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63
제63화
어릴 때부터 특출나게 뛰어났거나 가문의 힘을 등에 업어 모든 것이 자신의 마음대로 흘러가던 놈들이 대부분 가지는 공통점이 있다.
사소한 것들은 무시하는 태도.
그 정도는 얼마든지 자신의 배경과 역량으로 무시할 수 있다는 게 그들의 머릿속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렌에게 달려드는 에반 마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카아앙!!
마치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검을 휘두르는 족족 그 방향으로 검이 날아온다.
카앙!!
“크윽!”
이럴 리가 없었다.
고작 이런 버려진 도시에서 자신의 검을 이리 쉽게 막는 놈이 있다니…….
“커헉!”
상대가 발로 찬 의자가 땅바닥을 굴러 발목을 휘감더니 균형을 무너뜨렸다.
다급히 몸을 일으키는데, 위에선 맥주가 흘러내린다.
“아아아아아악!!”
악을 내질러보았지만, 주변에서 비웃음 소리만 흐를 뿐이었다.
그쯤 되니 알 수 있었다.
상대의 실력이 자신보다 훨씬 위였음을.
후웅! 후웅! 후웅!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검이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뒤로 몇 보 물러선 렌이 잔뜩 충혈된 눈으로 추태를 부리는 에반 마샬을 나직하게 지켜보았다.
“후우…, 후우…….”
“이쯤 하지.”
이를 아드득 가는 에반이 끝까지 검을 곧추세웠다. 하지만 이전처럼 마구잡이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이제 알겠어? 눈을 똑바로 뜨고 현실을 직시해. 경지에 올라서고 싶다면 인정할 줄부터 알아야 하니까.”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가 사색에 빠졌다.
생각해보면 눈앞의 남자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증거는 충분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들고 있어도 구할 수 없던 암시장의 경매장 티켓을 이 남자는 가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실력자일 확률이 높다는 것일 터.
그저 아비트라리에 오는 것들은 전부 쓰레기에 하찮은 패배자들뿐이라는 편견과 고정관념들이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었음을 에반은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비켜!”
렌이 에반의 팔을 당기고 뒤에서 에반을 찌르려던 놈의 목을 베어 떨어뜨렸다.
등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핏물에, 에반이 고개를 돌리니 칼이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게 보였다.
애초에 같은 편이라 생각지도 않았지만, 눈앞의 남자를 죽이면 티켓을 빼앗을 수 있다며 응원하는 척이라도 하던 놈들이 상황이 틀어지자 바로 태도를 바꿔버리니, 에반은 지금껏 자신이 무엇을 했나 하는 회의감에 빠졌다.
“나를… 왜 구한 거지?”
“인생 선배로서 가르쳐준다고 하지 않았어? 정신 차려라. 이제 저놈들 다 같이 덤빌 테니까.”
렌의 말과 동시에 사방에서 들려오는 금속음.
저마다 검, 도, 창, 도끼 등등 무기를 꺼내든 인간들이 네 사람을 노리고 있었다.
“검 좀 쓴다고 하길래 믿어줬더니, 순 병신이었잖아?”
“그러니까 애새끼한테 뭘 맡긴다고 쯧.”
“문 막아! 곧 흑사회에서 간부들이 올 거다! 길 막아!”
렌이 비틀거리는 에반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살고 싶으면 나 따라와라.”
“…뭐?”
“네 몸 간수는 알아서 하라고. 뭐, 내가 너 지켜주기라도 할까?”
렌의 말에 주변을 한 번 쭉 훑어본 에반이 이를 악물고는 검을 움켜쥐었다.
“시끄러.”
테이블을 발로 차 다가오는 놈들을 밀어낸 에반이 앞으로 나선다.
“내가 길 뚫을 테니까.”
조금 전 싸움에서 꽤 지쳤을 텐데도 망설임 없이 달려가는 모습에 헛웃음을 지은 렌이 뒤로 물러났다.
