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s First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52
천하제일 시한부 (52)
가만히 턱을 괴고 누워 있는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방금 저 여인은 내 기운을 흡수하듯이 빨아들였다.
“흠.”
하지만 지금은 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치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뭔가 있긴 한 것 같은데.”
호기심이 샘솟았다.
그녀의 품 한쪽에 볼록하니 뭔가가 올라와 있다.
분명 저것이 내 기운을 흡수한 원흉일 텐데.
“보고 싶긴 한데…….”
남의 물건이다.
더군다나 분명 여인은 깨어나기 무섭게 품에 지닌 저것이 있나 없나부터 살폈다.
아마도 꽤 중요한 물건이리라.
결국 난 호기심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뭐 도둑놈도 아니고.”
어쩌면 자유자재로 사용하지 못하는 전하결을…… 풀어 줄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좋아.”
난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일어나면 물어보지, 뭐.”
혼잣말과 함께, 문을 열었다.
밖에 나가 바람이라도 쐴 참이었다.
“어?”
그때였다.
하필이면 지금 저 멀리서 서희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오라비?”
서희와 눈이 마주쳤다.
서희는 순식간에 이쪽으로 달려왔다.
“볼일 있다면서, 여기 있었어?”
서희의 말에 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뭣 좀 찾을 게 있어서.”
대충 둘러댔다.
“음, 귀면 아저씨는?”
“걔는 왜?”
서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아침에 식사를 따로 하겠다고 하셔 놓고는 그릇이랑 식기를 안 가져오셔서.”
“아, 그거 찾으러 온 거야?”
“응.”
서희가 말과 함께, 별채의 문을 잡았다.
난 얼른 서희의 손목을 잡아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져다줄게.”
“아냐, 찾을 것도 있고.”
“어? 뭘 찾게? 지금은 안 되는데.”
순간 당황했다.
“왜 그래?”
서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올려다보았다.
평소랑 다른 반응에 그녀 또한 뭔가 싸한 기운을 느낀 것이다.
“왜 안 되는데?”
“아니, 그냥…… 잠깐, 음.”
갑자기 변명을 생각하려니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하하, 잠깐 걸을까?”
“…….”
서희가 눈을 째리며, 그대로 문을 열었다.
힘으로 막으려면 막을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 서희에게만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엇.”
별채에 들어서기 무섭게 서희가 딱딱하게 굳었다.
한구석에 누워 있는 여인을 발견한 것이다.
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서희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어젯밤인가 들어왔더라고. 깨어나면 내보내려고.”
“내보낸다구?”
서희가 조심스레 쓰러진 여인을 향해 다가갔다.
“피가…… 많이 다쳤나 본데.”
아닌 게 아니라, 이제 쓰러진 여인의 입에서는 쌕쌕거리는 숨소리마저 들려왔다.
‘이거 꼭 내가 그런 것 같잖아?’
그녀를 너무 거칠게 던졌나 싶었다.
서희는 다급하게 그녀를 똑바로 눕혔다.
“의원한테 데려가야 하는 거 아냐?”
“그건 안 돼.”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척 보기에도 저 여인은 쫓기는 자다.
여인을 쫓는 추격자들이 의방을 뒤지고 있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럼 약이라도 가져다줘. 초영 언니한테 물어보면 알 거야.”
“흠.”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희의 표정이 너무도 완고했기 때문이었다.
난 곧장 초영에게 약을 타왔다.
간단한 지혈제와 요상단 정도였지만, 이 정도라도 안 하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
서희는 능숙하게 약을 물에 타서 먹였다.
“생각보다 잘하네?”
조금 놀랐다.
마치 오랫동안 병간호를 해 본 것처럼 아주 뚝딱이다.
“아버지가 말년에 좀 편찮으셨거든.”
“아아…….”
난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서희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이내 약을 다 먹인 서희가 날 끌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대번 눈을 째린다.
“저런 사람을 내보낸다구?”
“응?”
“아까 그랬잖아. 정신 차리면 내보낼 거라고.”
