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262
제262화
대륙의 전황이 심상치가 않다.
브릴런트에서 시작된 자그마한 균열의 여파가 조금씩 커져가며 대륙 전체로 퍼져가는 느낌.
이제는 성국과 로자리아를 넘어 제국과 아르젠까지 그 여파에 휩쓸려 진동하고 있다.
‘블레어 누님이 죽다니…….’
아르젠에서도 몇 없는 마스터급의 기사가 바로 그녀다. 더구나 아르한과 대적할 만큼 천재성을 가진 누님이 이리 허무하게 죽을 줄이야.
그녀의 죽음의 이면에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듯 보인다.
이번 아르젠의 피해도 피해지만 제국 측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
기사단 2개가 괴멸하고 병사들은 백이 넘게 죽었다지.
심지어는 3개의 마법병단이 치명적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반면에 흑성 쪽 피해는 경미했고 소수민족의 무덤은 지키지 못했다.
‘아무리 단장이 있었다고 해도 이 정도로 차이가 벌어질 수 있는 건가.’
절대적인 고수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일은 너무 작위적이었다.
“바실, 너는 여기 기다리고 있어.”
“그러지,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신호를 보내게, 대장. 바로 달려갈 테니.”
“그래.”
괜찮다고 했음에도 기어코 따라온 바실을 저택 밖에 두고 렌 일행은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택의 분위기는 예상대로 매우 심각하고 냉랭했다.
까닥 말 하나 잘못하면 목이 떨어질 것 같은 날카로운 기세가 사방에서 흘렀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이번 작전에서 흑성의 본대에 대패하여 전력이 약화된 상황이니.
이 틈에 누가 아르젠 저택으로 쳐들어온다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중앙 대저택의 입구로 레오노라가 나와 렌 일행을 맞이했다.
“들어와라.”
그들이 올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자연스레 저택 내 응접실로 들어갔다.
“너희들은 잠시 대기하고 있거라.”
레오노라는 렌을 제외한 나머지는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번 임무에는 저도 참여했습니다. 어머니.”
리안이 반발하며 나섰고,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입회식도 치르지 못한 녀석이 낄 데가 아니다. 렌은 뇌신류의 수장이니 독대하는 것뿐이다. 대기하거라.”
“예.”
수장을 들먹이니 할 말이 없어진 리안과 스칼렛이 돌아갔다.
“임무는 어찌 되었느냐?”
“흑성 측 간부 하나를 죽이고 흑해로 방류되던 마기 장치를 부쉈습니다.”
“잘했다.”
레오노라의 대답은 그게 끝이었다. 애당초 큰 칭찬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반응은 생각보다도 더 무덤덤했다.
당연히 성공해야 할 것을 했을 뿐이라는 듯.
“블레어 누님이 흑성의 단장에게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 평소에 자만하던 탓이지.”
“부인께선 딸이 죽었음에도 여전히 냉담하시군요.”
“블레어가 부족했던 탓이다.”
“아르한 형님을 구하려다 그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너였다면 아르한을 구하고도 살아 돌아오지 않았겠느냐?”
“……상대가 단장이었다면 저도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너도 부족한 것이겠지.”
렌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굳이 따지진 않았다.
“가주께서 단장과 독대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
“왜 전장에 나서지 않으신 겁니까?”
“사정이 있었다.”
“그게 무엇이기에,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든 겁니까?”
“네가 알 필요 없는 것이다.”
이를 악문 렌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가족이 죽었는데 가족이 알 필요가 없다면 도대체 누가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인가?
“2황자 때문입니까?”
“……마음대로 생각하거라.”
“가주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그러거라.”
지금까지의 반응으로 가주를 쉽게 만나게 해줄 것 같지 않았는데, 의외로 그녀는 흔쾌히 그 말을 수락했다.
렌은 곧장 가주전으로 향했다.
“왔구나.”
“예, 가주님.”
플레처는 좌에서 내려와 렌에게 다가갔다.
“많이 강해졌군.”
그저 렌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간의 성장을 꿰뚫어 본 플레처가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다.
카앙!!
초혼으로 첫 공격을 막고 이어지는 후속타가 빛살처럼 렌의 심장을 노리고 쇄도했다.
정말로 상대를 죽일 듯한 살기와 투기를 실은 일격.
피의 주인을 이용해 반응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렌이 검격을 막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그 일격을 정말 막을 줄은 몰랐는지 조금 놀란 듯한 눈빛의 플레처.
그가 검을 집어넣고는 렌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방금과 같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당황스럽고도 위험천만한 일들. 그러한 것들이 렌을 계속해서 성장시켜오지 않았던가.
조금 전 플레처의 일격 역시 마찬가지였다. 렌은 그가 펼쳐낸 그 한 수에 담긴 묘리를 되새기며 검을 움켜쥐었다.
“가주께서도 더 강해지셨군요.”
“아직 멀었다.”
“그래서 흑성의 단장을 돌려보내신 겁니까?”
“앉거라.”
말이 길어질 것을 예감했는지, 플레처가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너는 아르젠의 적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렌은 그의 질문에 놀랐다. 가주가 자신에게 이러한 물음을 던진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르젠의 적…….’
솔직히 처음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주가 되겠다고는 했지만, 아직까진 아르젠에 깊은 소속감을 느낀 적도 없고 이들을 진짜 가족이라 여기지도 않았었으니.