“허세는.”
“어떡할 거야!”
“우선 밖으로 나가. 흑사회라는 놈들이 오기 전에 빠져나가야 하니까.”
주점 안에 있는 놈들의 실력이야 별거 없는 놈들이다.
하지만 앞으로 몰려올 흑사회 놈들이 문제겠지.
‘에반을 미끼로 내 힘을 빼놓고 잡을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여기 있는 놈들 하나하나 일일이 베며 도망가기에는 체력 낭비가 심하다.
“그냥 뚫고 가! 죽이려 하지 마!”
애초에 에반은 아직도 죽이는 게 껄끄러운지 단번에 급소를 치지도 못하고 있다.
이럴 바엔 그냥 최소한의 방어만 하고 몸을 들이미는 게 나았다.
콰과과과과광!!
사방에서 가구들이 부딪치고 흑사회 놈들이 바닥을 굴렀다.
단숨에 문을 박차고 뛰어나간 일행이 동시에 렌을 바라보았다.
“이리로!”
골목으로 들어가자 반대쪽에서 늑대를 탄 일련의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이런 씨.”
“여기 아니잖아!”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거야.”
뒤쪽으로는 조금 전 주점에서 따라온 놈들이 길을 막고 있다.
뚫는 건 뒤쪽이 쉽겠지만, 저 뒤로 가면 길이 좁고 한정적이라 도망가기 힘들다.
자칫 놈들이 저기에 몰려들면 더 답이 없었다.
“그냥 저것들 뚫는다.”
“내가 뚫어!”
렌과 에반이 앞장섰다.
“저기 있다!”
“달려! 멍청한 늑대 새끼들아!”
“크르렁!”
– 멍청한 주인 놈!
“크허어엉!”
– 부모님은 잘 계시냐!
늑대들의 말이 자연스럽게 해석됐다.
어딜 가나 비슷한 늑대들의 인사법을 무시한 채 렌은 단숨에 늑대 위에 올라탄 라이더들을 베어내고 늑대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크르라아악!”
– 이제 내가 네 주인이다!
렌이 자연스럽게 늑대 말을 내뱉자, 주변 다른 이들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미친놈이었나?”
“늑대 말을 따라 하는 거야?”
“이제는 하다 하다 자기가 늑대인 줄 아는 놈도 오는군.”
흑사회원들이 렌을 미친놈 보듯 보았고.
“뭐야? 왜 저래?”
“……괜히 따라왔나.”
“아니, 우리 사수님 진짜 늑대 말 할 줄 알아!”
이전에 렌의 늑대 말을 들었던 레이먼만이 렌을 옹호했다.
“크르렁?”
– 뭐야?
“카라라락!”
– 너 늑대였냐!
렌은 대답 대신 목줄을 조이며 늑대에게 힘을 가했다.
“에반! 너도 이 녀석 잡아!”
“나는 늑대 탈 줄 모른다!”
“그냥 타!”
에반이 얼떨결에 렌이 건네준 고삐를 잡았고.
“야야, 너희 내 말 잘 들으면 풀어 줄 테니까 얌전히 얘 태워라.”
“캬라락!”
– 정말이냐!
“크르르륵!”
– 좋다!
늑대를 탄 다른 흑사회원들도 때려눕힌 프랜시스와 레이먼도 늑대에 올라탔다.
“얘네 말 잘 듣네?”
“고삐 잘 잡아라!”
흑사회원들을 밟고 질주하기 시작한 늑대 넷.
조금 달리자, 또다시 몰려오는 흑사회원들이 보인다.
“야, 너희 쟤네가 뭐라는지 들었지?”
“크르르.”
– 뭘 말이냐?
“어디 쪽에 숨어 있다고 하든?”
“크락!”
– 모른다!
“우르크마! 카라라그르락!”
– 멍청한 놈! B4 구역에 있는다고 했다!
“오? 거기가 어딘데?”
