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71)
169악당의 의지
“쿨럭, 쿨럭쿨럭!”
검게 썩은 피를 토해 낸 후, 나는 숨을 몰아쉬며 몸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살가죽 곳곳이 찢긴 것이나 뇌진탕 때문에 띵한 머리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눈 한쪽이 흐린 게 시력을 거의 잃은 듯싶었고, 뼈도 한 십여 개쯤 부러진 듯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왼쪽 어깨 아래의 허전함이었다.
흥, 팔 하나가 날아갔나.
졸지에 불구자 신세가 되었지만,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작은 불똥 놀이나 연막도 아니고 작심하고 만든 폭탄을 터트렸는데, 고작 팔 하나로 끝났다면, 오히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가벼운 실소와 함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놈을 바라보았다. 폭발 당시 내 손목을 짓밟고 있던 탓에 놈은 하반신이 통째로 날아간 상태였다.
더구나 남은 상반신에도 팔찌가 폭발하며 터져 나온 파편이 오장육부까지 파고든 덕분에 불사의 심장을 지니고 있더라도 절대 멀쩡히 살아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다만 불사의 심장의 생명력에 힘입은 듯, 몸 절반이 날아간 상태로도 놈은 창백한 얼굴로 피를 울컥울컥 토해 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제정신인가…?”
놈의 말에 나는 피식 실소했다.
실제로 이건 최후의 방법이나 다름없었다. 폭발력이 바깥쪽으로 향하게 제작해 놨다지만, 손목에서 직접 작동시키는 것이니만큼 내 위험부담도 엄청났으니까.
고작 팔 하나로 끝날 수 있었던 것만 해도, 가히 천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행운 제어’의 권능조차 쓸 수 없는 내게 하늘이 내려 준 행운 따위는 없었지만, 신에게 받은 악운이라면 있었다.
‘악령 흑심’
내가 암흑 교단의 수석 사제로서 여신께 선사받은 절대 악운의 신기, 악령 흑심.
이 신기를 심장에 품고 있는 이상, 그 어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나는 0.01% 이하의 악마학적인 수치에서나마 생존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단순한 가능성일 뿐, 반드시 생존한다는 행운 따위는 없었다. 내게 아무리 0.01%의 가능성이라도 찾아낼 수 있는 진리의 눈이 있다지만, 그것은 바늘구멍을 화살로 쏘아 맞히려는 목숨 건 도박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런데도 내가 이런 ‘폭탄’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간단했다.
“숙련된 악당은 항상 최악의 수를 염두에 둬야 하는 법을 몰랐나?”
“…설마 당신이 자폭용 수단까지 가지고 다닐 줄은 몰랐소.”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네 미숙함의 증거다.”
그래, 이건 원래 살상용이 아니다.
악당들이 최후의 순간, 적과 함께 죽기 위해 쓰는 자폭용 수단이다.
물론 내 경우에는 벌의 독침과 같이 상대를 위협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기에 이걸 만들 때만 하더라도 실제로 사용하게 될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한 적 없었지만.
“《악의 서》를 불태우려는 신관들을 끌어들이고 《악의 서》를 탐내는 요마를 풀어놓는 것으로 부족해서 자폭용 폭탄까지 함께 들고 나타나다니. 그게 삼류 악당이 할 짓이오?”
그 말에 나는 차갑게 웃어 보였다.
이류 악당인 놈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정말 목숨 말고는 내놓을 것이 없는, 그렇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삼류 악당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소?”
놈의 질문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대답해야 할 의리나 인정 따위는 없지만, 서열 1위의 마술사인 놈이 마지막 여력을 모아 마력 폭주라도 일으키면 골치 아팠으니까.
물론 그 경우를 대비해서 방패 하나를 옆에 준비해 두기는 했지만, 일부러 위험한 다리를 건널 필요는 없다.
“50년 전, 그대는 단 100일 만에 세계를 정복하고 《악의 서》를 완성해 냈소.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소. 그대가 아무리 대단한 악당이라도 세계를 정복하고자 한다면 신의 저주 때문에 파멸할 수밖에 없고, 그대가 신의 저주를 감당해 낼 수 있는 기보 《악의 서》를 만들어 낸 것은 세계를 정복한 뒤의 일이었으니까.”
그것은 더없는 모순이다.
《악의 서》를 만들려면 세계를 정복해야 하지만 세계를 정복하려면 《악의 서》로 신의 저주를 막아 내야만 한다.
이 모순을 해결할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세계를 정복하지 않고도 《악의 서》를 만들든가….
“그것을 위해 그대는 ‘암흑성’을 세우기도 전부터 신의 법칙을 거스를 수 있는 마의 힘을 손에 넣었을 것이오. 지금까지는 그 마의 힘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오늘에서야 알았소. 그건… 쿨럭쿨럭!”
말을 하던 도중, 놈은 핏덩이를 토해 냈다. 이미 하반신이 날아간 데다, 내장이 으스러진 몸인 만큼 단지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놈의 목숨은 한 줌씩 깎여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놈은 말을 멈추지 않고 이어 나갔다.
