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90)
하늘 위의 전쟁
천인을 속이다
사도의 자격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방법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
2차 전직을 위한 준비
비상을 위한 준비
지하로 가는 길
2차 전직
기만이 인도하는 길
하늘 위의 전쟁
[레티의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바닥의 시침이 역방향으로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파치치치칙!
처음에는 느리게. 하지만 점점 빠르게 돌며 얼마 후엔 잔상밖에 보이지 않았다.
“웃, 뭐야!”
“시험이 시작된 건가?
천인은 얼굴도 비추지 않았는데 퀘스트가 진행되자 주위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현, 뭔지 알겠어?!」
「생각하는 중이야.」
현은 번쩍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이나 하늘을 질주하고 있었다.
햇볕이 내리쬐고, 어둠이 덮이고, 다시 빛이 떠오르는 광경이 점점 빠르게 반복되었다.
메시지는 과거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그럼 얼마만큼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일까?
‘아….’
마침내 바닥에서 회전하던 시침이 완전히 멈추었을 때, 현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여기는.’
쿠르르르르!
거대한 땅이 통째로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부유하는 땅덩이의 가장자리에선 새카만 물감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것이 어둠의 땅에 자욱하던 안개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현은 돌아간 시간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5년 하고도 며칠 전.
유저가 아스리안에서 잠깐 사라졌던 날이자, 어둠이 자아의 일부를 되찾은 날이었다.
“우왓!”
“땅이 흔들리고 있어!”
쿠르르. 쿠르르르.
수 킬로미터에 걸친 지면이 뜯겨나가자 민첩이 낮은 유저들은 중심을 잡기위해 안간힘을 썼다.
팟!
진동은 곧 멈추었다.
뜯겨나간 부분이 지면과 완전히 분리되었기 때문이었다.
서서히 부유하는 섬 위에서. 주위를 둘러본 수십 명의 유저들이 말을 잃은 가운데.
띠링!
모두에게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티의 시험]-기억의 전장에 참여하였습니다!
=5년 전 천공과 심연은 목숨을 걸고 하늘에서 부딪쳤습니다. 만약 당신이 함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당신이 지닌 가능성을 이 자리에서 보여주세요. 레티가 그대들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
(※이 장소에선 무한정 부활할 수 있습니다!)
[부활 패널티] –퀘스트 메시지가 모두 지나간 뒤엔 타이머가 떠올랐다.
시험의 진행 시간은 총 3시간인 듯 했다.
“잠깐, 나 여기 어딘지 알고 있어.”
퀘스트 메시지와 주위의 풍경을 번갈아 바라보던 한 유저가 번뜩 소리쳤다.
“역사 퀘스트에서 나왔던 장소잖아!”
섬 한가운데 위치한 거대한 제단.
그곳에 콸콸 흐르는 어둠의 안개.
역사 퀘스트 에피소드 중 하나, 의 배경과 완벽하게 같았다!
“정말, 그러고 보니 그 마지막 에피소드 맵이잖아!”
“중앙의 산꼭대기에 검은 피라미드가 위치한 것까지 똑같아!”
대부분 유저들은 해당 에피소드를 경험해 보았고, 어느 정도의 스토리를 알고 있었다.
에피소드를 클리어하자 하늘의 검은 태양이 진짜 태양으로 변화하면서 끝났던 것도 다들 기억했다.
하지만 지금 하늘에 떠있는 것은 찬란히 빛나는 태양.
그 뜻은, 이곳이 같은 장소의 다른 시간대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역사 퀘스트의 다음 내용이다!”
에피소드에서 쭉 등장하던 어둠이라는 소녀는 애틋한 표정으로 이러한 마지막 대사를 읊었다.
“여기서부턴 나의 운명이니…. 그대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후후, 나의 부하였던 것을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건방졌던 소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역사 퀘스트를 하던 모두는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맞아, 뒤에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로 끝났지.”
“지금 우린 천공이잖아.”
“그 여자애와 다른 편에서 싸워야 하는 건가?
그들은 쭉 함께했던 동료와 싸우는 묘한 기분을 느꼈지만, 곧 고개를 흔들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곳은 천인의 시험장. 그런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제사가 끝나고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지.’
그리고 현의 머릿속에도 루이즈의 말이 스쳐갔다.
다른 이들과 달리, 현은 뒤쪽의 역사를 조금 더 알고 있었다.
‘그날 수차례의 죽음을 넘겼다고….’
또한, 망가진 채 바히미르의 성에 잠들어 있던 쌍둥이 골렘들도 떠올렸다.
샤틴과 샤티나는 루이즈를 지키다 처참히 파괴되었다고 말했다.
어둠이 지상에 올랐으니 천공의 집중공세를 받아내야 하는 것은 당연했으리라.
‘그 때의 전쟁이야!’
인간세력은 물론 천인들까지 참여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전쟁.
분명 가상의 전투일 것이다.
‘기억의 전장’이라는 단어가 퀘스트에 명시된 데다, 마음껏 부활이 가능한 전투가 진짜일 리 없으니.
하지만 가짜라고 알고 있음에도 현의 심장은 점점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현은 안개의 분출이 멎은 제단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루이즈는 남은 시간동안 천공의 표적이 되는 걸까?
그리고 나는 그런 루이즈를….
「현.」
갑자기 들려온 아인의 목소리가 현의 정신을 일깨웠다.
「신기하네, 이럴 때는 꼭 현이 누굴 생각하는지 금방 알겠어.」
「응…?」
「루이즈지? 현이 못하겠으면 내가 좀 혼내줄까? 안 그래도 걔, 괘씸한 구석이 있었거든.」
아인의 짓궂은 웃음기가 동화로 섞이는 순간, 현의 마음은 빠르게 진정되었다.
덕분에 불필요한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그래, 눈앞에 보이는 건 전부 가상의 세계. 환영 따위에 몰입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서 뭔 짓을 하려고.」
「흐응, 글쎄?」
「혹시 몰라서 말해두는 데, 너무 무리하지 마.」
「왜?」
현은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덧붙였다.
「여기서 마기를 쓸 순 없거든.」
기만자 칭호가 있다 해도, 천인의 시험에서 마기와 관련된 스킬을 사용하진 못한다.
쉐도우 링커의 핵심 스킬들이 전부 봉인된 이상 아인도 몸을 사려야 했다.
