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124
124
바로 다음 순간, 눈앞의 정경이 변했다.
놈들은 나를 강제로 다른 장소로 이동시킨 것이다.
메시지는 제안이 아닌 통보였던 셈이다.
낡은 종이 냄새로 가득한 서재.
그곳에 검은 안대로 눈을 가린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지옥 경매 관리팀에서 협상을 맡고 있는 현경이라 합니다.”
“…당신은 진짜 악마인가?”
내 질문에, 고운 입술이 싱긋 웃는다.
“인간으로 지낸 세월보다 악마로 지낸 세월이 더 깁니다. 처음부터 악마였던 것이 ‘진짜 악마’라면, 위대한 오만께서도 가짜 악마가 되시겠지요.”
위대한 오만이라……. 그게 누구를 말하는지 눈치챈 나는 그녀가 하려는 말을 이해했다.
“그래… 당신이 뭔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겠군.”
중요한 건 내가 가져온 것들이, 내 생각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가진 것 같다는 것이지.
“저희에게도 나름의 규칙이 있습니다. 원래라면 이어질 수 없는 지옥과 현세 사이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건, 그만큼 많은 존재들의 암묵적인 동의가 필요하고, 그건 곧 그만큼 많은 규칙들이 저희를 옭아매고 있다는 것을 뜻하죠.”
“그 규칙이란 게 뭐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협상 테이블에 올라온 상품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이 있지요.”
그렇게 말한 현경은 곤란한 표정과 함께 다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힘듭니다. 당신을 옭아매고 있는 규칙과 저의 규칙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
아마도 내가 특채자여서, 내게 정보가 될 것들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
“특채자와 용사가 연관이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그건 아닙니다. 이 경우는 특채자와는 상관없이 운명과 관련된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것도 오직 당신에게만 해당되는……. 안타깝게도, 여기까지가 당신이 지금 들을 수 있는 한계선입니다.”
특채자와 관련 없이 나에 관련된 정보라니.
내가 가진 정보와 지식으로는 눈앞의 이 여자 내뱉는 말들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맞추지 못할 퍼즐 조각을 줍는 것 같은 기분.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현경이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협상을 해야 하는 제 입장에서도, 제가 쥔 카드를 못 쓰는 이 상황이 달갑지 않습니다. 다만 그만큼 더 매력적인 제안을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을 겁니다. 드리지 못하는 것이 있는 만큼, 드릴 수 있는 것에서 더 많은 것을 양보하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이긴 한데… ‘진짜 악마’가 하는 말이라 믿기가 힘들군.”
“협상을 하면서 서로를 믿는 협상가는 없지 않습니까. 결과가 만족스러운 이후에야 믿을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말하는 현경을 보며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고, 여유를 되찾았다.
적어도 이 거래에서 내가 을은 아닌 것 같았기에.
“그냥 지옥 측에서 경매에서 낙찰받는 방법도 있을 텐데… 이렇게 번거롭게 일을 진행한다는 건 당신들에게도 제약이 있다는 것이군.”
“맞습니다.”
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
물론 지금 여기서 나눈 대화가 모두 나를 속이기 위한 기만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거래 자체를 거부하면 그만인 일이다.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겠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쪽에서 내가 가져온 것을 원한다는 것뿐.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얼마나 절박한지, 내가 뭘 해 줘야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보상을 해 줄 것인지도 모르니까.”
“그냥 저희에게 넘기셔도 경매에서 낙찰되는 것보다 후한 보상을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그녀의 꼬임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말로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거래가 아니라면 나는 그냥 정상적으로 경매를 마치고 돌아갈 거야. 내 마음을 돌릴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기껏 낙찰될 예상 포인트보다 조금 더 받고 물러날 거면 그냥 아무한테나 팔아넘기고 만다.
이렇게 드러눕는 협상은 결국 저놈들 발목을 잡고 있는 규칙이란 것의 강제성이 어디까지인가에 달렸다.
그래도 뭐, 거래가 무산된다 해도 상관없다.
다른 세계에서 온 놈들 반응을 봐서는 정상적으로 팔아 치워도 꽤 두둑할 것 같으니.
“우선… 거래 방법부터 밝히겠습니다. 당신이 출품한 경매 물품에 대한 판매를 포기해 주세요. 위약금으로 1억 포인트가 들어가겠지만, 그 부분은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그런 후에 저희들에게 물건을 양도해 주시면 됩니다.”
“…….”
위약금을 물어 가면서까지 경매 출품을 번복해라?
그렇다는 건…….
“지옥 경매에서 한 번 낙찰된 물건은 지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건가?”
현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냥 달갑지는 않은 태도.
아마도 규칙을 어기지 않는 한 숨기고 싶었을 테지만, 거래 방법을 밝혀야 하는 이상 숨기기 어려운 약점이었다.
