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178
제178화
검주가 미소 가득한 얼굴로 렌을 반겼다.
원래도 렌에 대한 호감을 대놓고 드러내던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그것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해있었다.
“바쁠 텐데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그래도 같이 싸운 전우들인데 들를 수 있죠.”
“역시! 신성 왕국을 구한 영웅은 그 마음씨도 바다 같구만!”
렌은 그의 칭찬을 대충 웃어넘기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근데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아.”
급격히 어두워지는 그의 표정. 심각한 얼굴로 렌을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를 공격하지 않았나?”
“아닙니다. 악마의 세뇌에 당해 그런 것인데요.”
“아니, 그딴 악마의 힘에 놀아난 것도 잘못이네.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말이야.”
악마들의 권능을 직접 겪어본 렌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사과하려고 부르신 겁니까? 그런 거라면 사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것도 그거지만, 사과만으로는 내 성에 차지 않아서 말이지. 이걸 받아주게.”
그가 품에서 자그마한 금패를 꺼내 렌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
“황실의 인장이 찍힌 증명패지. 이게 있다면 황제 폐하께서 무엇이든 단 하나의 부탁을 들어주실 걸세.”
“……이렇게 중요한 걸 왜 제게 주십니까? 부담스러워서 안 되겠습니다.”
렌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금패를 내밀었다.
하지만 검주는 렌의 손을 다시 밀어냈다.
“받게. 자네가 이번에 한 일이 이 정도 가치도 안 된다고 생각하나?”
“……그래도.”
“생각보다 고지식한 면이 있군. 자네가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우리 모두 죽었을 수도 있었네.”
검주의 말에 주변 기사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이야 다 지난 일이라 투덜대며 부상을 회복하고 있지만, 정말 그 당시의 상황은 끔찍하다 못해 절망적이었다.
그때, 렌 아르젠이 나타나 악마를 죽이고 전쟁을 종결시켰다.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만 수백 명의 목숨을 구했고, 나아가 바스티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살렸으며 성국의 멸망을 막았다.
단순히 악마를 죽였다는 것으로 끝낼 수준이 아니었다.
‘처음 바스티안에 올 때만 해도 이것과는 정반대의 눈빛이었는데.’
렌은 그들의 시선을 느끼며 새삼 또 한 번 느꼈다. 점점 높아져 가는 자신의 위상을.
하늘처럼 높아만 보였던 제국의 3검주가 자신에게 황제의 금패를 줄 것이라고 언제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렇게 황제 폐하가 주신 금패를 제게 주셔도 되는 겁니까?”
“괜찮네. 이건 내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하셨으니.”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받아줘서 고맙군.”
렌은 금패를 받아 들고 생각에 잠겼다.
‘황제에게 무엇이든 부탁할 수 있는 금패라.’
이것으로 무엇을 부탁하는 게 좋을까?
애초에 황제를 만날 일도 거의 없긴 하겠지만,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
제국의 황제만 들어갈 수 있다는 보물창고에 엄청난 양의 마도구와 대단한 무구들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있다.
거기서 하나를 달라고 해볼까. 아니면 역대 황제들의 무덤을 보여달라고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제국 아카데미에서 졸업반 생도들의 졸업 시험 심사 위원장으로 와줄 수 있겠나?”
“제가 말입니까?”
“사실 내가 하기로 했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처리해야 할 것들이 생겨서 말이야. 나를 대체하려면 마스터급은 되어야 할 텐데, 부탁할 만한 놈들이 없어서 말이지.”
제국 아카데미의 졸업반 생도들이라면 상당히 수준 높은 이들이다.
그간 듣기로는 아카데미 졸업반 생도들 중에서는 상급 기사 수준의 생도들도 꽤 많다고 들었다.
‘제국까지 가야 한다는 게 문제긴 한데…….’
검주에게 금패까지 받은 상황에서 마냥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게 언제입니까?”
“두 달 뒤네.”
“일정이 조금 빠듯하긴 하군요.”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역시! 나는 자네가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
“하하…….”
“그럼 기왕 온 김에 차나 마시면서 얘기나 좀 해볼-.”
그때 뒤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검주와 렌의 시선이 돌아간다.
“3검주님. 죄송하지만 동생과 이야기 좀 해도 되겠습니까?”
