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140)
사원으로 가는 법
현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몸의 떨림도 괜찮아졌어.’
숨이 가쁜 증상이 사라져 있었다.
라딕스 섬이 일으키는 감정증폭이 완화된 걸까? 아니면 단순히 루이즈와 동화해서 느끼는 착각일까?
검증을 위해 현은 루이즈와의 동화를 해제해 봤다.
“아니, 자네 갑자기 어디에 갔다 온 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상점 주인이 현을 발견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은가?”
“….”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나, 북쪽으로 가는 건 무리라니깐….”
“아니요.”
현은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해 보았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긴 하지만, 고통스럽진 않아.
평소보다 텐션이 조금 높은 정도다.
“멀쩡해졌어요.”
“뭐, 멀쩡하다고…?”
“네. 갑자기….”
이어서 현은 주위 동료들의 상태도 살펴보았다.
아인만 조금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나머지 일행들은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현은 마침 옆에 있던 살론에게 물었다.
“좀 괜찮아졌어요?”
방금까지만 해도 잔뜩 인상을 쓰고 있던 살론의 표정은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어어… 왠지 모르겠는데, 훨씬 나아졌다.”
“그래요?”
“현, 그렇게 말하는 거 보면 너는 뭔가 아는 거냐?”
살론의 물음에 현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쩌면요….”
“정말인가? 이 지긋지긋한 상태이상을 해제할 방법을 찾아낸 거야?!”
“글쎄요…. 그건 마을로 돌아간 뒤에 생각해 봐야겠어요.”
주위는 헤르파를 축하해 주는 코르케스족의 목소리로 떠들썩했다.
성인식의 참관을 마치고 산을 내려가는 일행의 얼굴도 올라갈 때보다 편안해져 있었다.
***
마을로 돌아온 뒤.
현은 성인식에서 일어났던 일은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공감의 힘을 발동시키긴 했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원리는 아직 완벽히 파악하지 못했다.
‘공감이 왜 쌓였는지부터 알아내야 해.’
현은 기도의 정의부터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초월자는 기도를 받아 공감의 힘을 쌓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허나, 수많은 신전들의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기도’ 스킬을 지니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제대로 기도하는 방법을 모르는 이도 부지기수였다.
헌데도 어떻게 초월자들은 그들에게서 공감을 얻을 수 있었는가?
‘스킬이 중요한 게 아니야.’
기도라는 행위가 초월자에게 공감을 좀 더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면?
‘공감을 얻을 방법은 기도 외에도 있는 거야!’
기도하지 않아도… 단지, 초월자를 섬기고 갈망하는 마음만으로도 공감이 생성되는 건지도 모른다.
누구의 기도도 받지 않았는데 공감의 힘이 발동한 것이 그 증거 아니겠나!
현은 재차 상태 창을 살펴보았다.
수치가 떨어지긴 했지만, 공감의 힘은 아직까지도 유지되는 중이었다.
‘역시 길드원들이겠지?’
-인간의 한계치를 넘어선 감정을 느끼는 동안엔 세상 모든 존재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혼의 감정이 클수록, 영혼과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더욱 큰 공감을 얻습니다.
루이즈에게 뺏어온 공감의 스킬설명 중 일부.
현은 그 중 두 번째 문구에 집중했다.
‘나랑 가장 가까이 있는 게 바로 길드원들이잖아.’
그리고 공감을 보내주는 존재는 바로 쉐이드 길드원들이라고 추측했다.
스탯 증폭률이 35퍼센트에서 23퍼센트로 낮아진 이유는, 성인식이 끝나고 마을로 되돌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섬의 고지대보다 저지대가 감정증폭의 상태이상이 덜하니까.
“자, 다들 잠깐만 로그아웃 해봐요.”
생각을 마친 현은, 모든 길드원들의 접속을 종료시켰다.
길드원들의 ‘공감 지분’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한 명만 남겨둔 채로 스탯 증폭률을 확인한다면, 각자의 기여도를 알 수 있지 않겠는가?
