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80
제180화. 절제
사할리스에 나타난 마족을 용사의 후손 차시연이 물리쳤다.
왕실에서 직접 공표한 이 사실은 왕국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거리, 술집, 길드 등 장소를 불문하고 차시연에 대한 얘기가 사람들 사이에 오갔다.
“용사의 후손이 마족을 물리쳤다고? 설마 그 죄인의 핏줄을 말하는 거야?”
“레이든 왕자님과 근위 기사단도 쩔쩔매던 마족을 그 차시연이란 여자는 대등하게 맞섰다는데?”
“아니, 잠깐만! 물리친 건 고사하고, 지금 마족이 레지에타에 다시 나타났다는 거잖아? 이거 엄청 심각한 일 아니야!”
화제는 차시연에 대한 의문을 지나, 마족의 재출현에 대한 우려로 넘어갔다.
“그래도 100년 전과는 다르겠지. 과거와 다르게 우리 인간이 얼마나 강해졌는데?”
“근데 그건 마족도 마찬가지 아니야?”
“자네 레지에타 성교회의 힘을 무시하는 거야? 심판관들이 마음만 먹으면 마계로 쳐들어가서 새로운 마왕의 목을 따는 것도 가능할 거라고! 거기다, 그 차시연이란 용사 후손도 아직 건재하다잖아!”
“근데 사할리스는 그렇다고 쳐도, 그 죄인의 후손이 다시 한번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서줄까?”
“당연히 나서줘야지! 지 선조가 지은 죄를 후손이 대신 씻어줘야 하지 않겠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한다고!”
대체로 용사에 이어 그 후손도 인간을 위해 싸워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이 분위기에서 밥을 먹긴 힘들 것 같다.
숟가락 한 번 안 댄 음식 접시를 놔둔 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얘들아.”
메이와 수호는 나를 뒤따라 식당에서 나왔다.
생물이 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갖춰야 할 능력은 적응력이라고 했거늘,
어째 이 레지에타에 역한 공기는 이주나 지났음에도 좀처럼 적응되지 않았다.
이주, 그래 벌써 이주나 됐다. 내가 인계에 온 지.
당초 목적은 점차 내 몸을 잠식할 투기를 억제할 존재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찾긴 찾았지.
용사 차시혁의 후손 차시연.
직전까진 긴가민가했지만, 사할리스에서 그 아이의 진심이 담긴 검을 맞댄 후엔 완벽한 확신이 들었다.
이 아이야말로, 마계의 투기를 억제해줄 유일한 존재라고.
사할리스에 있을 때와 다르게, 쓸데없는 싸움을 피하고 싶은 지금의 내 몸 상태가 그 증거다.
자 그럼 난 이제 어떡해야 할까?
그 아이가 유일한 해결책이란 걸 알았으니, 마계로 돌아가 투기를 전부 흡수한 뒤, 다시 인계로 와서 그녀와 싸워야 할까?
이래서야 그 미친 전대 마왕 놈이랑 다를 게 없다.
그럼 모든 사실을 그 아이에게 털어놓고, 함께 마계로 가자 할까?
가능성 제로에 가까운 일이다.
안 된다는 건 그렇다 쳐도, 그 아이에게 혼란만 더 가중시키겠지.
그걸 원하진 않는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 채 메이와 수호 둘에게 물었다.
“지금 우리가 마계로 돌아가면, 인계엔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메이와 수호는 잠깐의 고민 끝에 동시에 답했다.
“한 달 정도 걸릴 듯해요.”
[30일 정도 걸릴 겁니다.]생각보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이쯤에서 마계로 돌아가, 한숨 고르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마족들을 안심시켜주는 것도 중요하니까.
하지만,
“아직 냄새 맡고 있지 수호야?”
[점점 멀어지고 있긴 하지만, 정확히 맡고 있습니다.]아직 이 인계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거리의 끝에서 수호와 메이, 그리고 북적북적 오가는 사람들을 돌아봤다.
“이노투스와 코흐…. 그 반인반마 형제는 여기서 처리하고 갈 거야. 절대로 마계에 보낼 생각 하지 마.”
메이와 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불어,
“벨져 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내 곁을 은밀하게 뒤따르던 아이리네와 흑마교회의 단원들도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부르크 왕국 서남부. 국경 인근.
성교회의 옷을 입은 단원들이 이끄는 세 대의 마차가 으슥한 산골을 지나고 있다.
그들의 앞에 십여 명의 도적들이 가로막았다.
“만나서 반갑습네다~ 성교회 나으리들~!”
도적단의 수당 그렉이 단검을 훙훙 돌리며 앞으로 나섰다.
마차를 몰던 성교회원들은 발만 멈춰 설 뿐, 놀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우린 이 인근에 사는 주민들인데, 요즘 생계가 영 어려워서 통행세를 좀 받고 있수다! 성교회 나리들께서 은총만 좀 베풀어주신다면, 우린 기쁜 마음으로 길을 열어드리지~!”
호위병은커녕 짐마차를 모는 성교회원들은 무장조차 안 된 상태.
성교회원들은 각자의 짐을 내려놓은 채, 마차에서 얌전히 물러났다.
