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72)
170마왕의 의지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감기에 걸린 것처럼 머리가 화끈거리면서도, 정신은 더없이 맑았고.
몸은 불이 붙은 듯이 뜨거웠지만, 그 열기는 오히려 몽롱한 쾌감이 되어 묘하게 나를 들뜨게 했다.
그렇기에 팔찌를 제외하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음에도 나는 부끄러움 대신 상쾌함을 느꼈다.
그런데도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이토록 기분 좋은 감각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마치 처음으로 하늘을 본 어린아이처럼, 혹은 성교의 쾌감을 알게 된 어른처럼, 또는 살인의 쾌락을 깨달은 살인마와 같은 즐거움에 취한 채, 나는 생각에 잠겼다.
세레나를 어떻게 죽여야 할까?
그녀를 죽일 수 없다는 걱정 따위는 없었다. 내가 부탁하면 그녀는 흔쾌히 죽어 줄 테니까.
보통 사람들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겠지만, 몇 번이나 사지를 헤쳐 온 영웅이자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는 세레나라면, 얼마든지 웃으며 죽어 줄 것이다.
그녀의 새하얀 목에 밧줄을 감아 조르거나, 아름다운 금발을 부여잡고 물에 빠트리거나, 목에 상처를 내서 피만을 뽑아내거나, 등 뒤에서 칼로 심장을 찌르거나, 은밀히 독약을 먹이는 등 여러 방법을 생각해 본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고통스럽고 미안한 방법이었고,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다.
차라리 남자 인간들을 몇몇 데려와서, 죽을 때까지 윤간을 시키는 쪽이 나을까?
그 모습을 무심코 상상해 본 순간, 나는 다리 사이가 저릿해지는 감각과 함께 황홀한 쾌감을 느꼈다.
언제나 고결하고도 아름답던 세레나가 더러운 사내들의 밑에서 허덕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한다는 배덕감이 나를 즐겁게 했다.
하지만 세레나는 싫어하겠지.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나는 머릿속의 생각을 지워 버렸다. 세레나가 그런 죽음을 좋아할 리가 없었고, 나는 세레나에게 가능한 한 즐겁고 만족할 수 있는 죽음을 주고 싶었다.
응, 역시 내 손으로 하는 게 가장 좋겠지? 나는 절로 흘러나오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내 불꽃에 그녀가 아름답게 변할 모습이, 그 황금빛 머리카락과 하얀 살이 타오르며 만들어 낼 불꽃에 대한 기대감이 나를 기분 좋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내린 후, 엉망으로 무너진 채 불타오르고 있는 공동 한가운데에 서 있는 너무나 무뚝뚝하면서도 반가운 얼굴을 보며 나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와 줬구나, 코드.”
그가 나를 구해 주러 올 것을 알았기에 당연히 놀람 따위는 없었다.
비록 그의 한 팔이 사라져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나를 구하기 위해 그가 치른 희생의 증거임을 알았기에, 나는 더욱 순수한 기쁨을 느꼈다. 세레나만 죽이면 이 사내는 내 것이 될 것이며 영원히 행복을 독점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이 나를 황홀한 쾌감으로 몰아 놓았다.
그때, 그런 나를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한 걸음을 옮기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본래 신과 악마는 대등한 존재인데도, 천 년 전의 전쟁에서 악마들은 신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둬 냈다. 본래 100명이던 신은 13명밖에 남지 않은 것에 반해, 108악마는 99마리나 남았다는 사실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 갑작스러운 이야기에도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내였으니까.
무엇보다 신들과의 싸움을 기억하고 있는, 그리고 신들을 산 채로 불태우는 재미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내게, 그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아나?”
“그야 악마들이 훨씬 강했으니까.”
너무나 쉬운 문제를 내는 그에게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는 눈썹을 살짝 치켜뜰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9명의 악마는 대체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하나?”
“……?”
뭐지, 이 느낌은?
갑자기 가슴에 오는 따끔거리며, 치밀어 오르는 불쾌한 열기에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마치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리는 듯한 감각이, 내 안의 무언가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는 말을 이어 왔다.
저벅.
“무참히도 학살당한 신들에 비해 108악마는 신과의 전쟁에서도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그런데도 108악마가 99악마밖에 남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그 9명의 악마를 또 다른 악마들이 먹어 치웠기 때문이다.”
…뭐?
그의 서늘한 눈이 내게 향한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 눈빛은 언제나와 같이 차가웠지만, 그런데도 이전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아니, 어쩌면 그 시선을 받는 내가 다른 것일지도 몰랐다.
저벅.