「또 루이즈 걱정해 주는 거 아니고?」
「…아니야.」
「흐응, 방금 그거 거짓말이….」
아인은 잠시 감았던 눈을 뜨며 말했다.
「아니네…!」
「쓸데없는 짓 말고, 서둘러 움직이자.」
랭커에 가까운 유저들이기 때문인지, 근처의 모두는 빠르게 준비를 마쳐가고 있었다.
현은 너무 눈에 띌 생각도 없지만, 소극적으로 움직일 계획도 없었다.
‘잘하면…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현은 특별한 사실에 주목했다.
천인의 퀘스트는 유저들로부터 대리자(기사)를 선출한다는 점에서 공작의 대회와 매우 흡사하다.
또한, 선출되지 못한 자들도 성과에 따른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점도 같았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 한 가지.
천인의 퀘스트에선 유저가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반적으로 전쟁터에서 레벨업을 하는 건 미친 짓이겠지만….’
물론 쉬운 방법은 아니다.
현은 이전 메시지에서 부활 패널티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부활 패널티]-죽을 때마다 레티의 ‘평가’가 하락합니다.
-사망하면 획득한 경험치를 전부 잃어버립니다.
-10초 후 안전한 장소에서 부활합니다.
이곳은 전쟁터 중에서도 특히나 위험한 전쟁터다.
상대는 오합지졸이 아닌 어둠의 군대들.
과거의 샤틴, 샤티나와 맞서야 할지도, 어쩌면 스코타나토스를 포함한 공작들과 싸워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 상대들로부터 죽지 않고 경험치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할까?
300레벨 후반이나 400레벨을 넘어서는 적들과 맞붙으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
아니, 그런 네임드를 제외해도, 심연의 무리에 둘러싸이는 순간 곧바로 사망하겠지.
그런데 한 번이라도 죽으면 경험치가 전부 날아간다니, 이런 장소에선 몇 날 며칠을 사냥해도 1 레벨을 올리기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그 방법이 통한다면….’
하지만 반대로, 고위 마물들과 네임드들을 마음껏 잡아내면서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죽지만 않는다면 전쟁터는 최고의 효율을 지니는 사냥터로 변하리라.
현은 방금 떠올린 방법이 통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여기서 바로 200레벨을 찍을 수도 있다!’
그것도 고작 세 시간 만에!
「아인, 지금 피로도 몇이야?」
「한자리 수인데, 왜?」
「오늘은 무조건 잡아둘 거야.」
「응…?」
「녹초가 되기 전까진 못 도망가니까, 알아두라고.」
「…!」
마침 운 좋게 찾아온 광속 레벨 업 기회.
현은 한시도 쉬지 않고 사냥할 계획이었으니 아인에게도 미리 말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힘들면 꼭 말해.」
「현은…?」
「나는 이 정도로 안 지쳐!」
현은 상태창의 피로도를 힐끗 살폈다.
21. 불필요한 곳에 집중력을 소모하지만 않는다면 다섯 시간은 거뜬히 집중할 수 있었다.
팟! 팟!
잠시 후, 본격적인 시험이 시작되려는 듯 섬의 곳곳에 있는 포탈에서 신관들이 걸어 나왔다.
기사단이 탄 비룡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수 킬로미터의 조그마한 섬.
어둠의 군대에 맞서기 위한 천공의 연합군이 대열을 갖춰가고 있었다.
띠링!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메시지가 울렸다.
점수란 레티의 평가. 대리자를 뽑는 기준.
‘시작이군.’
현은 천인들이 공작보다 훨씬 까다로운 방식으로 유저를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레티 또한 마찬가지. 그녀는 단순히 무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시험을 개최하는 것이 아니다.
키워드는 ‘헌신’.
레티는 동료와 협동하는 유저에게, 천공의 군대와 조화를 이루는 유저에게 더 높은 점수를 매길 것이 분명했다.
“우리 파티는 각자 역할 다 기억하죠?”
“물론, 준비해 온 대로만 합시다!”
현은 주위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봤다.
레티의 의도를 파악한 것은 자신만이 아닌 듯했다.
다들 시험 전부터 파티를 이루고 온 건가? 그러면 확실히 레티에게 가산점을 얻겠지.
하지만 그것은 다른 유저들의 사정일 뿐, 자신의 목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경험치 말고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어.’
현은 점수에 관해선 잠시 잊기로 했다.
점수가 너무 낮으면 ‘유니콘의 뿔’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얻어도 되는 물건. 지금은 그보다 쉽게 오지 않을 기회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저기요, 아인님이죠?”
그렇게 현이 막 움직이려던 때,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저희 파티에 근접 딜러가 한명 비는데, 혹시 같이 하실래요?”
“파티요…?”
“여기 이쪽 분들입니다. 절 포함해 지금 다섯 명이죠.”
현은 잠깐 훑어보는 것으로 그들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솔플 유저들끼리 모인 건가?’
척 봐도 어설픈 조합이었다.
아무 계획 없이 왔다가 시험 주제가 전쟁이라는 걸 확인한 뒤에야 허겁지겁 저들끼리 뭉친 거겠지.
유저에게 전쟁이란 급성장의 기회이지만, 한편으론 위험이 가득한 장소이기도 했다.
동료가 없는 유저는 아무것도 못 하고 돌연사하는 경우가 부지기수.
특히 전쟁터에선 파티를 이루는 편이 안정적이다.
“혼자 참가하신 거라면 저희들이랑….”
「현! 쟤들이랑 파티할 거면 나 동화 풀어버린다?!」
「뭐? 잠깐, 안 해! 가만히 있어!」
갑자기 들려온 아인의 목소리.
찰나 현은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여러 번 말했잖아. 이 도시에서 동화를 풀면 정말 큰일 난다고!」
「후후, 당연히 장난이지.」
정말로 장난이었을까?
아직도 심장이 철렁거리는 현은 아인의 말의 진위를 가릴 수가 없었다.
“…파티는 사양할게요.”
“그런, 함께하기로 한 다른 동료가 있으신 건가요?”
“아뇨, 없는데, 필요 없어서.”
현은 일단 거절의 뜻을 밝혔다.
멀어지는 도중 뒤에서 무어라 중얼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불평일까? 비아냥거림일까? 아니면 혼자서 전쟁터로 뛰어드는 무모함에 혀를 차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남들의 시선 따위가 아니니까.