“아 그거야, 귀찮잖아. 보기에도 쫓기고 있는 것 같은데. 쟤 쫓아오는 놈들이 여기까지 오면 어떡하려고?”
“그래도 너무 매몰차. 최소한 지금은 아무런 일도 없으니까 치료라도 해 주고 보내면 안 될까?”
아니, 이미 다 해 놓고 뭘 물어봐.
“이 정도만 해 줘도 된 거야. 아니 오히려 이건 위험한 짓에 가까워.”
난 서희에게 짐짓 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무림에서는 매사 행동을 조심해야 돼. 작은 호의가 언제 비수가 되어 돌아올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귀찮은 상황에 쉽게 얽히기도 하거든.”
어우, 말을 해 주는데 왜 이리 등골이 오싹하지.
“맨날 무림, 무림.”
서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은 뭐, 사람 사는 곳이 아니야? 다 같은 사람인데.”
“…….”
그렇지 그것도 맞는 말이지.
“그렇게 재고 따지고…… 뭐, 손해 좀 볼 수도 있는 거고 뒤통수도 맞을 수도 있는 거고. 나도 객잔 일하면서 그런 거 많이 겪었거든.”
“뭐? 누가 뒤통수 때렸어?”
내가 발끈하자, 서희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많이 봤다구. 아무튼 난 도와주고 싶어.”
“저 여인이 진짜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려고?”
“헤에.”
서희가 슬쩍 내 옆으로 붙어 서며 씩 웃었다.
왠지 더 불길해졌다.
“천하제일검이 옆에 있는데 뭐가 두려워서?”
허허허, 큰일 났다.
괜히 말해 줬나 싶다.
“아무리 그래도…….”
“오라비가 지켜 줄 거잖아. 아니야?”
서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지켜 주지.”
당연하다.
내 동생 내가 지키지 누가 지켜 주나.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해 줄 거다.’
저 여인을 돕는 것이 네 뜻이라면.
난 기꺼이.
이내 서희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마워, 오라비.”
“어? 어.”
괜히 머리가 간지러 벅벅 긁었다.
서희는 말과 함께, 손을 흔들며 안채 쪽으로 달려갔다.
“또 올게, 나 잠깐 하던 게 있어서!”
서희의 말에 난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에휴.”
어쩌다 짐 하나가 더 늘어난 듯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서희가 저리 웃으니 기분은 좋았다.
* * *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그녀가 깨어났다.
난 그때까지 여인을 감시할 겸, 또한 수련도 할 겸 계속해서 내부를 관조하고 있었다.
전처럼 운기를 하진 않고 그냥 내부를 다듬는 식이었다.
“일어났냐?”
시큰둥한 말에 여인이 다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자신의 몸 상태를 보고는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이게 뭐냐는 듯한 눈치였다.
“가끔 구해 줘도 지랄하는 족속들이 있거든? 그게 네가 아니길 간절히 빌어 본다.”
난 주먹을 말아 쥐고는 씩 웃어 주었다.
“고, 고맙습니다.”
여인이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래, 이름이 설이라고 했지?”
내 말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인상을 쓰는 걸로 봐선 몸이 계속 불편한 듯했다.
“편하게 누워 있어도 돼.”
“…….”
여인은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한참 뒤, 조금 진정했는지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절 치료해 주신 건가요?”
“음, 어.”
물론 내가 아니지만, 대답해 주기 귀찮아서 대충 답했다.
“고맙습니다. 대협.”
“…….”
요즘따라 대협이란 소리를 참 많이 듣는 것 같다.
뭐 기분은 그닥 나쁘지 않았다.
“저…… 이곳은 어딜까요?”
그녀가 재차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난 어이가 없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제가 도망친 곳도 모른다고?
“여기 악안인데? 악안 서현리.”
“악안…… 악안이면…….”
여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청해성이랑은 먼가요?”
“청해?”
익숙한 지명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청해를 가고 있는 중이었나?”
내 역질문에 여인이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청해성이랑은 완전 반대인데? 청해성은 이곳에서 엄청 멀거든.”
“음.”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그녀가 자신의 짐을 챙겼다.
