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301
제301화
황위에서 물러난 전 황제, 아서 세르펜티우스의 별궁.
그의 거처에 손님이 왔다.
“오랜만이군. 앉아라.”
아직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기에는 너무나 정정해 보이는 전 황제 아서 세르펜티우스.
그가 밝게 웃으며 렌을 맞이했다.
“무탈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폐하.”
“나야 뭐, 이제 뒷방 늙은이지. 이제 이 적적한 생활을 뭐 하고 보낼지 생각 중이네.”
“폐하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아서가 황위를 내려왔어도 그의 권위는 여전히 대단했고, 하물며 현 황제보다도 아직까지 그를 따르는 이들이 더 많았다.
정말 그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하지만 그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렌을 보며 물었다.
“……생각해보니 아닌 것 같군요.”
“……자넨 정말 가끔 보면 얄밉군.”
렌은 피식 웃었다. 만약 그렇다고 대답했으면 황제는 그것을 빌미로 어떤 요구를 해왔겠지.
그래서 아니라고 한 것이다. 혹시나 했는데, 그의 반응을 보니 진짜 그럴 의도였던 것 같다.
‘은퇴하고서도 무서운 분이네.’
“술 좋아하나?”
“조금 합니다.”
“술이나 먹지.”
렌은 전 황제와 몇 시간이나 대작을 하며 술을 들이마셨다.
도대체 그간 어떻게 참고 산 건지, 전 황제는 그야말로 술고래였다.
천하의 렌조차 도저히 이길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그만…, 그만 마시시죠. 폐하.”
“그만은 무슨? 이제 시작이지. 대륙의 영웅이 이것밖에 안 되나? 자! 마시자고! 건배!”
황제가 술잔을 들이밀었다. 렌은 별수 없이 술잔을 마주치며 술을 들이켰다.
“자자! 잔이 비었군.”
“제가 아까 폐하께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말에 아니라고 대답해서 이러시는 겁니까?”
“뭐? 나를 그런 쪼잔한 인간으로 보는 건가!”
그가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바깥에 다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하다.
아마 하인들도 전부 다 들었겠지. 예전이라면 체통을 지키느라 절대 보이지 않을 모습을 이제는 거리낌 없이 보인다.
“그런 게 아닙니다. 농이었죠. 어찌 폐하께서 하고 싶은 걸 못 하시겠습니까?”
“정말 그리 생각하나?”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함정인 걸 알지만 들어갈 수밖에 없다.
여기서도 아니라 말하면 아마 이 술자리를 영영 벗어나지 못할 테지.
“그렇습니다.”
“하하하! 자자, 한 잔 하게.”
또다시 술잔을 들이켠 그의 눈빛이 싹 바뀌며 처음 차분했던 그 모습이 되었다.
‘취한 게 아니었나?’
술을 이만큼이나 먹고도 멀쩡한 것도 놀랍지만, 지금껏 술 취한 척한 것도 놀라웠다.
내게서 저 말을 듣기 위함이었으면 굳이 하인들에게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었을 텐데.
“자네는 가끔 생각이 얼굴에 뻔히 보일 때가 있어.”
“그렇습니까?”
“그래, 왜 굳이 취한 척을 했나 싶지?”
정확하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려야 내 입지가 조금은 가라앉을 테니까.”
그가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렌은 그제야 황제가 이런 연기를 한 이유를 깨달았다.
“현 황제 폐하를 위함이었군요.”
그는 대답하는 대신 술을 마셨다.
대단한 인간이다. 그 와중에도 그러한 것들을 계산하며 행동하고 있었다니.
“내게 검술을 가르쳐주게.”
“……예? 폐하께서 굳이 제게 검술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까? 다른 훌륭한 이들도 많지 않습니까?”
“기왕이면 대륙 최강 기사의 검을 배우면 좋지 않겠나?”
“아르젠의 검술은 알려드리지 못합니다.”
이 부분만큼은 단호했다. 아무리 가주가 되었다고 한들 이건 말이 안 되는 것이었으니.
“하, 나를 뭘로 보고. 그냥 적당히 자네가 괜찮아 보이는 검술을 알려주면 되네. 그저 가끔 이렇게 술친구나 해주며 검술을 알려줘도 좋네.”
“진심이십니까?”
“진심이네.”
“알겠습니다.”
딱히 어려울 건 없다. 매일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가끔 한 번씩 놀러 올 때마다 알려달라는 것이었으니.
술자리가 마무리되고 렌은 별궁을 떠났다.
그를 부르는 이들이 너무 많았지만, 이전에 만나야 할 녀석이 있었다.
렌은 로자리아로 향했다.
로자리아 서부에 존재하는 유적지, 그곳으로 폴른을 불렀다.
그와 약속했던 시간이 되었고 폴른이 찾아왔다.
폴른은 매우 불만스러운 얼굴로 렌을 노려보았다.
“단장의 시체는 넘겨주기로 해놓고 벌써 반년이 넘게 흘렀어!”
“미안하지만 단장의 시체는 줄 수 없어.”
대륙에 존재하는 유일한 악마의 육체다. 이 녀석에게 그걸 넘겼다가 어떤 대참사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노릇.