자신들의 요구를 따라 주리라 판단한 그렉은 박수를 쳤다.
“역시 똑똑하신 분들이라 그런지 상황 파악이 빠르시구먼. 자! 다들 뒤져!”
그렉의 명에 도적들이 짐마차로 붙었다.
신이 난 얼굴로 이리저리 짐마차를 뒤지던 도적들의 얼굴에 이내 실망이 감돌았다.
“두목! 이분들 빈털터리인데요?”
값진 물건은 고사하고, 하다못해 밀이나 향신료 같은 식품이라도 있길 기대했건만,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
있는 거라곤, 왜 있는지 모를 빈 상자들 뿐.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그렉은 분을 내며 짐마차를 발로 후렸다.
“어이 성교회 나리들! 이럴 거면 마차를 뭐 하러 몰아? 빈 상자들 갖고 장사할 일 있어?”
한 성교회 단원이 대답했다.
“빈 상자가 아닙니다. 전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가르침이 담겨있습니다.”
“기도를 너무 많이 하다가 정신이 탈출하기라고 했나? 대가리에 신앙심만 차 있으면 뭐 해? 그걸 어디 다가 써먹는다고!”
그렉은 단원들 앞에 침을 탁 뱉었다.
이대로 물러나기엔 아쉽다는 생각이 들던 차, 그렉의 눈에 뭔가가 담겼다.
일자로 줄지어오던 세 번째 마차의 끝, 두 개의 바퀴가 달린 반 평 남짓의 작은 수레.
사람 하나가 설 정도의 높이에 천막으로 가려진 게, 마치 이동식 화장실처럼 보였다.
그렉은 아직 내부를 보지 않았지만, 뭔가 대단한 게 숨겨져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재밌어 보이는 게 하나 있었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네!”
그렉은 다시 싱글벙글해진 얼굴로 천막을 걷었다.
-후욱!
내부를 본 그렉은 5초 정도 행동이 정지되었다.
이상함을 느낀 부하들이 따라와서 물었다.
“왜 그래요 두…!”
뒤따라 내부를 본 도적들의 반응도 마찬가지.
도적들은 마치 귀신에 홀린 듯 천막 내부를 하염없이 보았으며, 멍때림 끝에 그렉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 뭐 하는 곳이야 여긴?”
분명 반 평 남짓의 협소한 공간이었다.
허나 그 내부엔 상하좌우로 끝도 없이 펼쳐진 넓은 광장이 그렉과 도적단 앞에 펼쳐져 있었다.
양옆에는 차마 눈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금화들이 쌓여 있었고, 중간중간 높게 세워진 기둥엔 보석으로 깎은 듯한 칠색 빛의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앞으론 잡티 한 점 없는 새하얀 피부의 금발 미녀들이 줄지어 서 있으니,
도적들로선 여기야말로 천국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 욕망에 굶주린 어린 양들이 찾아왔구먼.”
그때 광장에 메아리치듯 들려온 목소리.
휙휙 목을 돌리던 도적들의 시선은 곧 들어온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언제부터 있었을지 모를, 한 노인이 천막 입구 앞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생계가 곤란해서 통행세를 걷는 중이었다고? 딱하기도 하지. 내 가여운 자네들을 위해 은총 정도야 기꺼이 베풀어줄 수 있지.”
노인은 양쪽에 쌓인 금화 더미를 가리켰다.
“한 사람당 각자 열 개씩 가져가게. 그거면 당분간은 자네들과 가족들이 배 굶주릴 일 없을 거야.”
“저, 정말입니까?”
“이 사람들 속고만 살았나? 진심이니 어려워 말고 가져가게!”
도적들은 신나라 하며 금화들을 주머니에 넣어댔다.
오늘이야말로 인생에 다시 없을 운수 좋은 날.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아무 징조 없이 찾아온 행운은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한 번 행운에 맛을 들이면, 그 이후엔 그 행운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한 욕심을 내게 되는 법이니.
“그 은총. 조금만 더 베풀어줘도 되지 않아?”
돌아선 노인의 목으로 칼이 얹어졌다.
“금화가 셀 수도 없을 만큼 사방에 깔려있는데, 고작 열 개만 가져가라고? 좀 더 줘도 되잖아? 100개. 아니 두당 500개씩 줘도 상관없지 않아? 보아하니 살날 얼마 안 남은 갑부 노인 같으신데, 이왕 아량을 베푸실 거 더 크게 해도 좋잖아? 안 그래?”
노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또 이왕 주는 김에 저기 있는 아가씨들이랑도 좀 놀게 해줘 봐! 솔직히 그거 쓸 힘은 있긴 해?”
“우리 기깔 나게 놀 자신 있어! 혹시 모르잖아? 우리 덕분에 불끈불끈해질지!”
다른 도적들도 좋다고 휘파람을 불며, 노인에게 더한 것을 요구했다.
도적들의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이내 쯧쯧 하는 혀 차는 소리가 광장에 울렸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절제하면 얼마나 좋은가? 내 자네들 같은 부류 때문에 도무지 이 지겨운 땅을 떠날 수가 없어.”
