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seong Detective Agency RAW novel - Chapter 91
00083 여학교의 유령 =========================================================================
해경은 향운정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온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기 쪽으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는 일은 늘상 있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평소보다 더 차림새에 신경을 쓴 탓인 듯했다. 해경은 공연히 쓰고 있던 모자의 챙에 손을 대어 시선을 피하며 후원으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미랑이 해경을 별채로 안내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던 인혜가 해경에게 잠시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는 몇 마디 더 나누고 곧 전화를 끊었다. 인혜가 앉은 채로 해경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보아하니 또 젊은 사업가 행세를 하는 모양인데, 무슨 작당을 하려고 그리 근사하게 꾸몄는지 궁금하군요.”
“감사합니다.”
“소화 양은 잘 지내고 있나요?”
“글쎄요. 오늘이 첫 면회라서요. 가서 이야기를 들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 계획을 세울 때 인혜에게 차를 빌리며 소화를 미리암여학교에 위장 입학시킨다는 이야기는 미리 해 놓은 터였다. 인혜가 해경의 말을 듣더니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혹여 소화 양이 학교에 적응을 잘 한다면 그대로 신식 학교에 다니게 해 보면 어때요?”
“네?”
해경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약간 높이며 되물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다. 그저 위장 입학을 준비하며 소화 정도라면 한학도 잘 알고 머리가 원체 영리하니 들키지 않고 다른 학생들 사이에 섞여 잘 지낼 수 있으리라 확신한 것이 다였다. 인혜가 해경의 얼굴을 보더니 당황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본인이 원할 때 얘기겠지만요. 미리암여학교는 학비가 상당히 비싸다고 하니 내가 원조해 줄 수도 있고, 다른 학교로 옮길 수도 있지만 어쨌든 무어 나쁜 생각은 아니지 않아요?”
“그렇지요.”
“물론 학교에 다니게 되면 미스터 정의 사무실 일을 도와줄 시간이 몹시 줄어들기는 하겠지만요.”
인혜가 묘하게 자기를 놀리는 어조라는 것을 알아채기까지는 몇 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소화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아무래도 젊은 남녀가 함께 일한다는 것 때문에 묘한 시선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고,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그런 말을 들으면 의식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해경은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
“사건을 해결할 때까지는 당분간 신세를 지게 될 것 같습니다.”
“내가 언제 미스터 정에게 내 신세 진 것 갚으라 하던가요?”
인혜가 웃는 얼굴로 되물었다. 해경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혜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놀리는 것에 재미를 붙이기 전 자리를 뜨는 편이 현명하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는 탓이었다.
“잘 다녀와요. 소화 양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좀 알려 주고요. 얘, 미랑아. 바깥에 차 한 대 대기시켜 놓으라고 전하렴. 지난번과 같은 것으로.”
인혜가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하고는 미랑을 불러 부탁했다. 미랑이 잰 몸놀림으로 얼른 바깥으로 나갔다. 해경은 인혜가 뭐라고 말을 덧붙이기 전 서둘러 미랑을 따라 나섰다. 대문 밖으로 향한 미랑이 다시 돌아오자 몇 분 뒤 문 앞에 기사가 딸린 차가 한 대 섰다. 해경은 뒷좌석에 올라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여학교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의 면회 시간을 빼고서는 소화와 접촉할 수 있는 길이 전연 없다는 것이 다소 불안한 요소인 것은 확실했다.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으니 무언가 알아냈기를 바라기보다는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다.
차가 미리암여학교의 정문 앞에 서자 해경은 차에서 내렸다. 일부러 조금 이른 시간을 택한 것이 주효했는지, 정문 근처에서 서성이며 가족을 기다리던 소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해경에게 쏠렸다. 애초에 다른 사람들 눈에 띄기 위해 옷차림에 신경을 쓰고 인혜에게 굳이 차를 빌린 것이었으니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해경은 셔츠 칼라를 매만지며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소녀들 사이에 소화의 모습은 없었다. 어린 사환이 해경의 모습을 보고는 곧 달려왔다.
