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30
30.
‘흐음. 저 옷보다는 내 옷이 더 어울리겠는데.’
이린의 옷은 대부분 고급품이었다. 여행하는 동안은 너무 눈에 띄지 않는 게 좋다고 옷감 색깔도 주로 옅은 노란색과 흰색에 자수도 없이 수수했지만 한눈에 봐도 옷감의 질이 달랐다.
“후우.”
“괜찮아, 오빠?”
한참 뒤 이현이 땀을 흘리며 손을 떼자 아이가 스르륵 무너지며 잠들었다.
아까와는 달리 고른 숨소리에 이린도 안심하고 아이의 겉옷을 갈아입혔다. 피가 묻은 건 겉옷뿐이라 얼룩이 보이지 않도록 차곡차곡 접어 짐 속에 몰래 넣었다. 어설프게 묶인 수수한 머리끈도 풀고 이린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장식했다. 얼핏 봐서는 이린의 자매나 또래 친구 정도로 보일 것이다.
“신분 확인을 하면 내 친구인 걸로 해 두자.”
“그래. 어린아이라 그리 깊게 캐묻지는 않겠지.”
뭔가 거짓말이 익숙해지는 기분도 들었지만 이미 구해 버리고 영약까지 먹였으니 엎질러진 물이었다.
‘뭐 마교나 혈교 관계자만 아니길 비는 수밖에.’
마교와 혈교가 그렇게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것도 아니니 가능성은 낮았지만.
마교와는 현재 대치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사이도 아니었기에 괜히 관련되어서 좋을 게 없었다. 혈교는……
‘공식적으로는 10년 전쯤 무림맹과 마교의 공동전선으로 혈교는 궤멸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 잔당들이 생존하고 있었지.’
이린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니 약 30년간 숨죽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장원이 불탄 그날 이린의 등에 칼을 꽂은 이들은 태반이 정파 사람들이었다. 회유된 이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비고(秘庫)니 신물(神物)이니 하는 중요한 물건을 찾는 데, 어설프게 회유한 이들을 끌어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린이 기억하는 배신자들은 명백하게 정파의 젊은 제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슬슬 이 시기에 제자로 들어온 이들 중 혈교의 간자가 끼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하네.’
그들의 나이는 대체로 이린보다 조금 많거나 적은 정도.
연가장에 들어온 간자들은 대부분 원래 일하던 이들이 아닌 늦게 들어온 신입인 편이었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건 연가장의 무사들이 몰살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나올까.’
이린은 그들이 정파에 파고드는 것을 어설프게 막을 생각은 없었다.
연가장에 들어오는 이들도.
그들을 막았다가 나중에 들어온 새로운 간자를 알아내는 것보다야 미리 알고 있는 편이 대처하기 편하니까.
이린은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이 아이가 혈교와 관계없는 무고한 자이기를 빌었다. 사실 어린아이들이야 뭘 알고 혈교를 따르는 게 아닐 테니까.
“그러고 보니, 영약을 먹었으니 이 아이도 무공을 익히면 좋겠네.”
“이미 익히고 있는 것 같던데?”
“정말?”
아이에게 내기를 주입하며 운기를 이끌었던 이현은 이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파의 무공을 익히고 있는지 아직 어린아이이지만 정순한 기운을 가지고 있더구나. 나중에 린아와 겨룰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가…….”
아이의 땀을 닦아 주며 이린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고른 숨을 내쉬던 아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이 살짝 떠졌다. 그리고 아이는 이내 안심한 듯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차는 어느새 객잔에 도착해 있었다.
예정대로 무사히 객잔에 도착한 후, 이현은 다인실을 빌려 자신과 이린, 중독된 아이 셋이 한 방에 묵도록 했다. 객잔에는 여동생들이 아프다고 둘러댔다
영약을 먹고 상태가 안정된 것 같아 보이지만 아무래도 독 때문인지, 아니면 많이 놀라서인지 미열이 오르고 있어 혼자 두기는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영약을 먹이고 해독까지 시켜 준 마당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혹시나, 만약에, 저 아이와 이린을 둘만 뒀다가 갑자기 공격해 오기기라도 하면 곤란했고.
어쨌든 걱정이 되어 의원을 불렀지만 큰 문제는 없다고 진찰하고 돌아갔고, 이현이 아이를 돌보고 있는 사이 이린은 가방을 열었다.
“자, 그럼 이제 심판의 시간이 왔다.”
끼이이이-
이린의 손에 잡힌 청아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누가 맘대로 먹어도 된다 그랬어!”
끼이-
“게다가 몰래 상자에 구멍까지 뚫어 놓고!”
끼이-
이린이 잘못을 지적하며 한 소리 할 때마다 청아는 끼이끼이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이린은 청아가 잘못할 때마다 엄하게 혼을 내는 편이었다. 평범한 뱀이라면 그냥 포기했겠지만 청아는 지능이 있는 영물이었다.
‘아니, 애초에 평범한 뱀이면 키울 생각은 못했겠지.’
예전의 인연이 있는 데다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았던 뱀이라 이린은 나름 애착이 있어 아버지가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고집을 부려 청아를 키우기로 했다. 아버지 연적훈도 청아가 보통 뱀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뱀을 꺼려하면서도 이린이 키우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다.
그렇게 키우게 되었으니 잘못을 하면 혼내고, 고치면 칭찬하며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이린의 교육 방침이었다. 그리고 뱀인 데다 영물인 청아는 말을 알아듣는 만큼이나 말을 안 듣는 아이였다.
키이이이이-!!