23퍼센트의 스탯 증폭률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약 5분간의 실험 끝에 현은 다음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아인 : 12%
살론 : 2%
타르타르 : 2%
지니 : 3%
다 합하면 약 20퍼센트.
현재 스탯 증폭률인 23퍼센트에서 빼면 4퍼센트가 남는다.
초월자는 스스로 공감을 전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 루이즈의 지분은 없을 테고.
파피 혹은, 세상 곳곳에 날 인식하고 있는 유저들이 나머지 지분을 담당하고 있는 거겠지.
거리가 멀수록 공감의 효과가 미미해진다지만, 억 단위나 되는 유저들이 모이면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음. 대충 이렇게 되는 거군.’
현은 몇 가지 실험을 더 해보기로 했다.
길드원들이 각자 정비하고 있는 틈에, 아인을 데리고 단둘이 마을의 외곽으로 향했다.
잔나무가지로 뒤덮인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아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말했다.
“아인, 지금부터 날 생각해 봐.”
“어어…?”
아인은 상당히 당황스러워했지만 현의 부탁을 거절하진 않았다.
“이, 이거 혹시….”
“혹시?”
“예행연습이야…? 여기서…?!”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어서 상태 창을 살펴본 현은 한 가지 사실을 더 알 수 있었다.
스탯 증폭률이 5% 상승했다는 건, 아인의 기여도가 12%에서 17%로 늘어났음을 의미한다.
길드원 중 누군가가 자신을 강하게 의식할수록, 공감의 힘도 커진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현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아인이 아무 말 없이 옅은 숨을 내쉬며 천천히 다기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서, 현의 로그 창에 두 줄의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후후, 이번엔 도망 못 가지롱.”
“너, 무슨…!”
“휴식상태로 전환하려면 해 봐. 현의 몸이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면!”
그렇게 말하는 아인은 손톱으로 현의 피부에 꾸준히 옅은 상처를 내고 있었다.
갑자기 로그아웃해서 도망쳐 버리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
‘동화!’
‘…?!’
[‘아인’님이 계약을 해제하였습니다!] [동화하기 위해선 다시 상대의 동의를 얻어야만 합니다!」현은 반사적으로 동화를 사용했지만, 스킬은 발동하지 않았다.
오늘의 아인은 제대로 스위치가 들어간 듯했다.
자신이 생각할 만한 방법들은 미리 다 막아두는 걸 보면 말이다.
갑자기 도망치지 못하게 손까지 잡고 있는 상태였다.
“잠깐만, 아까도 약속했잖아! 조금만 더 참기로 했던 건…!”
“하지만 현이 날 불러낸 걸? 그러면 책임도 현이 져야지!”
현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라딕스 섬의 공기가 현의 심장을 더욱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보고 있자니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
진퇴양난에 빠진 찰나.
현을 구원해 준 것은 타르타르였다.
현은 잔나무가지들 사이로 자신들을 엿보고 있는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타르타르…?!”
“뭐어?!”
아인의 고개가 휙 돌아갔고.
어색한 침묵 속에서 세 사람이 마주보았다.
한참 만에 타르타르는 쭈뼛거리며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엿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언제부터 거기 있던 거야?”
“어… 그게… 바, 방금…. 방금 막 왔어요…!”
“…….”
녹화 본을 요구하거나, 동화로 알아보면 어차피 들킬 거짓말이란 걸 알아챈 걸까?
마구 말을 더듬던 타르타르가 이실직고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어요! 죄송해요!”
“이 꼬맹이 자식이!”
후훗, 아인의 외침에 현은 갑자기 웃음을 흘렸다.
방금 전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던 아인이 당황하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꼬맹이라니.
아인은 성장기를 겪은 타르타르의 키가 자신보다 더 커진 건 안 보이는 걸까?
하지만 아인의 앞에서 사색이 된 타르타르를 보면 또 꼬맹이란 말이 어울리기도 하는 것이 아이러니였다.
***
사건은 간단하게 마무리되었다.
반성의 의미를 담아 타르타르가 쉐이드 길드의 잡일들을 도맡아 하기로 결정된 것이었다.
