 만큼 항상 상대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회사 차원에서 공식 발표를 할 정도면 사업이 꽤 진행됐다는 이야기네?”
“파주에다가 5만 평 가까이 되는 땅을 확보해 놨대.”
재경은 하이힐을 신은 발끝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손아영 그 계집애가 웬일로 잠잠하게 있나 했지. 설마 뒤에서 그런 일을 꾸미고 있을 줄이야. 아무튼 잔머리는 잘 돌아간다니까.”
이야기를 들은 재성은 이제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나 큰 땅을 사들였다면 규모도 보통은 아닐 것 같은데.”
“총 4개 동에 영업 면적이 3만5428㎡나 된다 하더라고. 거기다가 수천 대를 동시에 주차시킬 수 있는 주차장도 만들 계획이고 말이야.”
“그 정도면 국내 최대 규모라고 할 수 있겠네.”
“면세점 싸움에서 나한테 안 될 것 같으니까. 방향을 바꿔서 아울렛에다가 올인하려는 게 틀림없어.”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면세점 못지않게 성장 가능성이 큰 사업이었기에 결코 나쁜 판단이 아니었다.
‘역시 재계 1위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건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재성은 누나인 재경을 쳐다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사성 백화점에서 아울렛 사업을 한다니까 맞불을 놓고 싶은 거야, 아님 내가 한 제안이 충분히 사업성이 있다 판단하고 선수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 거야?”
단순히 경쟁심에 이러는 거라면 굳이 두 여자의 자존심 싸움에 끼어들고 싶진 않았다.
재성의 말뜻을 바로 알아차린 재경은 코웃음을 쳤다.
“날 뭘로 보는 거야. 아무리 내가 손아영을 싫어한다고 해도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 바보 같아?”
재경은 자존심 상한다는 듯이 그를 흘겨보았다.
“단순히 아울렛만 덜렁 지어놓는 것보다 네가 한 제안대로 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더라고.”
화려한 외모에 가려져서 그렇지 재경도 사실 머리가 상당히 잘 돌아가고 사업 감각 역시 뛰어난 축이었다.
사적인 감정이 엮여도 철저하고 이득을 따져서 움직이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사성 백화점에서 먼저 선수를 치려고 한다니까 넋 놓고 가만있을 순 없잖아.”
그러면서 재경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물론 아영이가 잘되는 꼴을 보기 싫다는 이유도 있긴 해.”
꽤나 솔직한 태도에 재성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역시 누나다워.”
“왠지 욕하는 걸로 들려.”
재수 없다는 것처럼 재경이 손가락질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어.”
“그래서. 어쩔 건데?”
재경이 다그치듯 묻자 그는 몸을 뒤로 기대고는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신경 쓸 필요 없어.”
기대한 것과 다른 대답에 잘 정리된 재경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이대로 그냥 있자는 거야?”
“맞아. 선수를 빼앗긴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획을 무리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잖아.”
그러자 재경이 잠시 그를 뚫어질 듯 쳐다보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사업을 먼저 선점하는 게 얼마나 이득인지 모르는 건 아닐 테고.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사성에서 추진하는 아울렛 사업은 첫 삽이라도 제대로 뜨면 다행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재경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면서 제대로 설명해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교외라고 해도 이 정도 사업을 벌이려면 투자금이 적지 않겠지?”
“그렇겠지.”
대형 복합 아울렛 단지를 구상하면서 대략적으로 계산한 투자금이 3~4천억 원 내외였다.
그러니 파주에 만들어질 사성 아울렛 역시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공사비가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현금 회전이 빠른 백화점이라고 해도 한 번에 그만한 거액을 조달하는 건 어려울 테니까.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겠지.”
“당연한 거 아냐. 사업을 자기 돈으로 하는 멍청이가 어디 있어.”
재경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뻔한 말을 계속 빙빙 돌려가며 하는 것에 살짝 짜증이 난 듯했다.
날카로운 눈빛을 받으면서도 재성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는 여유롭게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금융권에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다면 어떻게 되겠어?”
“……?”
“자연스럽게 공사는 중단되고 아울렛 개장은 무기한 연기될 거야.”
잠시 말이 없던 재경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IMF 같은 경제 위기가 오기라도 한다는 말이야?”
“맞아. 직접 가해지는 충격은 그때보다 약할지 몰라도 파급력은 훨씬 더 세고 오래갈 거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치부하려던 재경은 너무나도 진지한 재성의 표정을 보고 말을 멈췄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미국에서 터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점점 커져가는 건 알고 있지?”
요즘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였기에 그녀 역시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수긍이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아예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미국 내에서 일어난 부동산 버블 붕괴일 뿐인데. 충격은 제한적이지 않겠어?”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월가 투자은행들과 미국 정부마저 여전히 통제 가능한 상황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니 재경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
“어차피 지금 당장 서둘러 사업을 추진한다고 해도 사성 백화점을 따라잡기는 어렵잖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재경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잖아. 사성 백화점이 어떻게 하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우리는 우리 계획대로 하자고.”