이린이 봐주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는지 청아가 파닥파닥 도마 위에 오른 생선처럼 몸을 흔들었다.
“잘못한 거 알아, 몰라?”
끼이이-!
몰라! 하는 목소리가 들린 것만 같은 기분에 이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작은 걸 어떻게 때릴 수도 없고. 어지간해서는 타격이 없기 때문에 혼낼 때는 막대기에 청아의 몸을 말아 놓고 그대로 젖은 붕대로 다시 칭칭 감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곤 했다.
뜨거운 물을 워낙 싫어해서 물에 담가 볼까도 생각했었지만 그건 좀 불쌍한 데다 물이 금방 식어 버려서 한도 끝도 없기에 그만뒀다.
“그렇게 먹고 싶었나?”
“예전에는 청아가 못 뚫고 들어갈 만한 데에 놔둬서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동안도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딱히 건드리진 않았는데.”
아이의 열을 재어 보고 아까보다 약간 떨어진 것을 확인한 후 다가온 이현이 끼이끼이 애처로운 소리를 내는 청아를 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한 얼굴을 했다.
청아는 화가 난 이린에게서 자신을 구해 줄 사람은 이현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지 더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뱀의 눈빛에서 그런 걸 느낀다는 게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이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때문에 이현은 슬쩍 다가와 이린을 달랬다.
“저기…… 린아? 린아의 교육 방침은 알겠지만 청아는 아직 어리잖니. 그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오빠! 다른 것도 아니고 영약이라고. 나중에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 목숨도 구할 수 있는 건데! 그리고 앞으로 또 이러면 어떡해? 뱀이 먹어서 좋은 걸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그 산증인이 바로 저기에 누워 있지 않은가. 만약 영약이 없었다면 저 아이는 치료할 방법이 없어 지금쯤 검은 피를 쏟아 내며 죽었을지도 몰랐다.
이현도 그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기에 차마 뭐라고 변명해 주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청아가 사람도 구했잖아. 그때 청아가 아니었으면 토사에 깔려 있던 사람들은 찾기 힘들었을 거야.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게다가 이렇게 혼이 났으니 청아도 다시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진 않을 거야. 그렇지?”
이현의 말에 청아가 그 말이 맞다는 듯 필사적으로 몸을 팔딱였다.
끼이이-
이현의 설득이 효과가 있었는지 화가 난 이린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그 틈을 타 이현은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
“맞다. 그때 린아가 청아를 칭찬하면서 맛있는 거 주겠다고 했었지? 청아는 그 말을 듣고 자기가 영약을 먹어도 된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으음…….”
제법 그럴 듯한 이현의 가설에 이린도 생각에 잠겼다.
‘정말 그때 그 말이 화근인가.’
예전에 청휘의 셋째 형이 죽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으니 청아가 없었을 경우 남궁청운이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을지는 사실 알 수 없었다.
‘우리랑 부딪치며 뭐가 바뀐 건지, 아니면 그때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어도 그냥 무사히 구출될 운명이었던 건지.’
하지만 어쨌든 청아가 사람을 구했고 자신이 상을 주겠다고 말한 것도 맞았다.
끼이이- 끼이이-
이현의 말이 맞다는 듯 어떻게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청아를 보며 이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오빠 말대로 상으로 맛있는 거 준다고 해서 먹은 거야?”
끼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청아의 애처로운 모습에 이린 역시 마음이 약해졌다.
“하지만 그거 막 먹으면 안 되는 거야. 또 상 준다 그러면 마음대로 먹을 거야?”
끼이, 끼이, 끼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이린이 훈육을 계속했다.
“앞으로는 맘대로 먹지 않을 거지?”
키이이-
이린의 목소리가 누그러진 걸 귀신같이 눈치챈 청아가 애처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한 살도 안 된 애를 너무 혼내기도 그렇고.’
이린이 한숨과 함께 풀어 주자 청아가 애교 부리듯 매달려 왔다. 사실 묶어 놔도 조금만 용을 쓰면 혼자 풀고 빠져나올 수 있을 만큼 청아의 몸은 유연했다. 이린은 자신이 화내고 있어 얌전히 묶여 있는 청아에게 더 화를 낼 기분도 들지 않아 청아의 몸을 살살 쓰다듬었다.
“많이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앞으로 그러면 안 된다? 응응.”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청아를 달래는 이린을 본 이현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웃었다.
‘아버지가 하시던 거랑 똑같이 하네.’
이린은 철이 일찍 들어 어릴 적부터 그리 말썽을 피우는 편은 아니었지만 원체 겁이 없어 상상도 못한 무모한 짓을 가끔씩 저지르곤 했다. 연적훈이 이린이 잘못을 할 때마다 반성하라며 손들고 있게 하고 혼낼 때면 이현이 옆에서 동생을 변호해 주곤 했는데.
지금 청아를 혼낼 때 거의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이린을 보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빠는 왜 그렇게 웃어?”
“아니, 귀여워서.”
이젠 이린뿐만 아니라 이린이 키우는 뱀까지 귀여워 보이니 나도 큰일이구나~ 하고 키득키득 웃는 이현을 향해 청아가 꾸벅꾸벅 머리를 숙였다. 덕분에 이현은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다.
“푸훗.”
“아니 오빤 뭐가 그렇게 재밌는, 아, 눈 떴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이 그치질 않는 이현을 흘겨보던 이린은 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아이가 눈을 뜬 것을 발견하고 외쳤다.
이현이 뒤돌아보니 이린의 말대로 의식이 돌아온 아이가 힘겹게 눈을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