아니면 이것마저 규칙 때문에 어쩔 수 없었거나.
그렇게 생각한 나는 갑자기 웃음이 나와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자 현경이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상하군요. 제가 비웃음을 살 만한 이야기를 한 것 같진 않은데.”
“아니, 비웃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악마들이 인간들보다 더 규칙에 얽매여 사는 것 같아서 말이야.”
“…맞는 이야기군요. 저도 인간일 때가 훨씬 자유롭고 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동조하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웃음을 몰아냈다.
“방법은 알겠고……. 그래, 그렇게까지 해서 얻고 싶은 용사의 가격은 얼마나 쳐 줄 생각이지?”
“3억 네거티브 포인트입니다. 지금 경매장에 있는 가장 많은 포인트를 가진 분이 보유한 것보다 훨씬 많은 금액입니다.”
“부족해.”
내 단호한 대답에도 현경은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유지했다.
아직 내줄 것이 넉넉하단 뜻이겠지.
“경매를 그대로 진행해도, 이 절반조차 건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어. 단순히 포인트만 벌자고 들면 그 정도는 한 달이면 벌 수 있을 테니까.”
“반대로 생각하면 한 달이라는 시간을 버는 것이 됩니다. 경쟁자가 있는 입장에서 괜히 배짱을 부리실 필요가 있으실까요?”
경쟁자가 있으니까 배짱을 부려야지.
모처럼 내 포인트를 어떻게 긁어 갈까만 생각하는 놈들을 벗겨 먹을 기회인데.
이런 상황에서 적당히 만족하고 물러날 정도면, 다른 놈들한테 잡아먹히기밖에 더하겠는가.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 주시죠.”
“내게 가장 쓸모 있는 건 정보다. 그런데 그건 얻을 수 없다고 시작부터 못을 박혔지. 단순히 포인트만 늘려서 협상을 할 생각이면 여기서 나는 돌아가겠다. 적당히 다른 세계로 용사를 팔아넘기고, 내 세계로 돌아가서 인간들을 쥐어짜면 얼마든지 더 벌 수 있어.”
내 말에 현경이 작은 한숨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떠오르는 화면 하나.
거기에는 수많은 장비와 아이템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앞으로 진행될 경매에 나올 물건들입니다. 용사를 판매한다 해도 정산은 경매가 모두 끝난 뒤에 진행됩니다. 그러면… 지금 갖고 있는 포인트로는 이것 중 하나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말이 되죠.”
“그렇게 되겠지.”
“원하는 물건을 하나 고르십시오. 대금은 저희가 치르겠습니다.”
“정말 갖고 싶은가 보군.”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저희가 아닌 다른 자들에게는 그만한 값어치가 없을 겁니다. 하물며 필멸자들에겐 말이에요.”
“많이 망가뜨렸는데도 그만한 가치가 남아 있나?”
“어떤 것은 망가지면서 새로운 가치를 찾기도 하지요.”
순순히 대답을 해 주는 것 같지만, 정보로써 사용되기에는 실속 없는 선문답 같은 대화.
정보를 제한하는 필터링조차 발동하지 않는 것을 보니, 앞으로 대화를 이어 나간다 한들 얻을 것은 적어 보였다.
필터링이 발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민감한 것에는 아직 닿지도 못했다는 뜻일 테니.
그래서 관심을 돌린 곳은 앞으로 경매에 등장할 물건들.
“확실히… 탐나는 것들이 많이 있군.”
온갖 세계에서 모인 물건 중에는, 확실히 탐나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3개. 그리고 3억이 아니라 5억. 거기에 더해서 내 요구 하나를 더 들어주는 조건으로, 당신들에게 협조하도록 하지.”
안대 너머로 그녀의 눈썹이 꿈틀, 하고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요구하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포인트 부분은 걸고넘어지지도 않는 건가.
“내 고객 등급의 상향 조정.”
나는 VIP 등급인 내 고객 등급을 VVIP로 승급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것은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그럼 그 권한을 가진 자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물어는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자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
아마도 권한이 있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었다.
겉으로 드러나려는 긴장을 숨기느라 고생하기를 5분가량.
“알고 계십니까? 당신께선 고객 등급이 올라가도 그 혜택의 대부분을 누릴 수 없는 상태입니다.”
나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의 내가 얻을 수 없었을, 특채자들에게 걸려 있는 제약에 대한 정보.
전부 레비아탄의 비대한 정신세계에서 주워 온 것들이었다.
“어차피 이제 곧 도달하셨을 곳이니, 이번에는 양보해도 된다는 허가가 내려왔습니다. 정말 고생했다는 것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에게 과도한 보상이 가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말이죠.”
뭐… 충분히 그렇겠지.
전에 쟝이랑 접촉했을 때도 항의하는 놈들이 있었다고 했으니.