“누구를 만나러 오셨습니까?”
“이 학년의 박소화입니다.”
“가족이십니까?”
“친오빠 되는 사람입니다.”
친오빠라는 말을 듣자 사환이 이쪽으로, 하며 해경을 안내했다. 사환이 해경을 데려간 곳은 학교 강당이었다. 가족들의 방문이 가능한 날이면 강당을 응접실처럼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해경은 비어 있는 자리 중 최대한 눈에 덜 뜨일 만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다른 사람들도 곧 강당 안으로 도착해 각자 자리를 잡았다. 해경은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소화가 강당에 들어선 것은 십 분쯤 지난 뒤였다. 입구에 서서 두리번거리는 소화를 본 해경이 한쪽 손을 들어 보이자 소화가 품에 무언가를 안은 채 해경 쪽으로 뛰어왔다. 교복 차림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일주일 사이에 낯선 소녀처럼 느껴져, 해경은 소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맞은편의 의자를 빼 주었다.
“그리 뛰면 다쳐요.”
주변에 들릴까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소화가 배시시 웃었다. 해경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물었다.
“학교생활은 할 만합니까?”
“네. 친구도 생겼고 같은 방의 언니들도 잘 해주는걸요.”
소화도 주변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행이군요. 수업도 따라갈 수 있습니까?”
“아직 수학이나 영어는 잘 모르겠어요.”
소화가 조금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배워본 적이 일절 없으니 일주일 사이에 따라가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해경은 어쩐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그래, 유령은 좀 만나 보았고요?”
해경이 묻자 소화가 의자를 더 당겨 앉으며 동그랗게 뜨인 눈으로 소곤거렸다.
“이상하게 제가 온 뒤로 한 번도 귀신을 보았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동무들에게도 여러 번 물어보았지만 다들 그런 것은 못 보았대요.”
“동무들 중에 유령을 본 사람은 있답니까?”
소화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반대편으로 시선을 슬쩍 주었다. 해경 역시 소화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여러 명의 가족들과 함께 앉아 다과를 먹고 있는 단발 소녀가 있었다. 소화가 눈치 채일세라 얼른 다시 눈을 거두더니 말했다.
“제 짝인 이영신이에요. 귀신 이야기를 슬쩍 돌려 물어보았는데 며칠 전에 말해 주었어요. 자기는 여러 번 보았다고요.”
“여러 번을?”
“한밤중에 기척이 느껴져 눈을 떴더니 침대 머리맡에서 자기를 보고 있었대요. 꿈을 꾸는 줄 알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는 거예요. 매번 그랬다고요.”
해경은 영신 쪽을 다시 한 번 흘끔 보았다. 정숙이 말하기로 유령을 보았다고 학교를 그만두겠다, 집에 돌아가겠다 하는 학생들이 속출하는 판국이라고 했는데, 머리맡에서 귀신을 여러 번 보고도 지금까지 학교에 남아 있다니 사실이라면 상당히 강심장인 것은 분명했다.
“얼굴을 본 적이 있답니까?”
“그건 말하지 않았어요. 꽤 자주 보았다고만 했고요.”
대답한 소화가 주변 눈치를 보더니 소곤거렸다.
“저어, 선생님. 바깥으로 나가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그러지요.”
안에서 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해경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화도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소화가 학교 건물 뒤편으로 난 오솔길을 가리켰다.
“저 쪽이 산책로래요.”
소화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던 해경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소화가 언제나의 습관처럼 한 걸음 떨어져 따라오고 있었다. 해경은 손을 뻗어 소화의 팔을 살짝 잡으며 자기 옆으로 나란히 서게 했다.
“남들에게 의심받지 않게 합시다.”
“아, 아아, 네에.”
