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26
126.
“저어, 그럼 제가 소저께 대신 다른 비녀를-!”
“…네?”
그것이, 배에서 내리기 전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였다.
자신이 무슨 소릴 했는지 깨달은 남궁청휘가 얼굴을 붉히고 입을 다물어 버렸고, 이린 역시 신경 쓰지 말라며 부인에게 가 버렸으니 더 대화가 이어질 여지가 없었다.
‘아무 사이도 아닌 남녀가 비녀를 주고받지는 않지….’
청휘가 여전히 신경 쓰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는 이린도 난처한 듯 청휘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만큼 뭔가 이상한 기류를 깨닫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연 소협만 늘 쉬지도 못하시는데 저희도 불편해요.”
“쉬어야 할 정도로 힘든 일은 아닙니다. 남궁 소저.”
“아니요. 불공평한 건 좋지 않아요. 그리고 두 사람이나 뒤를 지켜야 할 필요도 없지요.”
확실히 언제나 이현만 따라오는 것도 좋아 보이진 않았기에 다른 이들도 동조했다. 이린보단 이현과 나이가 더 가까운 당자혜까지 그렇게 나오자 이현도 결국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근데 나는 따라가야 하나?”
“애들 잘 봐 주세요.”
당자혜는 그렇게 말하며 제갈수원을 심여준 앞에 내밀었다. 처음 보는 물건이 있다며 수상쩍은 상인을 따라가려다 청휘에게 뒷목이 잡혀 돌아온 제갈수원이 어색한 웃음소리와 함께 시선을 피했다.
“으음.”
“자, 여동생들에게 쫓겨났으니 우리랑 가자고.”
“그래, 하긴 우리가 너무 무심했지?”
소녀들의 축객령에 두 눈 가득 근심과 걱정을 담은 이현은 결국 백리한과 남궁청운의 손에 붙잡혀 끌려가야 했다. 옆에서 청운진인까지 거들었다.
“아무리 여동생을 아껴도 그렇지 너무 집착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래. 전에 배에서 보니 아주 날아다니던데, 뭐가 그리 걱정이야? 심지어 지금은 양옆에 무서운 언니들까지 끼고 있는데.”
“…….”
그 무서운 언니들의 인선에 관여했을 누구 씨의 말에 이현은 입을 다물었으나 여전히 심기는 불편해 보였다.
“뭐야, 그 불손한 눈빛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연이현은 남궁청운이 멋대로 면사를 벗겨 내는 것을 방치하며 별실의 2층으로 들어섰다.
남궁청운은 노는 걸 좋아하는 한량 같아 보이지만 예술에 조예가 깊은 백리한과 죽이 잘 맞을 정도로 안목이 높은 데다, 의외로 사람도 가렸다.
“어때, 연주가 들을 만하지?”
남궁청운이 웃돈까지 얹어 주며 불러낸 여인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악사(樂士)였다.
그가 데리고 온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자혜, 황보산, 제갈수원, 남궁청휘, 남궁수연.
남궁수연을 제외하면 다들 오대세가의 직계로 실력 또한 뛰어난 것으로 유명한 이들이었다. 강호의 소문에 밝은 사람이 본다면 두 눈을 의심할 만한 인선들이었다.
‘거부하기 힘들 정도로 쟁쟁한 세가의 자제들이지.’
그 면면을 살펴보면 남궁청운의 목적은 뻔했다.
청운진인과 사이가 안 좋은 듯하면서도 술 취향이 맞는지 이 지역 특산주들을 한 병씩 놓고, 한 잔씩 맛을 보며 실없는 얼굴로 즐거워하는 남궁청운을 보며 이현도 술을 따랐다.
“그만하세요.”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런 이현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가에 앉아 있던 이현이 슬쩍 시선을 내리자 남궁청휘와 얼굴을 가린 여인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남궁청휘와 함께 있는 이가 이린이라는 것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상한 뜻으로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저.”
