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28)
127마왕의 재난
촤아악.
물에 적신 수건을 꽉 짜서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며,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세레나는 언제 돌아올까?
짧은 한숨을 내쉰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츄리오넬에서 신관을 찾아보겠다며 세레나가 뛰쳐나간 것도 벌써 몇 시간 전. 그게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뻔히 알면서도, 나는 그녀를 말릴 수가 없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참아낼 수 없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도 세비트를 시켜 츄리오넬을 샅샅이 뒤지게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특별한 소식은 없었다.
그렇게 답답한 마음을 내리누르며 나는 그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떤 부상을 입어도 신음 한 번 흘린 적 없고 고통스럽거나 괴로운 모습을 보인 적도 없는, 철인처럼 믿음직스럽기만 한 그의 모습에 나는 어느새 잊고 있었다.
그 또한 상처 입으면 아프고,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죽을 수도 있는 ‘인간’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말이다.
나는… 언제까지 그와 함께 있을 수 있을까? 물론 영원한 것 따위는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언젠가는 그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으리라는, 그리고 결국 나 혼자 남게 되리라는 사실이 나의 마음을 아프도록 조여 왔다.
차라리 내가 인간이었다면….
아니, 하다못해 평범한 마족이기라도 했다면 좋았을 텐데. 과거 마왕이라고 불렸던 만큼, 나는 마족 중에서도 여러 의미로 특별했다.
단순한 마력만이 아니라 그 성장 속도나 수명에서도 그랬고, ‘38녹수를 흘리는 자’ 레벤트스 또한, 나 같은 마족은 달리 없을 거라고 단언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대한 마력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수명도 지금 내게는 그저 우울함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똑똑.
“…무슨 일이야?”
노크 소리에 나는 냉담하게 응대했다. 세레나라면 굳이 노크할 필요가 없을 터, 그 외의 찾아올 사람이 있을 리 없을뿐더러, 있어도 지금은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문 너머에 있는 상대의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라어라. 어떤 아가씨가 맡긴 쪽지를 보니, 여기 신관의 도움이 필요한 환자가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혹시 소녀가 잘못 온 건가요?”
“……!”
세레나가 신관을 찾은 건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벌컥 문을 열었다. 왜 세레나가 데려오지 않은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신관의 도움은, 지금 내게 그 무엇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나는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라. 귀여운 꼬마 아가씨가 환자인가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체구, 아홉 줄기로 묶어 내린 남색 머리카락, 거기에 끝부분이 여우처럼 올라간 탓에 묘하게 장난스럽게 보이는 가느다란 눈매와 보일 듯 말 듯 드러난 금빛 눈동자를 지닌, 이제야 겨우 일고여덟 살이나 됐을까 싶은 귀엽고 예쁘장한 소녀를 보며 나는 잠시 방황해야만 했다.
이런 꼬맹이가… 신관이라고?
물론 외모나 나이로 상대를 판별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마왕이라고 불리는 나조차도 외관은 10여 살 정도의 꼬마 계집이었고, 천검자로서 명성이 자자한 세레나도 연약한 미녀로밖에는 안 보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보다 머리 한 개는 더 작은 여자아이를 ‘아, 신관이구나.’ 하고 납득할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너, 정말 신관이야?”
“어라? 그게 의심스러우신가요?”
스스로 생각해도 무례하기 그지없는 질문에도, 소녀 신관은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여우처럼 가느다란 눈을 둥글게 휘어서, 싱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급한 건 환자겠지요? 그렇다면 의심스럽든 않든 일단 환자를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시는 게 순서 아닐까요?”
소녀의 말에 나는 일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 말 그대로였다.
이 소녀를 의심하든, 말든 지금 내게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었으니까. 설령 아무리 의심스럽다고 해도 도움을 요청하는 게 우선이었다.
“…부탁할게.”
“네. 좋아요.”
…이상한 아이네.
싱글싱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소녀의 모습에 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도 묘하게 어른스러운 태도라든가, 계속해서 눈가에 머물고 있는 미소라든가, 왠지 보기만 해도 평안함이 느껴지는 분위기가, 내 나이의 반도 되지 않을 어린 소녀에게 기묘한 믿음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종종걸음으로 문 안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본 소녀는,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어라어라?”
“왜?”
“다급해하신 걸 보고 남자친구라도 되시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버지셨나 보네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환자 상태나 봐 줘.”
“네. 알았어요.”
내가 퉁명스럽게 재촉하자 소녀는 싱글싱글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나는, 그러나 다음 순간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거야?!”
“그야 환자를 보고 있지요.”
누가 그걸 몰라서 묻는 줄 알아?!
소녀의 뻔뻔스러운 대답에 무심코 터져 나올 뻔한 고함을 애써 참으며, 나는 반쯤 억누른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왜 옷을 벗기는 건데?”
