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21
제421화. 바리엘로
“저기, 이안 경.”
장벽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노아가 이안을 붙잡았다.
클리포포드가 바리엘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살아남았음을 인정하는 바였다. 하여, 전쟁 피해 배상금이나 후속 조치에 관한 것은 일절 관여하지 않고 오롯이 이안의, 그리고 바리엘의 의지에 맡겨둔 것.
다만, 나라 중대사에 대해서는 의문을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어찌하여 계약 마법을 에리포니 왕에게 걸지 않은 것인가? 루스웨나의 중심은 그녀이니, 무엇보다 우선시하여 심장을 잡아두는 것이 맞지 않나?”
이안은 노아의 말을 들으며 회중시계를 딸깍거렸다. 벌써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로운 해가 떠오르면 클리포포드를 떠나 바리엘로 향할 것이다. 자신의 바리엘 그리고 진이 기다리고 있는.
이안은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설명해주었다. 자이라가 에리포니 왕에게 걸었던 ‘현요’ 마법을 모르는 자로서는,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은 게다.
“에리포니 왕에게는 이미 마법이 걸려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면,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잃겠지요.”
“마법이 걸려있다고? 바리엘 측의 마법사가 그리한 것인가?”
“놀랍고 다행스럽게도 루스웨나의 어린 마법사가 하였습니다.”
루스웨나의 어린 마법사.
노아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이라를 떠올렸다. 겁 없이 장벽 안으로 뛰어들어 망아지처럼 날뛰던 그 어린것. 가족을 잃었다며 아득바득 소리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 분노로 인하여, 제 주군의 등에 칼을 꽂았구나.
“조건은?”
“모호하여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공식적으로 계약 마법을 걸었을 때 그 마법이 발동하여 에리포니가 죽게 되면, 바리엘 측의 입장이 난감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나 기득권이 무너지길 기다리는 자들이 존재하지요. 루스웨나 왕의 죽음에 바리엘이 조금이라도 의문을 남기게 되면, 그들에게 명분을 주게 됩니다. 저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
첫 번째로 우선시하는 것은 바리엘이라.
두 번째는 자이라 때문이었다.
저주에 가까운 현요를 사용함으로, 아이는 거대한 희생을 스스로 짊어졌다. 그것을 무색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겠나? 이안이 말끝을 잇지 않자, 노아 왕자가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러시는가?”
“아닙니다. 아무튼, 에리포니 왕에게 직접 계약 마법을 걸지 않은 것은 바리엘을 위한 것이고, 나아가 클리포포드를 위한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이안이 바로 옆 클리포포드 왕 쪽으로 고개를 작게 숙이자, 왕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장벽 안쪽, 시끄럽게 오가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전부 이안과 마법사들의 귀국 여정을 준비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황실에 우선 보고를 올리면 전하께서 마땅한 후속 조치를 결정하실 것입니다. 그때는 왕께서도 바리엘로 손수 오셔서 합의점을 찾는 게 유리하실 것입니다. 다몬과 에리포니 그리고 현 전쟁에 책임 있는 자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이니, 왕께서도 목소리를 직접 내심이 맞지요.”
마차에 짐이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했다. 분명 올 때는 맨몸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데, 고작 얼마간 머물렀다고 챙길 것이 많나 보다. 절반은 아코렐라의 연구 자료였고, 나머지 절반은 클리포포드 왕궁에서 실려나온 답례품이었지만 말이다.
소란 속에서 승전에 대한 답례라 하기에는 약소한 것이었지만, 왕은 이안을 빈손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이는 나라 차원에서 보일 성의였고, 경우였으니. 크고 작은 보물들이 끈에 묶인 채 차곡차곡 뒷자리에 실렸다.
“물론 나는 수도를 정비하며 진 황태자 전하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노아, 내일 바리엘 마법사들을 배웅하도록 하라.”
“예. 아버지.”
“그런데 저자들은 어찌할 생각인가, 이안 경?”
왕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높게 솟아있는 세르오 가문의 깃발이 있었다. 오도 가도 못하며, 어중간하게 자리 잡은 이상한 상황. 담화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세르오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저 온 상태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안은 루스웨나 진영 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세르오 가에 여식이 하나 있습니다.”
“여식?”
“에리포니 왕과 친밀히 지내는 여인인데,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담화를 마치고 돌아간 에리포니가 알레나라를 붙잡고 다시금 무언가 대책 회의에 들어간 것이 분명했다.
알레나라가 에리포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황궁 내, 직위도 지위도 없는 사교계의 여인이 무엇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상하기로는, 직접적인 행동 개시가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지금으로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신경 안 쓰셔도 될 것입니다. 인력을 차출한 김에 피해 복구에나 사용하십시오. 장벽 안으로는 들이지 마시되, 바깥 시체 운구에는 아주 적합할 것입니다.”
