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17)
116영웅의 격동
퍼버벙!
이건…!!
에반 경이 쏘아 낸 다섯 자루의 단검을 나는 검을 휘둘러 모조리 막아 냈다.
하지만 단검이 내 검에 튕겨 나간 순간, 그 안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온 검은 연기에 나는 급히 호흡을 틀어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나의 몸은 이미 뻣뻣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과거 ‘커스 블러드’가 만들어 낸 최고의 마비독, ‘밤의 숨결’이?”
나는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부들거리는 팔과 다리,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침묵하시는 황제 폐하.
특히 한쪽 어깨를 다쳐서 선 채로 뻣뻣하게 굳어 있는 아리스의 모습이 이것이 얼마나 지독한 독인지 알려 주고 있었다.
독에 대한 내성을 가지고 있는 나조차,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 마비시킬 수 있는 독이라니…!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단지 그 독의 지독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에반 경, 그 비검술은 설마…?”
“예. 이것이야말로 저의 진정한 비기, 야검자의 ‘배반의 칼날’입니다.”
“…그런 비열한 검술을 왜, 대체 어째서 익힌 겁니까?”
나는 이런 상황에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상 가장 비열한 검자였기에, 양지에서는 일개 도적으로만 불리었지만, 음지에서는 ‘도적의 왕’으로 군림한 야검자의 검술, ‘배반의 칼날’.
독마저 거침없이 사용하는 그 비검술은 당대의 무수한 기사를 쓰러뜨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도적의 검, 결코 성검자의 후예가 익힐 검이 아니었다.
“세레나 양. 당신이라면 아실 겁니다. 영웅의 후계자로 불리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
에반 경의 나지막한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영웅의 후계자라고 할지라도, 모두가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영웅의 후손에게조차 선조 이상의 영웅이기를 바란다는 것을 일검자의 후예인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는 조부님께 검술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성검자의 혈육이 다른 검가를 돌아다니며 검을 배우면서 겪어야 했던 수난을, 수치를 말입니다!”
그렇다.
원래부터 검가가 아니었던 트레이브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는 검술 같은 것은 없었다. 더구나 절정의 검술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직 무위지경만의 영역이기에 무아지경으로 검자가 되신 헤일 가주님은 무엇 하나 가르쳐 주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노력하여 왕실기사단장의 직위까지 올라왔지만, 저는 항상 조부님을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검술 하나조차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항상 저를 보고 조부님을 언급하고, 조부님의 휘광으로 이 직위를 얻었다고 말했지요.”
“그런 이유로… 이런 일을 벌였던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잘못이라고요? 아니오! 이것은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를 비웃는 이들에게 저의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서, 항상 저를 본 척도 하지 않으시는 조부님을 넘어서기 위해서!”
내 말에 처음으로 언성을 높인 에반 경은 이내 깊고도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보며, 조용히 말을 끝맺었다.
“그리고 그대의 옆에 당당히 설 수 있기 위해서 말입니다.”
“…….”
에반 경의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검사가 아닌 여인으로서의 직감이 알려 준다. 그 말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이 가련하고도 어리석은 기사가 나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을 벌였다는 사실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는 나를 마찬가지로 묵묵히 바라보던 끝에 에반 경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저는 세레나 양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드러난 이상 저는 결코 그대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을 테지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이 일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마음은 이미 10년 전, 그날부터 그분에게 바쳤으니까.
“그러니 저는 힘으로라도 그대를 얻겠습니다. 설령 평생토록 저를 위해 노래 부르지 않는다 해도, 그대를 저의 새장에 가두고 오직 저를 바라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집착이며, 애욕이며, 죄악. 오직 철저한 이기로만 가득한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뜻밖에도 분노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동정심마저 느꼈다.
빠져나오지 못할 자신의 마음에 휩싸여 십수 년에 달하는 시간을 헤매는 고통을. 끝내는 스스로 그릇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어리석음을 나 또한 알고 있었으니까.
하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폐하와 아리스를,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나는 독의 기운으로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천천히 검을 치켜들었다.
“잠시만 잠들어 계십시오. 그사이 모든 일이 끝날 겁니다.”
그 한마디 말과 함께 미끄러지듯 다가오기 시작한 에반 경을 향해, 나는 전력을 실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휘두르는 것만도 못한 일 검이기에, 에반 경은 간단히 맞받아쳐 왔다.
채앵―!!