“철저하게 진료를 하려면 아무래도 옷을 벗기는 편이 좋으니까요.”
대답 자체는 분명 일리가 있었다.
나도 루바젤에서 그가 약술사 일을 하는 동안 환자의 옷을 벗기는 것을 자주 봤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절대로 납득할 수 없었다.
“진료를 하려면 상의만 벗기면 되잖아. 바지는 놔둬!”
“어라어라? 안 되나요?”
“안 돼!”
“어라. 까다로운 환자분이네. 그럼 일단 간단한 진찰부터 먼저 해 볼게요.”
누가 까다롭다는 거야!
원래 옷을 벗기기 전에 간단한 진찰부터 해 보는 게 정상 아냐?!
목구멍까지 나온 고함을 내가 애써 참는 사이 소녀는 뒤적뒤적 풀었던 허리띠를 다시 채우고 싱글거리는 얼굴로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그리고 그의 손목을 쥐어 본 뒤,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어라어라.”
“왜?”
“아무래도 역시 벗겨 봐야겠는데요? 괜찮을까요?”
“…상의만이야. 알았어?”
소녀가 싱글싱글 웃으며 건넨 질문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어리고 의심스럽다고는 해도 신관인 소녀의 진료를 막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내 허락에도 소녀는 곧장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며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왜?”
“어라어라. 아무리 가족이라도, 남자의 맨살을 드러내는 건데 자리를 피해 주시는 게 예의 아닐까요?”
“상관없어.”
“어라. 하지만 아무래도 누군가 보고 있으면 소녀가 부끄러우니까, 잠시만 비켜 주시겠어요?”
…부끄럽다는 주제에 남의 바지를 다짜고짜 벗긴단 말이야?
말과 행동이 하나도 맞지 않는 가증스러운 소녀를 째려보기도 잠시, 나는 결국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싱글싱글 웃고 있는 얼굴은 둘째 치더라도 눈동자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눈매 때문에, 눈싸움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모르겠다니 아직 어려서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상태가 심각하기 때문일까?
내가 초조함에 문 앞을 서성이며 진료가 끝나기만을 기다릴 때, 문뜩 한 줄기 반가운 음성이 들여왔다.
“아리스? 무슨 일이죠?”
“아, 세레나.”
복도로 걸어오는 세레나를 보고 나는 무심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토록 불안한 상황에 믿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세레나가 준 쪽지를 보고 찾아왔다는 신관이 지금 코드를 진료하고 있어.”
“하아. 그랬군요.”
혹시라도 코드가 잘못된 줄 알았는지 설명을 듣고 크게 안도하는 세레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문뜩 그녀의 뒤에 서 있는 흑발 녹안의 소년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보다 세레나. 뒤에 있는 건 누구야?”
“아, 이분은 암흑 교단의 크리스 사제님이세요.”
“암흑 교단?”
츄리오넬에 암흑 교단의 사제가 있었단 말이야?
아무리 신전에 비해 영역이 자유롭다지만 암흑 교단은 악신을 모시는 사교.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북부라면 모를까, 다른 지방에서 암흑 교단의 사제를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암흑 교단의 사제를 본 후, 나는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남방인 특유의 갈색 피부에 검은 단발머리, 그리고 맑게 빛나는 연두색 눈동자까지, 그 외모는 분명 미소년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어벙하게 고개를 기웃거리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제대로 된 사제라기보다는, 견습 딱지도 못 뗀 칠푼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왜 나와 계신 거죠?”
그녀의 질문을 들은 나는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진료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그래,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방에 그와 소녀만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겨우 옷을 벗기는 일 때문에 내가 자리를 비워야 했다는 사실이 왠지 탐탁지 않게만 느껴졌다.
“그럼 얼마나 더 기다리면 될까요?”
“글쎄. 지금쯤이면 될 거 같은데.”
왠지 모를 초조한 예감에 내가 더 기다릴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세레나는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굳어 버렸다.
“세레나?”
어지간해서는 당황하는 일이 없는 그녀답지 않은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며 세레나의 옆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문안을 들여다본 후,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 안에 있는 거라고는, 기껏해야 텅 빈 침대와 활짝 열린 창문뿐….
…텅 빈 침대?
…활짝 열린 창문?
잠시 후에야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나는 쩌저적 얼어붙어 버렸다.
지금 이게 대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인지 그제야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굳어 있는 사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창가로 다가간 세레나는 잠시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몸을 돌린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미소가 사라진 그녀의 얼굴이 너무 섬뜩하게 느껴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세레나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꿈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문밖에서 멀뚱히 서 있는 사이, 그가 그 여우 같은 꼬맹이에게 납치당했다는 기가 막힌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