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seong Detective Agency RAW novel - Chapter 9
00009 사라진 반지 =========================================================================
해경은 금신당(金新堂)이라고 쓰인 간판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세월의 흔적인 듯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간판 아래는 간판만큼이나 낡은 문짝이 달려 있었다. 해경이 문을 밀자 기름칠을 하지 않은 지 오래인지 삐걱대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사내 두셋만 들어가도 꽉 찰 듯한 좁은 공간 안쪽으로 전당포 창구가 눈에 들어왔다.
해경이 몸을 숙여 창구 안쪽을 들여다보자, 왜소한 초로의 사내가 듬성듬성 백발이 섞인 머리를 꾸벅대며 졸고 있었다. 창구 앞에는 ‘金新堂 吳八滿(금신당 오팔만)’이라고 쓰인 명패가 놓인 채였다. 상진전당포와 화순전당포에 먼저 들렀다 온 길이었는데, 상진전당포에서는 화순전당포에서 받아 온 물건이라 했고 화순전당포에서는 금신당에서 받아 온 물건이라 해서 이리로 온 것이었다. 해경은 손가락 마디로 가볍게 창구 쪽에 설치해 놓은 창살을 두드렸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졸고 있던 팔만이 화들짝 놀라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더니 앉아 있던 의자를 당겨 창구 쪽으로 다가왔다.
“예에, 무슨 일이십니까?”
“보름 전쯤 백금 반지 하나를 맡으셨던 적이 있지요? 새끼손톱만한 금강석이 박힌 것인데요.”
해경의 말에 팔만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아아,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특이한 물건이라 쉽게 기억이 난 모양이었다. 해경이 팔만에게 물었다.
“그 반지를 맡긴 사람에 대해 기억나시는 것이 있습니까?”
“순사시오?”
팔만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해경을 올려다보았다. 해경은 짐짓 주변을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향운정 최자련 사장님의 부탁으로 온 것입니다.”
자련이라는 이름을 듣자 팔만의 안색이 대번에 달라졌다. 팔만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의 장부를 가지고 나왔다.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 가며 날짜를 확인하고 장부를 넘겨 보던 팔만이 해경 쪽으로 장부를 돌려 놓으며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김이삼(金二三)이라는 자가 맡겼는데 주소는 고시정(古市町: 현재의 동자동) 사십삼번지로 기록해 놓았군요.”
해경은 한글로 적힌 장부를 보았다. 급하게 쓴 것인지 글씨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악필인 데다 잉크가 번져 있었다. 주의깊게 그 주소를 입 안으로 한 번 뇌어 본 해경은 헛웃음을 웃었다. 고시정 사십삼번지라면 경성역이 아닌가. 가짜 주소를 쓴 것이 틀림없었다. 이삼이라는 이름도 되는 대로 적어 놓았을 것이 뻔했다. 애초에 본명을 적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경은 잠시 그 장부를 보고 있다가 팔만에게 물었다.
“이 자의 생김을 보셨습니까?”
팔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일이 꽤 지난 터라 기억이 희미해진 모양이었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팔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밤중에 문을 닫기 직전에 온 데다 모자를 푹 써서 얼굴이 어찌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음……키는 상당히 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 선생님과 엇비슷하거나 그보다 약간 컸던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장신이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골격이 꽤 남자다운 이였는데 덩치에 맞지 않게 매우 쩔쩔매더군요. 이런 물건은 진품 증서가 없다면 바로 값을 쳐줄 수 없다고 하니 무척 난처해했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진품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를 했는데 진품이라면 몇천 원은 갈 물건 같은데다 당장 수중에 그만한 현금도 없었고……또 급매를 원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장물 같아서 수상했는데 일단 백 원까지는 쳐줄 수 있고, 날이 밝으면 다른 전당포에 물어보겠다 하니 그러라고 하며 백 원을 받아 갔습니다. 이틀 뒤인가, 사흘 뒤인가 전화가 왔기에 화순전당포로 갔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목소리나 말투는 어땠습니까?”
“목소리도 사내다웠고 말투는 딱 경성 사람 말투였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옷차림이나…….”
해경의 물음에 팔만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해경이 흠, 하며 고개를 약간 기울이자 팔만이 한참 기억을 되짚어보는 듯한 얼굴로 천장을 보고 있다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해경을 쳐다보았다.
“아, 장부를 왼손으로 썼습니다. 오른손을 다친 건지 글씨가 서툰데도 왼손으로 쓰더군요.”
“그렇군요.”
