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s First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53
천하제일 시한부 (53)
“북해에서 왔나?”
내 물음에 여인이 화들짝 뒤로 물러섰다.
난 순순히 그녀를 놓아 주었다.
실내에 적막이 맴돌았다.
“탈시했다, 탈시의 경지에 도달했다, 탈시를 이루었다…….”
내가 씩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런 식의 경지 표현법은 북해…… 그중에서도 빙궁이 유일한데, 맞나?”
“…….”
여인의 눈빛에 경계심이 더욱 짙게 서렸다.
“대답해라. 널 살려 준 대가라 생각하고.”
“…….”
내 말에 여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분명 방금 나눈 손 속에서 느꼈을 것이다.
내가 마음먹고자 했으면, 진즉에 어떤 식으로든 제압당했을 거라는 걸.
“맞습니다.”
결국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눈빛에 서린 경계의 빛은 채 지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그 먼 곳에서 왜 여기까지 도망쳐 온 거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한차례 고개를 숙였다.
“아시겠지만, 제가 지금 쫓기는 신세예요. 너무 급한 나머지 눈에 보이는 대로 들어왔을 뿐, 다른 저의는 없습니다.”
“그건 알 것 같고.”
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에서 왔던 남만에서 왔던 사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이제는.
“청해로 간다 했던가?”
“네.”
여인이 짧게 답했다.
“청해는 왜?”
북해에서 청해.
도망치느라 길을 잘못 든 것이 분명했다.
“청해성에 가야 해요. 그곳에서 만날 사람이 있어요.”
여인은 뭔가 결심했는지, 굳은 표정으로 날 불렀다.
왠지 불길했다.
“이왕 도와주신 김에, 하나만 더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사례는 톡톡히 하겠습니다.”
“…….”
오호, 사례라.
절대 개입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조금 흔들렸다.
“사례 좋지. 근데 어떻게?”
문제는 저 여인의 정체를 모른다는 거다.
북해에서 왔고, 도망쳤다는 것은 북해에서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건데.
“네가 누군지 알고?”
“…….”
여인은 고민했다.
난 가만히 그녀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북해, 그것도 빙궁에서 도망쳐 온 여인.
빙궁은 돈이 많기로 유명하다.
“청해에 데려다주시기만…….”
“그건 싫어.”
난 단호하게 거절했다.
청해성이 여기서 얼마나 먼데, 지금…….
“거기까지 가면서 뭔 귀찮은 일이 생길 줄 알고? 더군다나 멀어.”
“아…… 그렇죠.”
여인이 낙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례를 주겠다는 말에는 혹했지만, 혹시라도 모를 귀찮은 일에 엮이는 것은 정말 싫다.
“근데 청해성에는 왜?”
문득 궁금했다.
아닌 게 아니라, 청해성은 내 인생 거의 전부를 갈아 넣은 곳이라 해도 무방했기에.
“만날 사람이…….”
“그니까 청해성 어디? 내가 청해성에서 살다 왔거든. 혹시 모르냐? 도와줄 수 있을지.”
내 말에 여인이 반색했다.
“아, 그럼 혹시 정천맹을 아시는지요?”
“정천맹?”
너무 잘 안다.
“정천맹은 왜?”
“사실 제가 만나려는 분이 정천맹에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목적지가 정천맹이다?”
내 말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금 의아한 것도 사실이었다.
‘분명 말투는 빙궁 특유의 어조인데…… 다른 북해인인가?’
북해 역시 여러 세력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북해는 빙궁을 구심점으로 단단히 응집되어 있다.
‘빙궁은 정천맹이랑 사이가 좋지 않지.’
그럴 수밖에 없다.
빙궁, 특히 빙궁주는 과거 중원을 향해 발호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빙궁주를 무릎 꿇려 돌려세운 건 바로 나고.
그러니까 정천맹의 신기검단주인 내가 그들을 강제로 막아 세웠으니, 그들이 날 찾아올 리도 없다는 것.
“정천맹에 개인적으로 연락을 보내 줄 수는 있다.”
“저? 정말요?”
“내가 정천맹에서 일 좀 했었거든. 따로 인편이나 전서구 정도는 날려줄 수 있지.”
