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70
170.
이린의 곁에 늘 붙어 다니는 청아와 홍아는 당연히, 지금도 이린의 소매 속에 있었다. 불안해하는 뱀들을 다독인 이린이 홍유와 유영에게 통보했다.
-불 좀 지르고 올게요.
-네?
본래 절에서 하룻밤 묵어가기 위한 길이었으니 짐도 들고 온 상태였다. 이린은 만약을 위해 짐 속에 있던 검은색 두건으로 머리카락을 꼼꼼히 가렸다. 영문을 몰라 하는 두 사람을 남겨 두고 이린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배 후미에 있던 작은 등불이 떨어지며 바닥에 불이 붙었다.
‘연 소저가 한 일인가?! 여기서 저기까지 40척(약 12m)은 될 텐데!’
홍유가 경악한 것 이상으로 당황한 이들은 물론 따로 있었다.
“!!”
갑작스러운 화재에 갑판이 소란스러워지며 왜구들이 우르르 몰려가 불을 끄기 시작했다.
화재는 후미만이 아닌 선체에까지 번졌는데 홍유와 유영은 그것 역시 이린의 짓임을 직감했다.
소란 속에 누각 위로 돌아온 이린이 두 사람에게 건넨 첫 마디는 몹시 당돌했다.
“사람 수를 좀 줄일까요.”
“…연 소저 보기보다 단호한 분이시네요.”
해적들 중 몇몇은 불을 끄러 달려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자연히 화재 현장에 눈이 가는 법이었다. 세 사람은 화재 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왜구 몇 명을 급습해 조용히 처리한 후 바닷속으로 밀어 넣었다.
불을 끄느라 바쁜 이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따금 파도가 거칠어져 불을 끄다 바다에 떨어지는 이도 있었으니 일행에겐 호재였다.
그리고 같은 시각, 상갑판의 소란이 화재라는 것을 눈치채고 불안해하던 사린은 자신의 팔을 기어오르는 무언가를 느끼고 한기에 몸을 떨었다.
‘뭐, 뭐지?’
끼이-
“!!”
왜구들은 잡아 온 여자들 중 유독 값비싼 옷을 입고 용모가 고운 여인들은 더 비싼 값을 받기 위해 나름 구석에 잘 모셔 두고 있었다.
하지만 잘 모셔 두고 있다고 해 봤자 노예로 팔려 갈 여인에 비해서일 뿐. 난생처음 이런 난폭한 취급을 당하고, 눈앞에서 다른 여인들이 폭행당하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진사린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무슨 소란인지는 몰라도 덕분에 해적들이 아래로 내려와 괴롭히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숨을 돌리던 사린은 귓가에 들려온 익숙한 소리의 정체를 금방 깨달았다.
‘어, 어떻게?’
주변의 시선을 살피며 슬쩍 뒤를 돌아보니 뒤쪽에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게다가 지금까지 기분 탓이라 생각했는데 뒤쪽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화재가 났음에도 열기는커녕 한기가 도는 것이 심리적 이유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 상태라 느끼지 못했지만 분명 뒤쪽에 구멍이 뚫린 것이 분명했다.
‘이 애들이 여기 있다는 건, 혹시 이린이 이 배 안에 있다는 건가?’
절망과 분노로 눈물을 흘리던 사린의 눈에 희망이 빛이 떠올랐다.
이린은 이 뱀들을 몸에서 한시도 떼어 놓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저 불도 이린이 일부러 낸 걸지도 몰랐다. 그사이 이 뱀들을 들여보낸 거라면 이해가 갔다.
‘배가 뭍에 닿을 때 우릴 구하러 올 거야.’
자신보다 어린 이린이지만 무공이 뛰어나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배에 타고 있는 해적들의 수가 적지 않으니 혼자서는 힘들 것이다.
‘누군가 같이 왔다면 좋겠지만 혼자일지도 몰라.’
이린이 오라버니와 함께 왔다면 그들만 오지 않았을 테니 배에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벌써 이 죽일 놈들을 때려잡았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 이린 혼자, 아니면… 아까 이린과 함께 자리를 뜬 이들까지 4명 정도가 최대였다. 그렇다면 자신도 이 이상 발목을 잡을 순 없었다.
“이 끈이라도 풀어주면 좋을 텐데….”
뱀에게는 무리겠지.
밖의 소란을 믿고 사린이 작게 한탄했다. 개도 아니고 뱀이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끼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홍아를 본 사린의 눈에서 문득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지금 자신의 곁에는 호위인 소운이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수가 없는 사린은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을 원망했다.
‘이런 곳에 오는 게 아니었어. 내가 억지를 부려 서호에 오지 않았다면 소운은 무사했을 텐데!’
그리고 갑자기 팔 근처가 살짝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은 사린은 움찔 떨며 몸을 비틀었다.
‘끈이… 풀렸어?’