“가려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환영이다.
하지만.
“안 돼.”
서희가 싫어할 것이 뻔했다.
또 내쫓았다고 오해해서 날 몰아 부칠 것이 아닌가?
쓱.
여인은 긴장한 채, 허리춤 뒤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녀의 허리춤 뒤쪽에는 작은 소검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몸이나 치료하고 가라고. 별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고.”
“…….”
내 말에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호의적이죠?”
×발.
그냥 고맙다고 인사하고 염치없이 처 앉을 것이지.
호의를 베푼 것에 대한 이유를 묻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하…… 그럼 그 몸으로 나가서 뒈지고 싶냐?”
“…….”
여인이 망설였다.
제 몸이니까 제가 더 잘 알 것이다.
“내상도 최소 며칠은 요양해야 할 것 같고…… 몸의 상처도 제대로 아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거 같은데, 아닌가?”
내 말에 여인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 의심하지 마. 널 죽이고자 했으면 넌 이미 여기 없어.”
내 말에 여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거듭 고맙습니다. 대협.”
“어우, 내가 대협이란 소리만 들으면 이게 소름이 돋는 병이 있어. 그만하고 앉아 봐. 얘기나 좀 하게.”
난 그녀를 맞은편에 앉혔다.
여인이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음.”
난 말을 빙 돌려 할 줄 모른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부터 꺼냈다.
“네 품에 있는 거. 그거, 뭐야?”
“…….”
여인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와, 무슨 표정이 저렇게 시시각각 다양하게 변할 수 있지.
신기한 광경이다.
“보셨나요?”
여인이 차갑게 물었다.
난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기운을 빨아먹더라고. 그래서 묻는 거야. 별다른 뜻은 없어.”
“…….”
여인이 자신의 품을 쓱 만져 보았다.
그 물건이 그대로 있음을 확인한 여인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건 말씀드릴 수가 없…….”
이내 여인이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뭐지? 미친년인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뭐야? 무섭게 왜 혼자 지랄이야?”
“아니…… 분명 기운을 빨아들였다고…….”
“아아, 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분명 저 품 안에 있는 뭔가가 내 기운을 쪽 빨아들였다.
“반응을 했다고……?”
여인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가죽 주머니였는데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재질로 만들어진 티가 팍팍 풍겼다.
우웅!
가죽 주머니가 연신 진동했다.
아주 미약했지만 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저것이.
‘날…… 찾는다.’
분명했다.
내가 자연스레 풍기는 기운 자체가 저 가죽 주머니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분명 아까는 멀쩡했는데.’
한 번 내 내력을 뽑아 먹고, 한동안 잠잠했다.
하지만 그녀가 깨어 있는 지금, 또다시 내 기운을 원하듯 저 가죽 주머니가 요동쳤다.
스릉!
이내 여인이 소검을 뽑아 들었다.
“이 보물은 마공에만 반응한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속성의 제한이 없는 탈시의 경지에 오른 자들만이 가능한 일.”
여인이 기세를 끌어 올렸다.
그녀의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무리해서 기운을 끌어 올리느라, 실핏줄이 터져나간 모양이다.
“나이도 내 또래 같고, 그렇다면 탈시의 경지에 이르렀을 리는 없을 테니…….”
여인이 이내 자세를 낮췄다.
전형적인 발검세.
더군다나 즉각 출수 있게 무릎을 긴장시킨 모습이다.
난 그런 여인을 보며 씩 웃었다.
저 여인의 말투에서 그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냈으니까.
‘탈시의 경지.’
이런 말을 쓰는 곳은 딱 한 곳이다.
“너…….”
말을 꺼냄과 동시에, 거리를 좁혔다.
이내 여인의 검을 뺏어 들고, 그녀의 허리를 잡아 가볍게 눕혔다.
물론 내부에 무리가 생기지 않는 선에서.
이내 경직된 그녀가 내 동공에 가득 맺혔다.
난 그런 그녀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북해인이구나?”
탈시의 경지.
북해에서도…… 딱 한 곳.
빙궁의 인물들만이 사용하는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