인편이라면 광흑을 조금 부려 먹으면 되고, 아니면 전서구 날리는 거야 진랑에게 직속으로 보내 버릴 수도 있었다.
여인은 반색하며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가려고?”
“네. 더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일단 이것을 좀 같이 보내 주세요.”
여인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둘둘 말린 한 장의 서찰이었다.
서찰을 봉인한 봉인지는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문장이었다.
‘빙궁, 그것도 궁주의 인장.’
생각보다 여인이 대단한 위치에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북궁환의 심복?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젊…… 잠깐.’
아차 싶은 생각과 함께, 여인을 돌아보았다.
‘닮았구나.’
어째선지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낯설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북궁환의 핏줄이다.’
“……?”
내가 빤히 바라보자 여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천맹 누구에게 전해 주면 되나?”
미소와 함께 물었다.
“신기검단으로 보내 주시면 됩니다.”
“신기검단?”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북궁환의 여식이 대체 왜 신기검단을 찾는단 말인가.
북궁환의 세력을 괴멸시킨 장본인이 바로 신기검단, 아니 바로 나인데.
“안 될까요?”
여인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 표정이 또 처음 볼 때와 달리 강아지처럼 퍽 귀엽게 느껴졌다.
“좋아. 보내 주지.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이쯤 되니 궁금증이 더욱 강해졌다.
빙궁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니다.
하지만.
빙궁주의 여식이 왜 원수 같은 신기검단을 찾아가려 하는지.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몸부터 치료하고 가라고. 괜히 널 보냈다가…….”
서희의 눈총을 받는 건 사양이니까.
* * *
“아 글쎄,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씨세가의 정문.
그곳에서 소란이 일었다.
정문을 막고 있던 봉칠이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앞을 막은 사내들의 가슴을 거칠게 밀어냈다.
“잠깐만 협조해 주시면 되오. 저희가 쫓던 흉악범이 이 근방에서 사라졌기에…….”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뒤에서 들려오는 한 여인의 목소리에 봉칠이가 경직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이내, 봉칠과 대치하던 사내들이 입을 떡 벌렸다.
“저희 집에서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냐고 물었는데요?”
그녀는 서희였다.
일순 주변이 환해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서희의 미모는 아찔함 그 자체였다.
이제 제법 살도 붙고, 피부에 윤이 흐르기 시작한 서희는 예전의 그 서희가 절대 아니었다.
“크흠, 큼. 이 댁의 주인 되십니까?”
“네. 무슨 일이신가요?”
사내들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차렷 자세로 입을 열었다.
“저희는 흉악범의 뒤를 쫓고 있습니다. 무고한 사람 넷을 살해하고 도주했으며 품에는 위험한 물건도 지니고 있지요. 그 흔적이 이곳에서 끊겼기에 근처 집들을 모조리 수색 중에 있습니다.”
“아아. 집에 든 사람은 없는데…….”
말을 이으려던 서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어제 우연히 별채를 갔다가 봤던 피투성이의 여인이 떠올랐다.
‘아니야.’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오라비, 서진이 있다.
만약 뭔가 문제가 있다 해도 서진이 든든하게 지켜 주고 있다.
“수색은 안 됩니다.”
서희가 거절했다.
“헌데 어디서 오신 분들이신지요?”
서희의 물음에 사내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섬서성의 무양문이라고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소. 우리는 거기서부터 이 흉악범의 뒤를 쫓아왔소이다.”
사내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며 소리쳤다.
그때였다.
“아가씨…… 어? 누구?”
초영이었다.
초영과 광흑이 뒤따라 나왔다.
초영을 본 사내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이, 이런 미인들이…… 여긴 대체……?’
능히 천하제일미라 칭해도 부족할 만큼 아리따운 여인들이 즐비하다.
이 얼마나 행복한 상황인가.
“눈 깔아.”
그 순간, 또 다른 사내 하나가 살기를 내뿜으며 다가왔다.
찔끔한 사내가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덩치에 맞지 않게 그는 겁이 상당히 많은 자였다.
살기를 내뿜으며 사내의 눈을 내리깔게 만든 이는 바로 아지였다.