현은 이번에도 스스로의 판단을 믿을 뿐이다.
「아인… 부탁 몇 개만 하자.」
「응?」
「네가 해줘야 할 일이 많아.」
이제 땅은 완전히 천인의 영역에 들어섰다.
어느새 지면의 상승은 멎었고, 제단에 콸콸 흐르는 안개마저 멈추었다.
‘이게 그 날의 전쟁….’
현은 눈앞의 광경에 기가 질렸다.
시야를 뒤덮는 것은 끝도 보이지 않을 언데드의 무리들!
언데드는 아마도 스코타나토스의 병력들일 것이다.
샤틴과 샤티나… 어둠을 모시는 시종들도 지금쯤 깨어났으리라.
제단 근처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물들이 끊임없이 땅에서 솟아나거나, 포탈을 통해서 넘어오고 있었다.
‘천공 쪽도 대단해.’
현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쪽엔 천공의 군대가 빽빽하게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아주 가끔씩 천인도 섞여 있었지만, 대다수는 제국과 성왕국의 연합으로 구성된 대군이었다.
‘저건 천사를 소환하는 의식일까?’
순간, 현은 눈을 빛냈다.
후방에서 수백의 신관들이 모여 기도하는 장엄한 광경을 발견했기 때문에.
초월자의 강림은 쉽지 않다.
역사를 살펴봐도 초월자가 신탁 외의 힘을 행사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압도적인 힘을 다루는 존재들을 소환하기 위해선 그만큼 어마어마한 공감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저 중에 신녀가 섞여 있다면, 최소 비숍, 잘하면 로열의 천사까지 소환되겠어.’
물론 의식엔 제법 시간이 필요하다.
강력한 천사일수록 더욱 긴 시간이.
어쩌면 180분이라는 제한시간은 초월자를 부르는 데 필요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본격적으로 초월자가 나서면 유저를 포함한 인간과 천인들은 싸움에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승부를 봐야겠지!’
시험이 시작된 지도 제법 지났다.
수많은 생명이 사그라진 와중에도 현과 아인은 단 한 마리의 마물조차 죽이지 않았다.
경험치도, 레티의 점수도 전혀 얻지 못한 상황.
그럼에도 아인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성공적으로 계획을 마친 현의 웃음이었다.
조금 전, 칭호의 효과를 활용하여 제국의 대군을 기만한 참이었기에.
「현, 다음에 말할 내용 계속 알려 줘!」
제국군의 사령관 바로 옆에서, 아인이 재촉했다.
현이 직접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말하는 주체에 따라 거짓말의 성공률이 달라진다는 사실이 실험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이었다.
「미안. 잠깐 딴 생각 하느라. 지금도 제 머릿속에 신탁이 울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내 머릿속엔 신탁이 울리고 있어.”
‘좀 다르지만… 상관없나?’
현은 시험이 시작되자마자 천공의 지휘체계를 거슬러 올라갔고, 머지않아 가장 높은 계급의 NPC와 만날 수 있었다.
사령관의 바로 옆 자리!
아인의 입술이 열릴 때마다 제국 사령관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새로운 신탁이 확실합니까?”
「맞아요.」
“어.”
지금 말하는 소녀는 난데없이 등장한 신녀였다.
어디서 온 누군지도 알지 못한다.
당연히 처음엔 정체를 의심했지만, 그녀의 손등에 새겨진 룬과, 찬란히 빛나는 성화(聖火)를 목격한 뒤엔 완전히 의심을 거두고 신녀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제가 미래를 보았으니, 제 지시를 따라주십시오.」
“그러니까… 내 명령을 따라.”
“물론, 신탁을 따라야겠지요!”
게다가 신녀는 벌써 여러 번의 예언을 적중시켰다.
미래를 본다는 것! 신탁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정말 의심을 하나도 안 하네.’
사실, 현은 루이즈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이곳은 5년 전의 시점. NPC의 입장에서 자신은 시간여행자와 다르지 않으니 미래를 예측하기란 아주 쉬웠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약간의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유일하게 걸리는 존재는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천인, 레티.
‘지금은 신경 쓰지 말자.’
다행히 그녀는 유저에게 관대한 천인이었다.
진실의 신도이긴 하지만… 그래도 거짓말 몇 번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천공의 병력 일부를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기회, 현은 약간의 리스크를 감수하기로 했다.
「이제부턴 심연의 정예 골렘들이 깨어날 겁니다.」
“곧 엘리트 몹이 등장할 거야. 골렘이.”
아인의 입이 떨어짐과 동시.
드드득, 땅에서 무수한 수의 인형들이 솟아올랐다.
다시 한 번, 예언의 적중이다.
“오오…! 정말이다!”
”큭, 사악한 마기를 풍기는 인형이라니!“
화아아악! 때마침 현이 성화를 밝히자 일대가 빛에 물들었다.
광휘의 장검을 손에 쥔 아인의 모습은 마치 성녀.
어둠을 토벌하기 위해 내려온 빛의 사도처럼 보였다.
「마무리는 꼭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것들은 계속해서 살아나고 말 테니까.」
“막타는 무조건 나한테 넘겨.”
“막타… 라고요?”
「야, 그건 너무 줄였잖아! 걔가 알아듣겠냐고!」
갑자기 현이 한 소리 쏘아붙였다.
문장을 요약하는 것은 좋지만, 적어도 NPC들이 이해하도록 말해야 할 것이 아닌가?
「현이 빨리 말하라며, 그럼 어쩔 수 없잖아!」
「알겠어. 이상한 용어만 쓰지 마.」
현의 타이름에, 아인은 헛기침을 한 뒤 사령관에게 재차 신탁을 전달했다.
“저것들은 꼭 신녀의 힘으로만 처단해야 돼. 그러니까 나한테 버프… 아니, 강화마법 좀 걸어 줘.”
“최대한 힘을 보태겠습니다. 지원단장!”
“예!”
우웅. 우우웅.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많은 이펙트가 아인의 전신을 휘감았다.
대부분 고정 데미지를 증가시켜주는 버프.
이로써 막타를 치기 수월한 조건이 갖추어졌다.
‘완벽하다!’
현은 번개와 신성력이 뒤섞인 성검을 곧게 뻗었다.
문득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왠지 아스라로 돌아온 기분이네.’
주위의 전장을 둘러보았다.
천공이 자신의 손짓 아래 움직인다.