잡일이라지만 어차피 외부에 떠넘기긴 곤란해, 다재다능한 그가 아니면 맡길 사람이 없기도 했던 일이었다.
한편으론 타르타르의 두 번째 노예 계약이 시작된 셈이었다.
그리고 아인이 상당한 소란을 피운 탓에, 타르타르가 벌인 일은 길드의 모두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단 둘이 되었을 때, 살론은 큰형으로서 충고를 건넸다.
“임마, 아무리 혈기왕성한 나이여도, 그런 걸 엿보면 되냐?”
“아니에요! 저 실제로 엿본 건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크큭, 미수에 그쳐서 망정이지, 자칫하면 범죄가 될 수도 있다고.”
지니와 파피는 사건에 별 관심이 없었고, 이 방면으론 나이에 비해 순수한 루이즈만 눈치 없이 계속 떠들어댔다.
“무엇인가? 나에게도 알려다오! 너희끼리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흐흐, 꼬맹인 몰라도 돼.”
“꼬맹이라니! 이 몸은 아마도 20살이 넘었다! 현과 비슷한 나이로, 성인이란 말이다!”
“아, 그런가? 깜빡했군.”
그렇게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시간은 계속 지나갔다.
해가 어두워질 무렵, 마을에선 본격적으로 헤르파가 성인이 된 것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렸다.
거대한 나무줄기들에 은은한 마력등이 켜졌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향이 피어올랐다.
중턱마을의 밤은 지상이나 하늘의 도시들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었다.
코르케스족들은 외부인을 배척하지 않았다.
“자네들도 오게나. 이런 경사스런 날엔 사람이 많을수록 좋지!”
“감사합니다.”
현은 그들의 권유를 거절하지 않았다.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서라도 NPC와의 교류는 필수였다.
물론, 그런 계산적인 목적이 없더라도 축제현장을 바라보는 루이즈의 눈빛을 보면 거절할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은은히 타오르는 모닥불과 이리저리 흔들리는 날개를 바라보며, 현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공감의 힘을 다루는 방법은 완전히 알아냈지만, 그 작동원리까지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왜 멀쩡해졌을까?’
그렇다, 아직 한 가지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있었다.
공감을 다루게 된 동시, 감정증폭이 증폭되는 현상이 완화된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뿐 아니라 길드원들도 함께 멀쩡해졌다.
‘보통은 반대일 것 같은데.’
현은 어둠의 땅에서의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루이즈의 공감이 해방되었고, 온갖 감정의 격류를 받아내야 하는 탓에 루이즈는 굉장히 고통스러워했지.
하지만 감정이 사라지는 지금은 그때와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유저라서 그런 걸까?’
현은 공감의 스킬 설명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어보았다.
지속시간이 끝날 때마다 루이즈와 혼돈 계약을 맺는 중이었다.
(※주의 : 자아의 크기가 너무 작아 공감을 축척할 수 없습니다! 모이는 힘은 자동적으로 스탯을 증폭시키는 데 사용됩니다!)
자신과 루이즈의 차이는 하나뿐이다.
공감을 축적할 수 있는가? 없는가?
케이드리알만 봐도 알 수 있다.
초월자는 축적한 힘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한다.
직접 힘을 행사하거나, 신탁을 내리거나, 부하를 만들거나, 혹은 가게에서 케이크를 사먹을 수 있는 돈을 만드는 데도 모아둔 힘을 사용해아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초월자가 아니다.
공감을 축적할 수 없어, 그 모든 힘은 자동으로 스탯을 증폭시키는 일에만 소모되고 있었다.
무수한 가능성을 지닌 힘을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셈이다.
‘유저는 공감을 모을 수 없으니까, 감정도 공감과 함께 해소되는 건지도 몰라.’
물탱크에 물이 찰수록 압력이 강해진다.
하지만 채워지는 즉시 물을 사용해 버리면 물탱크에 물이 꽉 차서 터질 일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공감의 원료가 감정이라면.