가벼운 금속음이 울리며, 하나의 검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그 검을 튕겨 낸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에반 경이 휘두른 일검이었다.
하지만 에반 경이 튕겨 낸 것은, 내 손에 들려 있던 검이 아니었다.
저벅. 저벅.
“아…!”
검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복도에서 서서히 걸어 나온 그분을 보고 나는 무심코 탄성을 내질렀다.
그분의 모습은 온갖 상처와 먼지로 얼룩져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검과 방패로 무장하신 그 모습은, 어째서인지 너무나 든든하게 보여 이런 상황임에도, 내게 더없이 깊은 기쁨과 안도를 느끼게 했다.
“…당신이었습니까?”
처음부터 그분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에반 경은 무서운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았다.
증오, 분노, 질투, 경멸, 그 온갖 것들이 뒤섞여 가라앉은 그 시선은,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벌써 수십 수백 번도 넘게 그분을 천참만륙 내 버렸을 듯만 싶었다.
하지만 살기로 넘쳐나는 에반 경의 시선에도, 그분은 흔들리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눈을 똑바로 마주 보셨을 뿐.
“새를 새장에 집어넣는다 하여 너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에반 E. 트레이브.”
“상관없습니다. 설사 저의 것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새는 저를 바라볼 테니까요.”
“새장 안의 새가 바라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새장 밖일 뿐이다.”
“아니오.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소녀를 죽이고, 당신의 심장을 뜯어낸다면 새는 틀림없이 저를 바라볼 겁니다.”
나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다. 만약 이곳에서 홀로 살아남게 된다면, 나는 평생 에반 경을 증오하고 저주할 것이다.
설령 어떤 굴욕을 받더라도, 복수할 기회를 얻기 위해 인내할 것이고, 검이 없다면 한 마리의 미친 늑대가 되어서라도 이빨로 그 목덜미를 물어뜯으리라.
그것이, 에반 경이 원한 일임을 알면서도.
“그러고도 영웅이 되고자 했던가.”
“그렇기에 영웅이 되고자 했던 겁니다. 새장 따윈 없더라도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날개를 얻기 위해서.”
“날개가 있다고 하여 박쥐가 새와 함께할 수 있을 듯싶던가?”
으득.
으스러지도록 이를 깨문 에반 경. 그는 찢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이번 계획만 성공했다면, 그렇다면 나는 영웅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증오가 아닌 사랑을 받을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단 말입니다!”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해도 너는 결코 영웅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에반 경의 사나운 고함에 비하면, 그분의 목소리는 너무나 나지막해 단지 귓가에 스쳐 가는 듯만 싶었다.
그런데도 그 단호한 음성은, 단숨에 에반 경의 고함을 잘라 내며, 선명하게 귀를 파고들어 왔다.
“날개가 없다면 날개를 만드는 대신 스스로의 발로 일어나 걷을 수 있나? 얻을 수 없다면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나? 그런데도 다만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나?”
“…….”
날개를 얻고자 했고, 모든 걸 얻고자 했고, 무엇 하나 버리지 않고자 했던 타락한 기사는, 그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만 묵묵히 자신을 노려보는 에반 경을 향해 그분은 그렇게 선언하듯 말을 끝맺었다.
“스스로 영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나?”
“…닥치십시오.”
“배반의 칼날처럼 쓰레기 같은 검술로 적을 쓰러트리고, 이러한 모략 따위로 공을 세운다고 해서, 진정으로 영웅이 될 거라고 생각했나? 에반 E. 트레이브?”
“닥치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너는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입 닥쳐!!!”
그 순간 에반 경의 손이 번뜩이며, 수많은 섬광이 그분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에반 경은 불꽃과 같은 잔영을 일으키며, 단검을 피해, 한 자루 검을 뽑아 든 채, 미끄러지듯 그분을 향해 달려들었다.
“당신이, 당신 따위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뭘 안다고 그렇게 떠들어 대느냔 말입니다!”
저 검식은…!
에반 경은 그림자처럼 미끄러지며, 그림자조차 베어 버릴 쾌검을 휘둘렀다.
설마 에반 경이 ‘배반의 칼날’만이 아니라 ‘그림자 베기’까지 익히고 있을 줄이야.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달려드는 에반 경을 보면서도, 그분은 동요하지 않고 검을 들어 올렸다.
“너에 대해 알고 싶은 생각 같은 것은 없다.”
카앙!
