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digger of the Fallen Kingdom RAW novel - Chapter 75
제75화
똑똑.
가볍게 두드린 방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문이 열리자, 레시아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오빠!”
행정보좌관이 있는 집무실은 생각보다 넓었다. 그리고 그곳은 대부분이 서류로 가득 차 있었다.
“아, 이번에 새로 부임하셨다던 금사자 기사단의 임시 기사단장님이시군요.”
“렌 아르젠입니다.”
“행정보좌관 리차드입니다.”
나와 리차드가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바쁜데 온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안 그래도 좀 쉬려던 참이었지요. 레시아, 단장님과 잠시 시간을 보내고 오거라.”
“네, 감사해요.”
리차드의 흔쾌한 수락에 나는 레시아와 함께 잠시 밖을 나가 걸었다.
“일은 어때?”
“어렵긴 한데, 괜찮아. 흥미롭기도 하고, 보람차기도 하고?”
“그럼 다행이네.”
서로가 너무 바빠지다 보니, 제대로 대화할 시간이 부족했다.
이렇게 여유롭게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게 얼마 만인가.
나와 레시아는 서로 그간 못 나눴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고충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힘든 건 하는 일이 많은 것 빼고는 딱히 없는 거야?”
“응. 그것 빼고는 괜찮아.”
레시아의 표정이 미묘했다.
내가 아니라면 딱히 이상한 점을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아주 미세한 차이.
이건 분명히 무언가 걸리는 게 있다는 거다.
“진짜 없어? 내가 널 본 게 몇 년인데. 솔직히 말해봐.”
“……아니야. 정말 없어! 괜찮아!”
애써 웃음 지으며 환한 모습을 보여주는 레시아.
이렇게까지 말 안 할 정도면 이미 이 녀석의 입으로 듣기는 그른 상태다.
‘그 늙은이가 접근한 건가?’
슬슬 그런 시기가 되긴 했다.
제인 공주에게 레시아를 부탁해 놓기는 했지만,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상 제인 공주도 레시아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할 수도 있다.
레시아가 힘든 것을 잘 이야기하지 않기도 하고.
“그래? 그럼 다행이고.”
나는 모른 척 넘어가며 레시아와 이야기를 끝내고 그녀를 돌려보냈다.
널찍한 복도를 지나고 있을 때, 저 멀리 어딘가 낯익은 인간이 걸어오고 있다.
“이게 누구신가? 렌 아르젠 임시 기사단장이 아니신가?”
고급스런 옷을 칭칭 감고 있는 백발의 노인.
얼굴에 가득한 기름진 탐욕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언제 봤다고 아는 척이지.’
불편한 속내를 숨긴 채, 나는 웃으며 그를 반겼다.
“추밀원의 퍼번트 베셀러 님이시군요.”
“오, 나를 아는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임시 단장께서 뭘 좀 아는구만. 그래. 무슨 일로 여기까지 행차하신 건가?”
노인의 입가에 불쾌한 미소가 슬며시 드리운다.
분명 레시아를 만나고 왔다는 걸 알고 묻는 것이었다.
“동생을 만나고 왔습니다.”
“아, 그런가? 이거 동생 사랑이 지긋한 오라비셨군.”
“제가 좀 아끼는 동생이라서 말입니다. 하하.”
“그런가? 동생이랑 이야기는 잘 나눴나?”
“예, 그간 제대로 대화를 못 해서 이참에 그간 안부도 듣고 그랬습니다.”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묻는 것이, 아마 자신의 이야기가 나올까 그런 것 같다.
‘확실히 접촉이 있긴 했나 본데.’
레시아가 딱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가볍게 만나서 이야기를 한 정도인 것 같다.
그 와중에 이 변태 늙은이가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군. 나중에 동생이랑 같이 내 저택에 한번 놀러 오게나. 내가 제대로 대접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넓으신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그걸 이제야 알다니. 너무 훈련만 하고 산 것 아닌가?”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다음에 한 번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꼭 오게나.”
“예.”
그 말을 끝으로 퍼번트는 갈 길을 떠났다.
혹시나 레시아가 있는 곳으로 가나 싶어 확인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확실히 저 늙은이 눈에 들었군.’
아직 저 변태 늙은이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단계는 아닌 듯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할 듯했다.
그전에 어떻게 모가지를 따든지 늑대 밥으로 주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속이 느글거리네.”
쉽게 레시아를 건드리지는 못할 것이다.
전생과 다르게 지금의 내 영향력이 전과 다르기 때문에.
뭐, 이 정도의 힘으로 저 늙은이의 변태적 기질을 다 막을 순 없겠지만, 어느 정도 억제는 되겠지.