군대를 지휘하는 것은 이미 익숙했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사령관 노릇을 할 수도 있으리라.
‘다 지휘할 필요는 없어.’
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쟁놀이는 나중에 해도 충분해. 지금은 경험치를 올리는 일이 더 중요했다.
‘기사단 두 개 정도만 움직이면 되겠지.’
수만의 병력까지 다뤄본 자신이 한 두 개의 기사단을 손발처럼 운용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제국의 기사들은 목숨을 바쳐 어둠을 멸할 각오로 이곳에 왔겠지.
미안하지만 자신은 오늘 그들의 운명을 기만해 줄 생각이다.
기사단의 목숨은 경험치를 올리기 위한 용도로 사라지고 말 테니.
‘아니, 과거의 환영에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나?’
이어서 현은 명령했다.
“돌격하라!”
‘아차…!’
말하고 나서야 실수를 깨달았다.
분위기에 심취한 나머지 아인의 목소리를 거치지 않았단 사실을.
괜찮나…?! 이러면 ‘기만자’의 효과가 제대로 발동하지 않았는데.
「이제부턴 현이 말해도 될 같아.」
현이 초조해하던 때 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더 할 거짓말도 없잖아!」
「…그렇네.」
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신성의 흐름을 따라 제국에 울려 퍼진 목소리. 기사단은 그 명령 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
시험이 시작된 지 약 한 시간 째.
천공과 심연이 쉴 새 없이 엉키는 과정에서 유저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큭…! 우리 전열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밀어붙이고 있나? 아니, 밀리고 있어!”
유저들 중엔 과거 일루나의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지닌 자도 존재했지만, 그들 역시 전장의 혼란에 휩쓸려 2번이나 죽음을 맞았다.
아직까지 한 번도 죽지 않은 유저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가장 많이 죽은 자는 무려 52번!
콤보 계열 도적이었고, 그래서 솔로 플레이를 고집하던 탓이었다.
사냥한 마물의 수로만 따지면 최상위권에 속할 테지만, 레티의 시험에서 그 활약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레티는 무모함을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무모함 때문에 전체의 균형을 해치는 이를 한심하게 보았다.
조화로움을 중시하는 레티가 솔플을 고집하는 자에게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빌어먹을! 이번 시험은 벌써 조졌군!”
어차피 망한 거 레벨이라도 올릴까?
지금에 와선 그런 생각조차 접었다.
초반엔 언데드들 사이를 날뛰며 제법 짭짤한 경험치를 수급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력한 마물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격해진 지금, 그는 전선을 나서기만 하면 몇 초 만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
[사망했습니다!] [33800의 경험치를 잃어버렸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점수가 너무 낮아서 더 이상 하락하지 않습니다!] [10초 후 안전한 곳에서 부활합니다!]53번째의 죽음.
방금은 후열에 숨어 있었음에도 갑자기 날아든 화염의 광역마법에 녹아내렸다.
‘제길!’
시험이 전쟁터라고 알게 되었을 땐 기대어린 웃음을 지었다.
콤보 도적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기에.
일루나에서 활약했던 살론이 그에게 전쟁의 로망을 심어 주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딴 시험이라면 난 빠지겠어!’
[이후 6개월간 레티의 시험을 치룰 수 없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시겠습니까? Y/N] [수락하였습니다. 대리자의 전당에서 퇴장합니다.]한 시간 만에 첫 번째 탈락자가 나왔다.
허나, 나머지 유저들은 경쟁자 하나가 줄었음을 확인할 여유조차 없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전쟁의 혼란에 휩쓸려 죽어버릴 테니까.
“크으, 여태까지 겪었던 퀘스트 중에도 가장 힘든 축에 속하는군.”
그나마 가장 여유가 있던 누군가가 신음을 흘렸다.
크림슨 길드.
회귀자 길드와, 새로운 프로게임단들이 새롭게 치고 올라온 지금도 랭킹 10위권에 당당히 발을 걸치고 있는 전통 깊은 길드였다.
“저도에요, 이거 어쩌면 여태껏 알려진 시험들 중 제일 큰 스케일 아닐까요?”
“그럴지도 몰라. 이런 전쟁이라면… 어쩌면 우리도 역사 퀘스트에 출현할지도 모르지.”
2번 파티의 리더, 엑시움이 한숨 돌리며 중얼거렸다.
모두가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도 어떻게 잠깐의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엑시움은 파티원 전원을 제국에 맡기는 선택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제 3 지원대에 파티를 합병합니까? Y/N]이번 시험에 참가한 크림슨 길드원은 무려 16명!
그들은 레티의 성격을 누구보다 완벽히 파악하고 시험에 참가했다.
조화를 중시하는 레티의 성격을 완벽히 분석했기 때문에 이러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크림슨 2번대’는 이제 ‘라우스 지원대장’의 지휘를 따르게 됩니다!]2개의 풀 파티, 16명의 크림슨 길드원은 모두 제국의 어느 부대에 합류했다.
그 순간, 엑시움은 다시 한 번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당신의 선택을 흡족해합니다!] [보너스 점수로 30을 획득합니다!]점수가 순식간에 두 배로 뻥튀기되었다.
하지만 점수보다 더 중요한 요소.
크림슨 길드는 제국의 지휘를 따르게 되면서 이전과 비할 수 없는 안정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힘들지만, 다른 사람들은 더 힘들 거야.”
엑시움은 주위를 살피며 혀를 내둘렀다.
전장은 귀가 먹먹해지는 폭음, 고함과 비명소리가 섞인 아우성으로 가득했다.
저런 장소에선 아무리 라티스나 아인이라도, 1분조차 버틸 수 없겠지.
유일한 정답은 바로 천공의 군대와 조화를 이루는 것. 시험 출제자의 의도 또한 그것이 아니겠는가.
“NPC의 보호를 받는 우린 남들보다 여유가 있으니까.”
이어서 바로 옆 제국 병사의 표정을 목격한 찰나, 엑시움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왠지 오늘은 이 녀석들이 진짜 인간처럼 느껴지는데?’
목숨을 바치기로 각오한 자의 비장한 표정.
순간, 소름이 돋았다.
NPC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나? NPC가 아닌 것 같아.
엑시움의 느낌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전장의 모든 존재들은 천인인 레티가 자신의 힘을 불어넣어 만들어낸 허상, 인공지능 또한 천인의 기준을 따라간다.
