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61)
159악당의 전투
미끼를 물었군.
하늘에 떠 있던 먹구름에서부터 성을 향해 떨어져 내린 뇌전을 보고, 나는 음험한 흉소를 머금었다.
《악의 서》를 완성되기를 바라지 않는 신들은 당연히 이 사태를 수수방관하지만은 않았다. 물론 아무리 신들이라도, 신탁만으로는 이토록 빨리 신관들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탁이 내려오기도 전부터 사제장이 암암리에 정보를 흘려 둔 덕분에 시기적절하게 신관 전사와 전투 신관을 여기까지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내가 준비한 것은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다.
메스테르 늙은이를 통해 서신을 보냄으로써 ‘하늘 섬의 떠돌이’와 ‘이름 없는 골짜기의 공포’까지 끌어냈으니까. 물론 그 벼락 맞을 괭이 새끼나 그 생매장당할 뱀 자식에게 내 부탁을 들어줄 의리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저 욕심 많은 것들이 《악의 서》를 손에 넣을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악의 서》의 정보를 흘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상황을 낙관하지만은 않았다.
어둠의 군세는 암흑성의 유산을 이어받은 현존하는 최강의 악의 조직. 아무리 신전의 세력과 요마들의 힘이 있어도 악의 서를 지닌 어둠의 군세가 상대라면 그 우세를 점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신관이나 요마들에게 악의 서를 빼앗기면 더 골치 아파진다. 그렇기에 나는 이 양동작전을 계획한 것이다.
고리타분하기가 기사들보다 더한 신관들이라면 당연히 정면에서 공성전을 벌일 것이다.
반대로 아흔아홉 요마 중에서도 가장 교활한 ‘하늘 섬의 떠돌이’와 제일 신중한 ‘이름 없는 골짜기의 공포’라면 안전하면서도 눈에 띄지 않는 루트, 즉 성 중심부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를 공략하며 야금야금 어둠의 군세를 파먹어 들어갈 것이다.
신관들과 요마들이 서로 만난다면 큰일이지만 이렇게 공략 지점이 분리된 이상, 서로 맞부딪치기 위해서는 우선 ‘어둠의 군세’부터 무너트려야 할 터.
아무리 어둠의 군세가 강대해도 이렇게 안팎으로 두들겨 맞는 상황에 제대로 된 경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덕분에 생겨난 기회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가자.”
“예.”
“알겠나이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녀석과 요염하게 웃고 있는 야월관을 이끌고, 나는 성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비밀 통로를 방치해 두지는 않았을 터, 발견되지 않은 비밀 통로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불확실한 행운에 의지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참으로 나답지 않게도 공성전의 혼란을 틈아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뭐, 그렇다고 신관들처럼 맨몸으로 어둠의 성을 공략하는 무식한 짓을 벌일 셈은 아니지만.
중력 제어의 권능을 사용해 성벽을 넘어서려다 대낫을 휘두르는 흑회색의 사제들에게 밀린 신관이 밑으로 떨어지고, 어느 신관이 던진 돌멩이가 관성 제어에 의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허공을 날아가 철갑으로 무장한 병사를 날려 버리는 등, 전투 신관들과 어둠의 군세는 성벽을 경계로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압권인 것은 그 전투의 선두에 선 신관 전사들과 그들과 맞서고 있는 거한과 늙은 사제였다.
흐음, ‘철의 전도사’와 ‘죄의 전도사’인가?
하여튼 대단하군.
‘언더 블랙미스트’의 7대 비전으로 만들어진 흉기로 무장한 거한, 사악한 힘을 흩뿌리며 사제들의 권능을 베어 내고 있는 늙은이.
그 무시무시한 위용에 내심 고개를 내저으며, 나는 밧줄이 달린 갈고리를 꺼내 들었다.
물론 이런 갈고리 하나로 공략할 수 있을 만큼 어둠의 성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저 아득한 성벽의 높이만 해도 발리스타라면 모를까, 어지간한 석궁이라도 닿지 않을 정도니까.
그래, 석궁이라면… 말이다.
“세레나.”
“예.”
내게서 갈고리를 받아 든 뒤, 녀석은 밧줄을 쥐고 빙글빙글 회전시켰다. 그리고 녀석이 밧줄을 놓은 순간, 갈고리는 중력의 법칙을 깡그리 깨부수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허공을 향해 치솟아 올라갔다.
챙!
좋아, 계산대로다.
갈고리가 성벽에 걸린 것을 보고 나는 음험한 흉소를 머금었다.
공성 병기조차 쓰지 않는 신관들의 병신 같… 정직한 공격에 적응한 탓인지, 한 박자 늦게야 갈고리를 발견하고 보초들은 기겁하며 밧줄을 끊어 내려 했다.