그림자와 같던 참격이 불꽃과 같은 반격에 헛되이 튕겨 나온다. 에반 경의 검술은 ‘데스 쉐도우’ 최고의 검사였던 1교관과 비견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림자 베기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그 천적과도 같은 전장의 불꽃을 습득한 그분에게 통용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네게 전해 줄 말은 있지.”
무뚝뚝한 음성과 함께, 그분은 에반 경에게 방패를 밀어붙였다.
검이 튕겨 나간 틈을 노렸기에 피하지 못할, 그러나 돌격 거리나 가속도가 붙지 않은, 단순한 견제 이상의 효과는 없어 보이는 방패 치기. 하지만 그것으로 나타난 결과는 내 예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콰앙!
“커억!”
무슨…?
방패에 가슴을 부딪친 순간.
종잇장처럼 뒤로 날려 간 에반 경의 모습에 나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이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도 근력이나 체격은 에반 경이 우위에 있었다. 하물며 갑옷으로 완전무장 한 에반 경을 저토록 간단한 동작으로 날려 버리다니, 그것은 설령 나라고 할지라도. ‘바위의 힘’을 써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하나 그분이 쓴 것은 ‘바위의 힘’이 아니었다.
‘바위의 힘’이 너무나도 큰 힘 때문에 그 동작이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다면, 지금 그분이 보여 준 동작은 정반대로 지극히 기본적이고도 단순한 움직임을 통해 신체 본연의 힘을 완벽하게 이끌어 내는 쪽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는 힘의 낭비를 철저하게 배제함으로써, 완벽한 효율성을 구현해 낼 수 있는 힘. 그 정체를 알아볼 수가 있었으니까.
“크윽. 이, 이게 대체 무슨…?!”
튼튼한 갑옷 덕분일까?
그토록 심하게 날려 갔는데도, 에반 경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엉망으로 찌그러져 있는 갑옷과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다리는 에반 경이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하나 그런 몸 상태로도 에반 경은 그분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아니, 그럴 리가… 설마 그럴 리가 없어!”
파바바밧!
자신의 몸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당혹감이 서린 눈으로 그분을 노려보다가, 에반 경은 수많은 비검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독과 흉계로 가득 찬 밤중임에도 시퍼렇게 빛나는 단검.
설사 막아 낸다 할지라도 특수한 장치로 독을 뿜어내기에 피해 내야만 하는 ‘배반의 칼날’에도, 그분은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다만 귀찮은 파리를 쫓아내듯, 한 팔에 쥐고 있던 방패를 휘두르셨을 뿐이다.
카가가강!!
우산에 튕겨 나가는 빗방울이 이러할까? 그분의 방패에 닿는 순간,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튕겨 나와 우수수 떨어진 단검을 나는 망연히 보았다.
야검자의 비전이 너무 가볍게 막혔기 때문이 아니다. 단검과 맞닿는 순간, 그분의 방패가 일으킨 변화를 보았기에 검사로서 경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방패의 각도를 조절해 힘을 흘리거나, 살짝 끌어당겨 충격을 흡수하는 것, 그리고 반대로 내밀어 공격을 튕겨 내는 것 등, 동작 자체는 어느 교본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기본적인 방패술일 뿐이었다.
하지만 순간을 백으로 나눈 듯한 찰나 만에 오직 그 기본적인 방패술만을 사용해서 수많은 단검에 담긴 힘을 방향을 완벽하게 돌려 버리는 것은 나로서는 흉내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흉내 낼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세상에 오직 한 명뿐.
“어떻게… 당신이 ‘철의 영혼’을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나조차 배우지 못한 그것을 대체 어떻게?!”
에반 경의 처절한 절규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무아지경을 얻으신 헤일 가주님께서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만들어 내셨다는 비전.
‘철의 영혼’.
스스로 병장기와 하나가 됨으로써, 모든 병장기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내는 그것이야말로, 원래 대장장이시던 헤일 가주님을 성검자로 만든 힘의 근원이었으니까.
그렇게 경악으로 얼어붙어 있는 에반 경을 그분은 더없이 차가운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 어떠한 비전이라 해도 결국은 인간이 만든 기술. 네가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배우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음성으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분을 나는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무위지경으로 만들어진 검술이라면 모를까? 다른 검경에서 비롯된 비전은 검술을 초월해, 이미 그 자체로 깨달음의 정화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설사 같은 검경을 깨달은 검자라도 다른 검자의 비전을 배우기는커녕 흉내 내는 것조차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물아지경의 총화인 ‘세계의 열쇠’에 무아지경의 정화인 ‘철의 영혼’마저 쓰면서도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는 그분의 태도는 그만큼 어처구니없는 것이었으니까.
