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ity 10000% Catastrophic Player RAW novel - Chapter 46
* * *
엘프들의 왕, 엘라리온의 안내를 받아 세계수로 향하는 도중.
엑스의 드론 하나가 이성우에게로 바짝 다가왔다.
―저기, 이성우 플레이어님? 아니······ 길드 마스터님? 하 이거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냥 편하게 씨자 붙여서 부르시죠.”
―······정말요?
엑스는 괜히 이성우를 편하게 불렀다가 화를 입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으나,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가 또 무슨 험한 꼴을 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덧붙였다.
―알겠습니다, 이성우 씨. 드리려던 말씀은 호칭 문제가 아니고······ 정말 괜찮을까요? 아무리 지성체라지만, 몬스터를 믿고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간다는 게.
“위험부담이 크다?”
엑스의 마공학 드론이 마치 고개를 끄덕이듯, 위아래로 흔들렸다.
“저는 몬스터를 믿는 게 아닙니다.”
퀘스트를 믿는 거지.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세계수의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엘프의 요청은 속임수가 아니라 진짜라는 뜻.
물론, 지금은 도움을 청하는 입장이어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 다른 마음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이쪽에서 빈틈을 보이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이성우의 흔들림 없는 모습은, 엑스의 눈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저건, 무지막지한 힘을 지녔기에 가질 수 있는 여유겠지.’
하긴.
‘측정 불가’급 플레이어답게, 측정 불가능한 전투 데이터를 뽑아내던 이성우라면.
‘저 거대한 엘프의 나무를 통째로 베어내는 것도 가능할지도 몰라.’
그냥 뿌리째 뽑아버릴 수도 있고······.
엑스는 혼자서 상상하고 혼자서 전율했다.
‘스케일 장난 아니네, 정말.’
엑스는 게이트 사태 이전부터 할리우드에서 생산되던 블록 버스터 영화의 광적인 팬이었다.
특히 《아틀랜틱 림》 같은 거대 메카물에 매료되어 있었었기에, 기계에 엑세스할 수 있는 특성을 각성한 후 늘 기대해왔다.
언젠간 자신의 의식을 연결한 거대 메카닉을 조종하고 말리라는 꿈.
그가 식물인간이 되고서도 삶의 의지를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꿈 덕이었는데······.
이성우를 마주한 지금은 그 노력이 다 무슨 의미였나 허탈할 정도였다.
위력과 스케일로 본다면, 이성우 하나가 거대로봇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으니까.
‘아니, 거대 메카를 개발해도 저 인간한텐 안 될 것 같은데.’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이성우를 따라가는데,
돌연 이성우가 손을 들어 올렸다.
세계수의 뿌리 곁에 지어진, 호화로운 신전의 담장을 지나는 순간이었다.
『[대룡의 가호: 정신 방벽]이 [세뇌]의 효과를 무효화합니다.』
신전의 경계를 넘느 순간 돌연 정신 방벽이 발동된 것.
이성우는 슬그머니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딴청을 피우는 레라지에를 노려봤다.
“어이, 시치미 떼지 말고. 왜 미리 말 안 했어?”
“흐흐. 역시 감이 좋구나, 필멸자 치곤 말이야. 너의 종복들이 그 더러운 기생충의 힘을 어디까지 버티나 궁금해서 지켜보려 했던 것뿐이다.”
딱!
이성우가 레라지에의 콧잔등에 딱밤을 먹였다.
“하악! 무슨 짓이냐, 인간!”
“너야말로 무슨 짓이야? 네 경쟁자를 전부 없애주겠다는데,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그래, 일단 이번 일이 끝나면 네 땅콩부터 떼야겠다.”
“땅콩? 무슨 소리냐?”
머잖아 알게 될 테니, 기다리라고.
이성우는 뒤로 돌아서서 정소현을 찾았다.
“넵, 마스터!”
“여기서부턴 다소 위험하니, 혼자서 들어가겠습니다.”
“어······ 괜찮을까요?”
이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상대가 고위 악마라지만,
진명을 아는 데다가 놈의 격이 레라지에 이하라면.
‘필요 이상으로 긴장할 필요는 없겠지.’
그런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건데,
정소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아뇨, 마스터 걱정을 누가 해요. 저희 말이에요, 저희.”
그런 거였어?
아무리 그래도 걱정은 좀 해줘라.
이성우는 엘라리온을 불러, 엘프 군대의 중간급 지휘관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게 했다.
그리고 문경준에게 당부했다.
“허튼짓하는 놈 있으면, 가차 없이 베세요.”
“예, 명령 받듭니다.”
문경준이 대답과 동시에 벼락처럼 검을 뽑아 쥐자,
강제로 모여든 엘프 지휘관들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이랬는데도 무슨 일 생기면 딱 아까 전처럼만 싸우세요.”