해경은 잠시 장부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김정호는 확실히 육 척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키라, 그였다면 팔만이 그를 그 정도의 장신이라고 기억할 것 같지 않았다. 다만 이로써 반지를 전당포에 맡긴 제3의 인물이 있다는 것은 확실해진 사실이었다. 골격이 좋은 장신의 남자가 전당포에 남의 결혼반지를 급하게 잡힐 일이 무엇이었을까. 절도범이 장물을 처분하러 온 것이라면 이미 이만한 물건을 절도당했을 때 김영채가 신고를 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 일이 벌어지기 전 절도 신고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게다가 영채가 일부러 김정호에게 소화를 습격하게 하고 반지가 없어졌다고 신고한 것이며, 소화의 방에서 가짜 반지를 진짜 반지라고 들고 나와 소화를 절도범으로 신고한 행각을 보았을 때 해경은 영채가 자신의 손에 진짜 반지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반지가 그 의문의 사내에게 갈 수 있는 경로는 단 하나뿐이었다. 김영채가 직접 그 사내에게 준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남자가 어쩌면 협박범일 수도 있었다. 남편에게 알려지기 전 일을 덮어 버리기 위해 그에게 직접 반지를 준 것은 아니었을까?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인사를 건네고 막 돌아서려던 해경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해경은 다급히 다시 돌아서서 장부를 막 덮으려는 팔만의 손을 막았다. 팔만이 의아한 눈으로 해경을 올려다보았다. 해경은 품에 넣고 있던 봉투를 꺼냈다. 영채가 받았다는 협박 편지였다. 편지를 꺼내 펼친 해경은 장부에 적힌 글씨와 편지의 글씨를 비교해 보았다.
해경은 이 편지의 글씨는 필적을 바꾸기 위해 손을 반대로 하여 적은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그 사내가 왼손으로 글씨를 썼다고 한 마지막 말이 퍼뜩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편지의 ‘반지’와 장부에 적힌 ‘번지’를 나란히 놓고 꼼꼼히 비교한 해경은 곧 허, 하고 짧은 소리를 뱉었다. 장부와 편지의 글자에서 각각 ‘ㅂ’을 쓰는 법이 아예 달랐던 탓이었다. 다시 원점이었다. 해경은 편지를 접어 다시 품 안에 넣고는 장부를 밀어 놓았다.
“혹여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더 생각나는 일이 있으시거든 향운정 쪽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예, 그러지요.”
해경이 돌아서서 문을 밀려는 순간, 뒤에서 팔만이 해경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해경이 걸음을 멈추며 돌아보자 팔만이 말했다.
“방금 생각난 것인데, 밑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턱 밑에 흉터가 있었습니다. 손가락 한 마디만하고 흰 흉터라 눈에 잘 띄지는 않았습니다만…….”
장신에 턱 밑의 흉터라면 범위를 꽤 좁힐 수 있을 터였다. 해경은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깍듯이 인사를 하며 전당포를 나섰다. 이제는 김영채의 주변 인물들에 대해 알아볼 차례였다. 경성역 앞에서 전차를 타고 명치정으로 이동한 해경은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책장에서 경성에서 구할 수 있는 신문과 잡지를 매일 꼼꼼하게 스크랩한 두꺼운 서류철 십여 개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은 해경은 ‘ㄱ’ 항목을 찾았다. 김영채, 김영채, 하고 중얼거리며 서류철을 뒤지던 해경은 왼손으로는 서류를 넘기고 오른손으로는 종이 위에 영채에 대한 정보들을 적어 내려갔다.
평양 출신, 역관 집안의 딸, 여학교, 토월회, 조성훈, 호화 결혼식, 본정의 문화 주택, 김영채 주연인 연극과 영화 제목 따위의 낱말이 종이 위를 가득 채웠다. 대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들이었다. 한참 서류철을 뒤지던 해경이 문득 손을 멈췄다. 몇 년 전의 잡지 기사였다. ‘한상준과 김영채, 극단 백야에 입단’. 짧은 제목이 시선을 끌었다. 해경은 그 기사를 주의깊게 읽었다.