“무아란 자기 자신을 비우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는 법. 긍지가 있다면 버려라. 집착이 있다면 잊어라. 욕망이 있다면 없애라. 소원이 있다면 포기해라.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을 때, 비워진 자신 안에 철의 영혼은 깃들게 된다.”
“……!”
순간, 나는 눈을 부릅떴다.
그것이 무아지경에 이르는 가르침이자, 철의 영혼의 시작이자 끝임을 알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에반 경을 똑바로 주시하는 그분의 눈동자가 무아의 경지를 펼침으로써 잠시나마 투명해진 장벽을 통해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던 그분의 마음을 처음으로 훔쳐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본 것은…, 한없는 ‘절망’이었다.
아니, 절망이라는 말 따위로는 부족했다. 그것은 10년 동안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수많은 좌절을 보고 겪어 온 나로서도 보는 순간 아찔해질 정도로 깊은 어둠이고, 더없이 공허한 나락이며 한없이 허무한 불꽃이었다.
이해하기는커녕 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그렇기에 더더욱 위험하고도 고독한 마음이 어느새 나를 떨리게 하고 있었다.
대체… 대체 당신께서는 어떤 삶을 살아오신 겁니까?!
외치고 싶었다.
묻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그렇게 이해함으로써 공허한 그분의 마음을 채워 주고만 싶었다.
그런데도 나는 끝끝내 입을 열 수 없었다.
이곳이 황제 폐하의 앞이라거나, 에반 경과 싸우는 도중이라는 하찮은 이유 때문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묻는다 해도 그분은 절대 대답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그리고 설령 대답을 듣는다 해도 나는 결코 그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그렇게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끝끝내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음일까? 에반 경은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다시 그분을 향해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것, 소망하는 것,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마저 닳아서 사라지는 무아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검경.
그렇기에 사대 검경 중에서도 가장 고독하고 슬픈 그 검경을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빠른 검도 전장의 불꽃을 베어 내지는 못했고, 그 아무리 은밀한 검도 철의 영혼을 넘어서지 못하고 헛되이 튕겨 나올 뿐이었다.
“으아아아아!!!”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한 것일까?
이미 죽음마저 각오한 듯, 최소한의 방어조차 포기한 채, 그림자 베기와 배반의 칼날을 동시에 쏟아 내는 에반 경의 모습에서는 귀기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에반 경의 그토록 필사적으로 만들어 낸 쾌검 속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온 비검조차 그분은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볼 뿐이었다.
“파멸할지언정 포기할 수 없는 집착, 그것이 너의 악이라면….”
카가가가가강!!
한 손에서 피어난 불꽃이 그림자를 집어삼키며, 한 손에서 일어난 철의 바람이 칼날을 튕겨 낸다.
그것은 그야말로 불꽃의 성문과 철의 성벽, 어떤 검과 화살도 범접할 수 없는 요새, 그리고 그 요새에 있는 것은 단지 성벽만이 아니었다.
“너의 악의, 받아 가겠다.”
푸욱!
나지막한 선언과 함께 그분의 손이 움직였다 싶은 순간, 불화살처럼 날카롭게 쏘아져 나간 검은, 망가져 있던 갑옷과 함께, 에반 경의 가슴을 꿰뚫고 등으로 튀어나왔다.
…….
검광과 금속음이 난무하던 밤하늘에.
갑자기 찾아든 정적은 너무 고요하여 심장을 멎을 듯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 정적 속에서, 그분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묻지.”
갑옷 덕분에 급소가 약간 빗겨 나갔던 것일까? 가슴이 관통됐음에도 즉사만은 면한 듯, 에반 경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분을 마주 보았다.
“너에게 검을 가르쳐 주고, 가짜 《악의 서》를 만들어 낸 자가 누구냐.”
그분의 질문을 들은 에반 경은 조용히 그분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했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에반 경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앞둔 채로도 놀랍게도 평온한 얼굴, 그리고 그 위에 떠올라 있는 옅은 미소와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
무언가를 말하려 했음일까?
나를 향해 입술을 움찔거리던 에반 경은, 그러나 결국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눈을 감고 고개를 떨궜다.
그것이… 에반 경의 마지막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