몸이 자유로워진 사린은 옆을 살폈다. 사린의 옆에는 백리설과 유나가 있었다. 정신이 든 이후로 내내 울고 있던 유나는 지쳐서 잠이 들어 있었고, 백리설은 뭔가 이상한 듯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
그리고 놀란 듯 고개를 뒤로 했다.
“백리 소저.”
“진 소저 이게….”
“쉿. 가만히 있어요.”
“알았어요.”
잠들어 있는 유나의 끈까지 풀어 준 홍아는 그대로 진사린의 옷자락 속에 똬리를 틀었다.
[우리 뱀들은 똑똑하거든.]언젠가 그렇게 말했던 이린의 말을 떠올리며 사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뱀이 얼마나 똑똑한지는 몰라도, 이린이 자신을 위해 보냈다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사린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백리 소저, 지금 조금이라도 쉬어 둬야 해요.”
“…알았어요.”
왜구들이 불을 끄러 올라간 지금도 하갑판에는 노를 젓는 노꾼들이 있어 자신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중원말을 할 줄 아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했다.
사린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여전히 위쪽은 소란스러웠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왜어를 알아듣는다는 홍유는 이린의 상상 이상으로 적극적이었다.
바람 때문에 불길이 커지자 그 틈에 갑주를 걸치고 있는 왜구를 잡더니, 옷과 갑주를 빼앗아 몸에 걸치고 은근슬쩍 왜구들 틈에 섞여들어 모르는 척 왜구를 바다로 떨어뜨리거나, 하갑판에 내려가 상황을 슬쩍 살피고 돌아오기까지 했다. 왜 들어가느냐는 말에 허둥지둥 나와야 했지만.
-세 사람은 아직 무사해요.
-다행이네요.
-붙잡혀 있는 다른 여인들이 몇 명 더 있는 게 걸리지만요.
어디서 약탈이라도 해 왔는지 배 위에 있는 잡다한 짐들 덕분에 운신이 편했다. 하갑판 역시 혼잡한 모양이었다.
불길은 다행히 무사히 잡혔다. 미리 아래쪽은 불이 번지지 않도록 청아가 힘쓰긴 했지만, 그래도 위험하다 싶으면 몰래 청아를 데려가 불을 꺼야 하나 고민했는데 다행히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육지가 보인다 해도 실제 거리는 꽤 멀어요. 수공(手功)을 익혔다 해도 두 분은 바다가 처음이니, 뜻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커요.
-어쩌죠?
-위험 부담이 있지만, 어느 정도 뭍에 가까워질 때까진 지금처럼 계속 숨어 있어야죠.
갑판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래에서는 몰라야 한다. 그래야 정해진 방향으로 수부들이 계속 노를 저을 것이다. 위를 정리하면 그다음이 아래, 어제처럼 수부들 중에 왜인이 아닌 노예들이 많다면 편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많았다.
-두 분은 거리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제 지시를 따라 주세요.
-알겠어요.
불이 난 동안 몰래 해치운 왜구의 수는 기껏해야 네다섯 명.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떨어진 이도 두엇 정도 있었으니 그 이상은 사고라고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 건드리지 않았다.
뒤쪽 전체에 화재가 번진 터라 밤새 불을 끄느라 기진맥진한 왜구들은 밖보다 안에서 쉬고 있는 숫자가 많았다.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배 위에서 세 사람이 더 이상 숨어 있기는 어려웠다.
-바다에 빠지게 두지 말고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야 해요. 저들은 수영에 능할 테니 도망가서 알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탈출하지 않으면 위험해요!
홍유의 말에 이린과 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는 점점 육지를 향하고 있었다. 주변 지형을 살피던 유영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곳은 바다가 육지 안쪽으로 들어간 지형이었다. 배가 만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사이 옆쪽으로 헤엄쳐 가면 훨씬 안전했다.
-다행히 배들이 만(彎) 안쪽에 정박하고 있으니 헤엄쳐갈 거리는 생각보다 짧아요! 저쪽에는 왜구가 많지 않을 가능성도 크고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검각 출신들은 기본적으로 수공을 익혔으니 잡혀 온 다른 여인들을 데리고 도망치는 것도 수월할 터였다.
육지와의 거리를 가늠하던 홍유가 두 사람과 마지막으로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헉!!”
홍유의 신호에 유영이 아껴 두었던 비도를 던지자 배 위에 있던 네 명의 왜구가 동시에 픽픽 쓰러졌다.
‘자혜 언니 못지않네.’
어제 경황이 없어 유영의 활약을 제대로 보지 못한 이린이 감탄하며 뛰어들었다.
“악!”
말은 통하지 않지만 비명만은 만국 공통이었다.
단칼에 왜구를 쓰러트린 이린과 홍유의 주위로 왜구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더 빨랐다.
챙! 창!
검을 맞부딪치는 일조차 드물 정도로, 두 사람의 검은 빠르게 왜구를 처치했다.