화들짝 놀란 소화가 곧 고개를 주억거렸다. 해경은 소화와 함께 인적이 없는 좁은 오솔길을 나란히 걸었다. 두 사람이 걸으면 폭이 꽉 찰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 연식이 상당히 되었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큰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대낮인데도 길이 어두웠다. 눈까지 쌓인 겨울 밤 이런 길을 혼자 지나 목을 매달고 죽은 소녀라니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오솔길을 지나자 공터가 나타났다. 해경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공터에 홀로 선 아름드리 고목이었다. 이파리 하나 없이 앙상한 가지를 드리운 탓인지 더욱 스산하게 느껴졌다. 해경이 그 나무를 보는 것을 눈치 챈 소화가 옆에서 말했다.
“영신이가 그러는데 저 나무를 오래 보면 귀신이 들린다는 말이 있대요.”
“재미있군요.”
과연 그런 말이 나올 법한 나무기는 했다. 그 스산함에서 애써 눈을 돌린 해경은 근처의 의자를 찾아 소화와 나란히 앉았다. 소화가 그제야 품에 안고 있던 것을 해경에게 내밀었다. 해경은 의아한 표정으로 소화가 내민 것을 받아들었다. 겉표지에 ‘出納簿(출납부)’라고 쓰인 공책이었다. 표지를 넘겨보자 많은 이름과 함께 숫자들이 꼼꼼히 기록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세란 양이 기록하던 출납부인 것 같아요.”
소화의 말에 해경은 출납부에 시선을 둔 채 되물었다.
“출납부라고요?”
“여기서는 학생들의 생활을 모두 사생들이 자치적으로 한대요. 식비는 한 달에 한 번 일괄적으로 걷고, 용돈도 집에서 보내 주면 출납 담당이 얼마 받았는지 기록하고 담당에게 타서 쓰게 되어 있답니다.”
“김세란 양이 출납 담당이었습니까?”
“표지 안쪽에 이름이 쓰여 있었어요.”
해경은 소화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과연 표지 안쪽에 작게 김세란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고개를 갸웃한 해경은 출납부를 꼼꼼히 확인했으나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부잣집 아가씨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라 그런지 식비 외에 매달 받는 용돈이 꽤 컸으나 출납 내역도 대체로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건 어디서 났습니까?”
해경의 물음에 소화가 주저하며 대답했다.
“기숙사 방 책상 서랍에서요.”
“서랍을 하나하나 다 찾아보고 다닌 겁니까?”
“아, 아니어요!”
소화가 펄쩍 뛰며 고개를 흔들었다. 해경이 가만히 소화를 마주보자 소화가 목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제가 있는 방이 아무래도 세란 양이 쓰던 방인 것 같아요. 서랍을 열자마자 이걸 발견해서…….”
“그래요?”
물론 충분히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세란의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들어간 소화에게 하필이면 세란이 쓰던 방이 배정되었다는 건 우연일까. 물론 우연일 수도 있었다. 유령이 나타난다며 학생들이 겁에 질려 집에 돌아가거나 학교를 그만두는 일이 일어난다고 했으니 하필이면 그 방이 비어 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자신이 함께 있지 않다 보니 작은 일에도 민감해지는 것일까 생각한 해경은 소화에게 물었다.
“같은 방을 쓰는 동무들은 유령 이야기를 하지 않던가요?”
“잘 모르겠어요. 언니들과는 아직…….”
소화가 말끝을 흐렸다. 언니들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방을 함께 쓰는 동무들이 상급생인 모양이었다.
“몇 명이 한 방을 쓰고 있습니까?”
“저까지 세 명이에요. 원래는 넷이 쓴다는데 두 명은 나갔다고요. 사 학년 언니들인데 서은용과 고명하라고 해요.”
“동무들은 이상한 점이 없습니까?”
“그런 건 모르겠어요. 둘 다 몹시 멋쟁이인 것 같았어요. 출납부를 보니 용돈을 꽤 많이 받고 있었는데 외출을 할 때면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많이 사더라고요. 저한테도 어느 백화점을 자주 가냐고 묻기도 했고요.”