평소 1세대 인공지능밖에 접하지 못한 이들이 1.5세대의 정교한 감정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진짜 제국병이 된 기분이군.’
엑시움을 비롯한 크림슨 길드원들은 전장의 비장한 분위기에 전염되어 가기 시작했다.
‘일체감, 이게 바로 진짜 대리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겠지.’
‘무슨 지시든 목숨을 바쳐 따를 수 있을 것 같아!’
상부로부터 새로운 명령이 떨어진 것은 그 때였다.
엑시움은 순간 착각한 줄로 알았다.
그 명령의 내용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3지원대장의 목소리가 신성의 물결을 타고 휘하의 모든 병사에게, 크림슨 길드원들의 귓가에도 울려 퍼졌다.
어째선지,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에 조금 당혹스러운 기색이 섞여 있었다.
“돌격이라고? 우리 지원대 아니었어?”
“저기로 돌격하면 전멸하는 게 당연하잖아….”
“좀 기다려 봐. 명령에 착오가 있었겠지.”
크림슨 길드원들이 의문을 떠올리던 와중, 다시 한 번 명령이 들려왔다.
이번엔 각오를 마친 듯 결연한 목소리였다.
두두두두.
그와 동시 일제히 돌격하는 주위의 병사들.
“착오가 아니다!”
‘이게 전쟁인가…?’
엑시움이 침음을 삼켰다.
병사들 사이에서 주위를 살피니 정말 다양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울고 있는 자, 고래고래 악을 쓰는 자, 그리고 무표정을 간신히 연기하는 병사도 있었다.
그들의 귓가에도 같은 명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레티의 시험 전에 확인한 키워드들이 눈가를 스쳤다.
조화, 그리고 헌신.
‘대리자의 자격.’
이 또한 레티의 시험일 것이다.
무리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지원대로 돌격하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이 떨어질 리는 없겠지.
“그래, 여기서 천공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거군.”
각오를 마친 엑시움의 중얼거림에 파티원들은 깜짝 놀랐다.
“잠깐, 엑시움, 설마 저 명령대로 돌진하자고?”
“여태껏 우리 파틴 아무도 안 죽었잖아! 경험치도 제법 얻었고… 게다가 죽으면 점수가 많이 떨어질 거야!”
「그 망설임이 바로 시험이다.」
엑시움은 씩 웃으며 자신이 생각한 것을 모두에게 말했다.
레티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길드 채팅을 이용해서.
「우리가 희생이란 선택지를 고를 수 있을지 지켜보겠단 거지.」
「아, 그런 거였나.」
「그러면 방금 단체로 함정에 빠질 뻔했네?」
「아마도.」
죽으면 일정량의 점수가, 추가로 대량의 경험치가 하락한다.
그런데도 당신은 천공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이 내려온 경위엔 레티의 손길이 닿았음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모든 상황을 파악한 크림슨 길드원들의 입가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좋아, 천공을 위해 몸을 불사를 때로군.”
“이 목숨으로 한 순간의 빈틈을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을 바쳐도 좋아…!”
다들 한 마디씩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으며 선두 병사들의 틈에 섞였다.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레티에게 최대한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지원대의 최후는 장엄했다.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선두 병사들은 어둠의 군단의 집중공세를 버티다 하나씩 산화해갔다.
두두두두!
죽음의 직전, 반대편에서 돌진해 오는 기사단을 목격한 엑시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을 포함한 자들의 죽음으로 어둠에게 도달하는 길이 열렸기에, 그는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다.
[사망했습니다!] [2726343의 경험치를 잃어버렸습니다!] [누군가 황급히 당신을 돌아봅니다!] [미처 목격하지 못한 상황을 추측 중입니다….] [상황을 추측 중입니다…….]시야가 암전한 뒤,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잠깐.’
불안감이 엑시움을 엄습해왔다.
‘미처 목격하지 못한 상황이라니… 설마 이쪽을 안 보고 있었나?’
[상황 파악이 완료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돌발행동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합니다!] [보너스 점수 30점이 회수됩니다!] [부활 패널티로 3점이 추가로 하락합니다!] [10초 후 안전한 장소에서 부활합니다!]‘진짜 안 보고 있었다고?!’
엑시움의 머릿속에 무수히 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돌격명령은 레티의 개입이 아니었던 걸까?
하지만 그래도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어!
조화, 헌신.
자신들만큼 레티의 의도를 잘 이행한 유저는 없을 게 분명한데…!
‘대체 뭐에 시선이 팔렸기에…?’
크림슨 길드보다 레티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파티나 길드가 있었나?
하지만 시험 직전에 특별히 눈에 띄는 파티는 없었다.
그렇게 당황에 휩싸인 와중 시야가 바뀌었고.
“……미안하다.”
엑시움은 함께 사지로 돌격했던 동료들의 시선을 한참동안 피해야만 했다.
***
현은 병력 일부를 과감하게 미끼로 던졌다.
화력을 한 번 상쇄하여 마법병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백병전엔 취약한 그 녀석들은 가장 귀중한 경험치의 재료였으니까!
‘지금!’
적들의 후방에 이르는 길이 뚫린 순간, 현은 기사단에 명을 내렸다.
“돌격하라! 전속력으로!”
화아아악!
거대한 빛이 기사단의 앞길을 밝혔다.
그것이 신탁이 가리키는 길.
수많은 제국의 기사들은 무서운 리치들의 군단을 향해 돌진을 시작했다.
“아아….”
“빛이시여, 인도를!”
함께 달리는 신녀의 모습은 기사단의 사기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었다.
어느 신녀가 직접 검을 들고 선봉에 나선단 말인가?
그러한 일은 역사에서 단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성녀…!’
‘빛의 사도이시다!’
어둠을 멸하는 것은 빛의 숙명.
그러니 어둠의 군대를 앞두고 신탁을 받는 아인은 빛의 사도로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다들 알지?! 마무리는 내가 지어야 돼!”
“잊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신녀님의 검으로 적의 숨통을!”
마법병의 무리를 돌파하기 위해 제국에선 최정예의 기사단을 보냈다.
바꿔 말해, 현과 아인은 300레벨 후반에서 400레벨 초반대의 NPC들에게 쩔을 받는 상황이었다.
카아아아! 성화의 빛이 담긴 양손 검에 베여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는 리치들.