하지만 ‘언더 블랙미스트’와 ‘드래곤 헌터’의 기술을 추가해 만든 밧줄은 쉽사리 끊어지지 않았다.
타닷!
바로 그 순간, 야월관이 허공으로 뛰어올라 맨발로 밧줄 위를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서 있던 보초들이 화살을 쏘아 댔지만 야월관은 좁은 밧줄 위인데도 곡예를 하듯 현란한 몸놀림으로 화살을 피해 내며 성벽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야월관이 성벽 위로 올라간 순간부터 일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크아악!”
“괴, 괴물…!”
놈들이 아무리 신관과는 극성이라 해도 모든 신관 전사 중에서도 최고의 체술을 자랑하는 야월관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그렇게 야월관에 의해 성벽이 정리되는 사이 나는 밧줄을 타고 성벽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힐끔 녀석에게 시선을 향했다.
“성의 중심부입니다.”
쯧, 골치 아프게 됐군.
녀석이 ‘추색의 지도’을 확인한 뒤 어두운 얼굴로 알려 준 계집애의 위치를 듣고, 나는 내심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감옥이 있는 성탑이라면 모를까, 내성의 중심부에 있다면 이미 의식이 시작됐다는 뜻, 그야말로 한 시가 아까운 상황이었다.
“내성으로 간다. 서둘러라.”
외성을 넘어왔다고는 하지만 ‘어둠의 성’ 안을 채운 미로를 지나 내성까지 가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미로의 복잡함도 복잡함이지만 무엇보다 미로에 매복한 병력을 상대하려면 수천의 병력이라도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 옆에는, 수천의 병력은 없을지언정 수백과 맞설 만한 무력이 있었다.
촤아악!
콰드득!
일격 필살의 이치에 따라 단숨에 철갑을 가르고 목을 베는 녀석의 검과 유능제강의 이치에 따라 대낫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목뼈와 척추 등의 급소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야월관의 체술을 보며 나는 내심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적으로 삼는다면 더없이 두렵지만 반대로 아군으로 삼는다면 더없이 든든한 것이 천검자라 불리는 녀석과 암흑의 사제 전사인 야월관이다. 드넓은 장소에서 포위 공격한다면 모를까, 이렇게 좁은 골목에서 이 둘을 상대로 해서는 아무리 많은 병력이라도 종잇장처럼 찢겨 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몇몇 힘만으로 돌파할 수 있을 만큼 어둠의 성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피비빙!
네 방향으로 뚫린 길목에서 앞뒤로 몰려드는 병력에 의해 진형이 살짝 느슨해졌다 싶은 순간, 사방에서 우수수 쏟아져 나온 화살에 나는 다급히 방패를 들어 올렸다.
후방에 있던 야월관은 춤을 추듯 유려한 동작으로 화살을 피해 냈고 녀석은 폭발하듯 검을 휘둘러 화살을 받아 내며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것은 숙련된 검사다운 대응이었지만 그 모습을 본 나는 안색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물러나라!”
쿠궁!
나는 다급히 녀석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갑작스러운 기음과 함께 땅에서 솟아난 벽에 의해 길이 막힌 뒤였다.
더불어 뒤에 떨어져 있던 야월관 또한 또 다른 벽에 의해 나눠져 버린 것을 확인하고, 나는 내심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쯧, ‘언더 블랙미스트’의 짓인가.
미로에 이런 대규모 기관 장치까지 더해 놓다니, 언더 블랙미스트가 아니면 시도도 못 할 일이다.
더구나 또 무슨 장치를 해 두었는지 모르는 상태로 섣불리 벽을 넘어갈 수도 없으니만큼, 즉각 합류하는 것은 힘들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통해 놈들이 노리는 것이 각개격파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카앙!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을 느낀 즉시, 몸을 돌리며 방패를 휘두름으로써 뒤에서 베어 들어오던 검을 튕겨 냈음에도 나는 그 여력을 받아 내지 못하고 주춤 물러났다.
바위의 검만큼은 아니더라도 절대 무시 못 할 중검을 받아 낸 여파로 손이 저릿저릿한 가운데, 상대를 확인한 나는 신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원탁기사단…!”
“오랜만이로군. 크렉 R. 스완!”
빌어먹을!
하필이면 ‘프리 나이츠’인가?
원한으로 두 눈을 시퍼렇게 불태우고 있는 놈들을 보며, 나는 내심 혀를 찼다.
하나같이 일류뿐이던 프리 나이츠 중에서도 원탁기사단은 최초로 일검자에 의해 회유된 18명의 기사의 맥을 잇는 구성된 최정예.
