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177
제177화
브릴런트의 사절단이 묵는 숙소에 도착했을 때, 내부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어수선하지 않았다.
이미 다 마무리되고 정리하는 듯한 상황.
다들 지쳐 보이기는 했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대장군님, 오셨습니까.”
기사단원들의 상태를 점검하던 제프먼이 렌에게 다가가 경례한다.
“스켈레톤들이 쳐들어왔다던데.”
“맞습니다. 조금 위험할 뻔했지만, 다행히 검은 빛기둥이 사라지면서 놈들의 힘도 약해져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멀쩡한 척 말하고 있지만, 제프먼의 상태가 제일 심각했다.
다른 이들이 그리 다치지 않은 것도 아마 상급 기사들이 희생해서 몸을 굴린 탓일 터.
‘딘 님. 도와주십시오.’
– 그러지.
강령의 동화율을 높이고 딘이 신성 마법을 써서 제프먼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
제프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렌이 펼쳐낸 신성 마법에 놀란 것이다.
“크큭.”
옆에 있던 바실이 재밌는지 실실 웃는다.
온몸에 피 칠갑하고 있던 제프먼의 상처들이 순식간에 아물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매만지던 그가 입을 떡 벌리고 렌을 본다.
“신성…마법 아닙니까?”
“그래. 성물의 힘이지.”
“성물 말입니까? 그게 무슨 소리신지.”
렌에게 쏟아지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들.
신성력으로 신성 마법을 펼쳐내는 것도 모자라 성물의 힘을 썼다고 하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애초에 렌이 신성 마법을 이렇게 대놓고 보인 것도 사실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어차피 나중에는 그가 신성 마법으로 악마를 처리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텐데, 이 자리에서 모두에게 한 번에 말하는 게 나을 테니.
“아스테논 신전에 악마가 나타났었다. 그리고 난 역대 교황들의 무덤에서 성물의 선택을 받았지. 그 힘으로 신성 마법을 쓰는 거다.”
사방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성물의 선택을 받으셨다고?”
“아니, 대장군님은 도대체 못 하는 게 없으시네. 북부에선 활로 타이란트의 대가리를 깨버리시더니.”
금사자 기사단의 도미닉과 앤드류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비앙카.”
“네.”
“어서 가서 머리도 좀 정리하고, 옷도 갈아입고 나오거라.”
레이튼의 말에 다급히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비앙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택으로 들어갔다.
“야.”
잔뜩 머리가 헝클어진 칼리 아르젠이 짜증을 그대로 드러내며 렌에게 다가갔다.
“그 금발에 느끼하게 생긴 놈. 추기경 맞지?”
“……저스틴을 말하는 거야?”
“그래, 그때 신전에 기도하러 갔을 때 음흉하게 웃던 놈 말이야.”
“저스틴 추기경이 왜?”
“그놈이 해골들을 몰고 왔어. 흑마법도 썼다고! 어떻게 그딴 새끼가 추기경이 된 거야? 신성 왕국 믿을 수 있는 곳 맞아?”
렌에게 따지듯이 짜증을 쏟아낸 칼리가 이를 악물었다.
레이튼과 제프먼에게 뒤를 맡기고, 도망가는 저스틴을 그녀 혼자 쫓았다.
하지만 스켈레톤들을 뚫고 저스틴을 잡아내기에는 그녀의 실력으론 무리였다.
결국 무리만 하다가 패배자처럼 돌아왔기에 짜증이 치민 것이다.
‘저스틴이 흑성의 첩자였다고?’
렌은 그녀의 짜증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렘과 아라드에 이어서 저스틴까지 흑성에 넘어갔었다니.
하물며 렘과 아라드는 신성력을 버리진 않았지만, 저스틴은 흑마법까지 썼다고 했다.
그 말은 신성력을 완전히 버렸다는 뜻. 완전한 변절자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이번에 저스틴만 보이지 않길래 설마 했는데……. 역시 그가 라만의 창을 오염시켰던 건가?’
라만의 창의 위치를 아는 이도 몇 없었다. 그중 하나가 저스틴이었고 플레이크가 라만의 창을 훔쳐 가려 했을 때 필사적으로 막은 것도 저스틴이었다.
‘차라리 그때 플레이크가 가져가게 놔뒀어야 했나.’
아니, 그랬다면 오히려 저스틴의 존재가 더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겠지.
이번 일로 변절자를 추려낼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결국 라만의 창도 지켰고 흑성의 고위급 실력자도 처리했다. 악마 역시 딘의 힘으로 완전 소멸시켰고.
“저스틴은 어디로 사라졌지?”
“나도 몰라. 어디 쥐새끼처럼 숨어 있겠지. 아니면 꽁지 빠지게 바스티안 밖으로 도망쳤던가.”
‘애스턴 님에게 추기경들에 대해 좀 더 신중히 조사하라고 해야겠군.’
신성 왕국이 이 정도로 썩었다면, 로자리아나 바란은 더욱 심하겠지.
