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s First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277
천하제일 시한부 (277)
여화는 죽었다.
그녀를 영일문 뒤뜰, 후원에 묻어 주고 장례까지 치르고 이곳으로 왔다.
그러니까…….
‘가짜.’
난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현경의 경지는 그 어떤 외기의 영향에도 굴하지 않는다.
곧바로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그 찰나에 당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진법이다.’
그렇게 알고 보니, 내게 덤벼드는 저 여화의 모습은 실은 순수한 기운의 덩어리였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간 자체가 왜곡된 것이다.
“이 기운 자체가…… 강시술의 원정이 되는 셈인가?”
여기가 종착지다.
만약 이곳이 혈교가 만들어 내는 강시술의 근원이라면 이곳을 철저하게 부숴야 했다.
하지만 실체가 없는 기운을 벤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화륵―!
그저 기운을 일으킨 채, 휘두른다고 될까?
갖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쉬익―!
동시에, 검에 깃든 기운이 스르륵 빨려 나가는 것이 아닌가.
“……미치겠군.”
갈수록 첩첩산중이다.
진기를 끌어 올리기 무섭게, 마치 누군가 빨아들이듯 그렇게 기운 자체가 소멸됐다.
콰앙―!
더군다나 계속해서 기운의 덩어리들이 내게 이빨을 들이밀며 덤벼 댔다.
터덩―! 쩡―!
난 부딪치는 순간마다, 빠르게 검에 기운을 둘러 달려드는 기운의 덩어리를 쳐 냈고 그때마다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기 바빴다.
‘일월신공.’
차분히 월식호흡의 첫 번째 구결인 월하무를 상기하며 기운을 전신으로 퍼트렸다.
‘하나, 둘…… 셋.’
정확히 삼 초.
삼 초가 지나면 언제 기운을 주천시켰냐는 듯, 기운 자체가 증발한다.
그리고 정확히 그 삼 초 사이에 저 기운의 덩어리는 날 향해 달려들고.
그때였다.
뭔가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가장 순수한 마음가짐, 가장 순수한 살의, 가장 순수한…… 본능. 살고자 발버둥 칠 때 비로소 꽃 피울 봉오리는…… 결국 마지막 형상을 품고 있을 것이다.”
지배의 정수를 취할 때, 보였던 환상.
그 환상 속에서 아버지가 내게 정확히 일러 줬던 말씀의 일부분이다.
‘형상.’
어렴풋이 내게 내민 그 첫 손을 잡았을 때, 나는 과연 무엇을 보았던가?
‘살의의 형상.’
그저 마음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스스―!
난 이내 전신의 기운을 모두 가라앉혔다.
내공을 무한정 뽑아낼 수 있는, 공령의 경지를 깨우치지 않는 이상 내 내공에도 한계점이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니까 이런 무의미한 짓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내 기운을 빨아들인 만큼 강해진다.’
즉, 검기나 검강으로는 저 기운을 절대 벨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난 한 번도 내가 의도해서 검은 꽃을 불러 본 경험이 없었다.
당연했다.
내 무공에 자신이 있었고, 삼재검과 후반부 초식인 천마검은 천하에 대적할 다른 무공 자체가 없는 천하제일의 검술임에는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난 초대 천마만큼의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다.
마선의 경지에 올라, 등선했다는 초대 천마는 같은 반열에 오른 달마와 장삼봉을 견제하기 위해 천마삼검이란 걸출한 검법을 만들어 냈다.
난 아직 천마사조가 남긴 심득을 백분지 일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 정도인데도 이만한 위력이면 엄청난 검술임에는 분명한데…….’
이곳은 그런 검술조차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은 일정한 방향대로 자연지기가 흐르는 곳이 아니라, 어찌 보면 역천의 순리대로 기운이 뒤틀려 있는 진법 속이었으니까.
‘형이 없다.’
형상이 없기에 벨 수 없다?
아니다.
‘남궁세가.’
