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verted to being a K-drama genius RAW novel - Chapter 51
하인혁 역시 래원이 건넨 말의 뜻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삶에서 지혜영은 이맘때쯤 돌연 퇴사를 했고, 래원은 그 원인이 하인혁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지혜영이 하인혁의 조연출을 했을 때 보였던 반응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래원은 이를 인지한 후로부터 지혜영을 자신의 조연출, B팀 감독으로 옆에 두며 보호 아닌 보호를 하는 중이었다.
유능한 동료를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한 번 살아보니 함께 날아야 더 높게, 더 멀리, 더 오랫동안 비상할 수 있는 세계였다. 이곳은.
“아무튼, 9월이 기대되네요, 래원 후배님.”
“저도 그렇습니다, 하인혁 선배님.”
두 사람은 세면대 앞 거울 속 서로를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래원은 옥영임 작가를 잘 알고, 하인혁도 잘 안다.
한배를 탄 초반에야 의기투합하겠지만,
그 팀의 말로가 어디로 굴러갈지는 안 봐도 훤했다.
* * *
완연한 봄 날씨를 자랑하는 5월 말의 어느 날.
래원과 차가을 작가는 첫 미팅 이후 연락만 주고 받다가 오늘에야 다시 만났다.
오늘, 드라마 의 주요 배경이 될 학교 헌팅지를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상당량의 촬영이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교실과 복도는 세트장이 만들어지지만,
체육관이나 강당, 그밖의 학교 야외 장면을 위해 고등학교 한 곳을 섭외해야만 했다.
대담픽쳐스의 로케이션 매니저가 사전에 2곳의 학교를 물색해두었다.
래원과 차가을은 오늘 그와 함께 그 2곳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했다.
우선, 첫 번째 후보 학교.
도착 30분 전에 미리 전화를 걸었더니,
– 죄송하지만, 우리 학교를 빌려드릴 수 없게 됐습니다. 학교운영위원회 차원에서 재검토 후 부결 처리가 돼서요···. 이게 지금 방금 다시 결정이 된 거라, 이번 방학에 보충 수업도 운영해야 하고, 아무튼 죄송하게 됐습니다.
돌연,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허···. 이거 뭐지? 갑자기 뺨 맞은 기분이네?”
로케이션 매니저는 굉장히 황당해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래원과 차가을 역시 어이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향을 틀어 두 번째이자 마지막 후보지로 향했다.
신도시에 지어진 지 얼마 안 되어 깨끗한 새 학교였다.
그런데,
“매니저님, 이 학교는···.”
주변 경관을 둘러보던 래원이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주변에 아파트가 너무 걸리겠는데요? 그냥 방송나가면 여기 주민들한테 백퍼 민원 들어올 거라, 매번 일일이 CG 처리하는 것도 골치 아플 거 같고요.”
“아, 이 학교가 교정도 예쁘고, 그림이 잘 나올 거 같아서 섭외하려 한 건데···. 힘들까요, 감독님?”
“교정은 괜찮아요. 학교 느낌도 우리 드라마 분위기랑 잘 맞고요. 미리 보여주신 사진도 좋았어요. 그래서 오케이 했던 건데···. 근데, 직접 와보니 이렇게 사진에 안 찍힌 곳에 아파트가 많이 걸릴 줄은 몰랐어요.”
“··· 그럼, 어쩌죠?”
“일단은, 후보지로 놔둬 주시고. 시간이 아직 있으니까 다시 섭외해보는 건 어떨까요? 정 없으면 여기로 할 수밖에 없겠지만, 분명 CG 작업 때문에 제작비도 오를 거고, 시간도 많이 잡아먹을 거예요.”
난감해 하며 미안해하는 로케이션 매니저.
“네, 감독님. 제가 더 알아보고 찾아볼게요. 아···. 어떡하죠. 오늘 다들 시간 내주셨는데, 다음에 또 뵈어야 할 거 같아서···.”
“할 수 없죠. 괜찮습니다.”
“매니저님도 고생하셨습니다. 헌팅이 쉽지가 않은데···.”
차 작가와 래원은 으레 있는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오늘 이렇게 그냥 파하기는 아깝다는 투로, 로케이션 매니저가 물었다.
“감독님, 작가님 혹시 서울이나 경기권에 잘 아는 고등학교 없으세요? 교정이 우리 드라마 감성이랑 어울리는 곳으로요.”
“······.”
정 안되면 중학교도 괜찮고요.”
“······.”
세 사람 사이에 침묵만이 맴돌았다.
그러다 불현듯,
“있습니다, 저!”
래원에게 좋은 생각이 난 듯했다.
“섭외가 될진 모르겠지만, 문의는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래원을 보는 매니저와 차 작가의 눈이 반짝였다.
얼마 있다가,
래원의 일행은 [예화 예술 고등학교] 라고 새겨진 교문 앞에 도착했다.
래원의 연락을 받고,
래미의 담임 선생님이 미리 수위실 앞 교문에 나와계셨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드라마 제작사 대담픽쳐스의 로케이션 매니저 입니다.”
“안녕하세요, 드라마 작가 차가을 입니다.”