애초부터 넘길 생각 따위 없었다.
“망할 새끼! 대륙의 영웅이란 놈이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구나!!”
그가 분개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렌에게 덤빌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렌은 묵묵히 녀석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속이 풀릴 때까지 욕을 내뱉은 후에야 조금 진정된 폴른에게 렌이 손짓했다.
“따라와.”
유적지의 조사를 담당하던 탐사단장에게 미리 말해둔 덕에 유적지에 사람은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
“과거 에르제브라는 왕국이 있던 곳이지.”
“……그래서? 나를 왜 여기 데려온 거야?”
“네가 결국 악마의 신체를 가지고 싶은 건 낭아검을 완성시키고 싶어서였지.”
“맞아.”
“그 방법이 여기 있다.”
폴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검을 들어봐라.”
렌이 여명을 들었다.
“…여기서 날 죽여서 입막음하려고! 네가 그러고도 대륙의 영웅이냐!”
폴른이 소리쳤고 렌은 다짜고짜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카앙!
적당히 했다고는 하지만 역시, 지난 전쟁 이후 혈검을 다루는 게 훨씬 능숙해졌는지 더 강해졌다.
‘그래도 아직 멀었다.’
허공에서 검로가 기이한 각도로 꺾여 폴른의 머리를 노린다.
“크윽!”
그가 간신히 검을 막았다. 렌은 계속해서 낭아검을 펼쳤다.
캉! 캉! 캉!
아슬아슬하게 폴른이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검이 계속해서 쇄도했다.
이쯤이면 그의 몸이 망가져야 하는데, 렌은 여전히 멀쩡하다. 되려 낭아검을 자유자재로 펼쳤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
폴른이 경악하며 렌을 보았다.
이 괴물이 예전에 홈멜츠라는 놈에게 낭아검을 빼앗아 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평소에 낭아검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그게 돌아오는 반동 때문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인간의 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초월에 이르면 가능한 것일까?
“초월이 아니야.”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렌이 말했다.
“그럼 뭐지?”
“너의 혈통을 뛰어넘으면 된다. 나는 그걸 할 수 있지.”
“그게…, 무슨 소리냐.”
렌은 탐사단이 발굴해 놓은 과거 기록들을 보여주며 에르제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서…, 피의 주인이란 걸 할 수 있게 되면 그게 가능하단 말이야?”
“그래.”
“그럼 당장 가르쳐 줘!”
마지막 희망을 찾은 듯 폴른이 소리쳤고 렌은 고개를 저었다.
“넌 죄를 너무 많이 지었다. 알고 있지?”
그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폴른이 저지른 악행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당장 죽여버려도 괜찮은 놈이었지만, 아스터의 부탁으로 렌은 폴른을 살려두고 있었다.
“……안다.”
“그러면 죗값을 치러라. 죗값을 모두 치렀다고 여겨졌을 때 알려주마.”
폴른이 이를 악물었다. 그가 말하는 죗값이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없었다.
이리 말해놓고 또 갑자기 죗값을 더 치러야 한다며 안 가르쳐주면 자신만 낭패였기 때문이었다.
“허튼 생각 마라. 피의 주인은 오롯이 나만 쓸 수 있고, 나만이 가르쳐줄 수 있으니까.”
“……망할 놈. 그럼 기한이라도 정해 줘라.”
“그걸 기한으로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냥 가라. 없던 걸로 하지. 대신 지금 당장 죽이지는 않으마. 근데 또 악행을 저지른 게 내 귀에 들어오면 넌 그 즉시 죽는다.”
렌이 그를 버려두고 먼저 걸어갔다.
그런 그를 다급히 따라온 폴른이 무릎을 꿇고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할게! 한다고! 뭐든 한다!!”
렌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드리웠다. 물론, 폴른은 보지 못했다.
* * *
폴른을 보내고 렌은 로자리아 왕국으로 향했다.
“렌, 왔느냐.”
“그래. 얼굴이 많이 좋아졌네?”
카리나의 미모가 몇 달 새에 물이 오른 듯 더 아름다워졌다.
마법사의 경지가 올라서 그런 건지, 따로 관리라도 받는 건지.
렌은 새삼 그녀를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부끄러우니, 그리 보지 말거라.”
그녀가 뺨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렌이 품에서 새벽의 여명을 꺼냈다.
에르제브의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물이다.
“그러고 보니 빌려 가서 주지 못했었지. 자.”
“아.”
그것을 받아 든 카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달라진 것 같구나.”
“고쳤어.”
“……뭐라고? 이걸 고쳤단 말이냐?”
“그래.”
렌 또한 마법의 경지가 5성의 끝자락에 이르렀고 마력 또한 충분했다.
그리고 에르제브의 국왕 셰인과 아엘리나, 에밀리아 등 영웅들의 도움으로 이것을 복원할 수 있었다.
“이거라면 로자리아 마법병단의 전력이 몇 배로 오를 거야.”
“너는 항상 만날 때마다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그럼 이제는 그만 찾아와야겠네.”
