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ity 10000% Catastrophic Player RAW novel - Chapter 33
* * *
악마를 썰어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던 강성태의 시선이 잠시 레라지에에게 머물렀다.
‘설마 알아보는 건 아니겠지.’
기껏 메인 퀘스트의 목표를 초과 달성해 생포한 고위 악마가 [징벌의 망치]에 묵사발이 되는 꼴을 보나 싶었는데.
다행히 강성태의 눈빛은 ‘웬 고양이?’ 하는 눈치였다.
그 의문의 눈빛이 ‘설마’로 바뀔세라.
이성우가 입을 열었다.
“놈은 패퇴했습니다. 죽진 않았지만, 왔던 곳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하아, 신이시여.”
“겨우······ 끝난 겁니까?”
강성태와 오정훈이 차례로 탄성을 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극한까지 치솟았던 긴장감이 일거에 해소되면서,
다리가 풀린 모양이었다.
‘확실히 고위 악마는 간단한 상대가 아니었다. 놈이 방심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농락당하다 죽었겠지. 역시······.’
힘이 필요하다.
더 많은 힘이.
“이보게, 이성우 플레이어.”
“예.”
강성태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묻고 싶은 것이 정말 한가득이야.”
이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 징벌기사 강성태라도, 방금 일을 겪고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더욱이 신성기사단은 그 이름처럼, 멸악을 기치로 내세우며 명예와 책무를 중시해온 집단.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은 대항하기 어려운 유형의 악을 상대하는 데에 특화된 터라 프라이드도 강하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악마란 존재에게 된통 당했으니.’
단지 레라지에가 등장한 것만으로 반 수 이상의 기사단원이 무력화되고 말았다.
언제 이런 일을 겪어보았겠는가.
“······하지만 이 말부터 해야겠군.”
강성태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이성우 앞에 허리를 숙였다.
“덕분에 살아남았네. 감사를 표하네.”
의외였다.
프라이드 높은 기사단 내에서도 가장 자부심 높기로 유명한 강성태.
그가 이렇게 허리를 굽히다니.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사단이 함께 싸워주지 않았더라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성우가 강성태를 일으키려 했지만, 오히려 옆에 있던 오정훈도 허리를 숙였다.
“터널 안에서부터 줄곧 신세를 졌습니다. 고맙습니다.”
“두 분, 여기서 이러시지 마시고. 어서 허리 펴시죠.”
“아닙니다. 저는 자만에 취해 터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오판을 범했습니다. 이성우 플레이어가 아니었다면, 이미 한참 전에 조원들과 함께 저세상에 가 있겠죠. 백번 머리를 박아도 부족합니다!”
이성우는 난감해졌다.
“그게 아니라······ 지금 저희를 지켜보는 눈이 무척 많습니다.”
“아?”
기사단의 두 사람이 이성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관리국의 차단선 바깥엔······.
방송국 차량과 취재진, 시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숨죽인 채 이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두 사람이 허리를 펴고 헛기침하며 체면을 차리기 시작했다.
“흠흠. 오 조장, 사령부에 균열 공략 성공 소식을 타전하도록.”
“예······.”
균열 봉합, 전투 종료.
소식이 전해지자, 곧바로 이능대응군과 구조대가 진입해 터널에 고립되었던 시민들을 구출하기 시작했다.
“승아야!”
“아빠!”
죽는 줄만 알았던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사랑하는 가족들과 부둥켜안는 사람들.
그들을 둘러싼 취재진으로 현장에 일대 혼란이 빚어졌으나.
고통과 절망이 아닌,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다는 안도감과 놀라움으로 가득한 분위기라.
소란이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성태가 슬그머니 이성우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마지막의 그 일격은 정말 굉장하더군.”
“감사합니다.”
“후폭풍에 휘말려서 하마터면 기사단이 전멸할 정도였으니까.”
“······.”
뭐지? 시비를 걸러 왔나?
“농담이야. 설마하니, 아무도 뽑을 수 없다는 문무왕의 대검을 가졌을 줄이야.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토록 빠르게 강해졌나? 비결 좀 나눠주지.”
‘비결이라. 나야 스킬 노드가 생긴 덕분이지만, 기사단엔 의미가 없을 텐데.’
하지만 강성태가 워낙 눈을 빛내는 탓에 뭐라도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음. 아침저녁으로 체력단련을 합니다.”
“끙. 그런 거야, 우리도 늘 하는 건데.”
“맨몸이 아니라, 중력을 무겁게 만들어서 합니다.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면서 특성을 유지하는 건, 나름 훈련이 되거든요. 제 경우는 운동강도도 올라가기도 하고요.”
“호오······. 우린 중력 능력자가 없는데, 그 방식을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까.”
“글쎄요. 플레이트 메일을 걸친 상태로, 신성력 뿜어내면서 훈련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거 좋군! 내 꼭 해보고 결과를 알려 주지.”