래원의 일행은 래미의 담임에게 인사를 청했다.
로케이션 매니저는 대담픽쳐스 명함을 건넸다.
“이쪽으로 오세요.”
세 사람은 그 교사를 따라 교문을 통과했다.
교정으로 향하는 길을 걷는데
하이얀 이팝나무가 가로수로 늘어서 있었다.
흰 깃털 솜 같은 꽃잎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학교 안쪽으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
푸릇한 잔디 구장 주변으로 리모델링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깨끗한 건물 세 개가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파릇파릇한 갖가지 나무와 군데군데 심어진 새빨간 장미가, 빨간 벽돌색 건물과 잘 어우러졌다.
“우와. 선생님, 학교가 너무 예뻐요.”
“우리 드라마랑 잘 어울리겠어요.”
로케이션 매니저가 감탄사를 연발했고, 차가을 작가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이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체육관과 강당 등등의 학교 시설을 소개해주는 래미의 담임.
예화예고는 서울에서 손꼽히는 예술고등학교인 만큼, 학교 시설은 일반 공립 고등학교보다 훨씬 좋았다.
‘학비가 비싼 이유가 다 있었네···.’
래원은 3월에 입학식에 왔을 때보다 더 자세히 학교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뭔가 특별한 손님이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예화 예고 본관의 학부모 상담실.
학교 소개가 끝난 후, 래미의 담임은 차와 다과가 준비된 이곳에
래원의 일행을 두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후루룩-
후훅-
조용히 차를 마시던 세 사람 사이가
갑자기 캐스팅 회의 분위기로 흘러갔다.
“감독님, 주요 배역은 거의 다 정리됐다고 들었는데···.”
“네, 주인공 [박태하]는 양수호. 여주 [이지은]은 류지현. 그리고 [정성욱] 이사장은 우종세 배우가 같이하기로 최종 도장 찍었습니다.”
래원의 설명에
차 작가 갑자기 한숨을 쉬었고,
로케이션 매니저가 되물었다.
“하아···. [이소은]이 문제네요.”
“아, 주인공의 과거 첫사랑이요? 사학비리를 파헤치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네, 힘들 것 같던 캐스팅은 오히려 일사천리로 정리되고 그 역할이 의외의 복병으로 남았네요.”
우종세 배우는 배미란 사장의 전화 한 통화로 바로 캐스팅됐고,
양수호와 류지현 역시 래원의 연락에 흔쾌히 응해주었다.
[이소은] 역할은 류지현의 언니 ‘류소현’에게 컨택해 봤으나,현재, 그녀의 소속사 측에서 고사한 상태.
“아, 자매 역할이라 친자매가 하면 딱 인데···. 류 자매처럼 이미지도 맞고 연기도 곧잘 하는 자매가 또 없잖아요. 하아···. 류소현은 왜 안 된대요?”
“늘 그렇듯 다른 스케줄 핑계죠, 뭐.”
“류소현, 다른 작품 뭐 하는데요?”
“··· ‘스페이스 캐슬’ 이요.”
바로 옥영임 작가와 하인혁의 ‘스페이스 캐슬’이었다.
전에 ‘재벌의 세계’ 때도 옥영임 작가는 류소현과 함께 못 하는 것을 끝까지 아쉬워했더랬다.
당시 대타로 류소현의 동생, 류지현을 들이밀어서 그나마 먹혔던 거였다.
그랬던 옥 작가가 류소현을 놓칠 리 없었다.
“그거 우리랑 비슷하게 시작하는 SBC 월화 미니 맞죠?”
“네···.”
“아 그럼, 진짜 안 되겠네. 스케줄 딱 겹쳐서.”
“거기랑 아직 도장 찍은 건 아닌 거 같은데, 아무래도 거긴 여자 주인공 역할이라 거기로 가려고 우리 거는 애초에 거절한 거 같아요.”
“그럼 어떡하죠? [이소은]···?”
“류소현한테 끈질기게 다시 연락해보면서, 플랜B를 또 찾아야죠.”
“······.”
“잘 해결될 겁니다. 결국 방법을 찾을 거예요. 언제나 그랬듯.”
느닷없이 진행된 캐스팅 회의로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똑똑똑-
때마침 문이 열리며 래미의 담임이 돌아왔다.
다시 들어오자마자,
“가능할 것 같아요!”
래원에게 밝게 소리치는 그녀.
“최종 결정은 학운위 거쳐봐야 되겠지만, 일단 저희 교장 선생님이랑 저희 이모부.. 아, 저희 이사장님께서는 흔쾌히 허락하셨어요.”
‘아, 래미 담임이 예화예고 이사장 조카였구나.’
몰랐던 사실이었다.
래원은 좋아하기 전에 한 가지를 더 확인했다.
“여름 방학 기간 1달 정도를 통째로 빌려야 하는데, 가능할까요?”
“네. 저희는 방학에 따로 보충 수업을 운영을 안 해서요.”
