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03
103.
“어, 내일 출발해?”
“응. 봉원우가 미안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서신을 보냈더라고. 노악도 하루 정도는 쉬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오늘은 쉬고 내일 출발하려고. 괜찮겠니?”
“나야 상관없어. 오빠는 아쉽겠네.”
“으음. 곧 다시 볼 일이 있겠지.”
노악 외에는 다들 사는 곳도 가깝질 못해서 이현도 몇 년 만에 보는 친우들이었다. 사실 노악도 그리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었고.
‘너무 먼 지방 친구를 사귀면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구나.’
친구를 두루 사귀는 건 좋지만 자주 보지 못하면 역시 아쉽지 않을까. 이린은 새삼 아직도 서신으로만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남궁수연과 진사린을 떠올렸다. 심지어 남궁수연은 같은 호남성에 있는데도 몇 년간 만나 보질 못했다. 피차 아직 어린 것도 있고, 무공 수련한다고 잘 돌아다니지 않는 탓도 있지만 자주 보기 힘든 건 사실이었다.
“전부터 얘기는 했지만 일단 동정호부터 가 보려고 하는데 린아 생각은 어때?”
“좋아. 동정호는 장사에서 가깝지?”
“맞아. 가까운데 오빠도 한번밖에 못 가 봤어. 가서 관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자.”
“응.”
동생과의 여행에 들떠 보이는 이현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 이린도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현과 헤어져 복도 모퉁이를 도는 순간 어라 하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이제 기억도 슬슬 무뎌지나.’
하기야 뭐 약속 아닌 약속을 했다지만 둘이 동정호에 간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산에 처박혀서 무공 수련만 하니까 자꾸 옛 기억을 되씹는 거야. 사람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해.’
물론 죽기 전 기억들이 너무 자극적이라 쉽게 잊히진 않았지만 현재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비교해서도 안 되고.
‘……진사린에게 약혼 축하한다고 서신을 보내자. 여행 중이라 답장 보내도 받기 힘들 거란 것도. 상단 사람들에게도 내일 떠날 거라고 인사도 해야지.’
진사린에게 서신을 쓰며 남궁수연에게도 비슷한 내용의 서신을 썼다.
남궁세가는 장사에서 가까우니 직접 찾아가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만, 좋은 기억이 있는 곳도 아니고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었으므로 이린은 서신만 보내기로 했다.
서신을 부탁한 다음에는 상단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떠날 거란 사실을 전하고 미리 작별 인사를 남겼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예정이었으니 배웅은 거절했다.
이린이 마지막으로 찾은 건 윤사훈 지부장이었다.
“내일 떠나신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네. 그래서 애들에 대해 몇 가지 부탁해 둘까 하고요. 당부해 둘 것도 있고.”
이린은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대로 아이들의 적성에 맞춘 교육을 부탁했다. 특히 이번에 장사로 오는 길에 데려온 오누이 중 오라비 쪽은 요리를 가르치도록 부탁했다.
“요리요? 뜬금없군요. 잡일을 하는 아이였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해 주세요. 동생은 골격이 좋아 보이기는 하는데, 아직 어리니까 일단 회연이랑 애들한테 맡겨 주시고 애들이 연가장으로 돌아가면 한동안은 서문민영이 맡아 줄 테니 자세한 건 좀 더 큰 후에 생각하죠. 애들 돌아갈 때 연가장에 데려가 맡기면 좋을 텐데 너무 어려서 오빠랑 떼어 놓기는 그렇네요.”
이미 민영에게 당부해 놓았다는 말에 지부장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선이는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게 해 주고 싶어요.”
“그 아이에 대해서는 저도 신중하게 키워 볼 생각입니다. 여러모로 말이죠.”
“아저씨가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니 걱정할 필요 없겠네요. 잘 부탁드려요.”
조목조목 진로 상담을 하던 이린이 마지막으로 지도를 펼치고 중요한 정보를 덧붙였다.
“이 지역에 있는 산이 매물로 나오면 기다렸다 바로 매입하세요. 여기, 이 지역 특산품은 미리 사 두시고요. 여기는 한동안 피해 다니시는 게 좋고요. 쌀은…….”
이현도 첫 여행에 수년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린 역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미리 적어 온 쪽지를 펼치고 자신이 기억하는 주요 사항들을 설명했다.
“아가씨 덕분에 상단이 얼마나 커지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잘됐네요. 버는 만큼 선행에도 힘써 주세요.”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이린의 태도에 연사훈은 한숨을 쉬며 동패(銅牌) 하나를 내밀었다.
“뭔가요?”
“장주님께서 아가씨께 만들어 드리라고 하신 황룡전장의 구좌입니다. 소장주님이 함께하시니 그리 쓸 일은 없겠지만, 이제 일일이 용돈 따로 받아 쓸 나이도 아니니 필요할 거라면서요. 아가씨 덕분에 얻은 수익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소소한 금액입니다만.”
“별로 안 소소한 금액일 거 같은 기분이 드네요. 고마워요. 아빠한테도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이린의 인사에 연사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부했다.
“소장주님과 친우분들이 함께하시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사람 일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 부디 언제나 조심하시길. 특히, 사람 조심하시고요.”
“조심할게요.”
“사람 주워 오는 건 소장주님이 더 심하시니 뭐라 할 수도 없고…….”
“늘 고생 많으세요.”
“남 일처럼 말씀하지 마십시오, 좀.”
