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87
87.
“괜찮으세요?”
“……이게 괜찮아 보이나?”
아이들을 향해 화를 쏟아 내려는 순간 갑자기 나타난 면사를 쓴 소녀 때문에 멈추게 된 사내는 불퉁하게 되물었다.
사내에게 겁을 먹고 굳어 있던 아이들은 이린의 등 뒤에서 멍한 얼굴로 숨을 돌렸다.
“옷에 꿀과 과일즙이 묻으신 것 같은데 빨리 씻어 내지 않으면 굳어서 성가셔질 거예요.”
“그,”
“그리고, 너희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너희들 실수로 옷을 더럽혔으니 어서 대인께 사과드리렴.”
사내가 화를 낼 틈을 주지 않고 뒤돌아서 아이들을 훈계한 이린은 아이들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어물거리자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빨리 도망이라도 칠 것이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는 것이 어린애들답기는 했지만 이린은 속이 터졌다. 할 수 없이 이린은 아이들 앞에서 면사를 걷었다.
“어……?”
“어서 사과하지 않으면…… 잡아먹는다?”
그 말과 함께 검은색 면사가 걷어지자 드러난 푸른 빛깔의 눈을 난생 처음 마주한 아이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히익!? 괴, 괴물……?!”
“죄송합니다, 는?”
이린이 파란 눈을 번뜩이자 굳어 있던 아이들은 부들부들 떨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아!!!”
다행스럽게도, 사죄의 말은 남긴 채.
괴물이야, 무서워, 잡아먹힐 거야,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안도한 이린이 몸을 돌렸다. 걱정과는 달리 다행히 사내는 화를 내기보다는 어이없어하며 이린을 보고 있었다.
“……뭘 한 거지?”
“죄송해요. 훈계를 조금했을 뿐인데 아이들이 도망가 버렸네요.”
“허어.”
이린이 저를 등지고 있어 아이들에게 뭘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사내는 어리둥절해했다. 이린은 자신이 괜한 참견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동시에 걱정했던 것보다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연가장 앞마당에서 사고라도 나는 건가 했네.’
이곳 침주는 연가장의 세력권이니 여기서 문제가 생기면 자연히 연가장과 아버지인 연적훈의 명성과도 이어졌다. 그러니 대부분의 무인들은 군자검과 연가장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이곳에서는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라고 하면 상당히 평화로운 해석. 뒤집어 말하면 군자검 연적훈이 무서워서 행패를 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실제 실력과 관계없이 자신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 고수라면 안하무인으로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이린이 보기에 눈앞에 있는 사람은 체면도 신경 안 쓰고 겁도 없어 보였다.
“근처에 제가 아는 다원이 있으니 더운 물을 빌릴 수 있을 듯한데, 안내해 드려도 될까요?”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신세를 지도록 하지.”
묘하게 여유가 넘치는 목소리였다. 평범한 얼굴과는 달리 사람부리는 게 익숙해 보이는.
‘그런데도 얼굴에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안 풍긴단 말이지.’
이린은 사내를 아까 갈까 말까 고민했던 근처의 다원으로 안내했다. 사정을 설명하자 이린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점소이는 순순히 돈 많은 단골손님에게 협조해 주었다. 점소이에게 건넨 은자의 힘일까, 다행히도 사내의 외투에 묻었던 얼룩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서 돌아왔다. 젖어 있긴 했지만.
“다행이네요. 많이 놀라셨죠?”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고맙군.”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에요. 그럼 저는 이만.”
사내가 화를 내는 기색이 없는 것을 확인한 이린은 그대로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니 뜨려 했다.
“도움을 받았는데 이렇게 인사도 없이 보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겠지. 차를 대접해도 되겠소?”
“아니, 괜찮…….”
“거기. 이 다원에서 가장 비싼 차로 두 잔 내와라.”
“네!”
이린의 거절을 거절하듯 사내는 큰 목소리로 차를 주문했다.
‘으음, 꽤 막무가내인 사람이네.’
다른 사람에게 명령하는 것이 몸에 익은 것이 확실히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괜히 엮여서 좋을 게 없을 것 같기도 했지만 이린은 살짝 호기심이 생겼다.