이에 래원이 빙긋 웃으며 로케이션 매니저와 차가을 작가를 쳐다보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생님, 감사드려요. 최종 결정나면 저희 측과 연락하면서 섭외서와 예산서 집행해주실, 담당 행정실 직원분을 따로 배정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그건 학운위 승인나면 교감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서둘러 진행해볼게요. 일단 당분간은 제 연락처로 문의주시면 됩니다.”
래미의 담임은 종이에 자신의 연락처를 적어 주었고, 래원의 일행을 교문 앞까지 배웅해주었다.
차가을 작가와 로케이션 매니저가 먼저 교문을 나서는 사이,
래원은 잠깐 걸음을 늦추며 래미의 담임에게 다시 한번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제가 불쑥 연락해서 괜히 무리한 부탁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선생님.”
“아유, 아니에요. 어차피 방학에 노는 학교라 공중파 출연하면 홍보도 되고 좋죠. 작년에 체육관이랑 건물 외벽을 싹 리모델링 했거든요, 안 그래도 저희 이모부가 그거 자랑하고 싶으셔서 안달이세요. 저희도 잘됐죠, 뭐.”
“하하. 감사합니다. 래미는 요새 별문제 없죠?”
“그럼요, 너무 잘 지내죠. 래미는 정말 걱정할 게 하나도 없는 아이예요.”
“초등학생 때 부모님을 여의고부터, 또래보다 일찍 성숙해진 것 같아요. 어른스러워 보여도 속은 많이 여린 아이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네, 학부모님.”
래미의 담임이 활짝 웃으며 대답을 해주니, 래원은 안심이 되었다.
만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래미의 담임은 상대를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래원은 오늘도 예화 예고를 걸어 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느낌 탓이겠지만, 래미가 이 학교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왠지 좋은 일만 생기는 것 같았다.
* * *
촬영지는 다행히 ‘예화 예고’로 최종 결정되었다.
이후 프리 프러덕션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드디어 6월.
밴프 월드 미디어 페스티벌 (Banff World Media Festival) 시즌이 되었다.
래원은 김윤하 작가와 함께 인천 공항을 출발하여, 벤쿠버 공항을 경유한 후 캘거리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장 앞에 밴프 측에서 보내준 전담 스텝의 팻말이 보였다.
[K드라마 ‘레이스 장갑을 낀 여인’ 환영!]“Here! Here! 여기요! 여기!”
그가 먼저 래원과 김윤하를 발견하고는 환대해주었다.
밴프의 6월은 서울의 3월과 비슷한 날씨였다.
햇볕은 따스했으나 바람은 약간 쌀쌀했다.
래원과 김윤하는 스텝의 안내를 받으며 밴프로 가는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2시간 남짓 달렸을까?
어느덧 저 앞 차창 밖에 하얀 만년설이 내려앉은 로키산맥이 보였다.
“와, 장관이네요.”
김윤하의 턱이 떡 벌어져서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마침내 셔틀버스가 밴프 국제 미디어 페스티벌이 열리는 페어몬트 스프링스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로비 입구에는
커다랗게 [2021 Banff World Media Festival] 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래원과 김윤하는 전담 스텝의 안내를 받아 체크인하고 각자 호텔 룸을 배정받았다.
“와아···. 무슨 윈도우 배경화면 같네···.”
래원이 받은 룸의 뷰는 탁 트여있었다.
밴프 시내가 내려다보이고, 저 멀리에 로키산맥이 솟은 전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래원의 가슴도 시원하게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간 쌓인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듯했다.
날카롭게 솟아오른 능선과 군데군데 하얗게 내려앉은 만년설 설경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식사와 함께 네트워크 파티가 열렸다.
올해는 45개국에서 1000여 개 작품이 참가했다.
호텔 ‘밴프 월드 미디어 페스티벌’ 홀 안에는
새하얀 식탁보가 씌워진 정갈한 원형 테이블 수십 대가 놓여있었다.
식사하면서 서로 소개를 하고 인사를 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다양한 인종들과 다양한 언어들 사이에서, 래원은 생각의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래원과 김윤하의 에 관심을 갖는 기자나 유럽의 프러덕션도 있었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먼저 다가와서 인사를 건네며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세계 2차 대전의 소용돌이 속,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라 그런지 극 중 배경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다음 날에도 다과와 티 타임을 가장한 살롱이나, 식사 시간의 네트워킹 파티가 이어졌다.
래원은 손이 닳도록 악수를 했다.
몇 번을 했는지 세다가 중간에 포기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밴프 월드 미디어 페스티벌의 꽃.
‘밴프 로키 어워즈(Banff Rockie Awards)’는 이틀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1000여 개의 참가작 중에서 본선에 진출한 작품들만 여기에 노미네이트 됐다.
픽션, 논픽션,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청소년까지 5개 장르 안의 총 26개 카테고리로 나누어 시상한다.
어워즈 첫날 밤.
래원과 김윤하도 심플한 수트와 드레스를 갖춰 입고 객석에 자리했다.
카테고리별로 수상작을 호명하고, 소감을 듣고, 축하 갈라쇼가 이어지고를 반복하며 홀 안은 말 그대로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경직되어 관람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다 같이 웃고 즐기는 분위기였다.
얼마나 지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