정소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서자,
엑스의 드론들이 계속 따라붙었다.
“······그쪽은 괜찮습니까?”
―아, [세뇌] 효과 말입니까? 시스템 메시지를 보니, 저는 생체가 아니어서 통하지 않는다는군요. 저는 오히려 이성우 씨가 어떻게 멀쩡한 건지, 그게 더 궁금한데요.
“저도 그런 거엔 면역입니다.”
―아니, 정신 공격도 안 통하고 독도 안 통하고. 사기 아닙니까?
그때, 길 안내를 맡은 엘라리온이 신전 안에서 손짓했다.
“이쪽으로. 신전 안에 어머니 나무의 뿌리로 통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자연주의적이면서도 화려한 장식이 가득한 공간이 펼쳐졌다.
이성우와 엑스의 드론들이 인상적이라는 듯 두리번거리는 사이.
엘라리온만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신관들이 전부······ 자리를 비우고 어디로 사라졌지?”
* * *
엘라리온의 의문이 풀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세계수의 뿌리로 통한다는, 기나긴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자.
엘프들이 벌였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으니까.
―음, 분위기가 신전과는 영 딴판이군요. 이거 맞습니까? 무슨 광신도 집단도 아니고······.
바닥에 피로 그린 육망성.
그 주변에 널브러진 엘프의 시체들.
그리고 지구의 것도, 이 세계의 것도 아닌 기이한 문자들.
‘저건 지옥의 문자로군······. 공양 의식을 치른 건가.’
물론, 레라지에에게서 [악마의 재능: 언어학]을 전해받은 이성우의 눈엔 그 의미가 낱낱이 이해되었다.
이 기묘한 광경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엘라리온인 듯했다.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끔찍한······?”
사이한 의식의 흔적도 흔적이지만,
세계수의 잔뿌리에 꿰뚫린 채 바싹 말라붙은 엘프들의 시신이 한둘이 아니었다.
“너희의 저 ‘어머니 나무’라는 게, 원래 자녀들의 고혈을 빠시는 분은 아니겠지?”
“무, 물론입니다. 어찌 그런 모독을······.”
“모독? 모독은 이미 오래전부터 당해온 모양인데.”
세뇌의 악마, 말라디우스.
놈은 세계수의 뿌리에 자리를 잡고, 세계수와의 연결이 다른 엘프들보다 강한 신관 계층을 세뇌······.
은밀히 산 제물을 받아온 것이다.
레라지에가 의외라는 듯 나지막이 웃었다.
“놈이 위좌 다툼에서 밀려난 뒤, 절치부심한 모양이군. 아무리 생명수에 기생했다곤 해도, 이 정도로 힘을 키우다니.”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지하공간을 가득 메웠다.
―큭큭, 이게 누구신가? 추적하는 군단의 주인 아닌가? 그런 꼴로 내 앞에 나타나 주실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흥, 말 걸지 마라. 격 떨어진다. 기생충아.”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말라디우스의 웃음이 다시 한번 지하공간을 흔들었다.
―필멸자의 애완동물이 되어, 동족의 위엄을 흙투성이로 만들어놓고서 여전히 기고만장이구나. 내가 네 빈자리를 차지해 칠십이 위에 공석이 없도록 해줄 테니. 영지는 잊고 미물의 삶에 만족해라.
“아무리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어도······.”
두 악마의 설전에 이성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고위 악마나 된다는 놈들이 어떻게 죄다 혓바닥이 이렇게 길어서는······ 차라리 치고받고 싸우든가.
그때, 엘라리온이 허리춤의 칼을 뽑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정체를 드러내라! 감히 이토록 많은 일족을 희생시키다니,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세계수가 오염된 데다, 동족들이 처참하게 희생당한 걸 목도한 그는 반쯤 이성을 잃은 듯했다.
―흐흐. 왜 그 대가를 내가 치러야 하지? 저들이 좋다고 알아서 해 바친 것을.
“뭐라―”
스윽―
지하의 어둠과 세계수의 굵직한 잔뿌리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신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마다 피가 엉겨 붙은 의식용 단검을 손에 쥔 채였다.
엘라리온이 그들 중 하나에게 검을 겨누었다.
“알미단 대신관! 이곳의 상황에 대해 뭐라 설명 좀 해보시오!”
일족 가운데 어머니 나무와 특별히 가까운 이들이 선별되어 신관이 된다.
대신관은 당연히 그 가운데서도 특출난 자이고.
그런 자가 어머니 나무에게 일족의 피를 먹이고 사특한 의식을 벌이고 있을 줄은, 엘라리온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물론, 이성우는 담담했지만.
‘이런 건 인간들이나, 몬스터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구만.’