막상 왔는데, 움직일 수 없다면 움직일 거리를 주는 수밖에.
“그리해도 되겠나?”
“예. 물론입니다. 자진하여 왔는데 어찌 돌려보내겠습니까? 여기 남은 바리엘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귀국할 때 함께 돌려보내십시오.”
“그러면 내 거절하지 않겠네. 알다시피 자국민은 죽었고, 대지는 무너져가고 있으니. 손이 하나라도 부족한 터라.”
생각 없는 세르오는 어쩔 수 없이, 그리고 기꺼이 수습을 도울 것이다. 그리해야만 승전(勝戰) 뒤에 올 논공행상에 한마디 말이라도 얹을 수 있고, 황궁에 개입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는 알레나라를 통하여 움직이고, 알레나라는 에리포니를 통하여 움직인다.
“예. 루스웨나는 현재 피해자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니, 당장 전투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담화에서 자신이 주장했던 것과 완전히 반하는 행동이니까요. 황궁, 전하를 만나기 전까지는 물밑에서 조용히 움직일 것이니 클리포포드는 그 틈을 이용하여 국가 혼란을 수습하시길 바랍니다.”
솨아아, 바람이 불어 이안의 머리칼을 흐트려놓았다.
딱딱하고, 단호한 어투로 조언하던 이안이 잠시 말을 멈춘 채 핏빛으로 물든 대지를 바라보았다. 클리포포드에서의 마지막 노을이 될 것이라. 이안은 조금 아쉽다는 듯, 작게 웃었다.
“…아름다웠습니다.”
길게 이어진 포도밭과 그 사이로 스며드는 노을. 농부들의 땀과 웃음. 그리고 지붕 위에서 노래부르던 노인과 신명나게 춤추던 아이들까지. 나라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이 참으로 진했다. 그리하여, 눈으로 직접 보는 작금의 사태가 조금은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클리포포드 왕은 착잡한 시선으로 이안과 함께 고개를 틀었다.
“클리포포드는 앞으로도 아름다울 것이네.”
자기 최면과 같은 바람. 마물의 범람이 턱 끝까지 차오른 지금도 왕이 보기에는 자신의 왕국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들판에 산처럼 쌓인 사체와 피비린내만 지워낼 수 있다면. 며칠 전만 하더라도 평온하던 그 나날들이 꿈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출발 준비에만 여념하시오. 이안 경.”
클리포포드 왕은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쯤하면 모든 것이 운명과도 같았다. 예기치 못하게 이안이 클리포포드에 있음으로써, 그들의 왕국이 살아남았으니. 이에 노아 왕자를 비롯한 주위의 병사들이 모두 무릎 꿇었다.
“참으로 고맙네. 이것 외에 내 할 말이 없다는 게 통탄할 지경일세. 클리포포드는 앞으로도 바리엘과 더욱 깊은 관계를 유지하여, 가이아의 중심이 되는 그대들을 단단히 받치겠네. 폐하와 진 황태자 전하께도 내 절절한 마음을 부디 전해주게. 곧 뵙고 인사 올리겠노라, 그날을 클리포포드의 작은 왕이 진실로 고대하는 중이라고.”
“바리엘의 영광 아래.”
“그리고 클리포포드의 영광 아래.”
꽈악.
이안은 자연스럽게 왕의 손을 맞잡았고, 가볍게 흔들었다. 신분의 차이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는 순간이었다.
왕은 손을 들어보이며 계단 위 내려다보고 있는 마법사들에게도 인사했다.
“바리엘의 마법사들이여, 고맙네.”
“마법부의 뜻이었습니다. 전하.”
마법사들 역시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그 인사에 답했다. 그사이 안면 튼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신의를 나누었고, 감사를 표하는 말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마법사님들.”
“예. 잘 놀다 갑니다.”
“하하하.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또 뵙겠지요.”
“부디 잘 지내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마법사님들의 번영과 안녕을.”
“자자, 아직 작별 인사 하기에는 마차가 가볍습니다! 다들 할 거 하고 합시다! 이거, 나 혼자 못 옮겨!”
“먼저 가시는 마법사분들이 누구지요?”
“저랑, 얘랑, 쟤…….”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름을 모르지 않습니까.”
부확!
시끌벅적한 소란 속, 베릭이 문을 박차고 굴러나왔다. 함께 엉켜있는 자는 에프디람.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서로 머리채를 붙잡은 채 계단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클리포포드 사람들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이 놀랐지만, 바리엘 사람들은 잠깐 움찔할 뿐 베릭인 걸 확인하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쳤나, 이게! 진짜!”