내분을 통해 줄고 줄어 이제는 5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쌍검자의 후예였던 코드 렐 스핀조차 본래는 원탁기사단에 소속된 18기사 중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위협적인 상황이었다.
더구나 뒤에 있는 이들도 ‘프리 나이츠’의 기사. 하나같이 일류 검사로 구성되기에, 과거 암흑성의 13사도 중에서도 ‘다크 스톰’과 함께 최정예 조직으로 꼽히던 ‘프리 나이츠’의 힘은 절대 만만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써야 하나?
주머니에든 약을 매만지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이들을 돌파할 가능성은 0.01% 이하, 설사 돌파하더라도 시간을 지체하게 된다.
미친 폭풍의 검을 사용한다면 단숨에 돌파하는 것이 가능할 테지만 벌써 그걸 쓰면 뒷일이 골치 아팠다. 그렇게 번민에 시달리던 나의 귀에 한 줄기 너털웃음이 들려왔다.
“허허, 이거 내가 때맞춰 온 것 같군.”
이 목소리는…?
나는 익숙한 너털웃음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둥근 원반 같은 것 위에 올라탄 채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한 늙은이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여긴 웬일이오?”
“별거 없네. 그저 배달해 줄 게 있어서 말이네.”
메스테르 늙은이는 능글맞게 웃었다. 그리고 좌우로 두 팔을 넓게 펼치며,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탐욕과 재보의 관리자 아르바이너여! 나 그대의 이름을 아는 자, 나 그대의 탐욕을 이해하는 자, 나 그대의 보물을 아는 자로서 청하니!”
피잉! 티디딩!
몇 개의 화살이 늙은이를 향해 날아왔지만 썩어도 마술사는 마술사라는 것을 증명하듯 마력 장벽을 펼쳐 공격을 막아 내며 늙은이는 주문을 완성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용의 갈비뼈를 깎아 뼈대를 세우고 용의 비늘로 장식한 황금의 문, 시간을 넘어 천 리를 한 걸음으로 하는 공간의 문이라!”
단순한 마법이 아닌 마술.
그것도 남은 마력을 모조리 쥐어짜 내는 듯한 강대한 마술이 늙은이를 중심으로 펼쳐진 순간, 어둠의 성의 결계와 늙은이의 마력이 충돌하며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기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직!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똥을 튕기며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결국 우세를 점한 것은 늙은이의 마력이었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아직 결계의 핵심인 내성이 아니었던 데다가, 신관들에 의해 어둠의 성의 결계가 흔들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여 늙은이의 마력이 허공을 뒤덮은 순간, 늙은이가 두르고 있던 황색 망토가 펼쳐지며 그 안에서부터 무언가 거대한 것이 솟아났다.
쿠구구궁.
황금으로 만들어진 기둥, 은으로 만들어진 악마와 요마의 조각.
그리고 넓은 문 위에 크고 작은 아홉 종류의 보석이 빼곡하게 박혀 별자리를 이루고 있는, 설령 제국의 황실이라도 만들려고 했다가는 백십 년간 재정난에 휘둘리게 될 황금의 문은 ‘프리 나이츠’의 기사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떠한 인간이라도 벗어날 수 없는 탐욕과 욕망을 자극하는 강력한 마력이 황금의 문에는 흘러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끼이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 육중한 문이 개방된 순간, 황금빛이 일렁이는 문 너머로부터, 한 줄기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랜―――――스!”
…뭐, 뭐?
어벙한 심정으로 문짝을 바라보던 중, 그 갑작스러운 외침을 듣고, 나는 경악하며 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황금 문짝에 홀려 있던 ‘프리 나이츠’의 기사들은 나보다 한 박자 뒤에야 반응했고, 그 차이가 나와 그들의 생사를 갈라놓았다.
“차칭―!!”
퍼어엉―!
쩌렁쩌렁한 외침이 뚝 끝맺은 순간, 문에 일렁이던 황금빛이 폭발하듯 깨져 나가 일단의 무리가 해일처럼 거세게 쏟아져 나왔다.
육중한 마갑을 두른 전투마와 하나가 되어 말의 체중부터 돌진력까지의 모든 힘을 랜스 끝의 한 점에 집중함으로써 막대한 파괴력을 낳는 기술, 랜스 차칭(Lance charging).
바위의 검의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검술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기사들의 궁극기라고 할 수 있는 그 필살의 돌격은 프리나이츠들의 진영을 단숨에 관통해 버렸다.
하나하나가 일류 검사인 그들인 만큼 본래라면 차징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겠지만, 메스테르 늙은이의 공간이동 마술은 그들에게 차칭에 대응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은, 그저 평범한 기사들이 아니었다.