리안 아르젠이었다.
“……이런.”
3검주가 렌과 시선을 마주친다. 괜찮으냐는 듯한 눈빛에 렌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지.”
렌이 일어났다.
“좀 조용한 곳으로 가자.”
“그러죠.”
두 사람은 교회 안의 사람 없는 방으로 들어가 자리했다.
“어머니가 널 보고 싶어 하신다.”
“……레오노라 님께서?”
“그래.”
“그 여자가 날 왜 보고 싶어 하지?”
신경질적인 렌의 말투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리안이 대답했다.
“네가 마스터라고 하니까.”
“…….”
당연한 게 아니냐는 듯한 너무도 뻔뻔한 대답에 렌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버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좀 변한 줄 알았더니. 여전하구나. 렌.”
그의 반응이 웃기다는 듯 피식 웃는 리안.
“아직도 부모의 사랑이나 관심을 그리워하는 거냐?”
“……그럴 리가.”
“그럼 상관없겠지. 어머니의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그 성격이 역겹다는 겁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한다.
“재능이 없으니 그리 대한 것이지. 그건 우리 가문이 아니어도 어딜 가나 마찬가지다. 네가 아니라 내가 그랬어도 똑같았을 거다.”
렌은 리안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리안이 그랬어도 똑같았을 거다라.
‘아니, 리안이 그랬다면 어떻게든 바닥에서 끌어 올렸겠지.’
레오노라는 겉으론 모두에게 매정하고 철저하게 강자를 대우하는 듯해도 그 안에 자신의 자식에 대한 명확한 선이 있다.
그 테두리 안에 있는 이들은 모르겠지. 바깥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 선이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법이니까.
칼리 아르젠이 렌에게 말했던 것처럼. 직계와 방계 사이에서 뚜렷한 격차가 있듯이, 현재 가주의 정부인인 레오노라의 아들들과 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
“가문으로 돌아와서 검의 입회식에 참여해. 네게는 명검이라 칭할 만한 검이 두 자루나 있지 않으냐.”
검의 입회식.
아르젠 가문에서 매년 진행하는 가문의 의식이다.
직계들과 가문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들만 신청할 수 있는 검의 입회식.
자신의 검을 가문에 입증하고 그에 걸맞은 실력을 보여 그 검이 가문의 검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의식.
검의 입회식에 참여하여 입회자들의 인정을 받은 검은 진정한 아르젠의 검이 된다.
검의 주인이 죽더라도 아르젠이 어떻게서든 검을 찾아 검의 무덤에 가져와 무덤에 박아 넣는다.
아르젠이 아닌 이는 절대 쓸 수 없는 검. 그게 바로 검의 입회식에서 인정받은 아르젠의 검이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렌은 굳이 바란까지 가서 검의 입회식에 참여할 생각은 없었다.
“너도 아르젠이니까.”
리안의 이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래, 나도 아르젠이었지.’
렌이 고안한 아르젠 검술 뇌신류도 결국은 아르젠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만들어낸 것.
나중에라도 가문의 가주를 꺾고 아르젠 위에 군림하게 된다면 아르젠 가문을 이끌어야 한다.
충분한 준비가 될 때까지는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는데, 사실 무서웠던 게 아닐까.
가주라는 거대한 그늘이, 가문의 직계인 형제들을 가문 내에서 마주하기가 두려웠던 건 아닐까.
렌은 그러한 생각이 들면서도 차마 그것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에 대한 두려움은 진작 떨쳐냈다고 생각했는데, 회피하고 있던 거였나.’
표정을 굳힌 렌이 생각을 정리하고는 대답했다.
“좋습니다. 가죠. 검의 입회식.”
“잘 생각했다. 검의 입회식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충분히 준비해서 와라. 오랜만의 복귀이니 가족들에게 실망은 안 주는 게 좋을 거다.”
“그럴 일 없습니다.”
“그렇겠지. 네 능력이라면 말이야.”
리안은 할 말이 끝났는지 자리에 일어서서 렌의 어깨를 살포시 짚으며 지나간다.
“그리고 어제는 고마웠다.”
쿵.
방문이 닫히고 리안이 사라지자, 렌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 * *
주머니 안쪽에서 매만져지는 딱딱한 금패의 촉감.