브릴런트는 이미 한 차례 썩은 곳을 도려내기도 했고 애초에 렌을 중심으로 세력이 완전 개편되어 흑성 놈들이 들어올 틈이 거의 없다.
“근데 어떻게 된 거야?”
칼리의 물음에 옆에 있던 바실이 대답해주었다.
“대장이 다 해결했다. 보다시피 저 성물의 힘을 이용한 신성력으로 악마를 죽였지. 저 검은 빛기둥도 마찬가지고.”
칼리는 익숙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존경의 눈빛을 보내기는 했으나, 다들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것처럼 태연한 반응이었다.
렌 아르젠이 갔으니 당연히 해결되겠지 하는 그런 반응.
이미 렌과 몇 차례 동행했던 이들의 눈에는 신뢰감이 그득했다.
심지어는 칼리 아르젠조차 렌을 믿는 눈치였으니.
“뒤를 좀 부탁해. 바실. 나는 좀 쉬어야겠어.”
브릴런트의 사절단도 모두 멀쩡한 걸 확인하자, 렌은 피곤함이 미친 듯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딘 아타나키스가 강령하여 엄청난 신성 마법을 쏟아낸 반동. 영력이 많이 늘어났다고 해도 피로가 몰려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나는 이만 돌아가지. 다시 찾아오거라.
‘고생하셨습니다.’
[강령이 풀립니다.]딘이 돌아가고 렌이 저택으로 들어갔다.
“칼리 아르젠.”
렌이 사라지자, 바실이 다짜고짜 칼리를 불러 세웠다.
“왜?”
“태도를 똑바로 해라. 대장의 밑으로 들어오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예의를 지켜.”
“……시끄러워. 누가 누구 밑으로 들어간대?”
바실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평소에도 무표정을 유지하는 그였지만, 방금 그녀의 발언 이후로 그의 표정은 몇 배는 더 차가워졌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말하지는 않으마. 하지만 더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마라. 난 더 이상 내 사람들이 아닌 남을 위해 일해줄 생각이 없으니.”
그리 말한 바실이 뒤로 돌아선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악문 칼리도 크게 코웃음 치며 떠났다.
“어라? 렌 경은 어디 가셨죠?”
뒤늦게 한껏 치장하고 온 비앙카가 렌을 찾았다.
“들어갔다. 피곤하다더구나.”
레이튼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그녀를 다독인다.
“아……, 그렇군요.”
“걱정 마라. 여기 있으면 또 렌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네! 아빠.”
“하하하, 내가 너를 어떤 놈팽이한테 보내야 하나 했는데, 렌이라면 충분하고도 남지. 아니 오히려 비앙카 네가 더 아쉬워 보일 지경이구나.”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사람들도 다 있는데. 렌 경이 들으면 어쩌려고.”
“들으라지. 누가 채가기 전에 침 발라 놓거라.”
“아빠도 참! 그만 하세요.”
그리 말한 비앙카가 부끄러운 듯, 다친 이들을 살피러 떠났다.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금사자 기사단원들이 소곤댔다.
“야, 폴. 네 누이가 힘들겠는데? 경쟁자가 너무 강하잖아?”
앤드류가 팔꿈치로 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에라이, 포기하라고 해야겠다. 내 동생이 좀 슬퍼하겠는데.”
“폴. 너무 섣부르게 단정 짓지 마. 우리 단장…, 아니, 대장군님 취향이 어떨지 모르잖아? 아무리 비앙카 님이 절세 미녀에, 트레비스 가문에, 성격도 좋고, 심성이 곱다고 해도 혹시 또 모르지?”
“맞아, 아직 비앙카 님도 대장군님과 둘이 식사한 적은 없다고?”
“닥쳐…. 망할 것들아.”
폴을 놀리며 킥킥 웃는 단원들의 모습에 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 *
다음 날 판테아 궁전에서 추기경 회의가 열렸다.
10명의 추기경이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고 렌이 참고인으로 회의에 참여했다.
“렌 아르젠입니다.”
“저희는 렌 경을 취조하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니에요. 그저 어제 있었던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필요해서 것이니 이해 바랄게요.”
오실리아의 말에 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먼저 어떻게 된 건지 차근차근 말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신의 계시가 내려왔었습니다. 교황들의 무덤에 가서 그들의 힘을 빌리라는 전언이었죠.”
추기경들이 나지막한 탄식을 흘리며 동요했다. 신을 믿는 성국의 이 수많은 추기경들을 모두 제치고 렌에게 성국을 구해달라 신이 요청한 것이니 말이다.
“저는 죽은 자들의 목소리를 가끔 들을 수 있습니다. 묘지기로 살아가다 보니 생겨난 능력이죠.”
“그럼 장의식에서 역대 교황들의 목소리를 전부 들었다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가끔 망자들의 강렬한 열망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일 뿐,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5대 교황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겠군요.”