렌이 장난스레 말했고 카리나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다! 나는…, 더….”
“더?”
“더…, 더 보고 싶다.”
“……어?”
렌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새벽을 여명을 꾹 움켜쥐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렌이 살짝 웃었다.
“자주 올게.”
그 말에 카리나가 수줍게 대답했다.
“그 말 꼭 지키거라.”
* * *
3년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다.
렌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의 다짐대로 가족과 보냈다.
세이아와 레시아는 아르젠의 저택으로 갈 수 있었지만, 브릴런트가 좋다며 남았고, 덩달아 렌도 브릴런트에 남았다.
소가주라는 자리에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차기 가주를 위한 자리일 뿐.
사실 가문 내에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자리다.
회귀 후 몇 년간은 방랑자처럼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미친 듯이 훈련하고 싸우기만을 반복했다.
하지만 지난 1년은 검을 든 날이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평화로운 나날이 지속됐다. 영웅의 가호 덕분에 하는 모든 일이 잘 풀렸고 왕국은 더욱 번성했다.
지난 전쟁의 여파는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회복되었고 브릴런트 왕국은 그 어느 때보다 강성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예전에는 바란, 로자리아, 신성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는,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국가였지만, 이제는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도 좋을 만큼 성장했다.
고작 3년이라는 시간만에 말이다.
“오빠!”
렌은 데케인 마법 아카데미로 향했다.
그곳에서 렌을 기다리던 레시아가 그를 반겼다.
“얼굴 많이 좋아졌네? 요즘엔 행정 일도 놓다시피 하고 마법에 푹 빠졌다고 하던데.”
“히히, 오빠에 비하면 아직 한참 모자라지만, 벌써 마력을 외부 힘에 개입하는 데 성공했다고!”
1년 전부터 렌의 제안으로 마법 아카데미에 들어간 레시아는 마법과 제법 잘 맞는지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벌써 중급반의 최상위 그룹에 속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속도. 다른 이들이 3년 걸려서 중급반 최상위 갈 것을 그녀는 1년 만에 간 것이니 천재라 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근데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건 레시아를 가르치는 스승들이 너무 대단하다 보니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달까.
“거기 교수들과 같은 스승에게 조언을 받는데 그 정도는 당연하지.”
“치, 아엘리나 님도 나 정도면 재능있다고 해주셨거든?”
“……그래?”
이건 좀 의외였다.
그 깐깐한 아엘리나 님이 재능 있다고 말한 거라면 진짜 천재라는 건데.
“그래도 너무 자만하지 마라. 너보다 뛰어난 천재들이 안 보여서 그렇지 여기저기 있으니까.”
“알고 있거든?”
토라진 듯 고개를 돌린 그녀가 렌을 게슴츠레 보다가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아아! 그 천재가 혹시……, 카리나 언니의 배 속에 있는 그 아이를 말하는 건가아? 응?”
“그건 당연한 거고.”
뻔뻔한 렌의 대답에 레시아가 경악스런 얼굴로 그를 보았다.
“와…, 진짜로 얼마나 대단한 조카가 나올지 감도 안 와서 할 말이 없네. 대륙 최고의 마법사와 대륙 최강의 기사의 자식이라니!”
레시아가 되려 호들갑을 떨며 렌을 놀리듯 말했다. 하지만 렌은 당황하지 않고 더 뻔뻔하게 밀고 나갔다.
“그게 아니지.”
“……뭐?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최강의 기사가 아니라, 모든 방면으로 완벽하다고나 할까. 검도 잘 쓰고 마법도 뛰어나지, 활은 백발백중에, 무투술만으로도 따라올 자가 없고 거기에 은신술, 암행술은 암황조차 인정했고, 그 외에도 조각술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지 악기 연주하면 관객들이 빠져들어서 헤어 나오지 못하…….”
“그만! 그만! 아우! 사람들이 오빠를 얼마나 위엄 넘치고 멋있는 영웅님으로 보는데, 이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레시아가 렌의 입을 틀어막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근데 사람들이 다 하는 말인걸.”
“열 받아. 다 사실이라는 게 더 짜증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레시아의 얼굴엔 얕은 미소가 서렸다. 자신의 오빠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게 뿌듯했다.
“근데 여기는 갑자기 왜 온 거야?”
“아, 맞아. 너…….”
렌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응?”
“애인 생겼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렌의 물음에 눈을 휘둥그레 뜬 레시아가 멈칫하고.
“진짜…구나?”
렌의 몸에서 희미한 투기가 새어 나온다.
“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디 허여멀건 하고 얼굴만 번지르르해서 검 하나 제대로 못 들 것 같은 놈이랑 밤길을 걸었다는 말이 있던데.”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레시아가 당황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때.
“어? 근데 언니가 오늘 멜리사 여왕님이랑 같이 오빠 본다고 온다고 하지 않았어?”
“어?”
렌의 얼굴이 순간 창백하게 변하고.
“지금 시간 지난 거 같은데 왜 오빠가 여기-.”
바람처럼 사라진 렌을 보며 레시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오빠도 이럴 때 보면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구나. 휴우…, 큰일 날 뻔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