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27)
26영웅의 고민
찔러, 베고, 가른다.
불꽃처럼 일렁이는 검 끝에서 폭발하듯 피어난 혈화가 비가 되어 몸을 적셔 온다.
휘둘러진 검을 부수고 찔러 들어온 검을 피하며, 화살을 튕겨 내는 것은 이미 본능.
살고자 하는 의지가 아닌, 계속 검을 휘두르려는 집념이 빚어내는…. 검에 혼을 판 귀신의 속삭임.
수십일까, 아니면 수백일까.
수없이 많은 목을 베어내고 심장을 꿰뚫어 얻은 정적 속에 검귀는 절벽에 홀로 남은 자신을 본다.
그 누구도 함께하지 못할 고독한 검귀의 곁에 남은 것은, 오직 한 자루의 검뿐.
절벽 위에 꽂혀.
사나운 바람을 받으며.
묘비처럼 주인의 자리를 지키는.
그 피 묻은 검만이 검귀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회한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
눈을 떴을 때는 이른 새벽.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검을 수련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 속에 나의 손은 무심코 옆자리를 훑는다.
검 대신 쥐어진 것은 잘 개진 원피스.
그 부드러운 감촉 속에, 내가 이미 검을 버렸음을 실감했다.
그렇다.
나는 오늘부터 검사가 아니다.
단지 한 명의 여인일뿐.
하지만 시골 처녀라고 새벽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새벽부터 할 일이 많겠지.
일단 옷을 갈아입은 후.
잠시 고민에 잠긴다.
평범한 시골 처녀는 아침에 무얼 하는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으니까.
일단… 밥과 빨래 정도일까?
나는 마을로 가서 재료를 샀다.
제대로 요리를 배운 적은 없다.
하지만 홀로 여행한 경험이 많은 만큼 간단한 요리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끼익.
막 수프를 끓이려 할 때,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
작은 발소리를 따라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직 잠이 덜 깬 듯.
졸린 기색이 가득한 자색 눈.
그것을 한 손으로 비비며, 부엌으로 들어선 소녀는 걸음을 멈췄다.
언제 졸린 눈을 했냐는 듯.
차가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소녀.
그 안에 담긴 것은 명백한 적대감.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이라기에는 너무 날카로운 이 적의는, 무엇 때문일까?
“…뭐 해?”
“아침을 준비하고 있어요.”
주방을 힐끔 훑어보기를 한 차례.
소녀는 성큼성큼 주방에 걸어왔다.
그리고 냄비 앞의 자리를 차지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할 테니까, 가.”
“알았어요.”
나는 순순히 소녀의 말에 따랐다.
그의 가족이라면 소녀 역시 내가 빚을 갚아야 할 대상, 내게 그 뜻을 거부할 자격은 없었다.
대신 빵과 샐러드를 식탁에 차릴 때.
수프를 가지고 나온 소녀는, 탁 소리가 나도록 접시를 탁자에 올려놓고 나를 노려보았다.
“…….”
이 소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나는 곤혹감을 느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으니까.
답을 못 찾은 내가 침묵을 지킬 때, 방문이 열리며 그가 걸어 나왔다.
깔끔한 흑의 경장을 차림의 그는 식탁에 앉아, 차가운 눈으로 나와 소녀를 보았다.
“앉아라.”
“예.”
“알았어…요.”
소녀와 내가 자리에 앉자 그는 하나의 술병을 꺼냈다.
낡은 종이에 싸여 있는 싸구려의, 그러나 한없이 낯익은 술병에 나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데모니레인….”
죄수들이 만들기에 맛도 품질도 떨어지는 저급한 와인.
하지만 예전, 그는 종종 이것을 마셨다.
데모니레인에는 몸의 이물질을 녹이며, 독에 대한 저항력까지 길러 주는 성분이 있어 적정량만 섭취하면 영약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알기 이전부터, 나는 그를 따라 이것을 마시고는 했다.
“받아라.”
“제게… 주시는 겁니까?”
그가 하나의 술잔을 내밀자 나는 오랜만에 당혹감을 느꼈다.
10년 전, 그는 오직 홀로 술을 마셨다.
나는 단지 그것을 지켜보기만 했을 뿐.
그와 술잔을 나눈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10년 만의 한 잔을 혼자 들게 할 셈이냐?”
“…아닙니다.”
그래, 10년이다.