청휘가 이린을 향해 내민 것은 연꽃 모양으로 세공되어 있는 작은 등이었다. 크기는 작지만 얼핏 보아도 상질의 물건이었다.
“자꾸 이러시면 부담스러워요.”
“…송구합니다.”
술에 취해 있는 것 같더니 어느새 다들 귀를 쫑긋 세우며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린의 차가운 거절과 함께 시무룩해진 남궁청휘의 목소리에 술잔을 기울이던 이들의 시선이 동시에 남궁청운을 향했다.
가정사가 조금 복잡할지언정, 어쨌든 이렇게 데리고 나올 정도로 나름 우애가 깊어 보이는 형제지간이었다. 과연 남궁청운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착잡해 보이는 게 조금 의외일 뿐, 이현에게 시비라도 걸지 않을까 싶어 긴장했던 이들은 뜻밖의 침묵에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반면에 이현의 표정도 어딘지 미묘했다. 온화한 성품에 안 어울리게 사랑스런 동생에게 접근하는 늑대가 있으면 바로 검이라도 뽑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분위기는 차가웠다. 주위의 흥미 반 걱정 반인 시선이 무색하게 이현 역시 술잔만 기울이…는 듯하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동생을 데리러 가 보겠습니다.”
당황한 노악과 백리한이 허둥지둥 이현의 뒤를 따르자, 청운진인과 남궁청운만이 자리에 남았다.
“넌 안 가냐?”
“대협께서는 안 가 보셔도 괜찮으십니까?”
“흥. 남궁세가의 직계라는 놈이 설마 저 순둥이의 검에 맞아 죽기라도 할까.”
“유정검이 미모로 더 유명하기는 하나 아직 어린 소년에게 얕잡아 보일 정도는 아닙니다만.”
“흥. 제 혈육이라도 재능이 없는 놈에겐 무심한 검황이 직접 붙잡고 가르쳤으니 평범한 어린 소년은 아니지.”
뜻밖의 서늘한 목소리는 술잔에 가득찬 술과 함께 삼켜졌다.
그 안에 담긴 뜻은 가볍지 않았지만 청운진인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창밖을 응시했다.
“하긴 유정검이 검을 뽑을 필요도 없이 연 소저가 독설 한번 던져 주면 전의를 상실해 손도 입도 못쓰게 될 것 같군요.”
“와, 너, 이, 도사 새끼 말뽄새가 그게 뭐야!”
“걱정 마시길. 연 소저는 순둥이 손에서 자라 순진해서 아직 험한 말은 서툰 모양이니.”
하지만 독설의 피가 흐른다는 당가 직계가 옆에 계시니 머지않았다는, 청운진인의 도인답지 않은 악담에 남궁청운은 뒷목을 잡았다.
집에서 곱게 키워 망정이지, 청운진인이 보기에 이린에게는 소질이 다분했다.
“오빠.”
곤륜의 도인에게 독설 꿈나무 판정을 받은 것을 알 리 없는 이린은 어느새 아래층으로 내려온 이현을 보곤 반가운 목소리로 쪼르르 달려갔다. 과연 검황의 지도를 받았다는 남궁세가의 총아도 오라비 뒤로 숨어 버린 이린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제 누이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지?”
이린을 뒤에 숨긴 이현의 양옆에는 백리한과 노악이 장벽처럼 서 있었다. 실상은 연이현이 돌발 행동이라도 하지 않을까 궁금, 아니 걱정되어 따라온 두 사람이었으나 남들 눈에는 함께 청휘를 위협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청휘는 괜히 이현과 다투었다가 공연히 더 미움을 살까 두려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형님은 어디 계십니까?”
“남궁 대협께선 청운진인과 함께 위에 계십니다.”
빨리 올라가라는 듯 길까지 비켜 주는 이현에게서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저어, 저는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아, 나도 올라갈게.”
백리한과 시선을 교환하던 노악이 먼저 청휘의 뒤를 따랐다.
