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45
245.
‘다시는 연가장에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나 놓고, 내가 장주일 때에도 몰래 비천산에 와서 이곳에 드나들고 있었던 건가.’
연화문이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이린은 분주히 여기저기 기웃거리더니 공동에서 이어져 있는 어느 동굴로 들어갔다.
“어디 가는 거지?”
“잠시만요. 아, 찾았다.”
그리 멀리 가지는 않았는지 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이린은 품 안에 작은 상자 하나를 안고 돌아왔다.
“석실에 있던 것이 아니었나?”
“맞아요. 하지만 제가 이곳을 우연히 발견해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 또 찾아들어 오지 않으리란 법이 없겠다 싶어서요.”
안쪽에 있는 동굴들 중에는 중간에 작은 물건을 숨기기에 좋아 보이는 공간이 종종 발견되었다. 그래서 이린은 기억하기 쉬운 몇몇 곳에 분산해서 비급을 숨겨 두었다.
‘명문세가나 문파의 것이 아닌 것들 중에 쓸 만해 보이는 건 내 방에 가져다 뒀지만…. 그냥 놔둬도 괜찮겠지.’
명문세가와 문파의 비급은 익히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익힌다 해도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면 성가시니 이린에게는 쓸모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단지 외부 유출이 걱정스러워서 숨겨 뒀을 뿐.
“왜 다 표지들이 없지?”
“혈교의 교주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장문과 가주들에게 비무를 청해서 빼앗았다고 들었는데 일부러 표지를 찢었는지도 모르죠.”
덕분에 한눈에 봐서는 어느 문파의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흐음.”
이린이 가져온 비급을 훑어보던 연화문이 몇 권을 선별해 집어 들었다.
“이거면 미끼로는 충분할 거 같은데.”
“어디 건지 아시겠어요?”
“그럭저럭. 익히고 계시던 분들이 아직 살아 있는 문파도 있으니 적당히 섞어야지.”
그렇게 말한 연화문은 책들 중 몇 권을 거칠게 찢었다.
“?!”
“조금 자극적일 필요가 있으니까.”
일부러 물에 담갔다 꺼내 멀쩡한 책의 상태를 훼손하는 것을 보며 이린은 제 것도 아닌데 괜히 놀라 움찔움찔 떨었다.
“그런데 의외로 남궁세가 것이 없군.”
“네? 아… 제가 아직 덜 꺼낸 게 있나 봐요.”
“이미 충분하니까 더 꺼낼 필요는 없다.”
“네.”
동요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린을 보던 연화문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남궁 삼공자와는… 정인 사이인가?”
“네? 아, 아니요!”
“…5년이나 찾아다녔다고 하던데.”
“그건, 그러니까. 그….”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는 이린을 보며 연화문은 저도 모르게 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아, 미안하다.”
“…괜찮아요.”
검성이 자신을 대할 때 몹시 조심스러워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이린도 괜히 조심스러웠다.
“왜 연가장에 저를 두고 가셨는지도 대충, 이해는 가고. 저는 연가장에서 충분히 사랑받으며 자랐으니까요.”
“연적훈도 신수린도 그 아들인 이현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지.”
동생 부부와 조카에 대해 말하는 연화문의 표정은 이린이 본 중에 가장 부드럽고 따스했기에, 조금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어머니라.’
솔직히 말하면, 어머니라고 해도 그리 현실성이 느껴지질 않았다. 너무 젊어 보여서일까.
아니면 저쪽의 태도도 그렇게 애틋하지는 않아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더 급한 문제가 있어서일까.
‘어머니라기보다는 처음 보는 친척 언니…나 이모 같은 느낌이야.’
문제도 어느 쪽도 이린은 겪어 본 적이 없어 그냥 막연한 상상뿐이라는 점이랄까.
“너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딱히 부족한 건 없었는걸요.”
이건 거짓말이다.
이린은 분명 계속 자신이 연적훈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신경 쓰고 있었다. 친어머니가 있다면 어땠을지, 왜 자신을 두고 간 건지 알고 싶어 했고.