인간들 가운데서도 그 상대가 악마라는 걸 알고서도 스스로 하수인이 되거나 숭배자가 되는 놈들이 있잖은가.
엘프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대신관, 말 좀 해봐라. 무엇 때문인가? 지식? 마력? 도대체 무엇을 약속받아야 일족과 어머니 나무를 배신할 수 있지?”
엘라리온은 답을 찾고 싶다는 듯, 처절하게 울부 짖었으나.
대신관이란 놈은 옅은 비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성우가 엘라리온의 어깨에 손을 얹고 앞으로 나섰다.
파르르, 떨리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너희 신관들은 악마에게 세뇌당한 거니까, 달리 이유를 찾지 마라.”
“악마······? 세뇌?”
황망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엘라리온을 쳐다보던 대신관이란 놈이 콧방귀를 뀌었다.
“다른 놈들은 그렇지만, 난 아니다. 하찮은 인간아.”
‘세뇌가 아니야?’
이성우가 눈을 비뚜름하게 뜨자, 알미단 대신관이 엘라리온을 향해 안광을 빛냈다.
“엘라리온, 어리석은 아이야······. 내가 누누이 이야기했건만. 결국은 네가 일족을 이 꼴로 이끌었다. 고작 백년살이에게 무릎을 꿇다니. 안 돼, 안 될 일이지. 내가 널 대신해 특별한 자들이 대우받는 일족을 만들겠다.”
백년살이? 그거 인간을 두고 하는 소린가?
거기에 ‘특별한 자들이 대우받는 일족’이라는 말에서 알미단이란 놈의 사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놈은 지독한 차별주의자인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약한 이들을 죽여 숲의 자양분으로 삼았다는 건가? 그런 미친 소리를 처음 꺼냈을 때 그대를 끌어내렸어야 했는데.”
아니, 무슨 교도소 면회장도 아니고.
악마들은 악마끼리, 엘프들은 엘프끼리 속에 있던 이야기를 꺼내놓고 뭐 하는 건가.
―엘프들에게도 뭔가 갈등이 있었나 본데요.
엑스가 귓가에 드론을 바짝 붙여놓고 속삭였지만,
이성우는 그런 건 알 바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놈들의 침공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죠.”
―아, 뭐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그는 나지막이 혀를 차면서,
지난번 파리여왕 베스페라 공략으로 얻은 [중력석 덩어리].
그걸 투자해 확보해두었던 스킬을 사용했다.
곧장 이성우의 눈앞에, 농구공만 한 무형의 구체가 생겨났다.
뒤쪽의 상(像)을 오묘하게 투영하는 구체, [중력 렌즈]였다.
『일시적으로 중력을 집중해, 공간을 왜곡하는 렌즈를 형성합니다. 공간 곡률로 인해 장애물 뒤의 대상까지 식별할 수 있습니다.』
비행처럼 응용 계열로 분류되어 파괴력은 없지만,
‘침공 이벤트’ 대응에 앞서 폭넓은 시야 확보의 필요성을 느껴 찍어둔 스킬.
‘이런 지하에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보아하니 이 지하는 아무리 엘프라도 신관 계층이 아니면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인가본데.
그렇다면 엘라리온도 그 구조를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할 것이다.
세계수의 뿌리가 내린 곳이니, 그 넓이는 또 얼마나 광활하겠는가.
여길 발로 돌아다녀서 타락의 근원을 찾는다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다.
하지만 이거면, 복잡한 구조와 수많은 뿌리 탓에 막혀 있는 시계(視界)를 극복할 수 있을 터.
물론 눈이 좀 많이 필요하겠지만, 적임자가 옆에 있었다.
이성우는 엑스의 대화용 드론에게 속삭였다.
“드론들 전부 끌고 오세요.”
―이, 이게 뭡니까?
“중력 렌즈입니다.”
―······그건 우주 현상 아닙니까? 중력이 강한 천체 주변으로 빛이 휘어지는 거?
“비슷합니다. 이걸 다각도에서 살펴봐 주십시오. 눈이 열두 개나 되시니까.”
―저를 옵저버로 쓰시겠다, 이건가요?
이성우는 어꺠를 으쓱해보였다.
그야 눈 두 개 보단 열두 개가 나을 테니까.
심지어 인간의 맨눈이 아니라, 기계와 소프트웨어의 도움을 받는 시각 센서는 훨씬 빠르고 정교할 것이다.
“이 지하 어딘가에 똬리를 틀고 세계수를 타락시키고 있는 원흉, 놈을 찾아야 합니다.”
―찾은 다음에는요?
이성우는 말없이 대룡거검을 가리켰다.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엑스의 드론이 말없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 뜻은 명확했다.
―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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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세계수, 기생의 악마(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