그 전에 처리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 * *
여느 때처럼 데케인에 모여 있던 레이먼과 아델린 그리고 일이 끝나고 올라온 제넌이 옹기종기 모여 훈련에 집중하고 있다.
밤이 되어 어두워진 데케인 곳곳의 횃불이 어둠 사이로 방문자를 비췄다.
저벅. 저벅.
흙과 풀이 밟히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세 사람이 표정을 굳히고 경계심을 키웠다.
“누구…십니까?”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남색 머리카락.
둥그런 안경 뒤쪽의 눈가에는 자그마한 주름이 멋들어지게 접혀 있다.
허리춤에는 검이 걸려 있고 옷은 한눈에 보아도 고급스러운 재질이다.
“렌 아르젠은 없나 보군.”
중년의 남성이 시선을 가볍게 돌리며 말했다.
“사수님을 왜 찾는 거야?”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지.”
“렌 님은 지금 여기 없어요.”
“그럼 어딨지?”
남자는 여전히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가 내뿜는 특유의 무거운 분위기에 세 사람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이 누군데 우리 사수님의 위치를 묻는 거야?”
보다 못한 레이먼이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는 남자.
“뭐 한 판 해보자는 건가?”
“못할 것도 없지.”
레이먼의 옆으로 제넌과 아델린도 나란히 섰다.
여차하면 다 같이 덤비겠다는 뜻이었다.
“재밌는 놈들이군. 셋이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귀여운 조카들을 보는 듯 싱긋 웃는 그 모습에 아델린의 얼굴이 발그레 붉어졌다.
그리고 그런 아델린을 황당하다는 듯 보는 레이먼이 한마디 했다.
“야, 너 무슨-.”
그때 들려오는 또 다른 발소리.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렌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숙부님?”
“예에?”
“숙부님이라고? 저 사람이?”
“어머.”
숙부라는 말에 세 사람은 안심하고는 긴장을 풀었지만, 렌은 오히려 더 그를 경계하며 움직였다.
“오랜만이구나.”
“예. 정말 오랜만이네요.”
“이야기 좀 할까?”
그리 말한 그가 옆에 덩그러니 선 세 사람을 흘긋 보았다.
그 눈짓의 뜻을 파악한 셋이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우리는 잠깐 다른 곳에 가 있을까?”
“그러자.”
세 사람이 사라지자, 숙부가 천천히 데케인을 거닐었다.
“이곳도 참 오랜만이구나.”
“왜 오신 겁니까?”
“내가 못 올 곳을 온 건가?”
“원체 관심 없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근데 관심이 다시 생기더군.”
하벤베르크의 묘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춰 선 그가 렌을 돌아봤다.
“스칼렛을 만난 적이 있더냐?”
“있습니다. 그야 사막에서-.”
“그때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 이후에 말이다.”
렌은 그 순간 그가 무엇을 궁금해하고 무엇을 생각하며 이곳에 왔는지 직감했다.
클레타 아르젠.
아버지의 동생이자, 가주 경쟁에서 밀려 브릴런트에 좌천당하여 이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검사.
스칼렛 또한 그가 거주하는 아르젠의 저택에 있으니, 아무래도 어떤 식으로든 그녀가 훈련하는 모습을 봤을 확률이 높다.
‘월격……. 아마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스칼렛의 월격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는 뜻이겠지.’
그 싸움광이 월격을 터득하기 위해 온종일 검을 훈련하고 있었을 테니, 아마 옆에 누가 온들 집중에 빠지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월격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으니, 그것을 알아채고 의심한 숙부가 여기까지 찾아오게 된 것일 터.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군.’
스칼렛이 월격을 스스로 완성할 수도 있으리라곤 생각했다.
하지만 그 괴랄한 기술을 아무런 도움 없이 홀로 벌써 성과를 낼 줄은 몰랐다.
‘확실히 가장 의심 가는 인물은 나뿐이다.’
몇 년 전에 그렇게 무기력하게 가문을 떠났던 렌 아르젠이 갑자기 상급 기사가 되어 세상으로 튀어나왔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그리 특출나지 않았던 녀석이 말이다.
의심할 이유는 충분했다.
“스칼렛 누님을 봤습니다. 저를 쫓아 사막에서 홀로 왔더군요.”
“그래서?”
“그래서 한 판 붙었습니다. 물론 제가 졌지만요.”
“……스칼렛이 붙자고 했단 말이냐?”
“예.”
그의 얼굴이 조금 복잡하게 변했다.
아마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오가고 있겠지.
“너는 아르젠의 절기들을 배우지 못했지.”
