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12
제412화. 누구의 의지인가
이안은 얼룩진 손을 물로 깨끗이 씻어내렸다.
황태자의 급서. 장관 된 자로서 정갈하지 못한 옷차림으로 맞이하는 것 자체가 불경이었으나, 전시 상황이니 충분히 참작될 수 있으리라.
바리엘의 전령이 이안을 알아보았다. 그는 고개 숙이는 대신, 가벼이 눈짓했다. 제국의 지엄한 전언을 지녔으니, 누구에게든 함부로 고개 숙이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이안은 천천히 허리를 굽히며 예의를 갖췄다. 헤일이 옆에서 부축을 도와주었고, 마법사들 역시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지켜봤다. 에프디람과 그의 수하만이 그저 흥미로운 듯 턱을 괴고 아래를 내려다볼 뿐이다.
처억.
“진 황태자 전하의 급서입니다. 이안 히엘로 장관 본인에게 직접 전달하라는 엄명이 있으셨습니다. 그대의 소속과 이름을 대시오.”
“저는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 자작입니다. 전령께서 찾는 자가 분명하옵고, 전하의 명을 무겁게 품어 그 뜻을 다하겠습니다.”
전령은 이안에게 묵직한 서류 봉투를 내어주었다. 인장과 금실로 틈 없이 묶여있어, 안쪽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확인 불가했다.
제 역할을 다하자, 전령은 그제야 본 직무로 돌아와 이안에게 경례했다.
“고생 많으십니다.”
“바리엘에는 별문제 없는가?”
“예. 마법부가 텅 비었다는 소식에 제도(帝都) 전체가 조금 어수선했지만, 전쟁 소식에 묻혔습니다. 바리엘은 현재 여러분들의 수호 아래 아주 평온한 나날을 이어가고 있으며, 진 황태자 전하 역시도 어떠한 흔들림이 없으십니다. 전하께서 친히 모두를 격려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으니, 부디 무사히들 돌아오십시오.”
“로만드로 님은요? 아세요?”
“예. 알지요. 홀로 마법부 지키면서 업무 일체를 담당하고 계시니까요. 서둘러 왔으면 좋겠다고 하시는데요. 곧 있으면 아이가 태어날 것인데, 육아휴가도 못 쓰겠다면서.”
한 마법사가 끼어들어 묻자, 전령이 가벼운 농담으로 대꾸했다. 마법사들은 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 돌아갈 것입니다. 버고스 왕을 붙잡았으니, 전쟁이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예. 말 타고 오셨죠? 날아가면 저희가 먼저 도착할 수도 있습니다.”
“로만드로 님 고생하셨는데 여기 포도주나 사갈까?”
“예? 버고스 왕이 잡혔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들입니까?”
전령이 화들짝 놀라며 자연스럽게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보고 올릴 때 첨언할 내용을 적기 위해서였다.
다른 소식도 아니고, 종전이라. 전령은 아주 기가 막힌 때에 자신이 도착했다는 걸 알아챘다. 따로 사람을 보낼 필요 없이, 자신이 그 정보를 갖고 돌아가면 될 일 아닌가?
마법사들은 자랑스럽다는 듯, 이안을 둘러싼 채 한마디씩 던져댔다.
“이안 님이 다몬 왕을 전투 중에 생포하셨습니다. 루스웨나와 북쪽 지원군들과의 협상 여지가 남았지만, 주축인 다몬 왕이 잡혔으니 별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요?”
마법사 한 명이 보란 듯이 위쪽의 에프디람에게 소리치자, 그녀는 방긋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전령은 마법사와 에프디람을 번갈아 보며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자는 누구인가? 클리포포드인은 아닌 것 같은데.
“방금 말씀드린 버고스 측 지원군입니다. 북방에서 온 자들, 아탄족이지요.”
“아, 아탄이요?”
“사령술사도 여럿 있고, 북쪽의 소수민족들이 대거 동원되어 있습니다. 아이, 걱정하라고 이르는 게 아니라요. 그냥 그랬다고요. 전령께서는 그저 올라가서 승전보를 날려주시면 됩니다. 거, 부럽습니다. 좋은 거 하게 되셨으니.”
“예! 이만한 영광이 없지요. 진심으로 고생들 하셨습니다.”
“고생은 저희가 아니라. 여기, 우리 이안 님이.”
짜잔. 마법사들이 조금씩 몰려들어 이안의 뒤쪽을 서성거렸다. 이제 이안이 답할 차례라는 듯이.
이안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연신 꽉 묶인 금줄을 매만지며 웃었다.
“무슨 소리인가. 피와 눈물 흘린 자가 한둘이 아닌데. 전령은 바로 떠나시오. 가능하다면 식사를 권하고 싶지만, 승전보는 바리엘 모두가 기다리는 낭보이지 않나? 기쁜 소식을 일찍 전해주려면 그대가 고생하는 수밖에 없네.”