난 남궁진에게 넘겨주었던 제왕검형의 비급을 떠올렸다.
제왕검형이 무엇이던가?
일정한 형(形)이 없는 검술이다.
극의에 이른 자만이 볼 수 있는 제왕의 형상은 사실 세인들의 입에서 전해진 말이었고 제왕검형은 순수한 깨달음을 기조로 한다.
그렇다면 그 깨달음에도 밑바탕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말도 된다.
그냥 백지상태에서 대체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창궁무애검법.”
남궁세가의 무사라면 누구나 익힐 수 있는 검법이다.
무림 전체로 치자면 매우 뛰어난 절세의 검술 중 하나였지만, 남궁세가의 직계들은 이 검술을 다섯 살 때부터 익혀 온다.
이 창궁무애검법이 바로 제왕검형을 깨우칠 수 있는 바탕이다.
‘그렇다면 나는?’
삼재검법.
태산압정, 횡소천군…… 그리고 팔방풍우.
거기에 더해, 천마삼검이란 후반부 세 개의 초식도 존재한다.
바로 이것이 ‘형상’을 일깨우는 밑바탕이 되어 줄 수 있다면?
난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삼 초가 지나고, 기운의 덩어리는 다시금 나를 덮쳐 왔다.
십 성 내력으로도 한번 부딪치는 순간, 쭉쭉 밀려 나갈 정도의 위력을 가진 기운의 덩어리.
난 저것을 반드시…… 베어 낸다!
화륵―!
첫 초식은 태산압정이었다.
기운을 배제한 채, 오로지 순수한 근력으로 휘두르는 검격.
기운의 보조를 받지 않아, 검의 자세가 매우 불규칙적이다.
내가 베고자 하는 궤적을 제대로 맞추기도 힘들었다.
당연했다.
가장 평범하고 누구나 익힐 수 있는 초식인 태산압정은 초식명만 웅장할 뿐, 실은 그냥 내려치기였으니까.
무림에 널리고 널린 무공들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순한 베기에도 수많은 심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텅―!
검은 그대로 허공을 휘저었고, 기운의 덩어리는 검을 피해 그대로 내 어깨를 후려갈겼다.
절로 일어난 내공 덕에 부상은 입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통마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엄청난 무게감과 함께, 가격당한 어깨가 뻐근했다.
난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태산압정에 이은, 횡소천군.
사실상 그냥 가로 베기다.
이번에도 당연히 내 검은 허공을 스치고 지나갔다.
쩌적―!
기운은 다시금 내 반대쪽 어깨를 후려갈겼고, 난 그대로 반쯤 무릎을 굽혀 간신히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동시에 뻗은 검.
기운이 내 몸에 닿은 그 순간, 난 삼재검법의 마지막 초식 팔방풍우를 펼쳐 냈다.
얼핏 보기에는 무작위로 휘두르는 것처럼 볼품없는 것이 사실이다.
기운의 보조마저 받지 않으니, 모양새는 영 아니올시다였다.
뭐라도 맞겠지 하는 심정으로 던졌는데, 역시나 기운은 요리조리 방향을 틀어 가며 기어코 내 하복부를 가격하고야 말았다.
“크윽.”
식은땀이 절로 배어 나왔다.
엄청난 고통에, 절로 이를 악물고 그 사이로 핏물까지 새어 나왔다.
역시나 기운의 근처조차 다가갈 수 없었다.
은근 부아가 치밀었다.
저딴 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고생하나 싶다.
‘가장 순수한 마음가짐, 가장 순수한 살의, 가장 순수한…… 본능.’
환상 속에서 마주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 다시금 가슴을 울렸다.
‘나는 지금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서 있는가.’
내가 내게 던지는 물음이었다.
긴장을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난 매일같이 최선을 다했는가?’
그래, 이건 나도 할 말이 많다.
난 살기 위해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은?’
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순간, 여화의 식어 버린 몸의 온도가 느껴졌다.