가주가 되려는 것도 그저 아르젠을 도구로 이용하려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마음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아직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렌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가주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제대로 정하지 못한 것을 억지로 끄집어내어 말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아르젠의 적은 아르젠을 제외한 전부다. 흑성뿐만 아니라 제국과 타국 역시 마찬가지지.”
그는 딱 지칭해서 제국을 언급했다.
아마 처음 던진 질문도 그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 한 것일 테지.
원래라면 가족들의 물음에 알 거 없다며 일갈했을 가주였지만, 오늘은 왜인지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아르젠은 브릴런트를 버리고 제국으로 넘어갔습니다. 근데 이제 와서 제국이 적이라고 하는 겁니까?”
“대륙 최고의 검가는 아르젠이지만, 어디까지나 가문에 한할 뿐이다. 제국의 힘에는 미치지 못하지.”
“그게 무슨 상관이죠?”
“힘이 없기에 숙이고 들어간 것이다. 브릴런트 역시 마찬가지지. 힘이 없기에 아르젠을 바란 제국에 빼앗긴 것일 뿐.”
“……그 말은 이제 제국에 반기를 들어도 될 만큼 아르젠이 강해졌다는 걸로 들립니다.”
“아직은 아니다.”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건만, 가주의 대답은 그 반대였다.
“하지만 곧이다.”
왜냐는 물음을 내뱉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렌은 그 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아르젠의 힘은 곧 플레처의 힘이었으니.
‘초월의 경지. 아직 이루지 못하셨구나.’
굳이 초월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렌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일 터.
현 대륙에서 초월에 발을 디딘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
플레처도 아직 완벽하게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대해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렌은 구태여 묻지 않았다.
“얼마나 남은 겁니까?”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단장과의 격전을 뒤로 미룬 것은 그 때문입니까?”
“첫 번째 이유가 그것이었지.”
물은 건 렌이었지만, 대답을 듣고 놀란 것 역시 그였다.
아무리 가주가 초월에 이르지 못했다고 해도 플레처 아르젠은 대륙 제일의 검사다.
하지만 그가 망설였다는 건 단장의 힘이 그와 동등하다고 판단한 것일 터.
‘지난번보다도 더 강해진 건가…….’
렌이 강해진 만큼 흑성의 단장도 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했다. 그래도 벌써 이 정도일 줄이야.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단장도 초월의 경지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만약 초월에 이르렀다면 이미 아르젠이고 제국이고 다 쓸어버렸겠지.
“두 번째 이유는 뭐죠?”
“2황자가 아르젠을 배신했다. 단장이 내게 말하더군. 내가 흑성의 본대를 막으러 간다면 2황자가 아르젠 저택을 쓸어버릴 거라고.”
“그걸 믿으신 겁니까?”
“놈들이 우리 영토 바깥에 대기하는 걸 확인했다. 이번 연합에 아르젠의 주요 전력이 다 나간 상태에서 나까지 자리를 비웠다가는 2황자의 병력을 막지 못했을 거다.”
“아르젠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겁니까?”
“…….”
가주는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렌은 그에게서 처음으로 나약함을 느꼈다.
초월에 다가간다는 자신감과 확신은 있을지언정, 아르젠이라는 울타리는 그리 튼튼하지 않다는 것을 그도 아는 것이다.
“제가 아는 가주님이라면 아르젠이 쓸려나간 것을 그들의 나약함이라 말하며 연합군에 합류해 흑성과 제국을 쓸어버렸을 겁니다.”
“헛된 망상이군. 그리하면 뭐가 남지?”
“가주께서 그토록 추구하시던 자존심과 기상이 남겠죠. 아르젠을 지키며 죽어 나간 기사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리 생각했다면 잘못 알고 있군. 그 모든 건 죽고 나면 가치를 잃는 것이다.”
“그럼 블레어 누님은…, 누님께선 죽어 모든 가치를 잃은 겁니까?”
가주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빛이 느릿하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너는 무얼 하고 싶은 거냐. 네가 뜻하는 바를 말하거라.”
“저라면 제국의 뜻을 알아냈을 겁니다. 제국이 정녕 아르젠을 버린 것인지. 아니면 그게 2황자의 독단적인 행동인지 말입니다.”
“네가 그걸 해낼 수는 있고?”
제국의 뜻을 알아내겠다는 것은 곧 황제의 의중을 알아내겠다는 뜻과 같았다.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그 황제는 설령 만난다 해도 속내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서 아르젠을 버릴 건지 말지와 같은 중대 사안을 본인이 직접 알아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하지만 렌은 자신 있게 말했다.
“해낸다면 어쩌시겠습니까?”
“해낸다면 네게 소가주의 자리를 주겠다.”
렌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과연 저 말은 진심일까? 어차피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에 꺼낸 말일까? 아니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 파격적인 상을 내리려 하는 것일까?
무엇이 되었든 렌은 그 보상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공식적인 소가주로 임명이 된다면 가주가 될 때까지 그 선언이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알겠습니다.”
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저희’ 아르젠을 잘 지켜주십시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지만, 플레처의 입가엔 처음으로 얕은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가주전을 나와 블레어가 묻힌 검의 무덤으로 향했다.
검의 입회식을 통과한 입회자들은 죽어 아르젠의 검의 무덤에 묻히게 된다.
블레어의 무덤은 그곳에 있었고 그녀의 애병은 비석과 함께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렌보다 먼저 찾아온 조문객이 있었다.
“아르한 형님?”
“……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