이현은 자신의 등에 달라붙어 청휘를 힐끔거리는 이린을 보며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린아. 심여준은?”
“다들 귀뚜라미를 보러 가겠다고 해서 같이 있을 거야. 나는 귀뚜라미 싸움 같은 데는 별로 관심 없어서 남궁 공자랑 먼저 나왔거든.”
귀뚜라미 싸움은 귀뚜라미 두 마리를 싸움 붙이는 것으로 일종의 내기 도박이었다. 도박이라고는 하나 꽤 고급 오락이라 즐기는 이들도 많았기에 귀뚜라미를 키우는 전문 업자들도 따로 있을 정도였다. 무공을 익히는 무인들에게 그런 게 뭐가 재밌겠냐 싶은데 의외로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산에서 자란 이린 본인이 관심 없는 것은 둘째 치고, 소매에 숨겨 둔 뱀들이 귀뚜라미에게 관심을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사람이나 동물을 함부로 공격하지 말라고 엄하게 교육한 부작용인지, 뱀들은 작은 생물은 거침없이 공격하곤 했다.
이를 알고 있는 이린은 행여나 남의 가게 귀한 귀뚜라미들을 상하게 할까 싶어 먼저 돌아가겠다며 사양했다. 이린이 먼저 돌아가겠다고 하자 남궁청휘 역시 자신도 관심 없으니 함께 돌아가겠다며 심여준을 안심시켰다.
두 사람은 평범하게 대화하며 만나기로 한 주루로 향했고, 분명 도중까지 아무 문제도 없었다.
청휘가 자꾸 이린에게 뭔가를 선물하려 하는 것을 빼면.
‘아무리 나한테 미안하다지만 지나치잖아. 남궁 공자는 약혼녀도 있는데.’
아직 확실하지 않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남궁수연의 표현에 따르면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문 간의 일이니 쉬이 번복하기도 어려운 일이고.
그걸 본인이 모를 리도 없는데 자꾸 이린에게 저러는 것은 마치,
‘나를 좋아하는 거 같잖아.’
대체, 자신을 보면 얼마나 봤다고.
“린아. 혹시 남궁 막내 공자와 무슨 일이 있었니?”
“어? 아, 아니. 왜?”
“어쩐지 분위기가 어색해 보이던데. 남궁 공자는 너에게 꼭 할 얘기가 있는 것 같고.”
이현의 말에 잠시 고민한 이린은 살짝 진실을 섞어 변명했다.
“전에 동정호에서 내가 청운 도장과 먼저 객잔으로 돌아간 적 있잖아. 그때 야시장에 들렀었거든. 거기서 내가 잠깐 혼자 떨어졌을 때 시비가 붙은 걸 남궁 공자가 도와준 적이 있는데, 그 일 때문에 신경 쓰이는 모양이야.”
거짓말은 아니다. 그 ‘잠깐’이 몇 시진이고 ‘시비가 붙은 상대’가 산적이었을 뿐.
“그런 것치고는 좀….”
“난 그것보다 저쪽이 우리 아가씨한테 관심 있어 보이는데.”
“그럴 리가요.”
백리한의 말에 이린이 손사래를 치며 이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우리도 올라가죠. 오빠, 나 배고파.”
“그래, 올라가자.”
아무렇지 않은 척 두 사람을 이끌면서도 이린은 내심 복잡한 심경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남궁청휘와의 첫 만남이 뜻밖에 조금 강렬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호감을 가질 만한 일이 뭐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은데.’
내내 차갑게 대했던 데다 일만 떠맡기고 급하게 돌아온 기억밖에 없었다.
아무리 이전에 남궁청휘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었다고 해도 지금의 남궁청휘와는 전혀 경우가 달랐다.
[그저 연 소저를 처음 뵈었을 때 모습이 마치 선녀가 하강하는 것만 같아-]이린은 문득, 남궁청휘가 예전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