‘나는 난전이 더 적성에 맞나.’
일대일 대련보단 난전이 익숙한 이린이 무심하게 해적들을 해치우는 모습에 홍유 역시 감탄했다.
‘어제 나와 대련할 때와는 다른 사람 같군.’
호승심을 느낄 때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홍유는 어쩐지 피가 끓는 감각에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타탁!
두 사람이 동시에 왜구를 쓰러트린 순간이었다.
하갑판으로 통하는 통로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런.”
“이대로 우리가 잡지 못하도록 막으며 본대가 있는 곳으로 향할 생각 같군요.”
“배가 뭍으로 향하고 있다는 건 다행이지만, 왜구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으로 들어갈 수는 없죠.”
목소리는 느긋했으나 행동은 빨랐다.
세 사람은 갑판 아래로 도망치려는 자들을 그대로 붙잡아 갑판 아래로 밀어 넣었다.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은 동료가 내려오자 당황해 검을 거뒀다가 홍유의 발길질에 그대로 밀려 넘어갔다.
그사이 세 사람이 통로를 닫고 내려왔다.
“사, 사저!!”
“유 사매, 괜찮아?”
정신을 차리고 사린과 백리설 옆에 붙어 있던 유나가 홍유를 발견하고는 반색하며 외쳤다.
“다들 괜찮아요? 구하러 왔어요!”
이린은 혹시 노꾼들 중 중원인이 있을까 해서 말을 걸었지만 아쉽게도, 노꾼들은 모두 손에 노 대신 무기를 들고 일행을 맞았다. 안타깝게도 이 배에 있는 노꾼들은 모두 왜인인 모양이었다.
“쯧.”
홍유와 이린은 동시에 혀를 차며 검을 들었다. 유영이 뒤쪽에서 세 사람의 검을 찾아 건네자 다들 검을 손에 쥐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내공이 부족해 남궁수연과 비교하면 회복이 늦은 편이었으나 반나절이 지났으니 대부분 검을 잡을 수 있었다.
“여기서 바다를 헤엄쳐 도망쳐야 하니까 너무 기운 빼면 안 돼요!”
그렇게 외치며, 이린은 파죽지세로 일격에 왜구를 베기 시작했다. 작은 등불 하나뿐인 어두운 선실 안이라 제대로 보이진 않았으나 그 뒷모습을 보며 사린과 백리설은 넋을 잃었다.
‘검을 잡은 사람이란, 재능이 빛나는 사람이란 저런 거구나.’
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검의 재능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허락된 자유는 그것뿐이었다.
‘왜 나에게는 없었을까.’
인정할 수 없기에 계속 고집을 부렸다.
사린이 아무리 노력해도, 사촌 오라비보다 더 좋은 실적을 보여도, 정작 하나뿐인 딸에게는 아무런 기대도 칭찬도 없는 부모님에게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었다.
차라리 검에 재능이 있다면, 자신을 인정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부모가 정해주는 혼처에 끌려가기보다는 자유롭게 세상을 호령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그 고집으로 인해 소운이 죽은 것이다.
‘빨리 포기했다면 좋았을걸.’
어찌 보면 끔찍한 광경일지도 몰랐지만 사린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린과 홍유, 유영의 벽을 뚫는 자는 없었지만 백리설과 사린은 검을 쥔 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후우.”
그리고 겨우, 세 사람이 한숨을 돌리고 잡혀 있던 여인들이 안도하는 그 순간.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둥-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배의 좌측에서 무언가와 가볍게 충돌한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덕분에 선실 안을 밝히던 작은 등불이 떨어지며 주변이 어두워졌다.
“이게, 무슨 소리죠?”
당황한 이린의 목소리에 홍유가 답했다.
“다른 배가… 접선한 것 같습니다.”
“배의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던 모양이군요.”
아니면 갑판에 아무도 없는 것을 눈치챘거나.
이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 수가 적지 않으니 쉽게 도망칠 수 없었다.
“다들 움직일 수 있겠어요?”
“움직일 수는 있지만, 어쩌려고요.”
“이 배는 생각보다 선체가 얇고 가벼워요. 홍 소저라면 뚫는 것이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
“연 소저.”
“제가 막고 있는 동안 선체를 부수고 바다로 탈출해요. 저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다 뒤따라갈게요.”
“안 돼요, 연 소저!!”
이린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위험한 순간인데도 이상하게 무섭지는 않았다.
‘왜, 이럴 때면 그 사람이 생각날까.’
머릿속과는 다르게 시선을 고정한 채,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린은 여기서 죽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끼익-
상갑판과 이어지는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한참을 어두운 선실에 있어 빛이 익숙하지 않은 이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카앙!!
그리고 검을 맞댄 순간 경악했다.
‘하, 설마 지금까지 겨룬 누구보다 강한 상대가 고작 왜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