하지만 죽진 않았다.
아무리 체력이 낮다 해도, 갖가지 버프가 덧씌워진 공격이라도, 마법사가 휘두르는 검에 쉽게 당할 몬스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아인을 바짝 호위하던 기사의 검이 번쩍였다.
400레벨이 넘는 그의 절기는 정확히 리치를 빈사상태로 만들 만큼의 생명을 빼앗았다.
“고마워.”
다시 아인의 검이 허공을 가르자 마물은 성화의 광휘에 삼켜져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눈에 보일만큼 쭉 올라가는 경험치!
물론 경험치 분배는 공헌도에 비례하기 때문에 100퍼센트의 경험치를 획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방금의 사냥감은 400레벨에 근접한 엘리트 마물!
막타를 날리는 것만 해도 평소엔 상상조차 못할 경험치를 벌어들일 수 있었다.
“신녀님, 여기도!”
“이쪽도 잡아두고 있습니다!”
“그 신성의 검으로 적에게 안식을 주소서.”
비슷한 상황이 기사단의 주위에서 반복되었다.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경험치를 모두 수급하기 위해서 현은 ‘생체리듬 가속’까지 사용해야만 했다.
[레벨 업!]머지않아 터져 나온 이펙트!
경험치를 똑같이 맞춰 둔 덕분에 현과 아인은 동시에 레벨 업을 할 수 있었다.
‘이래도 괜찮은 건가…?’
갑자기 현은 무서워졌다.
레벨 업이 빠른 건 좋지만 너무 빨라… 시스템 악용 뭐 이런 걸로 이용을 제재당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계속해서 맴도는 탓에 현은 다음의 메시지가 떠오를 때마다 움찔거렸다.
[누군가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경험치 수급을 시작한 순간부터 같은 메시지가 반복되고 있었다.
누군가란 분명 시험의 주최자 레티.
하지만 한편으론 모니터링을 하는 개발진의 경고라 생각되는 것은 왜일까?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양심이 없는 플레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여기서 너무 해먹으면 위험할지도 몰라.’
언젠가 들은 바에 의하면 개발진은 웬만해서 유저의 플레이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일 뿐이다.
실제로, 역사 퀘스트의 보상 중엔 스탯, 스킬 포인트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것은 개발진이 아스리안의 밸런스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딱 200레벨만 찍자… 이런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니까. 딱 한 번은 봐주겠지.’
그러한 현의 우려는 사실 불필요한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현은 개발진보다 레티의 시선을 더 의식해야만 했다.
천인의 힘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
이곳에서 획득하는 경험치는 천인이 지닌 힘의 근원과 연관되어 있었으니, 현의 레벨이 오를 때마다 레티의 힘도 함께 빠져나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같은 메시지가 계속해서 떠오르는 이유도, 레티가 본인의 힘이 유출되고 있는 곳을바라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러한 원리를 모르는 현은 개발진의 눈치만 볼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래, 나중에 뭐라고 하면 아무것도 몰랐다고 해야겠군! 시스템 악용도 한 번까지는 봐 주는 게 정석이잖아!’
기회가 왔을 때 최대한 해먹기로 결심한 현은 좀 더 사냥의 속도를 높였다.
“신녀님, 이쪽의 정화가 전부 끝났습니다.”
“아, 다 끝났으면 저쪽으로.”
한 곳을 정리한 뒤, 현은 제단의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은….”
“어둠이 있는 장소야.”
“어둠!”
어둠에게 도달하기 위한 길목엔 더욱 무시무시한 적들이 포진해 있었다.
정예 리치 군단, 발록, 뱀파이어는 물론이고, 얼핏 보이는 사신의 실루엣…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거대 괴물, 거인, 어쩌면 공작들까지!
잠깐 사이에도 새로운 마물이 땅에서 솟아난다.
정체모를 마물들 또한 붉은 포탈을 건너오고 있었다.
아무리 제국의 기사단이라 할지라도 저것들을 상대할 수는 없다.
역사대로라면 저 심연의 정예들은 아직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은 천인들의 상대… 혹은, 한참 뒤에 소환될 천사들이 상대해야만 하는 적이다.
현은 그 악몽 같은 존재들을 당당히 가리키며 말했다.
“신탁이 제국을 저리로 인도하셨다.”
“그 말은… 빛께서 저희를 선봉으로 택하셨다는 뜻입니까?”
“아마….”
막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현은 대답을 삼켰다.
입을 열려는 순간 떠오른 메시지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음 대답으로 거짓을 말한다면 그녀는 아주 실망할 것입니다. (-500점)](※주의 : 점수가 -100 이하로 내려가면 당신은 레티의 반감을 사게 될 것입니다!)
‘거짓을 말하면 500점 감점?’
아차, 현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방금 기사단장의 질문에는 빛이라는 단어가 섞여 있었다.
대천사, 대악마를 상징하는 몇몇 단어들은 누구도 장난스럽게 언급할 수 없다.
‘왠지, 여기서 잘못 대답하면 큰일 날 것 같다.’
돌연 날카로운 예감이 솟아올랐다.
현은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려 봤다.
레티가 빛의 세력 천사들과 긴밀하게 엮여 있다면?
그렇다면 빛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행동이었다.
기만자 칭호는 상대를 속이기 쉽도록 도와줄 뿐이지 온전한 사실을 거짓으로 바꾸진 못하니까.
‘빛을 제외하면… 아니, 빛과 연관된 천사들은 전부 제외한다면 남는 건 진실 쪽의 세력밖에 없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마음을 들추는 진실의 능력이 두려웠는지, 아니면 레티가 무언가의 정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을 고려했던 것인지.
찰나 현의 무의식은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질서는…?’
아주 잠깐 뇌리에 스쳐간 이름.
분명 마음속으로만 떠올렸다고 여겼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말릴 새도 없이 아인의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빛이 아니라, 질서께서 말하신 명령이야.”
‘뭐?’
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야,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아인이 멋대로 그 이름을 꺼낸 이유가 뭘까?
현은 그녀의 의도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현이 그렇게 말하라고 중얼거린 거 아냐?」
「내가? 중얼거렸다고?」
「응, 그래서 그대로 이야기하라는 줄 알았지.」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하지만 분명 목소리를 들었는데?!」
‘무슨 소리야…!’
아인과 논쟁할 틈은 없었다.