그와 헤어져 있던 기간이자, 마침내 다시금 만나게 된 시간.
나는 더 이상 어리던 훈련생이 아니고.
그 또한 경계해야 했던 교관이 아니었다.
10년 만의 재회를 축하하기에, 이 한 잔의 술만큼 어울리는 것은 없겠지.
“잃어버린 검을 위해.”
그의 무뚝뚝한 음성을 듣고,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두워진 시야 대신 떠오르는 것은 기억.
10년 전, 절벽에 꽂혔던 한 자루의 검.
누군가가 인간임을 버리고 한 명의 검사로서 죽어 가게 했던, 절대 잊을 수 없는 증거.
“잊어버린 시간을 위해.”
쨍.
가볍게 술잔을 마주치며.
나는 검붉은 와인을 내려다보았다.
10년 전 잃어버린 그 무언가를, 이 한 잔으로 되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약간의 위안은 되지 않을까?
잠시간의 머뭇거림 끝에 술잔을 입에 대려던 순간, 나는 거센 움직임을 느꼈다.
쨍그랑!
세차게 날아간 잔이 술병을 깨트리며, 데모니레인이 내 몸을 흠뻑 적셨다.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붉은 와인.
그 너머에 비치는 것은 날카로운 자줏빛 눈동자와 허공에 치켜든 작은 손.
…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녀가 원하는 바였기에, 나는 결국 순순히 그 손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내게 용서받을 자격은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외면한 채, 이것을 용서의 증거로 받아들이려 했던 스스로의 이기심을 깨닫고 환멸을 느끼는 내게 그는 나지막이 말을 흘렸다.
“씻고 오너라.”
“예.”
나는 그의 말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물을 채워 둔 욕조에 몸을 담그며.
조용히 상념에 잠긴다.
과거의 과오를 씻어 내는 것 따위, 어차피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임을 포기하고 검을 택한 그날부터, 나는 ‘검사’라는 이름의 ‘괴물’이 됐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내 안의 괴물을 잠재운 채 시골 처녀를 연기하는 것뿐이겠지.
촤아악.
욕조에서 나온 나는 물기를 닦았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자리로 돌아왔다.
소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엉망이 된 식탁과 무심히 벽난로를 주시하고 있는 그뿐.
나는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식사를 망쳐 죄송합니다.”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음성.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드러나지 않는 배려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몸은 괜찮은가?”
“예.”
스스로의 이기심이 부끄럽기 때문일까.
몸에서 약간의 열기가 느껴졌다.
차마 그것을 밝힐 수 없었기에 다만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문뜩 떠오르는 것은 은발의 소녀.
나의 어리석음과 추악함을 알려 준, 그 아름답지만 차가운 얼굴에 깃든 적의가 나의 마음을 아련하게 한다.
“아리스는 절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나로서는 이유 모를 적의.
그라면 그 해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내 속내를 꿰뚫어 보듯, 그는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아리스는 폐허에서 주워 온 아이다.”
“…그렇습니까?”
아아, 그래서….
그 자주색 눈동자도, 아름다운 은발도.
그의 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다르다.
오히려 눈치 못 챈 것이 이상할 정도.
하지만 이걸로 이해할 수 있었다.
혈혈단신이던 그에게 가족이 있는 것도, 소녀의 과민한 적대감도….
새로 알게 된 사실에 내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소녀가 새 수프 접시를 들고 나왔다.
수프를 내려놓은 소녀가 자리에 앉자, 그는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벽난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지막이 말문을 열었다.
“아리스. 같은 가족에게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
“……!”
그가 뭐라고 한 것인가?
비록 그의 곁에 머물며 같이 살지라도, 나는 어디까지나 외부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상상조차 못 했던 그 말이 나를 당혹하게 한다.
“세레나에게 사과하거라.”
엄하다 못해 무정하게까지 들리는 말.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끝에.
소녀는 내게 시선을 향했다.
뜻밖에도 그 자주색 눈동자에 불만은 없었다.
단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을 뿐.
“…미안해.”
“아뇨. 괜찮아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소녀의 눈에서 적의가 사라졌다는 것.
그 작지만 큰 변화가, 나를 평안케 했다.
하지만 그 편안함보다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 온기는… 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제야 식탁으로 고개를 돌린 그를 따라 한 입 떠먹어 본 수프는 조금 밍밍했다.
그런데도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단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따스한 수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