“참 말은 잘한다.”
그게 마음대로 되면 산에 들어가서 도나 닦고 있겠지.
재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건방진 동생의 얼굴을 쳐다봤다.
“누나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하니까. 구체적인 계획서를 곧 만들어서 보내줄게.”
“알았어.”
재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왔던 때처럼 찬바람을 쌩 일으키며 인사도 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또각또각 멀어지는 하이힐 소리를 들으며 재성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뒤로 몸을 기댄 채 매끈하게 면도한 턱을 한쪽 손으로 매만지면서 생각했다.
“면세점 사업에 개입한 나비효과가 이렇게 나타날 줄은 몰랐네.”
자칫 사성 백화점에 아울렛 사업 주도권을 빼앗길 뻔했다.
그는 앞일을 안다고 방심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절실히 느꼈다.
손아영이라.
미모만큼이나 야심 넘치고 능력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재경이 그녀를 싫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나이도 동갑인 데다 서로 거울을 보는 것처럼 똑 닮았으니 의식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다.
아마 저쪽도 만만찮게 재경을 거슬려 하지 않을까.
“본의 아니게 또 한 번 훼방을 놓게 될 것 같군.”
여자한테 미움 받긴 싫은데.
재성은 고개를 설레 흔들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짧은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되었다.
일기예보에서는 서울에 첫눈이 언제 내릴까 하는 추측들을 하면서 예년보다 훨씬 추운 겨울을 예고하고 있었다.
조금 늦게 집에 돌아온 재성은 이미 어둑해진 정원을 가로질러 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어…….”
정원 등불 아래에 박경수 회장이 혼자 앉아 있었다.
하얀 테이블 위에는 다 식은 머그컵이 하나 올려져 있었고, 두툼한 가디건으로 몸을 감싼 박경수 회장은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혹시나 방해될까 싶어 그냥 지나치려던 재성은 중간에 생각을 바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추운데 뭐 하세요?”
그러자 박경수 회장이 놀란 기색도 없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곤 담담히 대답했다.
“소화나 시킬 겸 나와 있다.”
“그러다 감기 드실 텐데.”
“그 정도로 약골은 아니야.”
요즘 박경수 회장은 부쩍 생각이 많아 보였다.
얼마 전 둘째인 박재민이 혼인 이야기가 오가던 여자와 결혼식을 올린 이후부터였다.
자식 넷 중 벌써 절반을 보내고 나니 갑자기 싱숭생숭해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넌 이제 오는 거냐?”
“회의가 늦게 끝나서 직원들 저녁 사주고 왔지요.”
그러면서 재성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술은 안 마셨으니 걱정 마시고요.”
“아무 말도 안 했다.”
박경수 회장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지레 겁먹어서 변명하기는.”
이젠 박경수 회장도 술 때문에 일일이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보여준 태도 덕분에 어차피 재성이 알아서 잘 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계속 거기 서 있을 거냐? 아니면 앉던가. 올려다보려니 목 아프다.”
재성은 잠깐 망설이다 이내 비어 있는 맞은편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자 박경수 회장이 앞에 놓인 머그컵을 들어 올렸다가 다 식은 걸 알고는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얼마 전 중국에서 배급한 영화가 크게 흥행을 했다면서?”
“예. 어제까지 집계된 관객만 천오백만 명을 넘겼습니다.”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서 그런지 영화 관람객 숫자도 엄청나구나.”
“14억이 넘는 인구 대국이니까요.”
박경수 회장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인건비 절약도 있지만 세계 최대의 내수 시장을 가진 나라, 중국.
제일 그룹을 비롯해 수많은 기업들이 관심을 가지고 그쪽에 진출하려 애를 쓰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나라가 그랬듯이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중국 국민들도 조금씩 여가를 즐기게 될 거예요. 그러면 영화 시장 역시 지금보다 몇 배나 더 크게 성장할 겁니다.”
“음.”
8, 90년대 대한민국의 고도 성장기를 함께해 온 박경수 회장은 막내아들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그래서 앞으로 중국에 더욱 적극적인 투자를 할 계획입니다.”
“나쁜 생각은 아니구나. 하지만 너무 바깥에만 시선을 돌리다가 정작 안방에서 쫓겨나는 잘못을 저지르지는 말거라.”
해외에만 시선을 두다가 국내시장을 놓치지 말라는 충고였다.
재성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사고뭉치에서 어느새 든든해진 막내아들을 보며 박경수 회장은 흐뭇해했다.
‘그래도 내가 자식 농사를 망치진 않은 모양이야.’
재성은 잠시 대화가 끊어진 틈을 타 슬쩍 물음을 던졌다.
“생각이 많아 보이시던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고민은 무슨. 그냥 바람이나 쐬면서 앉아 있었을 뿐이야.”
박경수 회장은 가볍게 넘기려다 잠깐 주저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머릿속에 생각하던 게 있긴 했다.
짧은 고민 끝에 박경수 회장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곧 있을 대선에서 넌 누가 청와대의 새 주인이 될 것 같으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