정천맹에 있을 적, 항시 묵묵히 내 곁을 지켜주던 여화, 종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은?’
서희 그리고 형.
형수님과 아직 어린 조카들.
‘큰 조카.’
처음 고향에 돌아왔을 때, 목도했던 큰 조카의 처참했던 모습이 생각났다.
형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지금을 살아가는가?
화륵―!
투명한 무언가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마.’
천마검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검명이 시작된 것이다.
우직―!
근육이 팽배하게 부풀었다.
순수한 근력이 힘을 최고조로 끌어 올렸다.
“조금 더…… 절실하게.”
죽인다, 죽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바로 인간의 원초적인 일곱 가지 본능 중, 하나.
‘분노.’
눈이 닿는 곳, 내 손이 닿지 않는 곳.
하지만, 난 벨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전신을 채우기 시작했다.
미약하게 일렁이기 시작한 불꽃은 점점 덩치를 키워 가기 시작했다.
불꽃 자체는 작아도, 타오른다.
타오르기 시작하면, 그것이 덩치를 키우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순수한 분노는…….’
어떤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말과도 같다.
누구는 복수를 하기 위해, 누구는 경쟁에서 밀려서.
누구는 너무도 억울해서, 누구는 또 너무도 수치스러워서…….
인간이 가진 가장 순수한 감정이었기에, 가장 빠르게 타오를 수 있고 그 무엇보다 강력한 기폭제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거다.
“천마삼검.”
난 이내 감은 눈을 떴다.
기운의 덩어리가 점차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저도 본능이 있다는 듯 움찔거린 것이다.
내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인지했던가?
“웃기는구나.”
한낱 인간이 만들어 낸 진법 주제에.
난 너무도 어리석었다.
천마삼검, 천마사조가 남긴 그 지대한 심득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저 검결만, 검식만 보고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저! 내공만 많다고 무한정 기운만 뽑아내고 있었으니까!
쩌적―!
난 가볍게 발을 틀었다.
순수한 근력의 파동이, 작게 파문을 일으켰다.
검을 틀어쥔 손아귀를 부드럽게 풀었다.
그렇게 달려드는 기운의 덩어리를 바라보며 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번에는…… 반드시 벨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천마삼검, 제일장.’
천마가 세상에 도래한다.
천마현신.
터덩―!
찰나, 아주 잠깐의 그 찰나.
기운의 덩어리가 내 검에 닿는다.
그리고 곧장 방향을 틀기 위해, 움찔거린다.
분명한 것은 어쨌든 내 검에 닿았다는 거다.
화륵―!
그 미세한 찰나를 느낄 수 없다면 난 평생 이곳에 갇혀 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느꼈다.
“천마앙소.”
천마신교, 마교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렸던 마교는 결국 하나다.
또한 그곳을 지배하던 천마도 결국은 단 한 명이다.
그런 천마신교를 창시했던, 천마사조가 남긴 심득.
‘이해하지 못했다. 오로지 마와 패로 세상을 꿇리기 위해서만 움직였다고 이해했으니까.’
천마사조는 달마삼검과, 태극혜검을 보고 장난스럽게 이 검법을 창시했다 전해졌다.
무의 극의에 다다른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불도.”
불도의 묘리도, 도교의 묘리도.
그 모두가 섞인 검술.
그렇기에, 이 검은 베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쩌정―!
“살리기 위한 검.”
기운의 덩어리가 튕겨 나갔다.
동시에, 내 전신에 내포된 내력이 역주천을 행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마도인으로서의 계승.
역천공의 발현은 곧, 또 하나의 껍질을 깨부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일월신공.”
난 가볍게 검을 틀었다.
튕겨 나간 기운의 덩어리가 잠시 쩔쩔매는 듯하더니 다시금 내게로 쇄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방법을 알아 버렸다.
씨익.
절로 웃음이 나왔다.
“건곤……대나이.”
일월신교, 최강의 무공.
천마삼검이 마침내 껍질을 부수고,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