이성우는 괜히 신성기사단에 독을 푼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특성 훈련과 육체 단련을 일원화하는 건, 실제로 훗날 정석으로 자리 잡는 트레이닝법이니까. 고생은 좀 하겠지만, 신성기사단은 더욱 강해질 필요가 있다.’
“그런데 자네 말이야.”
“······?”
“민간길드 같은 건 그만두고, 우리 신성······.”
“안 합니다.”
한 번 갔던 군대를 또 가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아니, 조건이라도 좀 들어보고······.”
그때, 뜻밖의 구원자가 등장했다.
관리국장 정찬석.
그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강성태 앞을 막아선 것.
“어허이, 강성태! 지금 누굴 함부로 빼가려고 하나?”
“정찬석이! 스카웃 제의야 자유 아닌가!”
성미가 불같은 두 남자의 만남.
심지어 이들은 유명한 앙숙이었다.
‘이 둘 사이에 끼면 피곤해진다.’
이성우는 슬금슬금 그들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정찬석이 그를 붙잡고 목소리를 낮췄다.
“방금 그 엘프, 엄청난 마기를 방출하더군. 홍 소장이 만든 계측기가 타버릴 정도였어. 분명 강한 놈이였겠지?”
이성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찬석이 마른세수를 했다.
“허,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 건지. 그런 게 예고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오다니.”
“마기······? 관리국은 뭔가 알고 있나 보군? 내 각성 이후로 그토록 강대한 악은 처음이었다. 스스로 지옥에서 왔다고 밝히던데, 놈의 정체는 악마인가?”
혼란에 빠진 두 사람을 바라보던 이성우는,
이들에게 약간의 정보를 공유할 필요성을 느꼈다.
‘어차피 나 혼자서 모든 악마를 상대할 순 없는 노릇이니.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풀 건 풀어야겠지.’
“국장님, 기사단장님. 긴급히 회의. 가능하겠습니까?”
정찬석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자네가 원한다면.”
강성태의 호응도 이어졌다.
“관리국까지는 거리가 있으니, 내 집무실로 갑시다. 기사단 본부가 이 근처니.”
* * *
그날 저녁,
회의에 참석했던 이성우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어휴, 삭신이야.”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하긴 요새 거의 쉬질 못했으니.’
당장 오늘만 해도 아침부터 균열을 봉합하느라 싸우기 시작해서,
대뜸 현세에 강림한 레라지에를 상대하고,
높으신 분들 모인 자리에 배석해 세 시간 넘는 회의에 고통받았다.
무심코 틀어놓은 TV에선, 온통 남산 균열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그 후 남산 1호 터널 남쪽 입구에 나타난 균열지기는 하이엘프였습니다. 민첩한 속도와 능수능란한 활 솜씨에 신성기사단이 고전을······.
이성우는 앵커의 멘트를 듣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대로 정리됐군.’
터널 내 민간인 대피 이후 열린,
신성기사단과 관리국의 공동 회의.
거기서 관리국은 악마의 존재를 신성기사단 한정으로 공개하고.
고위 악마 레라지에의 존재는 균열지기 하이엘프였던 것으로 공표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나날이 게이트 발생 빈도와 등급이 증가하는 추세라, 사회 불안도가 높은 상황.
‘괜히 대책 없이 사실을 공개했다간 더 큰 혼란이 초래될 수 있으니까.’
악마에 관한 정보는 당분간 관리국, 신성기사단, 이성우의 태성 길드 삼자끼리만 공유하며······
공동으로 대응해나가기로 했다.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로부터는 신성기사단이 아니라, 얼마 전 화제를 일으켰던 측정 불가급 이성우 플레이어가 주된 역할을 해냈다는 증언이 쏟아지고······.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돌리던 이성우는,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걸 듣고 화면을 바라봤다.
터널 내에서 그림자 마수의 파도를 막아내는 그의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차 안에서 시민이 촬영한 듯, 화질이 선명하진 않았지만.
이성우의 활약은 충분히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역시 이건 통제가 안 됐나.’
필요 이상의 주목을 받는 건 사절이라,
관리국에 보도 통제를 요청했지만.
이번 일은 게이트 내부에서 벌어진 사건도 아니라, 목격자가 한둘이 아닌 터라 어려울 건 예상했다.
‘뭐, 상관없지.’
무슨 일이든 장단점이 있는 법이다.
괜히 유명해진 탓에 누군가 목숨을 노리고 덤벼든다면 카운터를 먹여주면 될 일이고.
‘이러면 앞으로 활동하면서 인지도 부족 탓에 안 엮여도 될 일에 연루되는 시간 낭비를 피할 수 있겠지.’
더욱이 길드 마스터가 유명세를 떨치면, 길드를 굴리기도 여러모로 유리해질 터.
그렇잖아도, 아까 길드 실무를 맡겨놓은 권태성이 호들갑을 떨면서 전화를 했던 참이었다.
―야, 성우야! 지금 SNS가 너 때문에 난리야, 다 때려 부수고 날리고······. 지금 그것 때문인지 길드 지원자가 막 폭증하고 있다니까?