그리고 그 감정을 바로바로 사용해 버린다면, 영혼에 감정이 꽉 채워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길드원들이 멀쩡해진 이유도 설명이 가능해진다.
호스가 물탱크로 물을 전달하는 것처럼, 영혼의 끈이 그들의 감정을 자신에게 계속해서 전달하는 것이다.
‘대충 알겠군.’
공감의 사용법에 이어, 공감이 작동하는 원리까지 나름대로 추측해 본 현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드리알이 공감을 강조한 게 스탯 증폭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
라딕스 섬은 감정을 들썩이게 하는 기운으로 가득 차있다.
누구라도, 설령 400레벨을 넘어선 유저가 수백 만 명 모여도 그 힘을 사용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그리고 평범한 인간은 섬의 ‘상부지대’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아까의 경험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공감을 활용해서 이 상태이상을 해제하라는 거겠지?’
빛의 사원은 섬의 꼭대기. 인간의 감정이 가장 크게 증폭되는 장소에 놓여 있으니, 그 어떤 마법진으로도 뚫어낼 수 없는 천연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릴 수 없는 자는 섬 꼭대기에 위치한 사원에 발을 디딜 수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감정을 해소할 ‘공감’이라는 수단을 보유하고 있다면 어렵지 않게 그 요새를 뚫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을 마친 현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
“뭐? 북쪽 루트를 타고 올라가겠다고?!”
마을의 상점 주인은 현의 말에 경악했다.
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는 방법을 알아냈거든요.”
“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가 현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평생의 경험에 따르면 인간이 라딕스 섬의 기운을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방법을 알아냈다는 현의 말도 현의 착각이나 헛소리로 들렸다.
“정말로 올라가겠단 말인가?”
“네, 오늘은 일찍 자고, 내일 새벽에 바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그것도 어두운 새벽에?!”
“글루나의 빛이 있으니까요. 정 필요하면 빛을 비추는 마법도 쓸 수 있고요”
“아… 자네들은 빛의 신도였지. 아무튼….”
상점 주인은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 듯 입가를 실룩거렸다.
나름대로 호감이 가던 청년이 미치광이가 되어 돌아올까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후… 자네 북쪽 루트는 알고 있나?”
“그냥 위로만 올라가면 되는 거 아니에요?”
“허허허….”
이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군. 북쪽의 길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무것도 몰라.”
상점 주인은 말이 없었다.
결심한 듯 입을 연 것은 한참 동안 침묵을 이어간 뒤였다.
“자네의 뜻이 그리 확고하다면, 내 아는 한 명을 소개시켜 주지.”
“누구요?”
“북쪽 루트를 아는 자라네. 빛의 시종에 가장 가까운 자이기도 하지.”
‘빛의 시종’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현의 눈썹이 보이지 않을 만큼 꿈틀거렸다.
“…꼭 만나야 하나요.”
“그래, 미리 경고하건데 혼자서 섬을 오를 생각은 꿈에도 말게나. 다 자네들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
상점 주인은 장소를 알려주었다.
마을로부터 약 500미터쯤 더 올라간 곳에서 현은 커다란 나무위에 옅게 빛나는 마법진 하나가 걸려 있는 광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이 ‘빛의 시종에 가까운 자’가 살고 있다는 집.
홀로 사는데다 마을의 축제에도 참가하지 않은 걸 보면 어지간한 괴짜인 모양이었다.
“빛의 시종이라니… 내 정체를 알아채는 것은 아닌가?”
루이즈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현은 루이즈와 단둘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머지 일행은 접속을 종료하거나, 마을에서 자는 중.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사원까지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른다.
NPC인 루이즈와 파피를 야영시키는 것보단 마을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편이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시종에 가까운 자래. 진짜 시종은 아닐 거야.”
“우… 그래도 불안하구나….”
“어차피 길만 물어볼 거니까 금방 끝날 거야.”
파앙! 파앙!
현과 루이즈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나무를 타고 올라 평평한 나뭇가지 위에 안착했다.
지상으로부터 약 100여 미터.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오두막이 바로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사는 집이었다.
“계십니까?”
현은 인기척을 냈다.