“불의 악마는 분노의 악마를 먹어 치웠고, 빙설의 악마는 고독의 악마를 먹어 치웠다. 어둠의 악마는 공포의 악마를 먹어 치웠으며, 재보의 악마는 탐욕의 악마를 먹어 치웠다. 그리하여 다른 악마들조차 초월한 힘을 갖춘, 신들을 학살할 힘을 가진 아홉 대악마가 탄생했던 것이다.”
아…!
아흔아홉 악마는 본래 한 가지 힘이나 욕망으로 그 마력을 품는다.
어떤 악마는 욕정을, 어떤 악마는 날개를, 어떤 악마는 질투를, 어떤 악마는 안개를.
하지만 아홉 대악마만큼은 ‘감정’과 ‘힘’을 함께 다스리며, 그렇기에 다른 악마들을 초월한 대악마로서 군림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나는 뜻밖의 진실에 놀라기에 앞서 마치 비밀이 탄로 난 듯한 불쾌감에 휩싸였다.
저벅.
“그 아홉 대악마의 힘이 있었기에 악마들은 신과의 전쟁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악마의 힘은 숫자에서 비롯되는 법. 악마학에 따르면 108은 끝없는 순환을 상징하는 절대 완전수지만, 99는 무한에 가까울망정 절대 완전에 도달할 수는 없는 무한 불완전수다. 그렇기에 ‘마술’을 손에 넣었을망정, ‘마도’를 잃어버린 악마들은 신들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도 고작 13명밖에 안 되는 신의 권능을 막아 내지 못하고 스스로를 봉인하기에 이르렀다.”
그 순간, 나는 신들에 대한 혐오감을 느꼈다. 힘으로 안 되면 그저 순순히 몰살당하거나 창부처럼 다리를 벌리고 목숨이나 구걸할 것을. 쓸데없는 짓을 저지른 신들 때문에 악마들은 오랫동안 잠들어 있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이토록 즐거운 기분도 모른 채 고통에 허덕이며 살아와야만 했다는 사실이 내게 짜증을 느끼게 했다.
저벅.
“하지만 아홉 대악마가 미처 간과한 한 가지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이 다른 아홉 악마의 힘을 흡수하기 위해 그들을 ‘먹어 치웠다’는 것이다.”
뭐…?
나는 그 뜬금없는 지적에 의아해했다.
그래, 그 힘을 먹어 치우기 위해서는 악마 자체를 잡아먹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악마의 힘을 얻기 위해 다른 악마를 ‘먹어 치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이다.
저벅.
“그렇다. 악마 중에는 아홉 대악마 자신들조차 모르는 숨은 동조자가 있었다. 힘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악마를 ‘먹어 치우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기 위해 그 죄악의 방관하고 도와준 악마. 그리하여 아홉 대악마가 아홉 악마를 잡아먹는 순간 그 쾌락을 훔쳐 낸, 그 때문에 너무나 많은 힘을 소진하여 바닥의 바닥까지 떨어지고만 서열 99위의 악마가 말이다.”
“탐식의 발샤크…!”
모든 악마 중에서도 가장 저열한 악마. 끝없는 탐식의 욕망만으로 가득하여 눈에 띄는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심지어 자신의 육신조차 먹어 치움으로써 먹어 치우는 행위의 구현과 같은 존재로만 남게 된 그 발샤크가, 우리의 동조자였다고?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고작 그런 저급한 악마 따위가 위대한 아홉 대악마에게 동조하여 그들에게 힘을 주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기 싫었다. 하여 그에게 반박의 말을 하려던 다음 순간 나는 얼어붙어 버렸다.
우우우웅!
갑자기 그로부터 터져 나온 그 막대한 마력. 그것은 마왕이라 불리던 나조차 놀라울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그 마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마를 상징하는 핏빛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나를 얼어붙게 하고 있었다.
“코드, 당신… 마족이었단 말이야?”
생각해 보면 그것은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마검자가 내게 했던 말대로 그가 우리 마족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면 자기 자신을 마족으로 개조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을 테니까.
오히려 나는 오랜 의문 하나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성력과 마력이 반발하지만, 코드의 성력이 내 마력과 반발하지 않고, 오히려 달래 주었던 이유. 그것이 바로 코드 본인이 마족이었다는 비밀에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저런 마력을 가질 수 있지?
그래, 발샤크의 탐식을 이용해 수십 년간 마력을 먹어 치우게 했다면 가능하다. 발샤크는 무한한 탐식의 존재, 그것은 곧 무한한 마력을 내포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즉, 발샤크를 저금통처럼 사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법이나 마술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을 초월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라기보다는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이듯 흘러나온 대답을 나는 무시했다.