“그건 요마, 그중에서도 최강의 요마인 어둠의 산의 주인이었을 것이오. 그리고 그 어둠의 산의 주인이야말로 그대의 첫 번째 사도이며, 나머지 13사도를 끌어들여 세계를 정복했던 암흑성의 총사 쿠르타였을 거요. 그렇지 않소?”
“훌륭하군.”
50년 동안 그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 사실을 정황만으로 알아낸 놈의 추리력에 나는 가볍게 감탄했다.
하지만 내 탄성에도 놈은 만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음울한 눈으로 나를 마주 보며, 그 진정한 의문을 풀어놨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아내지 못했소. 천 년간 숨겨져 있던 세상의 비밀을 파헤쳐 내고, 천 년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어둠의 산의 주인을 끌어들이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세계 정복을 이뤄 낸 당신의 진정한 정체를.”
놈의 말에 나는 피식 실소했다.
암흑성의 유산을 이어받았던 놈이 죽음을 앞두고도 풀지 못한 마지막 의문이 고작 나의 정체 따위라는 게 어이없었으니까.
“키놀. 크레이. 케인. 코드. 매번 이름을 바꿔 온 그대의 진정한 이름은 뭐요? 그리고 그대의 정체는, 그리고 그대가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추구했던 이유는 뭐요?”
하나만 물어보겠다던 녀석이, 참 갖가지 걸 다 물어보는군.
그 사실에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며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둘러댈 말쯤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한낱 삼류에 불과한 내 거짓말로는 놈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설령 속일 수 있다고 해도 놈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놈의 질문에 대한 하나이자 모두의 해답을 알려 주었다.
“나는 키놀이며, 크레이고, 크레이지며, 케인이고, 코드다. 그 모든 것이 나의 이름이지만, 어차피 ‘지음받지 못한 자’인 내게는 그 어떤 이름도 결국 의미 없다.”
“…‘지음받지 못한 자’…라고?”
너무나 뜻밖의 대답이었던 것일까.
죽음을 앞두고도 음울하기만 하던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경악을 드러낸 채 나를 바라보던 놈은 이내 커다란 웃음소리를 토해 냈다.
“큭, 크하하핫! 그렇군. 그게, 설마 그것이 당신의 정체였나!”
죽음을 앞두고 있음에도,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처절하고도 광기 어린 웃음소리를 내지르는 놈을 향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평생 악을 추구해 온 놈이라면 그것만으로도 내 정체를 알 수 있었을 테니까.
“좋소. 천 년의 역사 속에 유일하게 ‘신에게 저주받은 악의 성지’를 빠져나온 지상 최악의 악당이여! 나의 악의를 받아 가시오! 그리고 이 세상을 그대의 악의로 물들이시오! 크하하핫…!”
그야말로 남은 생명을 쥐어짜 내듯 미칠 듯한 웃음소리를 토해 내던 놈은 결국 피를 왈칵 쏟아 내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암흑성의 유산을 모아 《악의 서》를 복원해 내고, ‘어둠의 군세’를 일군 대악당답지 않은, 그러나 더없이 이류 악당에 어울리는 최후를 맞이한 놈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잘 가라. 나의 두 번째 대행자여.
수십 년 동안 《악의 서》를 모으는 수고를 대신해 준 놈의 시체에서 눈을 뗀 후, 나는 붕대를 꺼내 팔을 지혈하고 약을 삼켰다. 하지만 팔 하나가 통째로 날아간 탓인지 출혈은 쉽사리 멎지 않았다.
끄응, 이대로는 위험한데.
원래대로라면 약을 한 사발은 먹어 치우고 편히 누워서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했지만, 이곳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죽기에 딱 좋은 일.
그 때문에 안간힘을 짜내며 몸을 일으킨 나는, 다음 순간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화르르륵!!
수정관 안에 눈을 감고 있던 계집애의 옷이 갑자기 불타오르며 새하얀 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싶은 순간, 수정관에 쩌저적 균열이 가며 명멸하는 마법진 위로, 새까만 불똥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 설마. 설마아…!
그 뜻밖의 상황에 경악한 와중에도 나는 다급한 김에 놈의 시체에서 ‘흑룡 휘장’을 빼앗듯 집어 두른 뒤 바닥에 뒹굴던 방패를 쥐었다.
이러한 현상이 어떨 때 발생하는지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으로 안타깝게도 세계의 열쇠를 얻은 이후, 내 불길한 예감은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쿠과과과과과광!!!
공동을 뒤덮은 마법진이 붕괴한다 싶은 순간, 무시무시한 폭발이 공동을 휩쓸며 계집애가 들어있던 수정관이 깨져 나갔다. 폭발의 충격은 사방으로 퍼져 나와 천장에 금을 하며 벽을 무너트렸고 그 충격에 휘말린 나는 허수아비처럼 뒤로 날려졌다.
“커헉!”
크윽… 이런 제기랄.