“말만 바꿔서 바로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이만 출발하시게. 전하께 안부 부탁하고.”
처억!
전령은 활짝 웃으며 경례했고, 마법사들도 그에 답하듯 동시에 손날을 세웠다.
이안은 서류 봉투를 든 채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부축하려는 헤일도 물린 채.
“모두들 창밖에서 떨어져 있거라. 전하의 급서를 읽을 것이니. 눈과 귀를 멀리해주어. 오롯이 나 혼자 있고 싶다.”
“명 받들겠습니다. 이안 님.”
에프디람은 자신을 지나치는 이안을 바라보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그래서, 자신의 제안은 어떻게 되는 건데?
“저기요. 마법부 장관님아. 나랑 얘기 중이던 거 까먹은 건 아니지요? 이드갈이랑 다몬 관련해서 나한테만 비밀 알려줄래, 아니면 베릭 저 새끼 넘겨줄래?”
말에 올라타던 전령이 귀를 쫑긋거렸다. 저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이드갈, 다몬과 관련한 비밀? 베릭을 넘겨? 베릭이라 하면 황궁 주방 털어먹는 그 친위대원 아닌가?
말고삐를 잡는 전령 손길이 괜히 늘어졌다. 조금이라도 더 들은 다음에 떠나고 싶건만, 클리포포드 병사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매정하게 말을 끌었다.
히이잉!
“이쪽으로 가겠습니다.”
“아, 그게, 예예. 갑시다. 가요.”
“조심히 가십시오. 바리엘의 지원을 클리포포드는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으니, 이 마음이 지엄하신 분께 꼭 전달되길 바라겠습니다.”
끼이익!
장벽 문이 열리자, 전령은 그제야 백기 걸린 버고스 측 진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잠 한숨 안 자고 내달린 데다, 정문을 피하여 우회했으니 전세를 알 리 없었다. 그는 바람에 펄럭이는 백기 쪽을 한번 힐끔거린 다음, 힘차게 말 옆구리를 차댔다.
“에프디람 족장.”
한편, 이안은 문손잡이를 잡은 채 에프디람을 불렀다. 계단 오간 게 조금 힘든지, 그사이 목덜미에 땀방울이 솟아있었다.
“제안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받들 의무는 없지. 두 조건 모두 거절한다.”
“거절한다고? 진짜? 조금 아쉽지 않나? 받아만 들이면 내가 잘할게. 우리 애들한테 말 잘해서 북쪽 정리도 싹 들어가고, 그, 빨간 대가리 밥도 꼬박꼬박 주고.”
이안이 피식 웃었다. 저 역시도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비밀이었다. 그런데 그걸, 고작 북쪽의 족장 된 자가 어찌 감히 감당한단 말인가? 베릭의 밥값은 더더욱 말이다.
에프디람은 새 씹을 거리를 꺼내 입에 넣으며 이안을 위아래로 훑었다. 서 있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게 한 번 칼질하면 두 동강 날 것처럼 생겼거늘, 어찌 한 줌의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나?
아탄 족장과 고작 두어 발자국 떨어져서는 미래를 함께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게, 죽음에 대한 감이 없는 건가?
“에프디람. 조용히 식사나 하고 나가 있거라. 내 전하의 명을 받는 것이 먼저이니, 이것을 받은 다음 그대와 다시 대화하겠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어. 그대가 내건 제안은 모두 별로거든.”
베릭과 사고방식이 비슷한 자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더욱 효과적일 터. 아니나 다를까, 에프디람은 씹던 것을 투, 뱉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재수 없네.”
“오, 영광인 줄 알거라. 내 면전에 대고 그리 말한 것은 그대가 처음이다.”
“영광은 지랄. 고기나 내줘봐. 그거 먹으면서 골통 다시 굴려보게. 고귀하신 바리엘 장관께서 제안이 모두 별로라 하시니, 내가 할 말이 없네. 시벌거.”
굴릴 수 있으면 굴려보든가. 이안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방으로 들어갔고, 계단 난간에 매달려 이를 지켜보던 베릭이 소리쳤다.
“나 안 팔린다!”
“오오, 베릭 축하한다.”
“이안이가 나 안 넘긴대!”
헤일은 조용히 하라는 듯 눈짓하였고, 이내 에프디람에게도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안 님의 명령 못 들었나? 전하의 전서를 읽는 동안 소란 피우지 말라 하셨으니. 에프디람 족장. 내려오게.”
“말 안 해도 간다. 배 졸라 고프니까 밥상이나 차려라! 나 아직 손님이라고!”
“쉬잇! 조용히 좀 하라니까!”
“뭐어어! 그쪽이 더 시끄러운데!”