귀면탈혼에게 구를 대로 구른 아지는 예전의 아지가 아니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숨 막힐 듯한 독기가 새어 나왔다.
그런 아지가 작정하고 살기를 내뿜으니, 주변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흉악범이 이 근방에서 사라져서, 수색차 오셨답니다. 섬서 무양문의 무사분이시라고…….”
서희의 말에 초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양문이라면 섬서에서도 알아주는 명문입니다. 헌데, 꽤 멀리서 오셨군요.”
“문주님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소. 하지만 이렇게 귀한 인연들을…….”
“아가씨께서 싫다잖아? 꺼지라고.”
아지가 무양문 무사의 말을 끊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사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 강하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정문을 지키던 봉칠에게서도 무언가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무양문의 무사는 짐짓 굳은 얼굴로 으름장을 놓았다.
“현재 악안에서 수색을 못 한 곳은 이곳뿐이오. 협조해 주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말을 잇던 사내는 경직된 자세 그대로 움찔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않는다면 어쩔 건데?”
귀면탈혼.
그가 무양문 무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언제…….’
“협조해 주지 않으면 어쩔 거냐고.”
귀면탈혼의 이어진 물음에 무양문의 무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슬쩍 뒤로 발을 뺐다.
“의심을 살 수밖에 없소. 지금은 협조겠지만, 다음번은 강제로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 새끼가…….”
아지가 눈을 부라리며 앞으로 나섰다.
“저기요.”
그때 서희가 나섰다.
서희가 나서기 무섭게 귀면탈혼이 발끈한 아지를 제지 시켰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다짜고짜 찾아와 집을 수색하겠다는데 허락할 사람이 어딨나요?”
“여태껏 다 그렇게 해 왔…….”
“여태껏 그래 왔어도 저는 승낙치 못하겠네요. 이만 가 주세요.”
“…….”
무양문의 무사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이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또 뵙겠소.”
짧은 말을 남긴, 그는 자신의 일행들과 함께 빠르게 장원을 벗어났다.
“괜찮겠어?”
귀면탈혼이 서희에게 물었다.
서희를 구해 준 시점부터 둘은 부쩍 친해진 상태였다.
“괜찮아요. 그것보다 아저씨는 알고 계셨죠?”
“…….”
서희의 의미심장한 물음에 귀면탈혼이 슬쩍 눈을 피했다.
“오라비께는 제가 물어볼게요. 아저씨께서는 장원을 좀 지켜 주세요.”
“그거야 내가 원래 하던 일이니. 당연하지.”
귀면탈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서희가 별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뭐?”
갑작스레 찾아온 서희.
서희에게서 방금 전 일어났던 상황을 듣게 된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서희를 안심시키고 돌려보냈다.
서희가 여인에 대해 물었지만, 아직 확실히 답해 줄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뒤에서 모든 걸 듣고 있던 여인이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했다.
“저들은 끈질겨요. 중원에 들어섰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쫓아왔으니까요.”
“어차피 벌어진 일이야. 널 받았을 때부터 대충 예상했던 상황이기도 하고.”
난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 어차피 내가 널 해하지 않을 거란 건 이제 알았잖아?”
“…….”
“그래야 내가 널 도울 수 있다. 정천맹에 연락은 보냈지만, 그들이 널 뭘 믿고 돕겠냐?”
맞다.
신기검단에 따로 연통을 보내 본들, 그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을 것이다.
빙궁주의 직인이 찍힌 연통을 보내 본들, 그걸 결정할 최종 결정권자가 없으니까.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신기검단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정천맹에서 일하셨다 하셨죠?”
결국 생각을 마친 여인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북궁설. 북해 북궁가의 마지막 후예이자…… 빙궁주가 바로 제 아버지 되십니다.”
결국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그리고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빙궁은 돈이 많은 곳이니까.
‘가볍게 도와주고 생색은 낼 만큼 내야지.’
도와준 만큼 확실한 보답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은 내 가벼운 생각을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변황삼변, 그들을 이끄는 삼패주들이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 중원을 노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중원인이라면…… 또한 정천맹의 무사셨다면 이 사안이 얼마나 중대한지 잘 알고 계시겠지요.”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