따악하고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장내에 울리고,
“자네들은 내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네.”
황금빛이 가득했던 광장이 순식간에 어둠으로 물들여졌다.
넘쳐났던 금은보화와 조각상, 미색의 여인들도 한 줌의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위기를 느낀 도적들은 공간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추, 출구가 없어!”
이미 그들이 들어온 천막 문까지 없어지고 난 뒤였다.
공간에 남은 건, 오직 노인과 겁에 질린 도적들뿐이었다.
“자격도 없을뿐더러, 이 세상에 살 가치도 없지. 그냥 이 땅의 양분이나 되어주게.”
노인이 다시 한번 손을 튕기자, 도적들의 전신에 알 수 없는 금가루가 퍼져나갔다.
금가루에 휩싸인 도적들은 처절한 비명을 짓다가도,
-바스스
이내 똑같은 가루로 변해 금가루와 섞어지면서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 * *
도적들이 소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곧 밖에서 대기 중이던 성교회 단원들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공간의 주인이자 절제의 현자인 모데스를 향해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었다.
모데스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요즘 들어 저런 약탈 무리가 많아진 것 같구나.”
“최근 사할리스에 활동하는 도적단 무리의 영향 때문인 듯합니다.”
“쯧쯧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군. 남이 만들어낸 영향력을 이용해,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 하니 말이야.”
혀를 차며 돌아서던 모데스는 돌연 천막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산테의 감이 맞았군. 이 기운을 내가 이 땅에 있으면서 다시 느끼게 될 줄이야.”
모데스는 혼잣말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천막 밖은 어느새 석양이 서쪽 하늘로 저물고 있었다.
지는 해를 보던 모데스는 그림자가 지는 등 뒤로 지그시 눈을 돌렸다.
“타지의 낯선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또 그렇지 않군. 자네들은 정체가 뭐지?”
“……마족입니다.”
모데스의 그림자 뒤로, 코흐와 이노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족인 걸 내가 몰라서 물었겠는가? 순수 마족의 기운도 그리 불결하진 않아. 아, 혹시 자네들 혹시 그쪽인가? 양쪽의 피가 섞인 반쪽이들?”
“바로 보셨습니다. 절제의 현자이시여…….”
“흠. 그 이름으로 날 부를 자들이 여기에도 몇 없는데 말이지?”
“사실 저희도 아는 건 많이 없습니다. 그저 인계의 질서를 관리하고, 그 옛날 용사에게 힘을 하사한 분이란 것 정도…. 일까요?”
모데스는 허허 웃으며 답을 이었다.
“그거면 얼추 다 아는 것 같은데? 자네들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덴 성공했군. 어떤가? 안에서 차라도 한 잔 들겠는가?”
“사양하죠. 그런 한가로운 목적으로 여길 온 게 아니라.”
코흐는 안경을 고쳐 올리며 노을이 지는 서쪽 하늘을 보았다.
“사실, 저희가 지금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어서 말입니다.”
“쫓긴다?”
“예. 기억하시죠? 100년 전, 인계를 침공한 마족의 수장, 마왕 벨시페르를…….”
“그 못 말리는 친구를 어찌 잊겠는가? 우리도 당시 고생 좀 했지.”
“그 후손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 좋게 웃던 모데스의 얼굴에 냉기가 감돌았다.
“누가 와 있다고?”
“마왕 벨시페르의 후손 벨져……. 현재 마계에서 가장 마왕의 권좌에 유력한 마족이 이곳 레지에타에 와 있습니다.”
인계를 파멸로 몰고 갔던 마계 절대자의 후손이 인계에 와 있다.
이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모데스에겐 그저 웃자고 넘길 일이 아니었다.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하기를 약 1분 정도.
불현듯 뭔가를 깨달은 모데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근데 자네들. 지금 쫓기고 있다 하지 않았나? 그럼 그 마왕의 후손이란 마족이 이 근처에 있을 수도 있단 뜻 아닌가?”
“역시 관록이 있으신 분이라 그런지, 눈치가 빠르시군요.”
“허허.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왔는진 모르겠지만, 자네들 살겠답시고, 날 이용하려는 일에, 내가 어울려줄 것 같은가?”
“은총을 베푼다고 생각해주시죠.”
“난 마족에겐 은총을 베풀지 않아서 말이야.”
“반은 마족이지만, 반은 인간이니, 그 은총의 반이라도 베풀어주시죠.”
이어지는 말장난에 모데스는 심기가 확 불편해졌다.
“나도 성격이 많이 죽었군. 일단 자초지종부터 천천히 들어볼 필요가 있겠어. 자 지금부터 자네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겠네.”
모데스는 손가락에 다시 한번 금빛을 발현했다.
하지만 빛은 얼마 못 가 꺼졌고, 주름으로 덮여있던 눈이 확 떠진 모데스는 급히 해가 지는 방향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모데스가 본 것은 어둠 속, 저가는 태양보다 더 붉게 타오르고 있는, 정체 모를 누군가의 눈동자였다.
“벌써 왔군.”
조롱인지, 긴장인 모를 떨림이 담긴 이노투스의 목소리가 아련히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