“예.”
“혹 아르젠의 절기를 쓸 줄 아느냐?”
“모릅니다.”
정말 모른다.
하벤베르크 검술의 절기라면 모를까.
“네가 아르젠 검술 제1 절기 장막 찌르기를 펼쳤다는 말이 있던데, 그게 사실이 아니란 말이냐?”
“아르젠의 절기와는 다른 기술입니다.”
“……그럼 무슨 기술이라는 거지?”
“제가 고안한 기술입니다.”
“네가 만들었다? 아르젠 검술과 비슷한 기술을?”
“예.”
“그걸 믿으라는 게냐?”
“믿지 못하면 어쩌시겠습니까? 저는 벌써 수년 전에 가문에서 나왔고, 가문의 절기는 먼발치에서 몇 번 본 것이 전부인 것을요.”
“…….”
믿기진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렌의 말처럼 그가 가문 내에서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은 온 가문 사람이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클레타는 아르젠의 검술을 먼발치에서 본 것만으로 재현해내고 그것도 모자라 검술을 개량해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정도의 재능이라면 이미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겠나?
‘그것도 아니라면……, 어릴 때부터 미래를 생각하고 둔재인 척을?’
클레타는 렌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이제야 실력을 드러낸 이유는 준비가 됐다는 뜻인 건가?’
자신의 안목이 제법 뛰어나다고 믿어왔던 클레타는 그 믿음이 틀렸음을 직감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렌이 어떤 이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한 번 봐도 되겠느냐?”
“뭘 말입니까.”
“네가 스칼렛에게 보여주었던 그 기술. 나도 한번 보고 싶구나.”
“그것 때문에 오신 거였군요.”
“그래, 스칼렛이 하도 소란을 피워서 말이지.”
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초혼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양지로 모습을 드러내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열심히 훈련했던 것도 맞으니.
“정말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구나. 네가 아르젠의 검술을 어떻게 바꿨을지 기대가 된다.”
“막아보십시오. 숙부님이라고 봐 드리지는 않을 테니.”
“좋다. 네가 아르젠인 것처럼 나 역시 아르젠이다. 경쟁에 밀려났다고 해도 그 피는 여전히 내 몸에 흐르고 있지. 오거라.”
– 당당한 기세는 마음에 드는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하벤베르크가 한마디 던지고는 렌의 몸으로 들어갔다.
[강령 – 하벤베르크 아르젠]
– 오오오……, 아르젠과 아르젠의 대결이라니. 재밌겠는데? 이 재밌는 걸 내 후계자는 보지 못하다니! 쯧, 바보 같은 녀석. 다음에는 어디 숨어서…….
포터가 그리 중얼거리며 주변을 보았는데 이미 아델린을 포함한 세 사람이 저 멀리 나무 뒤편에 숨어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 역시 내 후계자군. 눈치는 참 빨라.
급격하게 변해버린 분위기.
초혼을 움켜쥔 렌의 눈빛이 일변했음을 파악한 클레타가 침을 꿀꺽 삼키며 발검했다.
‘확실히, 무언가 달라졌군.’
조금 전까지 보여지던 빈틈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주변에 흐르던 공기마저 렌을 중심으로 흐르는 듯한 이 압박감.
내심 조금은 가볍게 생각했던 그 마음이 한순간에 씻은 듯 사라졌다.
후웅- 후웅- 후웅-
가늘게 흔들리던 횃불이 하나둘 꺼지더니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기를 통해 상대의 위치를 가늠하던 클레타는 시간이 흘러도 어둠에 적응하지 않는 눈동자를 인식하고는 호흡을 멈췄다.
‘이미 공간이 지배당한 건가……!’
스칼렛이 연습하는 기술을 보며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 정도가 확연히 차이 났다.
아니, 같은 기술을 연습하고 있던 게 맞기는 한 건가?
“흡!”
바로 코앞에서 느껴지는 베기.
분명 렌의 기척은 저 앞에 있는데 검격은 코앞에서 나타났다.
카가가각!!
기와 기가 만나 얕은 충격파를 퍼트리며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새하얗고 푸른 달빛.
눈을 부릅뜬 클레타가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빛무리를 바라보다가 그 달빛을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저었다.
하지만 어찌 검이 빛을 벨 수 있을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해낼 수 없다는 그 아득한 격차를 느낀 클레타의 온몸이 검기에 난자당해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허억…. 허억…….”
잔뜩 충혈된 눈동자가 고개를 들어 렌을 보았다.
“숙부님이라고…, 봐주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충격에 휩싸인 클레타를 향해 숨을 몰아쉬던 렌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