달깍.
이안은 문을 걸어 잠근 뒤, 천천히 줄을 풀었다. 진이 직접 찍었을 게 분명한 인장. 참으로 예쁘게도 찍으셨다. 이안은 희게 웃으며 서류 봉투 입구를 개봉했다.
찌이익.
두툼한 종이 위에 쪽지가 쓰여있었다. 진이 직접 자필로 적은 것이다. 언제 이렇게 농익은 필체를 익히셨나? 임명식 전, 수업에서 보았던 글씨체에서 미묘하게 성숙한 느낌이 묻어났다.
-이안 경. 잘 있는가? 그대와 마법사들이 출정해있는 덕분에, 이곳 바리엘은 언제나와 같아. 하고 싶은 얘기가 산더미지만, 전시에 그대에게 허락된 시간은 한정되어 있을 터이니 내 급히 줄이네. 부디 조심히 돌아와 마주하였으면 좋겠어. 이제는 나도 조금 컸으니, 보기 좋을 것이라. 나는 더 이상 아래를 보지 않고, 그대 또한 위를 보지 않아도 돼. 믿을 수 없다면, 일찍이 돌아와 확인해 보시어.
이안이 작게 웃었다. 글자만 읽었을 뿐인데, 어찌하여 전하의 음성이 귓가에서 울리는가? 참으로 신기하다.
뒷장 역시 앞장과 같게 글씨가 빽빽했다. 줄인다고 줄인 것이 이만하면, 돌아가서 나눌 대화가 참으로 많겠구나.
-버고스 사절이었던 티모시가 귀화하여 현재 궁에 기거하고 있네. 이미 알고 있으리라 믿어. 티모시가 국경을 넘어오면서 사절 당시 보관했던 자료를 내게 넘겨주었네. 버고스어로 쓰인 것을 해석하여 바리엘 공용어로 적어둔 사본이라. 로버사이드께서 오랜만에 꿈에 나와 이를 꼭 이안 그대에게 전하라 하셨어.
로버사이드가 이안에게 이것을? 뜻밖의 내용에 이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단순한 진의 허상이나 망상의 존재가 아니었다. 악마가 깃든 황궁에서 미래의 황태자 곁을 지켜준 자였고, 크고 작은 미래를 예견한 수호신이었다. 하나 서신에 쓰인 뉘앙스가 부정적인 게, 자신이 이걸 받지 않으면 문제 될 것이라 이르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 나는 아직도 이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몰라. 하지만 이안 경, 그대라면 알겠지. 그대는 언제나 내 앞에서 갈 길을 일러주었으니까.
차락.
이안은 조심스럽게 종이를 넘기며 글자를 읽어내렸다. 일종의 왕궁 일기(日記)에 준하는 것들이 섞여 있었다. 버고스의 실정과 내부 사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상세한 내용들. 이안은 로버사이드가 어찌하여 진에게 계시를 주었는지 의아했다. 특별히 눈에 띄는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안이 차분하게 마지막 장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그의 눈길을 사로잡는 한 단어.
‘러더포드.’
이드갈, 더 나아가 서자 이안과 짙게 얽혀있는 러더포드 명이 적혀있었다.
-…다몬 왕의 명령대로 길베트로와 롱겔을 러더포드에게 전했다.
길베트로와 롱겔? 사람 이름인가? 이안은 다시금 위쪽으로 돌아가 두 사람이 귀족 출신인지를 확인했다.
-…선왕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길베트로와 롱겔. 다몬 왕께서는 이자들을 잡아들여 가두었으나, 선왕 혹은 선왕비의 명예를 훼손하는 자들에 대한 엄벌은 없으셨다.
다몬은 회귀하면서 더 많은 형제자매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들을 러더포드에 넘겨줘? 대체 왜?
-러더포드 측에서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금과 은을 요구하였으나, 왕께서는 어떠한 물음도 없이 허락하셨다. 그 탓에 지방 귀족들의 세율이 5할 올랐다.
-다몬 왕께서 이드갈이라는 새로운 마력봉인석을 왕궁 고위공직자들에게 공개하셨다. 러더포드를 통하여 들인 것이라 하는데, 아직 효과는 미상이다. 왕께서 이르셨다. 그것이 버고스의 새로운 미래를 가져올 것이라고.
차락.
이안은 문득, 세 번째 삶을 고대하던 다몬 왕을 떠올렸다. 혹시 러더포드가 회귀와 관련되어 있나? 아니, 더 나아가 회귀하게끔 만들어준 근원일 수도 있다.
이안은 자신에게 감겨있던 추쇄 마법을 떠올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신의 뜻이라 여겼고 나움의 의지라 생각했던 자신의 현재가, 러더포드의 의도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안은 서류들을 한데 그러모은 다음, 급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다몬을 데려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