아마 이들도 웬만하면 나랑 엮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당신 악마 아닌가? 내가 건네는 걸 가져가서 그만큼 뽑아먹을 자신이 있으니까 이러고 있는 거잖아.”
“…부정하기 힘들군요.”
“나한테 휘둘리는 것처럼 보여도, 제값을 주는 것도 아닐 테고. 제값을 주는 거면 이렇게 순순히 다 들어주진 않겠지. 아무리 거래를 빨리 마무리하고 싶고 급하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저희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으셔도 좋을 텐데요.”
예쁜 미소와 함께하는 말이지만, 정이 안 간다.
악질 모바일 게임 운영자가 올린 공지사항을 보는 느낌이랄까.
0.000001% 확률을 자랑하는 랜덤 상자를 줄기차게 팔아 놓은 놈들이 ‘사랑하는 고객님~’이라면서 말을 걸면 주둥이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어지는 게 고객의 마음.
하지만 나도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제값을 받겠다고 드러눕기엔 내가 모르는 곳에서 리스크가 생길지도 모르니.
어차피 용사와 그 소꿉친구가 아무리 잠재적 가치가 높아도, 내가 쥐고 있을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망가뜨릴 수는 있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기도 했고, 타락시킬 수도, 몬스터로 바꿀 수도 없다.
언젠가는 그런 능력이나 아이템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를 미래를 바라보며 폭탄을 들고 있을 생각은 없다.
저 정도 망가졌다 어떤 계기로라도 살아나는 순간 그야말로 괴물이 되어 있을 테니까.
“말씨름도 지치는군. 어차피 거래 내용은 다 나왔으니, 이쯤에서 끝내지?”
“그럼 용사와 그 동료에 대한 경매 출품을 철회하시겠습니까?”
반가움이 묻은 목소리에는 반가움 말고도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이건 단순히 확인을 위한 질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쪽에서 위약금을 대신 지불한다는 조건으로. 나에게 제시한 조건들을 이행한다는 것도 물론 포함해서.”
이쪽도 계약 내용을 한 번 더 언급할 수밖에.
“물론입니다.”
싱긋.
처음 마주쳤을 때 봤던 은은한 미소가 눈에 밟힌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어느새 경매장에 앉아 있었다.
주변은 토끼를 범하거나 조각내며 분풀이를 하는 놈들로 가득했다.
“경매 진행이 늦어진 점,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저희 측의 실수로 판매되지 않는 것이 잘못 올라온 것 또한 사죄드립니다.”
다시 나타난 올빼미, 데모라의 사과에도 고객들은 화를 풀지 않았다.
오히려 수작 부리지 말라며 난동이라도 부릴 것 같은 기세.
그러나 정식으로 내가 출품을 포기한 물건인 이상, 지옥 상점 측을 옭아매는 규칙은 더 이상 작용하지 않을 터.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분명 소중한 고객님이시지만, 이 이상 경매에 방해되는 행위가 이어질 시 그에 합당한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데모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우주 공간 저편에서 거대한 존재가 우리를 오시하는 듯한 느낌.
그걸 느낀 모두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지옥 상점과 거래하는 자들은 갑의 위치에 서는 경우가 거의 없는 법.
이어진 경매는 얼음처럼 차가운 분위기와 침묵 속에 진행됐다.
그럼에도 갖고 싶은 것을 3개나 고를 수 있게 된 나의 마음은 따뜻했다.
찬찬히 물건을 살피던 나는, 갖고 싶은 것이 나오자마자 가격을 불렀다.
“10억.”
* * *
“젠장, 이번에도 저놈이군요.”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것처럼 퀭한 몰골을 한 남자가 머리를 벅벅 긁어 대며 한탄했다.
그런 그가 보고 있는 화면에는, 위대한 오만이 고른 지옥 특채자, 루크 에슬란테가 있었다.
“지옥 경매야 예외적인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저런 식으로 따로 접촉하는 건 또 왜 했답니까?”
남자의 하소연을 듣고 있는 그의 상사도 골치가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후우, 어쩌겠냐. 가져온 게 용사라는데.”
“아니, 애초에 어떻게 다 자라지도 않은 용사를 잡아 온 거죠? 용사란 놈들은 다 클 때까지는 운명이니, 세계의 의지니, 하는 것들이 무조건 지켜 주는 것 아닙니까?”
이어지는 부하의 짜증에 상사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다.
“난들 알아! 징징거릴 시간 있으면 수습할 궁리나 해! 지옥 경매 관리팀에 항의도 좀 넣고!”
“…알겠습니다.”
상사는 부하가 한 것처럼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규정을 위반하지는 않았다는 것과 한 세계의 운명을 뒤틀어 놓을 수도 있는 ‘타락한 용사’를 만들 재료를 구했다는 것이 심기가 상하셨을 분들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키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