창문으로 금발 여인이 보이긴 했지만,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기도하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끼익-.
이윽고 문이 열렸다.
그녀는 루이즈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 듯, 청초한 미소를 지으며 거리낌 없이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인간… 손님인가요?”
끄덕.
“섬의 북쪽에 인간이 오긴 쉽지 않을 텐데… 특별한 사정이 있으신가 보군요.”
“네… 조금.”
“일단 두 분 모두 들어오세요.”
오두막은 넓지 않았다.
딱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만 깔끔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집보다는 쉼터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였다.
“기도… 중이셨군요.”
현은 테이블 위에 놓인 나무 조각상을 힐끗거렸다.
커다란 날개를 지닌 갑주의 남자의 형상.
‘빛의 천사’를 깎아낸 조각상이 분명했다.
“아뇨.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어요. 제가 진정으로 기도하고 있었다면 두 분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겠죠.”
‘아….’
현은 그녀의 말뜻을 바로 알아챘다.
루티아에게 배운 기도의 요령.
의식을 극한까지 가라앉히면 바로 옆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한다고 한다.
그 정도의 수준이면 이 여자도 기도에 제법 일가견이 있는 것이겠지.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현은 한 번 숨을 들이쉬고 그녀를 찾아온 목적을 말하기 시작했다.
***
금발 여자의 이름은 세세리.
기도하는 모습을 본 순간 현은 딱딱한 신관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세세리는 그보다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북쪽 루트를 오를 거란 말을 꺼내자, 그녀는 현과 루이즈를 향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북쪽은… 위험한 곳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상상 이상으로 위험해요. 실수로 길을 잘못 접어든다면 최소 몇 주, 길면 몇 달, 몇 년까지 요양해야 할지도 모르죠.”
“길이요…?”
“북쪽의 기운은 균일하지 않아요. 모르는 자의 눈엔 똑같이 보여도 제게는 다르게 느껴지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세세리는 평생 동안 섬의 꼭대기로 향하는 북쪽 루트를 개척해 왔다는 말을 덧붙였다.
“인간은 코르케스족에 비해 감정의 그릇이 깨지기 쉬워요. 마을에서 가장 튼튼한 저도 아직 섬의 꼭대기에 오르지 못했는데, 인간인 당신에겐 더 어려운 일이에요.”
“실례가 아니라면 나이가….”
“스물이에요.”
“아, 네….”
지닌 분위기에 비해 나이는 어린 편이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북쪽 루트 개척에 일생을 바쳤다고 한다.
현은 문득 궁금해졌다.
다른 코르케스족은 높은 장소에 오르기를 극도로 꺼렸다. 몇몇은 두려움까지 내비칠 정도였다.
라딕스 섬의 상부로 갈수록 감정이 증폭되는 고통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헌데, 이 소녀는 어째서 섬의 꼭대기로 가려는 걸까?
“제 오라버니께서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이유를 물어보니 의외로 쉽게 대답해 주었다.
세세리가 그녀가 ‘시종에 가까운 자’라고 불리는 것과도 연관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섬의 꼭대기에 오른 코르케스족은 빛의 시종으로 선택받는다는 말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지요.”
“시종…?”
“맞아요. 오라버니께서 먼저 시종이 되셨으니, 저도 그 길을 따라가려는 것입니다.”
세세리는 그녀의 친오빠에게 일종의 동경심을 가진 듯했다.
“오라버니의 재능은 대단하셨죠. 남들은 마을보다 조금만 높은 곳으로 가도 힘에 겨워하는데, 오라버니께선 사원이 보이는 높이까지 자주 섬을 올라가셨죠.”
“그건 대단한 거야?”
“대단하지요! 성인이 되자마자 빛의 시종이 된 코르케스족은 오라버니가 처음이었으니까요. 그게 제가 성인이 되기 직전의 해였으니까… 벌써 6년 전의 일이군요.”
“으음….”
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코르케스족에겐 ‘높이 올라간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로 인정받는다.
사원에 다가갈수록 점점 증폭되는 감정을 견뎌내야 하니까 그런 거겠지.