“크락!”
– 모른다!
“이런 씨…….”
늑대들과 대화하는 렌의 모습을 본 에반과 프랜시스가 신기한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진짜 대화하는 거 맞아?”
“그냥 미친 거 같은데…….”
입을 멍하니 벌리고 렌의 뒷모습을 보는 둘.
“크르라라라락! 카락! 코록!”
“우락카락카!”
“카라그라라가.”
“구카구카라가! 크라크룩!”
무슨 정말 대화를 하는 것처럼 서로 알 수 없는 울음소리를 주고받고 있으니 안 믿을 수도 없다.
“이리로 가자. 저쪽에도 숨어 있단다.”
렌이 이리 말하면 정말로 그쪽에 적들이 숨어 있었다.
“와…, 진짜 대화하는 거야?”
프랜시스가 감탄하며 말했고 레이먼은 어깨를 들어 올리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요? 진짜 하실 줄 아신다고.”
렌이 사막 원정대에 합류했을 때 흑랑들과 대화를 했다는 건 알만한 이들은 아는 이야기였다.
“저…….”
에반이 쭈뼛쭈뼛 렌의 근처로 다가가 그를 불렀다.
“왜?”
“그 늑대 말 어떻게 하는 겁니까?”
“……뭐?”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보는 렌.
“그……, 인정하라고 했잖습니까? 저도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인정하고 배우고 싶다는 겁니다.”
‘검술이나 배울 것이지, 얘는 또 왜 이래?’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얘는 또 머리 아프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렌은 손을 내저으며 무시했다.
“좀 알려주십시오!”
“근데 너 왜 갑자기 존대하냐?”
“……해야…될 것 같아서…….”
에반의 볼이 살짝 발그레하게 변했다.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아직 애라는 게 또 새삼 느껴졌다.
“아무튼 늑대 언어는 아무나 못 배워. 관심 꺼라.”
렌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시무룩해진 에반이 뒤로 살짝 물러나며 자신이 깔고 앉은 늑대를 보았다.
“……크르르.”
그리고는 렌이 했던 것처럼 슬쩍 따라 해봤다.
“…….”
앞으로 열심히 내달리던 늑대가 고개를 비틀더니, 비웃음 가득한 눈초리로 에반을 곁눈질하고는 피식 웃는다.
“크륵.”
– 등신.
그 모습에 얼굴이 더 벌게진 에반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썅.”
* * *
흑사회의 간부들은 늑대들을 타고 다녔고 그 덕에 렌은 시끄러운 늑대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적들의 이동 방향이나 매복지를 미리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중앙 구역 안쪽 입구까지 다시 들어올 수 있게 된 네 사람은 안쪽에 들어가기에 앞서 어떻게 할지 의논했다.
“쯧, 처음부터 그냥 ‘레이크’에서 묵었어야 했나.”
“그…, 몰래 숙소를 잡으면 모르지 않을까? 레이크는 너무 비싸잖아!”
“안쪽으로 가면 확실히 흑사회 놈들도 못 오는 거 맞습니까?”
에반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대신 숙소를 잡지 못하면 아무리 중앙 안쪽 구역이라도 밤에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지.”
“레이크라는 그 숙소가 얼마나 비싸길래 그럽니까?”
“얼마나 비싸기는? 하루에 100골드라고! 거기다 인원 추가하면 50골드! 그 돈이면 도대체 생활비가 얼마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가락으로 셈을 세던 프랜시스가 다시 생각해봐도 경악스러운지 입을 벌리고 다물질 못했다.
“100골드? 1,000골드가 아니라?”
“……어?”
“하, 그런 실력들을 가지고 왜 이렇게 푼 돈에 절절매는 거야?”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프랜시스와 렌을 바라보는 에반.
그가 느닷없이 고삐를 틀어쥐고 앞으로 나선다.
“어디가?”
“그 레이크라는 숙소로 가면 되는 일이잖아? 뭘 고민해?”