“잠깐, 잠깐. 형, 흥분한 건 알겠는데 잠깐 진정하고. 이런 일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이미 정해놓은 노선대로 가는 거야.”
―어, 당연하지. 선발은 정소현 팀장이랑 상의해서, 신성력 사용자는 별도 확보. 잊지 않았어.
“좋아, 앞으로도 그렇게만 잘 부탁해.”
아직까진 모든 게 순조로웠다.
북촌 변칙 게이트부터, 서울 빌런 조직 ‘육익’의 소탕, ‘블랙 타이드’와의 두 번의 조우, 균열 봉합과 레라지에 생포까지.
첫 단추를 잘 끼우자, 그 결과가 다음 스테이지에서 좋은 영향을 발휘하는 선순환.
소위 스노우볼링이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극복해야 할 이벤트가 많다. 이 선순환을 계속해서 이어가야 해.’
그러려면 할 일이 많았다.
균열지기 거북을 죽이고 얻은 ‘저주받은 아다만티움 주괴’도 [초신성 용광로]에 집어넣어야 하고,
최초 업적 보상으로 받은 ‘중력석 꾸러미’도 열어봐야 한다.
[별의 회랑]으로 들어가, 얻은 중력석으로 노드도 채워야 한다.‘어휴, 바쁘구만.’
그리고 무엇보다······.
[불의의 습격]이라는 이름의 메인 퀘스트의 후속으로 생겨난 히든 퀘스트.『히든 퀘스트 – 악마 길들이기』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악마를 ‘자발적 협력’ 상태로 만들어라.
보상 : 펫 상점 개방
이걸 클리어해야 한다.
‘이전 회차에 북촌부터 대구까지, 온갖 학살을 저질렀던 놈을 협력 관계로 만든다는 게 마음에 안 들지만.’
보상에 표기된 ‘펫 상점’은 [드루이드]나 [다종 친화]처럼 타 생물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특성 보유자에게나 개방된다고 알려진 시스템.
‘어쩌면 내게도 쓸만한 기능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런 시스템은 개방하면 할수록 이득이다.
더욱이 놈은 고위 악마들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쥐고 있을 터.
앞으로 고위 악마들을 상대하려면 ‘진명’ 확보는 필수적이다.
어쩌면, 레라지에는 놈들의 진명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될는지도 모른다.
레라지에 녀석은 알까?
이 히든 퀘스트와 나름의 쓸모 덕분에 특별연구소 지하에서 고문당하는 신세를 면했다는 걸?
이성우는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 한쪽에 던져두었던 케이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나와.”
그러자 검은 고양이가 튀어나와 하악질을 해댔다.
“빌어먹을 필멸자······ 저 악랄한 이동 감옥에 이 몸을 감금하다니. 내 영지의 군단이 널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 악마들에게도 충성심이라는 게 있나?”
“하, 충성심? 너희 필멸자들은 그런 하찮은 감정에 의지할지 몰라도, 우린 다르다! 힘! 오직 압도적인 힘으로 군림할 뿐이지.”
이성우는 턱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강력한 힘으로 군세를 거느렸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러면 네 부하들이 여전히 너를 따를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뭐?”
“그렇잖아. 네 꼴을 봐. 힘도 모조리 봉인된 모양인데, 걔들이 널 알아보기는 할까?”
“······.”
“오히려 알아보는 게 문제일걸. 힘 잃은 대가리 쳐내고 그 자리 먹으려는 것들이 수두룩할 텐데. 어떻게, 이대로 지옥으로 돌아갈래? 그 몸으로 임프 한 마리라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필멸자, 이 개자식아······. 감히 이 몸을 협박해?”
딴에는 현실적으로 말한다고 했는데, 그게 신경을 거스른 모양.
이성우는 발톱을 세우는 레라지에를 향해,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진정하라고. 협박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라는 거니까. 나도 네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이 목걸이를 풀면 되잖느냐!”
“이미 해봤지. 안 되더라고. 너희 아버지가 아니면 안 된다는데.”
이건 거짓말이다.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다.
기껏 사로잡은 놈을 풀어줄 이유가 없으니까.
악마만 인간에게 거짓말하라는 법 있나.
인간도 악마를 속일 수도 있는 거지.
“이런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너부터 죽이는 건데, 후회스럽구나.”
“글쎄, 소용없었을걸. 내가 네 진명을 알고 있었다는 거 잊었어?”
“맞다! 너, 넌 그걸 어떻게······? 대체 네 정체가 무엇이냐?”
검은 고양이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나? 나야 평범한 인간이지.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무슨 소리냐?”
이성우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너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주어졌거든.”
“뭐······.”
“레라지에, 지옥의 주인이 되고 싶지 않아?”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동그랗게 열리고,
입이 벌어졌다.
물론, 놈에게 하인 하나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저 허울뿐인 잿더미의 왕좌에 불과하겠지만.
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선택지는 없으니까.
“나에게 협력해라. 그 자리를 네게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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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악마 길들이기(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