“또라이 같은 게, 뒈질려고!”
“그래. 오늘 아탄족 한 명 신께 보내버리겠어. 너 같은 건 한 방으로 보내주마.”
“네 공격 이제 눈에 다 보이거든!”
콰아앙! 쾅!
그렇게 구르고 구르다 이안의 발치에 뚝 떨어진 두 사람. 둘은 여전히 서로의 머리채를 붙잡은 채 이안을 올려다봤다. 녹안은 담담했지만, 한심한 시선이 여실했다.
“아니, 마법부 장관 나으리. 시바, 사람을 불렀으면 담화에 자리 하나 놔줘야 하는 거 아닌가? 왜 내가 베릭 이놈이랑 밥을 처먹고 있어야 해? 내가 밥이면 다 되는 사람인 줄 알아?”
“내가 먹고 있었는데 네가 뺏은 거잖아!”
꽥꽥 소리지르는 와중에도 절대 서로의 머리채를 놓지 않는 두 사람이다.
“…에프디람.”
이안은 슬쩍 쭈그려 앉으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베릭 역시 귀를 쫑긋거렸으나, 이안은 목소리를 최대한 죽였다.
“내 비밀 대신, 다몬 왕의 비밀을 일러줄까?”
“별론데. 곧 뒈질 사람 비밀 알아서 뭐 하게.”
“삶을 두 번 살고 있다더라.”
“…어?”
에프디람이 놀라서 베릭의 머리칼을 놓치자, 베릭이 신나서 소리쳤다. 단번에 복부를 걷어차이긴 했지만.
퍼억!
“이겼다으으억!”
“뭔데? 방금 뭔 소린데?”
그녀는 이안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며 물었으나,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원하는 걸 내어줬는데, 무엇을 더 말하란 말인가? 이안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까딱였다.
“그러게. 무슨 소리일까. 다몬 왕을 데리고 바리엘로 갈 것인데, 궁금하면 그대도 다음 담화 때 황궁으로 오라. 대신 마물 범람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아주 호의적인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라.”
“아니, 말을 왜 그렇게 감질나게 하다 말아? 이봐!”
“준비를 계속하라. 새벽에 떠날 것이니, 촉박하다.”
“제국방위부에서는 트웰러 장관님이 후임자를 선정, 뒤처리를 일임하셨고, 황궁친위대는 모두 철수하기로 했습니다.”
“바리엘 병사는 몇이나 남지?”
“버고스 측 병력을 해산시키는 최소 인원을 확인한다고 하셔서, 아직 들어온 말씀은 없습니다. 클리포포드 측 상황을 긴밀히 살펴본다 하셨습니다.”
“저기요, 이안 히엘로 장관님? 다몬이 뭐라고?”
“비밀이니 누설 금지다.”
“뭘 알아야 누설을 하든 말든!”
이안을 따라다니는 에프디람의 꼴을 보아하니, 확실히 베릭과 같은 족속이라. 마법사들은 혀를 끌끌 차며 귀국 준비를 서둘렀다.
* * *
여명이 터오는 하늘.
푸르스름한 새벽에는 온갖 빛깔이 서려 있었다. 장벽 문이 열리고, 마차들이 천천히 움직여 시체 길을 지나쳐갔다. 그 뒤를 따르는 이안과 마법사들. 말발굽 소리가 버고스 측과 루스웨나 측 병사들의 잠을 깨울 정도였다.
저 많은 마차 중 하나에는 자신들의 왕께서 포박되어 있으리라. 버고스 병사들은 왠지 모를 착잡한 기분에 혀를 둘러댔고, 북진하는 행렬을 끝까지 지켜봤다.
타닥타닥!
이안은 말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고 정면을 바라봤다. 오로지 갈 길이 정해진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이다. 옆을 호위하던 노아 왕자는 그가 어쩐지 터오는 일출을 향해 몸을 내던지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침묵 속에서 계속 내달린 그들은 국경선에 인접해서야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미리 연락받은 바리엘 병사들이 제국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중이었다. 승전보를 가져온 제국의 찬란한 마법사들, 그들의 귀환이라.
“이안 경.”
노아 왕자는 말 위에서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고, 이안은 별다른 말 없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어차피 곧 다시 볼 인연. 더 이상의 긴 인사는 의미가 없었다.
“가자!”
히이잉!
이안은 말고삐를 세게 쥐어 당기며 일렀다. 가자, 자신의 바리엘로.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진과 로만드로, 시아오시, 이외 수많은 제국민들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