미칠 듯한 행복감이, 내 머릿속을 황홀한 핏빛으로 채워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코드도 나랑 같은 마족이었구나.”
아아, 어쩜 이렇게 기쁠 수가.
그것은 그야말로 미칠 듯한 기쁨이고 환희였다. 내가 세레나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마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또한 마족이었다면, 내게도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벌레 같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 세레나보다는 같은 마족인 내가 사랑받을 게 당연하다.
아, 그럼 이제 세레나를 죽일 필요가 없네? 문뜩 깨달은 사실에 나는 안도감과 아쉬움을 함께 느꼈다.
내 손으로 세레나를 죽일 수 없다는 아쉬움과 세레나를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묘하게 뒤섞인 채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그 아쉬움을 떨쳐 냈다. 코드와 세레나, 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거야말로 내 가장 큰 행복이었으니까.
그것은 눈앞의 불꽃과 같은 행복에 취해 불꽃에 손을 뻗는 것처럼 모순된 생각이었지만, 나는 그 모순을 깨닫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코드의 손이 허공으로 펼쳐지며 굳게 닫혀 있던 입이 열렸다.
“용의 눈물은 바람에 얼어붙으니, 브리진의 슬픔은 눈보라. 가장 차가운 마음이 되어 북방을 뒤덮노라.”
“……!!”
콰드드득!
그 나지막한 영창과 함께 오싹한 눈보라가 사방을 뒤덮는 것을, 그리고 내 주변에 이글거리던 불꽃을 꺼트리는 것을 보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아홉 대악마의 힘을 썼기 때문이 아니다. 내 반의반도 안 되는 미약한 마력으로 마술급 힘을 발휘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가 나의 불꽃을 꺼트렸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당황하고 또 화나게 했다.
“무슨 짓이야, 코드!”
내 육신이나 다름없는 불꽃이 강제적으로 꺼진, 마치 뺨을 얻어맞은 듯한 모멸감에 나는 눈을 치켜떴다. 아무리 내가 그를 좋아한다지만 이런 모욕을 받아넘길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대답 대신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저벅.
“용의 손톱은 하늘을 찢으니, 아반의 기쁨은 번개. 가장 사나운 마음이 되어 천공을 가르노라.”
파지직!
“코드!!”
떨어져 내린 번개가 불꽃을 휩쓸며 마력 폭발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나는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코드가 상대라도, 더는 들끓는 분노를 견뎌 낼 수가 없었다.
화르륵.
숨결을 타고 일어나는 것은 황금빛 불꽃. 내가 용에게 받은 힘이자 숱한 신들을 불태운 분노의 불길을 나는 가차 없이 그를 향해 토해 냈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다리 하나쯤은 태워 줄 생각이었다.
그러면 그는 걸을 때마다 내게 몸을 기댈 테고, 그가 몸을 의지해 올 때마다 나는 더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불꽃을 마주하고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저벅.
“용의 뿔은 찬란히 빛나니, 크로멜의 탐욕은 황금. 가장 찬란한 마음이 되어 칠보를 빛내노라.”
퍼엉!
“코드…! 정말 한번 해보자는 거야?”
황금의 방패로 내 배려를 무시하는 코드의 만행에, 나는 머리가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는 배려마저 없는 분노와 함께 절대 그가 받아 내지 못할 불꽃을 만들어 냈다.
와라, 아르넬타의 불꽃이여!
지옥에 흐르는 화염의 강은 내 뜻에 따라 순식간에 공동을 불꽃으로 뒤덮어 갔다. 하지만 신조차 불태운 저주의 불꽃을 앞두고도 그의 눈은 여전히 빙하처럼 차갑기만 했다.
“용의 다리는 땅 위에 굳건하니, 하멜의 고집은 대지. 가장 끈질긴 마음이 되어 산맥을 지탱하노라.”
쿠과광!
지진이라도 난 듯 갈라진 대지의 틈으로 아르넬타의 불꽃이 송두리째 빨려 들어가는, 마치 강제로 옷이 벗겨지는 듯한 그 모욕감과 분노, 그리고 놀라움 속에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코드가 사용하고 있는 것은 99개의 주문에서 비롯된 마법이 아니었다. 비록 그 주문 하나하나는 수십 개의 쓰레기를 뭉뚱그려서 만들어 낸 한 개의 조잡한 조립품에 지나지 않는다지만, 그 안에서 풀려나오는 것은 분명 마술조차 넘어선 비의였다.
마족인 걸 넘어, 마도사(魔道師)이기까지 하다니….
코드, 대체 당신의 정체는 뭐야?