그러잖아도 엉망진창이던 상태로 벽까지 튕겨 나갔다가 땅에 떨어진 후, 나는 피를 울컥 토해 내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자폭하면서 받은 타격보다 좀 전의 충격이 더 클 정도였으니, 흑룡 휘장과 방패로 충격을 막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몸 전체가 으스러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내 진정한 재앙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쿠르르릉.
폭발의 충격이 성의 기둥을 무너트린 것일까.
굉음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한 천장과 벽은 ‘어둠의 성’이 붕괴하기 시작했음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지만, 내 앞에 닥친 재앙에 비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애들 장난일 뿐이었다.
수정관을 산산이 깨트린 채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는 계집애.
그 머리카락이 본래의 은색을 잃고 서서히 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그리고 계집애를 중심으로 뜨거운 열풍과 함께 사악한 기운이 풍겨 나오기 시작한 것을 보며 나는 고개를 떨궜다.
제길, 결국 흑마법의 후유증이 나타난 건가.
흑마법이 금기시되는 이유는 그만큼 악마에게 홀리기 쉽기 때문이다. 흑마법에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악마는 그 틈을 파고들어 영혼을 좀먹고 그렇기에 한번 흑마법을 접한 자는 점차 악마에게 물들어 가다가, 결국에는 악마의 화신과 다름없는 존재가 된다.
아무리 마력의 제어력이 뛰어난 마족이라도 이미 과거에 흑마법을 사용한 적이 있는 만큼 계집애의 마력은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거기에 온갖 흑마법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비전인 마법진을 사용해서 그 마력을 강제로 비틀어 짜내려고 했으니 사고가 벌어지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
나 또한 그 사실을 염려했기에, 그토록 서둘렀던 것이니까.
끄응, 난리 났군.
흑마법사가 완전히 마에 물들면 그 힘은 본래보다 몇 배로 늘어난다.
하물며 명색이 마왕이라 불리던 계집애가 그렇게 됐으니 이건 단지 나라 한두 개가 아니라, 그야말로 전 대륙급 재앙인 셈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당장 나부터 목숨을 보존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젠장. 이 일을 어쩐다.
나는 이를 악물고 진리의 눈을 펼쳐 눈앞에 놓인 모든 가능성을 찾아 헤맸다.
‘흑룡 휘장’을 사용한 방어 불가능, 미친 폭풍의 검 사용 불가능.
불가능. 불가능. 불가능….
그것은 무한대에 가까운 불가능.
도저히 답을 찾아낼 수 없을 마의 장벽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 가능성을 주는 절대 악운의 신기 ‘악령 흑심’이 있었고, 그렇기에 머리가 욱신거리며 검은 코피가 주르륵 흘러나올 때까지도 진리의 눈을 멈추지 않고 가능성을 뒤졌다.
불가능. 불가능. 불가능….
가능. 재검토. 가능.
…하아. 이런 빌어먹을.
수십만을 넘어 수천만에 달하는 검토 끝에 마침내 생존 가능성을 발견한 순간, 나는 절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것은 절망적인 계획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게는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콰직!
폭발의 충격으로 옆에 튕겨 나와 있던 ‘칠흑의 마수’를 집어 들고, 있는 힘을 다해 지면에 박아 넣은 뒤, 오른손을 왼쪽 가슴 위에 갖다 대고 빠르게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안전술식 접속. 1식에서 9식까지 안전술식 일제 해제.”
껍질에 둘러싸인 채 조용히 두근거리던 심장에서 아홉 겹에 달하는 자물쇠와 함께 마력의 사슬이 풀려 나가는 것을 느끼며 내가 ‘칠흑의 마수’를 움켜쥔 순간, 심장에서 일어난 기묘한 흡입력이 ‘칠흑의 마수’로부터 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크으윽…!
악마가 벼린 전설의 마검에 어둠의 봉인구가 더해진 탓인지 그 마력은 막대하기 그지없었지만, 내 심장은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구멍처럼 모든 마력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워 갔다. 끝내 ‘칠흑의 마수’가 산산이 깨져 나가며 손잡이의 흑진주만이 굴러떨어지는 가운데, 심장의 흡입력이 약해진 틈을 타, 나는 이를 악물고 주문을 영창했다.
“봉인구 접속. 봉인술식 연결. 제어술식 가동. 술식 역전.”
그 순간, 내 심장에서 돌아가던 하나의 수레바퀴가 우뚝 멈췄다.
그리고 그 수레바퀴가 서서히 반대편으로 돌아감에 따라, 다시 심장으로부터 토해져 나온 마력이 혈관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08주문 병렬연결. 1번부터 9번 술식 직렬연결. 금기 봉인 해제.”
두근!
과거 ‘데몬 소울’에서 내 스스로 심장에 박아 넣었던 서열 99의 악마.
탐식의 발샤크의 봉인구가 진동하며 터질 듯한 마력이 사지백해를 가득 채워 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마지막 주문을 영창했다.
“마도(魔道), 개방.”
108개의 주문이 맞물리며 9가지 술식으로 9가지 술식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렇게 조용히 감았던 눈을 떴다.
자아, 깨어나라. 탐식의 발샤크여.
마법을 넘어선 마술, 마술을 초월한 마도의 힘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