그런데 정작 친모를 만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만나게 되면 울면서 매달리게 될까 무서웠는데. 친모와의 조우보다 이현의 실종 쪽이 더 충격적인 탓일까.
하지만 그 일이 아니더라도 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더 요구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건 있었다.
‘연가장이 몰락하고 내가 홀로 장원을 지킬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요?’
묻고 싶어도 이제 대답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것을 물었다.
“연가장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당신은 달려왔을까요?”
“당연하지.”
“저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도요?”
“물론이다.”
망설임 없는 대답. 이린은 그것으로 만족하기도 했다. 이번에 자신이 실종되었을 때도 뒤늦게 알게 된 것을 보면 분명 다른 일에 얽혀 있었을 듯했다.
‘생각해 보면, 검황이나 검제같이 어울리지 않게 대단한 사람이 연가장을 신경 써 주었던 건 아빠보다는 검성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정작 친딸인 이린만이 까맣게 몰랐지만.
“?”
이린은 문득 가져가야 할 것들을 챙기던 연화문의 시선이 어느 한 동굴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러세요?”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을까. 들렀다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이 동굴에서요?”
“그래.”
“오래 걸리지만 않는다면요.”
이린의 대답에 연화문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고맙구나.”
그러고는 순식간에 아까까지 시선을 주던 동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저기에 뭐가 있었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워낙에 비슷비슷한 동굴이 많아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아.”
생각났다. 회귀 전, 중간이 무너져 있어서 끝까지 들어가 보지 못한 곳이었다.
뭔가 중요한 거라도 있는 걸까.
문득 주변을 살펴보던 이린은 뭔가가 떠오를 듯 말 듯한 갑갑함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넓은 공동(空洞)과 내부 공간의 삼분지 일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호수.
벽에 가득한 동굴들.
“아?”
제갈세가의 비고에서 유출된 그 알 수 없는 장보도.
동굴 입구에서 이곳까지 이어지는 길을 그려 놓은 약도와 함께 있던 그 낙서 같은 종이.
‘삼분지 일을 가른 선은 호수고, 원 주변에 가득했던 점은 동굴….’
그리고 붉은색으로 찍혀 있던 점이 하나.
이린은 동굴의 개수를 하나씩 세며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붉은색 표식의 위치를 확인했다.
몇 번이고 확인하던 이린의 손가락은 계속해서 한곳에서 멈췄다.
‘방금 검성이 들어간 동굴….’
그 장보도는 저곳을 표기한 지도였다.
“와. 왜 생각 못했지?”
이렇게 단순한, 그린 사람은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림이었는데!
‘진작 알았다면 집에 들렀을 때 확인할 수 있었는데.’
허탈함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이 바로 그 동굴에서 연화문이 나오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린? 무슨 일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묘하게 아까보다 더 가라앉아 보이는 얼굴을 보며 이린이 어렵게 입을 뗐다.
“그런데 저곳에는 뭐가 있기에 들렀다 가시는 거죠?”
“……위패를 모아 두었다. 아니, 검총(劍塚) 혹은 의관총(衣冠塚)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구나.”
“위패요?”
이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연화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총과 의관총은 시신 대신 그 사람의 검이나 옷을 묻은 무덤을 뜻했다.
연적훈에게 신교와 연가장의 관계를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린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신교… 사람들의 묘인가요?”
“……연가장 무인들의 묘다.”
그리 답하는 연화문의 표정이 더없이 우울해서 이린은 저도 모르게 연화문의 손을 붙잡았다.
“?”
“아빠도 알고 있어요?”
“아니, 그 아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도…….”
이린은 당시 연가장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의 연적훈의 얼굴이 얼마나 슬픔과 그리움에 차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분명 연적훈 역시 그들의 묘가 있다면 오고 싶어 할 것이다.
“모르는 게 좋다. 연가장의 장주가… 장원을 떠나 여러 사람을 해친 이들을 감싸 준다면 어찌 되겠느냐.”