이미 목소리는 밖으로 새어나갔고, 대답을 들은 제국 기사단장의 눈은 경악에 빠졌다.
“질서…입니까?”
“….”
질서의 대천사.
세상의 모든 정보가 담겨있다는 인터루프에도 질서에 관한 내용은 티끌만한 것조차 없었다.
진명은 물론, 남성체인지 여성체인지도, 능력도, 휘하의 천사들이 몇인지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강림한 역사도, 신탁을 내렸다는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도 목격한 적이 없기 때문에 신전마다 세워진 질서의 조각상은 베일을 쓴 실루엣의 형상이라고 한다.
그 존재에 대한 증거도 성서에 기록된 문장 하나뿐.
그러니 먼 옛날 누군가 실수로 성서 첫 줄을 잘못 기록한 것이라면, 인간은 억겁의 시간동안 있지도 않은 대천사를 섬기며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존재라면… 그에 관한 이야기는 진위를 판별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순간, 현은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이미 내뱉은 말. 끝까지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아인을 시켜 말했다.
「맞아, 질서의 신탁이다.」
“질서의 신탁이야.”
“그럼 신녀님게서 질서의 사도란 뜻입니까?”
“사도는 아니지만… 질서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거든.”
[…….]‘들키지 않나?’
질서에 관해선 이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한다.
아무도 아인의 말을 거짓이라 단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누군가…당신의 뜻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현은 메시지 창을 훑었다.
점수는 그대로지만 안심할 순 없다.
질서를 언급한 여파가 얼마나 커질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으니.
현은 다시 아인의 의도를 물어보았다.
「너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꺼낸 거야.」
「나 말이야?!」
아인은 굉장히 억울해했다.
「분명 현이 먼저 말했다니깐! 방금 녹화 본도 확인해 봤는데, 보여줘?!」
「녹음된 게 있어…?」
「후후, 기다려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말라고!」
현의 의구심이 솟아올랐다.
아인의 실수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금 자신도 녹화 본을 되감아 보았고, 자신이 아무런 말도 중얼거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뒤였다.
그런데도….
띠링!
[AIN님으로부터 동영상이 도착했습니다! (총 길이 : 5초)]‘정말 내 목소리가 녹음됐다고?’
꿀꺽, 침을 삼키며 짧은 영상을 재생해 보았다.
곧바로 ‘영혼 대화’로 아인에게 전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빛이 아니고. 질서의 신탁이다.」
“빛이 아니라, 질서야.”
이어서 같은 내용을 전하는 아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찰나, 현은 귀신에 홀린 기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봤지? 이번엔 내 실수가 아니었다고!」
‘진짜…로?’
다시 자신의 녹화본과 대조해 보았다.
같은 풍경, 같은 배경음에 자신의 음성만이 달랐다.
아인이 영상을 조작할 이유는 없어, 그럴 시간도 없었고.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나.
‘아…!’
「뭐야, 무, 무섭게 왜 그래?!」
갑자기 느껴지는 싸늘함에 아인이 몸을 떨었다.
현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치며 감정이 새어나갔기 때문이었다.
번뜩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아인의 녹화 본에 녹음된 목소리.
정말로 자신의 것일까?
그 의심은 상태창을 여는 순간 확실히 풀렸다.
아인의 칭호 목록에서 새로운 문장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기만자]-마력 15
-상대를 속일 때 좀 더 들키지 않습니다.
-가끔씩 귓가에 거짓말의 조언이 들려올지도? (※새로운 효과!)
‘언제부터 이런 게 생겨났지?’
화르르륵- 중간의 문장 하나가 불꽃으로 쓰여 타오르고 있었다.
가끔씩 거짓 조언이 들려온다고 한다는 기만자의 추가 효과.
‘기만… 이라고.’
칭호를 살피는 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방금 생겨난 것일까?
오늘 아침 아인의 상태 창을 확인할 때는 이런 것이 없었다.
‘분명 내 목소리지만, 내가 말한 게 아니야.’
현은 유저에게 갑자기 소리가 들려오는 경우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았다.
귓속말, 퀘스트 알람, 캡슐 대화, 동화를 통한 영혼대화 등등….
그 모든 것들은 유저의 기록 창에 로그가 남는다.
예를 들어 귓속말이 온 뒤 상세 로그를 살펴보면, ‘A님이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라는 텍스트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인이 보내준 녹화본의 로그 창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녹음된 소리만이 유일한 증거.
‘시스템 창을 조작하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
한참 고민하던 현은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것은 훗날 고민해 볼 일이었다.
지금은 NPC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데다, 레티도 이쪽을 지켜보고 있으니.
[누군가가 그대를 주시하고 있습니다!]‘어쨌든, 위기는 넘긴 것 같아.’
레티의 평가 점수가 드디어 10점을 넘어섰다.
‘이건 긍정적인 신호로 봐도 되겠지?’
그녀가 아인에게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는 뜻.
질서라는 이름을 대는 거짓말이 약간은 통했다는 뜻이다.
‘이제 와서 말을 바꾸진 못해. 앞으로도 이 거짓말을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현은 총체적인 상황을 판단해 보았다.
질서의 목소리를 듣는 유저가 있다는 소문이 NPC들 사이에서 퍼진다면?
필시 천공에 어마어마한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 유저가 아인이란 사실까지 알려진다면 아인은 천공 NPC들의 관심을 피할 수 없겠지.
‘소문이 커지면 감당할 수 없어.’
기만자 칭호가 어디까지 통할 진 모른다.
하지만 진짜 기만을 제외하고, 대천사, 진실의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없으리다.
일이 잘못된다면 아인은 대천사에게 소환당해 강제로 생각을 읽혀 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레티의 입을 막을 수 있나…?’
하지만 레티가 오늘의 일을 아무에게도 떠벌리지 않는다면 소문은 퍼지지 않는다.
칭호의 효과가 통하는 레티에겐, 좀 더 거짓말을 해도 들키지 않을 것이다.
‘칭호를 활용해서.’
기만자. 이런 상황에 진짜 기만은 어떤 방식으로 상대를 속였을까?
그렇게 생각해 본 찰나, 현의 뇌리에 섬광이 스쳐갔다.
‘그 방법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현은 머리를 굴리며 머릿속의 톱니바퀴를 맞춰갔다.
두루뭉술하던 계획은 순식간에 구체적인 것으로 바뀌어 갔다.