“아버지께서 모르는 사람이 사 주는 건 받지 말라 하셨지만 여기는 제가 안내한 제 단골집이니 사양하지 않고 받기로 하죠.”
“호오. 귀한 집 아가씨 같은데 호방하군.”
“여기 다과도 추가해 주세요.”
“네, 아가씨!”
“…….”
과자까지 주문하는 이린의 뻔뻔한 태도에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던 사내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런 사내를 이린 역시 신기한 듯 관찰했다.
“아가씨는 이 동네 사람이신가?”
“네, 이 지방 사람이에요. 대협께선 이런 곳까지 무슨 일로 오셨나요? 솔직히 제 고향이지만 그리 볼 것도 없는 동네인데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침없이 말하는 이린이 재미있는 듯 사내는 점소이가 내온 차를 들이켰다.
“사람 좀 만나러 왔지. 볼일이 있어서.”
“……안 좋은 일인가요?”
아무래도 강호인이 이런 곳까지 찾아와 만날 만한 사람이 아버지 연적훈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 이린이 조심스레 묻자 사내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안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사람을 찾고 있는데 그 사람의 종적에 대해 알고 있을 만한 자가 그자 외에 달리 없거든.”
“그렇군요.”
사내의 말투에서 적의나 살의보다는 어딘지 난처함이 묻어나는 것을 느낀 이린은 살짝 안도했다.
‘아빠를 만나러 온 거라 해도 싸우진 않을지도?’
하지만 곧 다른 가능성을 떠올린 이린이 물었다.
“그럼 만나서 물어봤는데 그 사람도 모르거나, 알아도 안 알려 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군. 사실 안 알려 줄 가능성이 더 크긴 하지.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의 성격을 생각하면……. 어쩌면 정말 모를 수도 있고.”
뜻밖의 시무룩한 반응에 이린은 저도 모르게 위로를 건네려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렇게 생각하실 정도면 찾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 나도 몇 번 포기하려고는 했는데 뜻대로 되질 않아서.”
“아, 찾는 분이 여자분이신가 봐요. 정인(情人)?”
“뭐? 아니 그건 아니……고, 친, 친우(親友)?”
뭐라는 건지. 그래서 여자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사내가 시선을 돌리고, 이어지는 기나긴 침묵에 이린은 자신이 괜한 소릴 했나 후회했다.
‘괜한 소릴 했나. 하지만 아빠라면 알고 있어도 당사자가 원하지 않으면 안 가르쳐 줄 거 같은데.’
아무래도 본인의 의사로 만나지 않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럴 경우 연적훈은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을 테니 잘못하면 칼부림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연적훈이 눈앞에 사내보다 강할지 약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검을 뽑게 된다면 무사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니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고 조금은 납득시켜 두는 편이 좋겠다 싶었는데.’
사내는 꽤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덕분에 비싼 차와 과자를 즐기며 조용히 시간을 보낸 이린은 쩔쩔매는 게 의외로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과자를 오물거리며 괜한 말을 덧붙였다.
“그럼 그 정, 아니 친우분이 떠나신 거라면 이유가 있을 텐데 짚이는 게 있지 않으세요?”
“모르겠, 아니, 아주 없는 것도 아닌, 아니, 하지만 새삼 그런 이유로 그럴 리가.”
잘은 모르겠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무겁던 분위기의 아저씨가 저러고 있는 걸 보니 반응이 제법 재밌었다.
“제가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떠난 이유로 뭐 걸리는 게 있다면 찾아도 다시 떠날지도 모르잖아요. 지금 만나려는 사람이 찾고 계신 분과 확실하게 연락이 닿는 분이라면 괜히 다그치지 마시고 서신이라든가 적어서 전해 달라고 해 보시는 게 어때요?”
“할 말이 없는데…….”
“그럼 왜 만나시려는 거예요?”
어이없어하는 이린의 반응에 사내는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 듯 어울리지 않게 우물거렸다.
“그……. 만나서 확인할 것도 있고, 공적인 용무도 있다.”
“그럼 그대로 적으시면 되잖아요.”
“그건, 그렇지.”