“자유파! 네놈들이 감히…!”
“네놈들 따위에게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 기사파!”
양분되었던 ‘프리 나이츠’의 나머지 7명의 원탁 기사들을 선두로 우르르 몰아닥친 자유파의 기사들을 보며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왜 여기서 자유파 놈들이 튀어나오는 건데?
“결국 긍지를 버리고 황실의 개가 된 주제에…!”
“우리의 긍지는 자유의지 아래 오롯한 법! 우리가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기사도를 지키는 한, 우리의 긍지는 꺾이지 않는다!”
…과연, 그러고 보니 프리 나이츠의 잔당을 황제가 거뒀다고 했지.
신전이 이토록 대대적으로 움직였는데 그 사실을 모를 황제가 아니다. 어쩐지 카산드라 소가주가 시간을 끌더라니, 뒤쪽에서 이런 술수를 꾸미고 있었던 거로군.
나는 내심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신전과 요마들만을 이용한 것은 그들이 가장 예측하기 쉬운 상대였기 때문이다.
반면 카산드라 가문이나 제국의 개입은 배후가 배후인 만큼, 예측하기 어려운 면도 많았다.
자칫하다간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나부터 처단될 위험도 있었기에, 최소한의 용도로만 이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오히려 역이용해서 나를 미끼로 이용하다니….
과연 황제와 카산드라의 소가주다운 솜씨였다.
하지만 숙련된 악당이란 어떤 변수이든 간에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 법! 나는 기사파와 자유파가 충돌로 놈들의 진영에 생겨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서로 으르렁거리느라 바쁜 이 순간이야말로 프리 나이츠의 진영을 돌파하기에 가장 적절한 기회였으니까.
물론 그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차칭 후 말에서 내린 자유파의 기사들은 검을 휘두르며 기사파의 기사들을 몰아쳐 갔고, 기세를 빼앗긴 기사파는 주춤 밀리면서도 필사적으로 진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잖아도 좁은 이 미로에서 일류 검사들끼리 뒤엉켜 싸우고 있는 이 아수라장을 헤쳐 나가는 것만 해도 내게는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내 앞에 버티고 나선 하나의 그림자가 있었다.
이놈은 또 누구야?
다른 놈들보다도 유독 두꺼운 전신 갑옷과 커다란 방패로 무장하고 있으면서도 검만은 유독 얄팍한 것을 쥐고 있는 기사, 놈의 공격에 대비해 나는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뒤이어진 놈의 행동은 내게서 어이를 뺏어가 버렸다.
척.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허?
제자리에서 빙글 몸을 돌려 내게 등을 보인 후, 놈은 그대로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참 기사파와 자유파의 싸움이 정점에 달해 있는 길목 한가운데를 향해 곧장 돌진하는 놈을 보며 나는 황당해했지만, 이어서 벌어진 일에 비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캉! 퍽! 카가강!
방패를 휘둘러 투구를 후려치고, 검을 휘둘러 갑옷의 이음새를 베어 내고, 몸을 비틀어 갑옷으로 칼날을 받아 낸다.
그저 최소한의 동작.
그것도 현란하거나 뛰어난 검술도 아닌, 누구나 배우는 철저한 기본기만으로 프리 나이츠의 기사파를 퍽퍽 쓰러트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놈을 멍하니 보길 잠시, 나는 뒤늦게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놈이 열어 놓은 길을 따라 몸을 날렸다.
그렇게 삽시간에 ‘프리 나이츠’의 진영을 빠져나왔다 싶은 순간, 놈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길목 한가운데 버티고 선 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가십시오.”
나는 떨떠름히 놈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지닌 병기를 극한까지 활용함으로써 ‘프리 나이츠’의 기사들을 간단히 쓰러트린 놈의 실력에 놀랐기 때문이 아니다.
여기에서 포기하고 물러나려는 놈의 행동이, 그만큼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자유파의 기사들이 우세를 점하고 있다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어둠의 군세’의 본진. 조금만 시간을 지체하면 다른 병력이 우르르 몰려들 것이다. 즉, 놈은 목숨으로 길을 막을 각오로 이 자리에 남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걸로 만족하나?”
“이것이 제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죄. 부디 저를 대신해 그녀를 도와주십시오.”
…멍청한 놈 같으니.
물끄러미 놈을 바라보길 잠시, 나는 결국 아무 말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성검자와의 거래 때문에, 일부러 급소를 비껴 찔러서 목숨을 살려 주었을 뿐, 이미 거래도 끝난 이상 내게 놈을 돌봐 줘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어둠의 군세’의 ‘검의 전도사’였던 한 어리석은 기사를 뒤로한 채, 나는 녀석과 다시 합류하기 위해 달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