레티의 입을 막는 것은 물론… 거기에 더해 수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는 방법.
어쩌면 아인은 천공에서의 입지를 다지고,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가자.’
하지만 모든 계획을 위해선 우선 시험에서 레티의 신뢰를 사야 할 터.
‘좀 제대로 해야겠어.’
아까처럼 ‘경험치’만 올릴 생각으론 안 된다.
조화와 헌신.
레티의 신뢰를 얻기 위해선 진정으로 천공을 위한 전쟁을 펼쳐야만 했다.
생각을 마친 현은 아인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전했다.
「아인, 다시 말해 줘. 질서께서 명하셨다. 어둠을 몰아내라!」
“…몰아내라!”
명령을 전한 뒤에 물었다.
아인은 여태껏 현이 실수를 확인하고 있었다고 알았다.
「이번에도 또 잘못 말한 거 아니지?」
「아까도 잘못 안 했어.」
「후후, 또 거짓말은…」
찰나, 동화로 감정의 떨림을 느끼지 못한 아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응? 어떻게 이게 거짓말이 아니지…?!」
「좀 복잡해. 싸우면서 말해줄게.」
기사단과 함께 돌진하며 현은 짧게 설명해 주었다.
자신의 칭호를 재차 확인한 아인은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그녀도 방금 말해주기 전까진 ‘목소리가 들린다’는 효과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언제 기만자에 이런 게 달렸대…?」
「나도 몰라. 하지만 이왕 일을 벌였으니까 제대로 기만자가 되는 수밖에 없잖아.」
현은 제국의 군세를 움직였다.
어둠의 군대의 약점을 찌르기 위해서였다.
전쟁의 구도가 어떻게 되어갈지는 루이즈와 그 시종들에게 대강 들있으니 취약한 곳을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태까지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않은 이유.
‘만나겠지?’
껄끄러운 얼굴을 마주하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환영이라고 해도 말이다.
“반드시 지휘관을 잡아.”
“이 골렘들의 지휘관 말입니까?”
“그래, 둘이니까. 하나도 놓치지 말고.”
샤틴과 샤티나.
간단한 원리다.
과거 루이즈의 목숨은 이 자매들에 의해 지켜졌다.
반대로, 그녀들이 없다면 어둠은 이 자리에서 사라질 수밖에.
과거에 일어난 전쟁의 결과를 바꿔 버린다면 단번에 레티에게 믿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것들이다!”
“저 인형들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
기사단은 곧 비슷한 생김새의 골렘 한 쌍을 마주할 수 있었다.
콰아아아아!
거대한 마기의 칼날이 대지를 긁었다.
기사단장은 칼날을 힘껏 튕겨냈지만, 그것이 생명체처럼 다시 날아올 것까진 예상치 못했다.
“큭, 신녀님, 조심하십시오!”
그 틈에 반대편에서 또 하나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성화를 밝히는 존재에게 위험을 느낀 것인지, 샤틴과 샤티나는 동시에 아인을 노리고 있었다.
‘칠흑의 칼날…!’
현은 자매들의 기술을 잊지 않았다.
진행방향이 2번 바뀌는 칼날.
샤티나가 그 기술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했는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두 번의 힘을 맞물리게 해서 ‘회전 칼날’을 만들었었지.
“모두 신녀님을 지켜라!”
“피하십시오…!”
현은 주위의 외침을 무시한 채 검을 앞으로 뻗었다.
‘회전축만 흩어 놓으면….’
마기로 이루어진 십여 미터의 칼날과 일 미터 남짓한 검이 맞닿았다.
힘 스탯이 거의 없는 아인이 샤티나의 기술과 부딪치고도 무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순간 일어난 기적.
광휘를 머금은 조그마한 검이 거인의 칼날을 멈추었다.
잠시 후, 칠흑의 칼날이 시들자 강렬하던 마기가 허무하게 흩어져 내렸다.
“사라…졌다?”
일순간 소음 가득한 전장에 정적이 일었다.
수년의 판정 연구와 수천 번의 실패를 거쳐 탄생한 유저만의 싸움법.
판정의 사각을 이용하는 기술이다.
유저 중에도 눈썰미가 낮은 자는 칼날을 멈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유저를 잘 모르는 NPC들의 눈엔 그야말로 신의 마술처럼 보였다.
“질서….”
“질서께서 우릴 보호하신다!”
천공에 환희가 피어올랐다.
기사단의 사기가 치솟았지만 현은 웃지 못했다.
반대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두 골렘의 모습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심장이 욱신거렸다.
자매들은 언제나 자신의 쓸모가 다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본인들의 기술이 의미 없이 사라지는 광경을 보면 어떤 기분일까?
「현.」
현의 상태를 눈치 챈 아인이 불쑥 나섰다.
「얼마 전에 만났다는 애들이 쟤네인가 봐?」
「…….」
「내가 대신 해 줘?」
현은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호흡을 골랐다.
그 때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무의식엔 숨겨진 감정이 남아 있던 모양이다.
「미안, 부탁할게.」
[레티가 당신의 머뭇거림에 의문을 가집니다.] [당신의 다음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상대는 천인.
무의식이 표정으로 드러날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었다.
「신녀처럼 연기할 수 있겠어? 예전에 루이즈가 했던 것처럼.」
「루이즈? 아무 생각 없으면 되는 건가?」
「음… 그것도 나쁘진 않네. 맘대로 해.」
띠링!
[통제 우선권이 일시적으로 변경되었습니다!]진정하는 동안엔 아인에게 전부 맡겼다.
괜히 쓸데없는 표정이 새어나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전투는 더욱 격렬해졌다.
아인이 두 기사단을 제외한 제국의 병력들까지 근처로 불러들였기 때문이었다.
샤틴과 샤티나의 최후는 말로 전해들은 것보다 처절했다.
어둠을 위한 목숨.
두 자매는 일순간 악마에 비견될 힘을 지니게 되었다. 서열식에서의 활약이 밋밋해 보일 만큼 압도적인 무위를 보였다.
휘하의 부하들이 전부 쓰러지고 둘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도 샤틴과 샤티나의 표정에 절망이란 감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싸우고 싸우다 마침내 힘이 다했을 때.
아인을 호위하던 제국 기사들은 절반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두 골렘의 잔해 역시 바닥에 흩뿌려졌다.
[레티는 당신이 과거를 알고 있다 확신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