인정하기 싫은 듯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는 사내를 보며 이린은 내심 혀를 찼다.
‘저러니 여잔지 남잔지 정인인지 친우인지가 도망을 갔겠지.’
그리고 괴로워하던 사내는 고개를 홱 돌려 이린에게 따지듯 말했다.
“지금 날 바보 같다고 비웃고 있지?”
“아닌데요.”
면사도 쓰고 있겠다 당당하고 뻔뻔하게 비웃으며 어느새 마지막 남은 과자를 우물거리던 이린은 보이지 않을 테지만 상대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인간관계는 성실하고 솔직해야 하죠. 혹시 자기감정을 잘 모른다면 다시 한 번 돌이켜 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아가씨 지금 웃고 있는 거 같은데.”
“어머, 그럴 리가요. 진지하게 도움이 됐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너무하시네요.”
이번 생에 남의 연애사(추정)를 듣는 건 처음이라 이린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그리고 그런 이린의 즐거운 기색을 눈치챈 사내는 꺼림칙한 얼굴로 이린을 쏘아보았다.
“면사 때문에 얼굴이 안 보이니 뭐 확인할 수도 없고……. 아직 어린 소녀 같은데 면사는 왜 쓰고 있나?”
“제가 좀 빛나는 미모의 소유자라 가리고 다닙니다.”
제 머리카락이 좀 금빛으로 빛남.
귀찮아진 이린은 자세한 설명을 생략했다.
“호오. 아버님께서 걱정이 태산 같으시겠군.”
“그럼요.”
이린과 반농담조로 주거니 받거니 하던 사내는 신기한 듯 피식 웃으며 식은 차를 단번에 들이켰다.
“생각해 보니 젊은 아가씨와 이런 대화를 해 본 건 처음이군. 충고는 고맙게 듣도록 하지.”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네요.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볼게요. 친우분과 꼭 다시 만나셨으면 좋겠네요. 아, 차랑 과자 고마웠어요.”
어느새 깨끗하게 비워져 있는 찻잔과 접시만 남기고 이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나? 아직 상담값은 치르지 못한 기분인데.”
“걱정 많은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이린은 가볍게 인사하며 사라졌다. 사내도 그런 이린을 붙잡는 대신 점소이를 불러 차를 추가로 주문할 뿐이었다.
‘아직 어린 소녀 같은데 무위가 보통이 아니군. 하지만 차림새에서도 귀티가 나는 저런 어린 소녀가 타 지역에 혼자 돌아다닐 것 같지는 않고…….’
사내는 찻주전자를 들고 다가온 점소이에게 적당히 돈을 쥐여 주며 물었다.
“아까 나와 함께 온 면사 쓴 아가씨가 어느 댁 영양인지 혹시 아나?”
“아이고. 모르셨습니까? 연가장주님의 금지옥엽 아가씨시죠. 어릴 적에는 소장주님과 종종 오셨는데 요새는 혼자 오시더라고요. 상냥하고 좋은 분이세요.”
이 근방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정보라 점소이는 단골의 정보를 가볍게 설명했다. 이 손님도 아가씨의 도움을 받은 모양이니 알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아아. 과연. 알 것 같군.”
그 오지랖은 연씨 집안 내력이었나. 자신이 아이들을 어떻게 하기라도 할까 봐 앞을 막아서던 모습을 떠올린 사내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옷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고 아이들이야 적당히 겁을 먹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연가장의 여식이라니 뜻밖의 대어를 만난 셈이었다.
‘내가 만나 본 연가 녀석들과는 성격이 많이 다른 거 같은데.’
사내는 자신에게 당돌하게 충고를 하던 이린의 발랄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어이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 게 나쁘지 않았다.
‘바보 제자 놈이 저런 아가씨를 며느리로 데려오면 좋을 텐데.’
대충 봐도 자신의 제자에게 지지 않을 성격이었다. 어린 나이에 무공 수준도 높아 보이는 게 과연 연가장의 핏줄다웠다.
그런 부질없는 생각으로 현실도피를 하던 사내는 이린이 내준 뜻밖의 숙제를 떠올리고 한숨과 함께 머리를 쥐어뜯었다.
서신이라니 참 낯부끄러운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