해경은 출납부에서 소화가 방금 말한 두 사람의 이름을 찾았다. 서은용과 고명하. 두 사람 모두 거의 일정한 금액을 꼬박꼬박 집에서 받고 있었다. 대체로 오륙십 원 가까이 되는 거금으로, 월초에 집에서 돈을 보내면 일주일에 한 번씩 돈을 찾아 가곤 하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돈을 찾아 가는 날도 거의 비슷했다.
“단짝인 모양이군요.”
“항상 같이 다녀요.”
소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잣집 소녀들이 같은 학교에서 같은 방을 쓰며 함께 다니는 것은 딱히 이상할 일이 없었다. 해경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 소화에게 물었다.
“두 명이 나간 이유는 모르겠지요?”
“네.”
“유령을 보고 나간 학생들일 수도 있겠군요.”
“아무래도 세란 양이 쓰던 방이라면…….”
소화가 말끝을 흐렸다. 해경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소화 양이 있는 동안 한 번도 직접 유령을 본 적이 없습니까?”
“네.”
정숙을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 때였다. 학생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자주 나타난다는 유령이 소화가 기숙사에 들어온 직후부터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역시 이상했다. 소화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해경이 아는 한 학교에 단 세 사람뿐이었다. 교장인 박영순과 자신에게 찾아왔던 이정숙, 그리고 세란의 언니인 김세명. 물론 소문이 퍼지는 데는 단 한 사람이면 충분했기에 비밀이 지켜지고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군가에게서 말이 새어나갔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잠시 팔짱을 낀 채 앉아 맞은편의 나무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해경에게 소화가 말했다.
“꼭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나타났으면 좋겠다고요?”
해경이 되물은 말에 소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께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귀신은 꼭 억울한 일이 있으면 나타난다고 하셨어요. 장화와 홍련처럼요. 세란 양도 무언가 억울한 일이 있으니까 나타나는 것 아니겠어요? 세란 양이 나타나면 꼭 물어보고 싶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그러다 정말로 나타나면 기절해 버리는 것 아닙니까?”
“아니어요, 절대로요!”
장난처럼 묻자 펄쩍 뛰며 손을 내젓는 소화였다. 해경이 그 얼굴을 보고 웃자 놀림받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얼굴이 빨개진 소화가 얼굴을 찡그렸다. 무심코 소화의 얼굴을 마주본 해경은 눈을 가늘게 떴다. 소화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린 해경은 몸을 조금 더 숙여 소화를 물끄러미 보았다. 움찔한 소화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였다. 해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소화에게 물었다.
“화장을 했습니까?”
평소와는 달라 보이는 것이 왜일까 생각하다 보니 입술연지를 바른 모양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 말에 소화가 화들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화의 반응에 더 놀란 해경이 소화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지요?”
“아, 아니어요.”
소화가 입을 가린 채 웅얼거렸다. 해경이 막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학교 쪽에서 종소리가 났다. 가족들의 면회 시간이 끝났다는 알림이었다. 귀까지 빨개진 소화가 입가를 가린 손을 절대 떼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저, 저어, 면회 시간이 끝나서 돌아가야 해요. 조사를 더 해볼게요. 출납부는 가져가셔요.”
“그러지요.”
소화를 부끄럽게 만들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것 같아 조금 미안한 기분이 된 해경은 소화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보다 두 배쯤은 잰 걸음으로 날듯이 오솔길을 앞서 내려가는 소화의 뒷모습을 보던 해경은 고개를 갸웃했다. 애초에 가져간 짐에는 입술연지 같은 것이 전혀 없었는데 어디서 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여학생들만 모인 곳이니 동무들의 것을 빌려 썼는지도 몰랐다. 한참 멋을 부리고 싶어 할 나이기는 했다. 더구나 부잣집 아가씨들이 잔뜩 모인 곳이라면 소화 같은 소녀가 주눅이 들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아무래도 남자다 보니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해경은 속으로 자책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