“맞습니다. 그래서 딘 아타나키스 5대 교황의 무구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신성력을 쓸 수 있던 것도 신의 계시와 더불어 ‘신성한 보석’이 제게 힘을 주었기 때문이었죠.”
렌은 미리 생각해두었던 거짓말을 술술 뱉어냈다. 이미 몇몇 사람들에게 이전부터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말한 적이 있었다.
대부분이 어디 말한 이들은 아니었지만, 마스터급에 올랐으니 이 정도는 밝힐 수 있었다.
이제는 제 한 몸 건사하는 정도는 되었으니.
“신성 마법도 무구들의 힘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제 다시 쓰려고 해도 안 되더군요.”
“그럼 신성 마법은 이제 다시 사용하지 못하는 겁니까?”
“예. 성흔이 생겼지만, 제가 사용할 수 있는 건 이 무구뿐입니다.”
렌이 오른팔에 착용된 운명의 수레바퀴를 들어 보였다.
“그건…….”
“운명의 수레바퀴란 이름의 무구. 이것이 저를 주인으로 택한다고 신께서 말씀하시더군요. 보다시피…….”
렌이 팔찌를 빼내기 위해 그것을 잡아당겼지만, 렌의 팔목에 딱 맞춰 크기가 조절된 그것은 전혀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빠지지 않습니다.”
그 말에 추기경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5대 교황의 무구들은 역대 다른 교황의 무구들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었다.
단지 사용할 수 없었을 뿐이지, 그 능력적인 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
그렇다고 렌을 강제로 붙잡아 빼앗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구가 렌 님을 선택했다면 이제 그 주인은 렌 님인 것이겠지요.”
“애스턴!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무리 그래도 딘 아타나키스 5대 교황의 무구이네!”
추기경들 사이에서도 그 소유권에 대한 의견이 반반으로 갈렸다.
그러다 결국 최종 결정은 콘클라베에서 교황이 정해지고 다시 하기로 의견이 수렴되었다.
“신께서 성국의 다음 교황에 대해 하신 말씀이 있었나요?”
렌은 오실리아의 질문에 추기경들의 면면을 천천히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애초에 이 질문이 나오지 않았어도 먼저 말할 생각이었다.
“애스턴 캐쉬 추기경을 말씀하셨습니다.”
프로코피우스 두카스의 죽음 이후의 상황.
애초에 렌은 처음부터 애스턴 캐쉬를 성국의 다음 대 교황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렌 님?”
애스턴이 당황한 듯 물었고 몇몇 추기경들이 표정을 굳힌다.
“그게…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사실, 아니다. 하지만 저들이 알 방법 따위는 없으니 일단 질렀다.
“허어…….”
“어찌 이런.”
이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추기경들의 고심이 눈에 훤히 드러난다.
‘무조건 이 말을 따르지는 않겠지. 하지만 영향은 미칠 거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 * *
할 말을 모두 끝낸 렌이 사상자들이 치료 받고 있는 성국의 교회로 향했다.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몸져누워 있었다.
라만의 창으로 상당히 많은 중상자들을 회복시켰음에도 이만큼이나 남았다는 건 그만큼 많은 이들이 다쳤다는 뜻.
특히나 환자의 대부분이 제국의 기사들이었다.
“렌…, 렌 아르젠이다.”
“추기경 회의에 참석한다더니 벌써 갔다 온 건가?”
“여긴 무슨 일이지?”
주변의 제국 기사들이 렌을 보며 소곤거린다. 이전에 그를 향하던 적대적이고 악의적인 눈빛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는 그 자리에 공포와 경외가 깃든 감정이 들어차 있었다.
“젠장, 팔이 움직이지가 않는군.”
“사제님 아니었으면 너 평생-.”
“야, 뒤.”
“뭐?”
“뒤 보라고! 렌 아르젠!”
복도를 가로막고 있던 제국의 세 기사단장. 그중 하나가 동료에게 소곤대며 소리친다.
그 말에 다급히 뒤를 돌아보자, 렌 아르젠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아…….”
렌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단장. 그중 두 기사단장은 앞서 렌과 시비가 걸렸던 이들이었다.
“좀 비켰으면 좋겠는데.”
“아, 그, 그러지.”
단장의 대답에 렌이 그를 나지막이 노려보자, 그가 당황하며 고개를 숙이고는 말한다.
“지나…가시죠.”
그제야 고개를 돌리고 지나가는 렌. 세 단장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터 주었다.
하루아침에 달라져 버린 그의 위상. 애초에 실력으로도 안 됐지만, 어제 그 광경을 보고도 그에게 함부로 대할 만한 이는 적어도 제국의 사절단엔 없었다.
그 3검주조차 이제는 적어도 성국 내에선 렌의 위상에 비할 수 없었으니.
그들 사이를 지나쳐 가는 렌의 시선 끝에 3검주의 모습이 보인다.
“오! 렌! 드디어 왔군! 자자! 앉게.”
그들에게는 한없이 차가운 3검주와는 정반대의 모습.
그 모습에, 렌에 대한 기사들의 어려움이 한층 더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