‘지난달 경성의 인기 배우인 한상준과 김영채가 극단 백야에 입단하였다. 두 사람은 한때 염문이 있었으나 양측이 모두 부인하였고, 김영채가 청년 부호 조성훈과 오월 십구일 결혼을 공표함으로써 세간의 소문이 종식되었다. ……’
해경은 펜으로 한 문장에 밑줄을 쳤다. ‘한때 염문이 있었으나’. 한상준은 육척 장신의 미남 배우로 이름이 높았고, 김영채와는 토월회 시절부터 함께 했던 동료였다. 조성훈을 만나기 전부터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던 데다 그가 영채의 잦은 염문 상대 중 하나로 거론되어 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두 사람이 한 극단으로 옮겨 갔다는 것 역시 해경의 시선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해경은 한참이나 그 기사를 보고 있다가 전화번호부를 찾아 넘겼다.
“김판구, 김판용, 김판주……여기 있군.”
극단 백야의 김판주 단장 전화번호를 찾아낸 해경은 그리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가 간 뒤 김판주입니다, 하는 목소리가 넘어왔다. 해경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밝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단장님. 지난번에 인사드렸던 이강운입니다. 기억하십니까? 향운정 최자련 사장님과 함께 왔던…….”
― 아, 예. 이 사장님. 기억하다마다요. 어쩐 일이십니까?
판주가 대번에 반기는 투로 물었다. 해경은 기사 위에 쳐 놓은 밑줄을 손끝으로 덧그리며 입을 열었다.
“네에, 극단 백야에 대해 좀 알아보고 관심이 생겨서 여쭤볼 것도 있고 하여 연락을 드렸습니다.”
― 그러시다면 제가 직접 사무실로 방문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방문해도 괜찮다고 하시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 아이고, 번잡하실 텐데…….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근처에 있으니 반 시진 정도 뒤에 뵐 수 있겠습니까?”
― 물론입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해경은 전화를 끊으며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어느새 거리는 온통 주홍빛의 햇살로 물든 채였다. 시계도 제대로 보지 않았는데, 기사를 뒤지는 사이 어느새 해질녘이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자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해경은 걸음을 빠르게 하며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들을 정리했다. 수많은 정보들이 한데 얽혀 머릿속에 어렴풋한 윤곽선을 그렸다. 무슨 그림을 그리고 싶은 거요,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해경은 극단 백야의 사무실 쪽으로 발을 옮겼다. 도착한 것은 이십 분쯤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문을 두드리기 무섭게 누구인지도 묻지 않고 안에서 문이 열렸다. 판주였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해경은 판주가 권한 의자에 앉았다. 판주는 그새 준비해 둔 것인지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장부며 포스터 따위를 탁자 위에 쌓아 둔 채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판주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해경은 짐짓 웃으며 말을 건넸다.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관심을 가져 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하지요. 궁금하신 것은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최근에 신문을 읽다 궁금한 점이 생겨서요. 백야에서 올리는 작품은 연일 흥행이기는 하지만, 단원들에게 월급제로 돈이 나간다면 인건비가 상당할 듯한데 전체 비용 중 단원들에게 나가는 돈은 어느 정도 됩니까? 특히 간판 배우들은 더 많이 받겠지요? 김영채씨나 한상준씨는 워낙이 유명하니…….”
돈 이야기가 나오자 판주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렇기는 합니다. 작품이 흥행이라도 투자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간신히 적자만 면하는 일이 많지요. 보통 일반 단원들에게는 월 팔 원 정도에서 십오 원 정도까지의 월급이 지급됩니다. 평균 십 원만 잡아도 단원이 스무 명이니 이백 원은 금방이지요. 김영채나 한상준은 간판 스타라 때에 따라 다르기는 합니다만……한상준은 백이십 원 가량, 김영채는 백오십 원에서 때에 따라 이백 원까지 주고 있습니다.”
“김영채씨의 몸값이 상당하군요?”
“본래 여배우가 몸값이 좋은 편인 데다 간판 스타니까요. 본인이 그 이하로는 하지 않겠다 하는 것도 있고, 입단할 때 한상준을 함께 데려온 것도 김영채라 원하는 대로 주고 있습니다.”
“예전에 두 사람 사이에 소문이 있던데 그 때문일까요?”
반쯤 농을 건네듯 판주를 떠 보자, 판주가 허허 웃고는 대답했다.
“그것까지는 알 수 없지요. 무어, 원체 각별한 사이라고는 합니다. 토월회에 같이 있어서인지 자기들끼리는 동지라고도 하고, 한상준이 큰 돈도 종종 빌리는 것 같기는 했습니다.”
“돈을 빌려요?”