“그래서 이런 곳에 위패를 두신 건가요?”
“그래.”
“그럼, 이곳에 대해 다른 누군가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나요?”
“…제갈세가에 남아 있던 벗에게 가르쳐 주려 했지만 내 서신을 받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다.”
“!”
어쩐지 그 약도가 유출된 과정을 알 것 같은 이린은 이마를 짚었다.
‘검성이 보낸 것이니 장보도라 생각한 걸까.’
이린은 의아해하는 연화문에게 사실을 알려 줄까 하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지금도 충분히 우울해 보여.’
내내 덤덤하던 얼굴이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웠다.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이러하니 20년 전에는 분명 더 심했을 터였다.
‘기억력도 좋고 정신까지 강하니 오히려 잊지도 못하고 계속 되새기게 되는구나.’
이린이 검성에게 품는 감정은 딸이 어머니에게 가진 마음이 아니었다. 그저 괴로워하는 사람을 달래 주고 싶다는 마음일 뿐.
“제가 보기에 당신은 조금 편해져야 할 필요가 있어 보여요.”
“그럴 수는 없다.”
연화문은 이린의 온기에 미소 지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내가 남은 삶을 사는 동안 계속 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다. 나는 분명 죽을 때까지 그들을 잊지 못하겠지.”
“잊지 말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그들을 위해 당신의 삶을 희생하지는 마세요. 혹시 그러다 이런 결과물까지 생긴 거 아니에요?”
곽선후가 연화문을 볼 때와는 달리, 연화문이 곽선후를 보는 눈에는 그리 깊은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연화문은 곽선후가 강제로 어찌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었으니 강제로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의 연화문을 보고 나니 어쩌다 둘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을지는 알 만했다.
곽선후가 상식적이고 정도를 지키는 남자, 예를 들면 이현이나 남궁청휘 같은 사람이었다면 이린은 태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죄책감을 가지고 사는 것까지 어찌할 수는 없지만 그 때문에 당신이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정작 혈교 놈들은 저렇게 멀쩡한 사람들 괴롭히며 잘살고 있는데 왜 당신만 괴로워해요?”
“…그것도 그렇구나.”
연화문은 자신을 위해 화를 내는 이린을 보며 엷게 웃었다.
이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정말 연적훈에게 이 아이를 맡긴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내가 키웠다면 분명 이런 아이로 자라지 못했겠지.’
연화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바보 같은 짓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너를 만나게 된 건 기쁘구나.”
“다행이네요.”
엉망이 된 비급을 품에 안은 이린은 연화문의 손을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이끌어 줄 사람이 필요해 보였다.
“연가장에 들르지 않아도 괜찮겠나?”
“나중에요.”
오랫동안 보지 못한 이들을 안심시켜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장원에 돌아갈 때는 이현과 함께하고 싶었다.
“어서 가죠.”
두 사람이 챙겨 간 비급은 연화문이 혈교의 근거지에 몰래 숨어들었을 때 가져온 물건으로 탈바꿈될 것이다.
가장 멀쩡한 비급은 소림의 것이다. 강호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은 명분을 중요시하니 자신들의 것만 무사하다고 몸을 빼지는 못할 터, 그 외의 비급들은 일부가 훼손되었거나, 반쪽뿐인 상태.
점잔 빼던 소림승들조차 문파의 비급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는데 다른 문파라고 다르지 않을 테지. 그간 비급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다들 그렇게 장보도니 비고니 떠들어 대다 많은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던가.
‘내가 독에 당했던 그 날도 비고에서 숨겨진 비급이 발견되었다는 말에 다들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다 수많은 사람들이 허무하게 죽었지.’
확실한 증거까지 있다면 다들 개떼처럼 달려들 것이 뻔했다.
‘남궁세가 것은 내가 남궁청휘한테 이미 줘 버리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빠지겠다고 하진 않겠지?’
이번에도 혈교가 얽혔다는 말에 남궁세가가 적극적으로 동참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