투덜거리면서도 이린이 걱정되는지 잔소리를 늘어놓던 연사훈은 동패를 품에 잘 집어넣는 이린의 어깨 위에서 꾸물거리는 뱀들을 보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혹시 모르니 뱀들 관리는 잘하시고요. 떠나시기 전에 얼음 추가 생산 좀 부탁드립니다.”
“네에~”
드디어 끝난 지부장의 잔소리에 이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즐거운 듯 손을 흔들며 문을 열고 나간 이린은 빙고의 위치를 확인하며 몇 걸음 가볍게 걷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경공인가. 아직 어리신데 굉장하군.”
연가장 식구들이 하나같이 무인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긴 하지만 열어 놓은 창문 너머로 사라지는 이린의 모습을 본 연사훈이 신기한 듯 감탄했다.
“하긴, 뭘 해도 이상하지 않지.”
경공만이 아니라 이린은 이상한 점투성이였다. 무엇보다 장원에서 떠나는 일 없는 꼬마 아가씨가 너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뭔가 말을 전해 줄 만한 사람……. 아니, 그분이 그럴 리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던 연사훈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방금 떠올린 인물에게는 그런 부지런하고 세심한 주변머리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
연사훈은 방금 전까지 이린이 서 있던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계신 건지…….”
“정말 이쪽 길이 맞나요?”
면사를 쓴 여인이 고삐를 쥔 채 앞서 가고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얼핏 듣기에는 정중한 목소리였지만 일행은 지금 그 차분한 음성에 짜증이 섞여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하하하. 청운 형님 방향 감각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거 아시면서 뭘 물어보고 그러세요.”
왜냐하면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여인의 옆에서 마찬가지로 말을 몰던 소년의 대답에 다들 힘없는 웃음소리만 흘렸다.
“맞다. 벌써 몇 번째 길을 헤맸죠.”
소년, 제갈수원의 말을 받은 당자혜가 빈정거리며 원흉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도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눈에 빤히 보였다.
그리고 그 원흉. 남궁청운은 지은 죄가 있어 화는 못 내고 이만 으득으득 갈았다.
‘어휴, 하여간 세가에서 귀하게 자란 놈들이라 아주 시건방져서는.’
누가 들으면 본인은 아닌 줄 알겠지만 여기 있는 일행들은 모두 오대세가의 자제들이었다.
즉, 귀한 집 자식들.
“청운 오라버니. 길은 그냥 저희가 알아서 찾아갈게요.”
남궁수연의 지친 목소리에 다른 일행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사를 떠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목적지인 동정호에 도착하지 못하고 있어 지친 일행은 모두 한결같은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 지금 나를 못 믿겠다는 거냐!!!”
어떻게 믿으라고요.
차마 연장자에게 대놓고 대거리를 할 수 없었던 일행의 시선이 남궁청운의 친동생인 남궁청휘에게 몰렸지만 청휘 역시 그 시선들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청운 형님이 굳이 데리고 나와 준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
길잡이로는 무쓸모였지만 청휘가 지금 이렇게 마음 편히 세가에서 나와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다 청운 덕분이었다. 갑작스레 청휘를 데리고 강호행을 떠나겠노라 나서 준 청운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또 암살을 걱정하며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나날을 보내야 했을 테니까.
12세에 폐관수련에 들어갔을 때 얻은 뜻밖의 영약과 비급 덕분인지 나날이 강해져 가는 청휘를 형들은 더 경계할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는 과민 반응을 보였다.
[네가 익힐 리 없는 것을 익히고 있구나. 어디서 얻었느냐?]자신이 숨기려 하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챈 아버지는 솔직히 좀 오싹했다. 물론 청휘와 같은 무공을 익히고, 청휘보다 강한 그와 검을 맞대고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란 것이 어리석었겠지만.
‘하지만 실력을 감췄다면 그건 그것대로 여전히 갇혀서 수련만 하고 있었겠지.’
청휘의 아버지, 검황 남궁익은 분명 그와 견줄 자가 많지 않은 절정고수였지만 피가 섞인 가족들이 봐도 절로 혈압이 오르는 독불장군이었다. 고강한 무공에, 세가의 직계로 가주 자리까지 올랐으니 더욱더 남의 말은 듣는 체도 하질 않았다.
덕분에 고생하는 것은 수년간 능력을 입증해 왔음에도 제대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첫 번째 부인의 아들들과 딱히 후계자 자리에 뜻이 없는데도 계속 견제받아야 하는 남궁청휘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집을 나와 버리고 싶은데.’
어머니만 모시고 뛰쳐나오자니 남궁청휘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집안이 아니었다. 정략결혼을 시킨 제갈세가에서는 절대 어머니를 받아 줄 마음은 없어 보이고.
장사에 들러 혹시나 싶어 제갈윤위 이모님께 운을 띄워 봤지만 여기는 지금도 벅차니까 불가하단 말씀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친자매처럼 자란 사촌 자매라더니 너무 차가운 거 아닌가?
‘여행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라며 무슨 맛집 말씀만 하시고.’
동정호는 취선루가 유명하고 서호는 영월루가 괜찮다던가.
이린에 대해 슬쩍 물어보았지만 딴소리로 말을 돌리며 히죽 웃기만 하시니 청휘의 속은 답답했다.
“으아아, 답답해 죽겠네!!”
“아니 이놈이 어디 어른 앞에서!?”
일행 중 하나인 황보산이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몸부림치자 본인도 어른스럽지 못한 청운이 훈계를 시작했다.
대체 언제까지 헤매야 하는가.
모두가 괴로워하던 그때, 뜻밖의 장소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