뜻밖의 정보에 해경이 되물었다. 판주가 해경의 물음에 아차 싶은 얼굴로 아이고, 하고 혼잣말처럼 내뱉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실은 그 때문에 한상준과 계약 파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청춘좌에서 잘 나가는 백민웅이라는 배우가 있는데, 한상준을 내리고 백민웅을 데려올까 해서……백민웅이 청춘좌에서 육십 원을 받는다는데, 이쪽에서는 팔십 원 정도를 불러 볼까 합니다. 연기력도 좋고 미남이라 요새 인기가 꽤 있습니다.”
한상준과 계약 파기를 한다는 말에 해경의 마음이 바뀔까 봐 전전긍긍해 백민웅에 대해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이 늘어놓는 판주였으나, 해경은 백민웅에 대한 얘기는 귓등으로 흘리며 물었다.
“한상준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이것 참…….”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표정을 하던 판주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마작 도박에 빠졌다고 합니다. 돈을 솔찮게 날린 모양이에요. 듣기로는 삼사천 원 이상을 날렸다는 소문도 있는데 얼마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두 달 동안 계속 가불을 해 갔습니다. 김영채에게도 돈을 좀 빌렸다고 하더군요. 빚을 갚느라 아주 전전긍긍하고 있답니다. 경무국에서 도박을 아주 엄중히 잡겠다고 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혹여 걸리기 전에 어서 계약을 파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삼사천 원이라면 보통 금액이 아니었다. 김영채라 한들 그 정도의 금액을 현금으로 바로 보유하고 있을 확률은 매우 적었다. 해경의 머릿속에 하나의 가설이 세워졌다. 도박빚에 쫓기던 한상준이 김영채에게까지 돈을 빌리려 했고, 현금이 없던 김영채가 대신 반지를 내주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귀한 반지인 만큼 위험 부담은 컸겠지만, 일상 생활에서 흔히 착용할 만한 패물은 아니다 보니 남편의 눈에 당장 띄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한 해경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해경의 눈치를 살피던 판주가 말을 덧붙였다.
“한상준과 계약을 파기하면 아무래도 인건비는 많이 절감될 겁니다. 그 점도 고려하시면…….”
해경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새 여배우는 물망에 없습니까? 인건비 절감이 목적이라면 김영채씨 쪽도 고민이실 텐데요.”
“김영채 본인이 성정이 좀 예민해서요, 향후 삼사 년 정도는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군 되시는 조성훈 사장도 극단에 어느 정도 투자를 하고 있고요.”
“소문대로 몹시 애처가군요. 적은 돈은 아닐 텐데요.”
“조선팔도 최고 가는 여배우의 남편이니 뭐……포스터가 나오면 제일 먼저 자기 회사에 아주 도배를 한답니다. 사무실에도 온통 김영채 포스터 투성이라더군요. 표도 엄청나게 사서 뿌리고요. 시집 하나는 정말 잘 갔지요.”
판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대답도 듣기 전 문이 열렸다. 놀란 판주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해경은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 사무실 안으로 막 들어선 것은 상준이었다. 상준은 해경을 보더니 낯선 사람의 존재에 놀란 듯 그 자리에 멈춰섰다. 판주가 잠시 당황한 기색을 하더니 상준에게 말했다.
“거, 대답하거든 들어오지 성격이 급해서 원……인사하시게. 무역업을 하시는 이강운 사장님이라고, 최근에 우리 극단에 관심이 좀 있으시다고 하네. 사장님, 이쪽은…….”
“압니다. 한상준씨지요? 지난번에 공연 잘 보았습니다.”
해경은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으로 상준을 살폈다. 앉아 있다 일어나는 찰나의 순간, 과연 금신당 팔만의 말대로 상준의 턱 밑에 희미한 상처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해경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상준이 경계하는 듯한 빛을 풀지 않고 가벼운 목례를 건넸다. 해경은 미소를 지으며 판주를 보고 말했다.
“급한 용무가 있으신 듯 하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지요. 여러 가지 말씀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이렇게 되어 죄송합니다.”
“배웅은 괜찮습니다. 말씀 나누십시오.”
길거리까지 당장 따라 나올 기세인 판주를 황급히 말린 해경은 백야 사무실을 나서며 문을 닫았다. 전당포에 반지를 맡긴 자는 한상준임이 거의 확실했다. 판주와의 만남에서 그토록 귀한 반지를 김영채가 어째서 남에게 그리 쉽게 내주었는지, 전당포에 반지를 맡긴 남자는 누구인지, 김영채와는 무슨 관계인지에 대한 의문은 모두 풀린 것 같았다. 해경은 종로서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었다. 엉킨 실타래의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갈 때의 짜릿함은 언제나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