그것은 108악마가 99악마가 된 이후 악마들마저 잃어버린 힘이었지만, 발샤크가 아홉을 잡아먹는 것을 훔쳐 먹었다면 그 안에 악마들의 파편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미약한 파편을 찾아내서 다시 원래대로 하나의 형태로 모아 다른 99악마의 주문과 짜 맞춰서 마도를 복구해 냈다고?
저런 하찮은 마력으로?
그것은 나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게 마도는 없을지언정, 그와 버금갈 힘만은 있었다. 그 힘을 이용해 나는 다른 여덟과 함께 빚어낸 오직 나만의 무기를 지상에 불러들였다.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아름답게 빛나는 창, 숱한 신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아크베르넬의 마창을 나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집어 던졌다.
저벅.
“용의 혈관은 거세게 약동하니, 투본의 슬픔은 강물. 가장 서글픈 마음이 되어 대해로 흘러가노라.”
퍼엉!
공간조차 불사르며 날아간 화염의 창이 땅에서 치솟듯 일어난 홍수를 증발시키며 그 너머에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 모든 것을 불사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만족감을 느꼈다. 저 불길 속에서는 그 누구도 살아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이제 그를 흑마법으로 되살려 내기면 하면 된다.
그러면 이제 그는 나를 모욕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영원토록 나만을 바라보며 나의 사랑과 나의 명령만을 받는 나만의 노예가 되리라는 사실이, 나를 희열에 잠기게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모든 기쁨은 사라져 버렸다.
저벅.
그 몸 곳곳은 화상으로 가득했고, 특히 왼팔은 어깨 밑까지 잿더미가 돼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흔들림 없이 걸음을 옮겨 왔다. 누구도 막아 낼 수 없던 나의 창이 막혔다는 사실에 대한 불신, 마치 강제로 능욕당하기라도 한 듯한 충격, 그 외에도 온갖 감정이 마음에서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감정이 무엇인지 나는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공포.
1,000년 전 전쟁에서조차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을 고작 인간 따위에게 느낀다는 사실을 나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이제는 우리조차 잃어버린 너무나 거대한 악의를 품고 있는 그의 존재가, 나를 두렵게 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란 말이가?
대체 어떤 인간이 악마조차 넘어선 악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를 잃을 정도의 고통. 그것이 너의 악이라면.”
하여 내 앞에 우뚝 멈춰 선 그가 천천히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무한한 악의에, 존재 자체가 먹혀 버릴지 모른다는 공포에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힘없이 떨고 있는 내게 그는 그렇게 팔을 뻗어 왔다.
“너의 악의, 받아 가겠다.”
탁.
“……!”
뭐? 아? 으?
머리 위에 조용히 올려진, 그리고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을 나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무한을 가까운 삶을 살아온 내게는 생소한 것이었지만, 짧은 삶을 살아온 내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치밀어 오르는 기쁨이, 슬픔이, 아늑함이, 따스함이 나를 너무나 당혹스럽게 했다.
“말해 보아라. 아리스. 무엇이 너를 고통스럽게 하느냐?”
순간, 나는 전율을 느꼈다.
과거에도 나는 이런 적이 있었다.
빙설관 레닌을 가로막고 나의 고통을 씻겨 주기 위해서라면 세상과도 싸우겠다고 했던, 그리고 자신의 피와 목숨으로 나를 달래 주겠다고 말했던 그날의 기억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던 몸을, 차갑게 식힌다.
“코드, 난… 나는….”
이런 게 아니었어.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그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는지, 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달은 나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사과할 필요 없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뚝뚝한 음성과 함께,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나를 끌어안은 채 나지막이 주문을 영창해 갔다.
“용의 심장은 뜨겁게 맥동하고 용의 폐는 거세게 율동하니, 아넬의 분노는 홍염이고 세르의 절망은 질풍. 함께 어우러져 생명을 지탱한다. 그리하여 용의 비늘로 단단히 감싸니, 플랑의 좌절은 수림. 생명을 휘감아 모든 것을 지키고 온건히 키워 내노라.”
고작 3개의 주문을 비틀고 왜곡하여 독립적으로 만들어 낸 1,080개의 파생 주문. 그것을 다시 짜 맞춰 만들어 낸 108개의 주문은 너무나 조잡하고도 형편없어 누더기를 기워 놓은 것만 같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너무 강인하고 따스해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렇게 불꽃처럼 따스하고도 바람처럼 시원하게 모여든 마력이 한데 얽혀 들고, 그리하여 넝쿨처럼 나의 심장을 휘감아 들어 아크넬의 기운을 다시 봉인구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의 품에 안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