형님과 대화를 끝내고 나는 바스티안을 천천히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황제에게 무엇이든 부탁할 수 있는 이 금패, 제국 아카데미 졸업반 생도들의 졸업 시험 심사 위원, 검의 입회식 그리고 영웅들의 단말.
‘뭐가 계속 생겨나는군.’
이중 가장 중요한 건 영웅들에게 단말을 연결하는 것이다.
대화가 갑작스럽게 마무리가 된 탓에 듣지 못한 게 있다. 그 단말이란 것을 어떻게 연결하는지에 대한 것.
영웅에 대한 판단도 내게 맡겼는데, 단말의 연결도 알아서 하라는 것인가.
‘신이 그걸 까먹고 말하지 않았을 리는 없겠고……, 때가 되면 알게 되려나.’
만나보면 알겠지.
사실, 지금 영웅 후보로 생각하고 있는 이에게 가는 중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숙소. 이미 몇 차례나 왔던 곳이라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 렌 경!”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아더, 무사했구나. 다행이야.”
북부 사령관의 아들, 아더 아이벤슈츠.
지난 파티에 잠깐 이야기를 나눈 게 전부였지. 몸이나 얼굴에 상처가 없는 걸 보니, 다행히 이번 아자젤 사태를 무사히 넘어간 것 같다.
“렌 경께서 악마를 물리치셨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매번 렌 경에게 도움만 받는 것 같아 너무 죄송합니다. 제가 도움이 됐어야 했는데.”
“됐다. 네가 무사한 것만으로 충분해. 스테판 님을 따라서 북부를 지켜야 하잖아?”
“맞습니다! 꼭 한 번 다시 와주십시오. 아마란스 기사단원들도 다들 렌 경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
“혹시…, 공주님을…보러 오신 겁니까?”
아더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이 녀석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저는 두 분을-.”
“그런 거 아니다. 혹시 로레즈 어딨는지 알아?”
“로레즈 카델버그 경 말입니까? 아마 숙소에 있을 겁니다. 훈련 도중에 흑기사와 만나서 좀 다쳤다는 것 같은데 그 이후로 방에서 안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 고맙다.”
아더가 아쉬움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떠났다.
나는 로자리아 사절단이 묵고 있는 숙소로 향했다.
사람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여기저기 고맙다는 인사를 받아내며 로레즈가 쉬고 있다는 방으로 향했다.
똑. 똑. 똑.
“누구…세요?”
노크를 하니 안쪽에서 잠긴 목소리가 들린다.
“로레즈 카델버그. 렌 아르젠이다.”
문 너머로 우당 탕탕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바로 열리는 문.
“렌…님?”
“들어가도 되지?”
“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와 로레즈가 마주 앉았다.
검은 더벅머리가 난장판으로 헝클어져 있다. 죽기 직전이었던 사람이라기에는 너무도 멀쩡해 보이는 모습.
안색이 창백하고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는 것과는 별개다.
“옷 들어봐.”
“네.”
로레즈가 잔말 않고 내게 베인 옆구리를 보였다.
아직 상처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벌써 상당 부분 아물었다. 몸에 마기가 있으니 사제들에게 치료받지도 않은 걸 생각하면 엄청난 회복 속도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하단 거지?”
“그냥요, 다요.”
잔뜩 풀이 죽었다. 그럴 만도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할 거지?”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건 네가 판단해. 네가 선택한 길이니까.”
“……네.”
“내가 너를 살린 것도 내가 선택한 길이야. 그러니 네가 그렇게 기죽어 있을 필요 없다.”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레즈의 상태를 확인했으니 볼일은 끝났다.
“네가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해. 그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이 들면 내가 네 목을 베러 갈 테니.”
“……절대로. 절대로 그럴 일 없게 할게요.”
나는 녀석의 물기 젖은 목소리를 뒤로한 채 밖으로 나갔다.
“……카리나?”
복도를 걸어 나서니 카리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다는 소식 듣고 왔다. 로레즈에게는 무슨 일 때문에 간 것이냐.”
“그게…….”
로레즈에 대한 변명을 떠올리던 내 눈앞에 갑자기 새로운 서브 퀘스트가 떠올랐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