그렇게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이겨낸 코르케스족이 섬의 꼭대기에 도달하면 ‘시종’으로 간택되는데, 그것은 코르케스 족의 역사에 남을 만큼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인 듯했다.
“오라버니는 어릴 때부터 북쪽 루트를 수십 개나 개척하셨어요. 언제든 꼭대기에 오를 수 있으셨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신 거죠.”
“시종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문득, 루이즈가 물었다.
부하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귀가 솔깃한 모양이었다.
조금 무례하게 들리는 질문에 현은 눈치를 주었지만, 세세리는 별 말 없이 루이즈의 궁금증에 대답해 주었다.
“일반적으론 계약이죠.”
“계약…?”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하지만 시종이나 부하를 만드는 건 초월자에게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란 사실은 알고 있어요.”
‘엄청난 양의 공감이 필요하겠지.’
그 방법은 현도 대강 추측할 수 있었다.
공감도 못 다루는 루이즈가 직접 부하를 만들어 내기란 요원할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어요.”
“어떻게…?!”
“운명… 이라고 말하면 이상할까요?”
“운명이라…?”
“태어나면서부터 시종으로 정해진 자들도 있거든요. 그런 특별한 존재들은 별도의 계약 없이도 천사의 시종이 된다고 하는데… 저희랑은 관계없는 이야기지요.”
세세리의 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그녀가 사원에 도달하고자 하는 이유는 오빠를 따라 빛의 시종이 되기 위해서.
하지만 섬을 오르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위험한 일이기에 6년이 지나도록 아직 하나의 등반 루트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그녀가 시종이 되는 방법은 섬의 꼭대기에 도달하는 것뿐이니, 지금은 차근차근 등반 루트를 개척 중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 정도면 섬의 북쪽 길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사실은 이해하셨겠지요.”
“응.”
“그래도 갈 생각이고요.”
“맞아.”
세세리는 상점 주인처럼 현의 결정을 만류하진 않았다.
대신, 하나의 퀘스트를 던져 주었다.
“저 봉우리가 보이시나요?”
그녀는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으로부터 약 1킬로미터 떨어진 장소.
코르케스족 소년의 성인식이 있었던 ‘고요의 연못’보다 두 배쯤 더 먼 장소였다.
“뾰족나무에요. 내일 아침까지 저 거목 아래로 절 찾아오세요.”
“꽤 높아 보이는데?”
“맞아요. 게다가 주변보다 기운이 더 무거워서 웬만한 성인 코르케스들도 가기 꺼려하는 장소죠. 하지만 북쪽의 길을 따라 사원까지 가려면 그 정도 감정의 떨림은 아무렇지 않게 버텨내야 합니다.”
띠링!
-내일 오전 7시까지 마을 북쪽의 뾰족나무에서 세세리를 기다리세요.
(보상 : 세세리의 안내)
퀘스트 내용을 읽은 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도 아직 꼭대기에 도달하지 못해서 등반 루트를 개척하는 중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럼 사원까지 안내할 수 없는 거 아니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이어지는 세세리의 말에서 알 수 있었다.
“사원이 보이는 곳까지만 제가 데려다 드릴 수 있어요. 그 이후의 구간은 당신 스스로의 힘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감정의 그릇이 크다면 아무 문제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저처럼 애를 먹겠지요.”
“음…. 좋아.”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현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퀘스트를 받아들였다.
공감을 사용하면 일행 모두를 퀘스트 장소로 데려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내일 보죠.”
세세리와의 긴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지루했던 걸까? 루이즈는 어느새 꾸벅꾸벅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현은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힘 스탯이 낮았다면 덩치가 커진 루이즈를 안고 거목을 뛰어 내려올 수 없었을 테니까.
‘나도 슬슬 자러 갈까?’
갖가지 일을 겪어서 살짝 피곤한 상태.
축제도 끝나고 모두가 잠든 시간, 현은 아스리안의 접속을 종료했다.
퀘스트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내일 아침 아인을 잘 깨워야겠다고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