“못 들었어? 거기 돈이 얼만데? 뭐 너 돈 좀 많은가 봐? 네가 우리 것도 내줄 거야? 아니면 난 못….”
“내줄게.”
“…가악? 뭐? 내준다고?”
프랜시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준다고. 그니까 오기나 해. 그…, 선…배님도 오십시오. 제가 내드리겠습니다.”
“선배님?”
“아, 아까 선배님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같은 검사로서 선배님이 맞으시죠. 인생 선배…뭐, 그것도 맞다고 칩시다.”
코웃음을 친 렌이 에반을 뒤따랐다.
“야야, 내가 먼저야!”
레이먼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에반에게 소리쳤다.
“뭐가 먼저라는 거야?”
“내가 사수님 밑에 먼저 있었어. 자식아.”
“뭐라는 거야? 난 선배님 밑으로 들어갈 생각 없다.”
“그래? 멍청하네. 사수님 밑에 있으면 얼마나 검술을 잘 가르쳐주시는데.”
“뭐? 검술을 가르쳐줘? 정말?”
그 말에 눈을 반짝인 에반이 렌을 바라본다.
아까 렌과 잠깐 검을 섞었지만 에반이 느낀 렌의 검술은 이전까지 겪었던 다른 이들과 무언가 조금 달랐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묵직함과 밀려 들어오는 압박감.
검술 자체에서부터 그 격의 차이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는군.’
생각에 젖어 열심히 내달리자, 어느새 레이크 앞에 도착해 있었다.
“수고했어. 멍멍아.”
프랜시스가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방을 잡고 오겠습니다.”
“같이 갔다 와.”
“옙!”
에반과 레이먼이 안으로 들어갔다.
렌과 프랜시스는 바깥에서 늑대들과 함께 대기했다.
“쿠르르락!”
– 우리 언제 보내주냐!
“기다려, 일 끝나면 도시 밖으로 내보내 줄 테니까.”
“카라가락!”
– 알겠다!
의외로 순종적인 녀석들이다.
흑사회 놈들이 길들여 놓아서 그런 건지, 그런 놈들을 길들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후 에반과 레이먼이 나왔다.
“늑대들도 다 맡아준다고 합니다.”
“그렇게 돈 받아먹는데 당연하지!”
“고맙다.”
“아닙니다. 아, 그……, 저는 에반 마샬이라고 합니다.”
에반이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난 렌 아르젠이다.”
“레이먼, 사수님의 오른팔이지.”
“프랜시스야. 고마워. 우리 친하게 지내자.”
프랜시스가 강제로 에반의 손을 낚아채 악수했다.
“그, 그래. 근데 선배님 아르젠 가문의 사람이셨습니까?”
에반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어릴 때 가문에서 나왔어. 성만 아르젠이지 아르젠이 아니다.”
“아……, 그러셨구나. 알겠습니다.”
“올라가자. 오늘은 여기서 푹 쉬자고.”
에반 덕분에 네 사람은 각자 방에 들어가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를 풀 수 있었다.
* * *
암시장 경매가 시작되는 날은 이틀 뒤 자정부터 시작이다.
아비트라리의 낮과 밤은 완전히 다르다.
빛이 밀려나고 어둠이 자리 잡은 그 시간대에는 낮의 시민들이 알지 못하는 음험하고 더러운 일들이 암암리에 벌어진다.
렌은 숙소의 소파에 앉아 낮에 받았던 티켓을 꺼내 들었다.
네모난 검은색의 티켓.
암시장 경매에 입장할 수 있는 이 입장권은 보잘것없는 이 외관과는 다르게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만한 가치를 지닌 곳에는 그만한 힘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모이는 법.
‘어떤 이들이 왔을지 기대가 되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음지에서 활동하는 권력가들이 양지에서 사용하는 가면을 벗고 본성을 드러내는 장소.
긴장을 놓치는 순간 위험해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조심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