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28)
27마왕의 고민
수많은 마법이 빛을 번쩍인다.
부수고 터트리는 빛의 향연 속에 차오르는 것은 승리의 확신.
십만 대군이라도 상관없다. 어떤 병기도, 어떤 군대도 이 무한한 마력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
그 확신이 깨어진 것은, 그야말로 찰나.
주문이 부서지고.
마력이 흩어지며.
마법은 실패한다.
남은 것은, 다만 연약한 육신뿐.
단 하나의 존재에게 모든 것을 잃은 허무감과 절망감이 마지막 마력을 끌어낸다.
이어지는 것은 참혹한 폭발과 파멸.
지금은 이미 사라진, 어느 왕국의 최후.
“에취!”
한겨울 아침답게 쌀쌀한 공기.
왜 이런 아침부터 일어나야 하는지, 불만이 뭉클뭉클 샘솟았다.
솔직히 아침쯤 굶어도 상관없다.
감당하기 힘든 건 그의 차가운 질책.
늦잠 자느라 아침을 못 차렸다고 점심까지 굶기다니… 지독한 인간 같으니.
그래도 이제는 슬슬 익숙하다.
나는 눈을 비비며 메뉴를 고민했다.
어제는 감자 수프, 그제는 당근 수프였으니까, 오늘은 달걀 수프를 만들어 볼까? 생선이 있으면 생선 수프를 해 봤을 텐데.
끼익.
그렇게 고민하며 부엌문을 연 나는, 안을 본 순간 걸음을 멈췄다.
햇살처럼 눈이 부신 금발과 푸른 리본. 그리고 맑은 눈동자를 지닌 여인의 모습이 잠의 잔재를 깨끗하게 날려 버린다.
이 여자가 왜 부엌에 있는 거지?
“…뭐 해?”
“아침을 준비하고 있어요.”
스스로 생각해도 차갑게 들리는 질문에, 여인은 자연스럽게 답했다.
마치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듯.
겨우 어제 이 집에 찾아와 놓고선, 뭐가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 그러는 거지?
무언가가 울컥 치솟는 가운데, 나는 냄비 앞을 가로막으며 그녀를 바짝 쳐다보았다.
“내가 할 테니까, 가.”
“알았어요.”
여인은 선선히 부엌을 나갔다.
부엌에 남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요리 따위,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때려치우고 싶었을 뿐.
그러나 원래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내 일을 저 여자가 하는 것을 본 순간, 마치 내 권리를 빼앗긴 것처럼,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권리…라고?
나는 문득 국자를 쥔 손을 멈췄다.
의무와 권리를 착각할 때는 지났는데,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든 걸까?
그렇게 생각에 잠긴 와중에도 내 몸은 익숙한 대로 수프를 끓인다.
마음 같아서는 특별 조미료로, ‘미친 용의 눈물’이라도 넣어 주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이런 시골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으니까.
만약 있다면, 좀 고민해 봐야겠지만.
수프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을 때, 여인은 이미 빵과 샐러드 등을 차려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탁!
그 모습조차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일부러 접시를 세게 내려놨다. 그리고 여인을 노려봤다.
“…….”
호수처럼 깊고도 투명한 눈동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을 듯한 저 강인한 눈은 왠지 사내를 연상시켜, 더더욱 나의 마음을 답답하게 했다.
그때, 사내가 방에서 나왔다.
마치 여인과 내가 보이지 않는 듯, 사내는 눈길 한 번도 주지 않고 곧장 나와 여인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식탁에 앉은 뒤에야 우리에게 시선을 향했다.
“앉아라.”
“예.”
“알았어…요.”
나는 여인으로부터 시선을 뗐다.
사내의 말을 거부 못 해서만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지 새삼 회의를 느꼈을 뿐.
그때, 식탁에 올려진 거무튀튀한 술병.
아침부터 술이라니, 무슨 생각인 걸까 싶어 사내를 보던 내 귀에,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데모니레인….”
나는 그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잔잔하던 여인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안에서 언뜻 드러난 그리움을.
그녀는 알고 있는 걸까? 그가 이 술을 꺼낸 의미를?
내 의문이 무색하게도, 두 잔에 직접 술을 따른 사내는 하나의 잔을 여인에게 내밀었다.
“받아라.”
“제게… 주시는 겁니까?”
…의외다, 정말.
저 사내가 술잔 같은 걸 건네주다니.
변함없이 싸늘한 얼굴이기는 하다.
이 안면 근육 마비 환자에게, 어차피 그런 건 의미 없고.
때문에 직접 잔을 꺼내, 술을 따라 주는 그 ‘배려’가 더욱 의외로만 느껴졌다.
“10년 만의 한 잔을 혼자 들게 할 셈이냐?”
“…아닙니다.”
의외인 것은 나랑 마찬가지인 걸까?
잠시 머뭇거리던 여인은 조금 복잡한, 그러나 따스한 미소를 머금으며 술잔을 들었다.
“잃어버린 검을 위해.”
나직이 말하며 술잔을 내미는 사내.
잠시 그를 바라보던 여인은 곧 눈을 감고, 잔을 든 손을 내밀었다.
“잊어버린 시간을 위해.”
쨍.
나로서는 알지 못할 말.
하지만 두 사람에게 그것은 대화.
아니, 어떠한 교감 이상의 것이었다.
거침없이 술잔을 비우는 사내의 모습이, 그리고 평안한 얼굴로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는 여인의 모습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대체 뭐야.
왜, 내가 이런 걸 보고 있어야 하지?
정말… 짜증 나!!
마음에 쌓였던 응어리가 터졌다 싶을 때
세차게 휘둘러진 내 손은, 이미 그녀의 술잔을 쳐 내고 있었다.
쨍그랑!
튕긴 잔이 술병과 함께 깨져 나가며 흩뿌려진 술이 여인을 흠뻑 적셨다.
아름답던 금발은 축축하게 늘어지고 원피스는 몸에 달라붙어 속이 비쳤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된 여인을 보며 차갑게 웃는다.
하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흠뻑 젖은 몰골에도 불구하고 분노나 당혹감을 드러내기는커녕, 따스한 온기마저 담긴 푸른 눈동자.
그 흔들림 없는 강인함은 촉촉하게 젖은 금발과 몸에 달라붙은 원피스마저 추하기는커녕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씻고 오너라.”
“예.”
여인이 자리를 벗어난 뒤.
나는 오히려 답답함을 느꼈다.
그리고 천천히 사내를 돌아보았다.
깊은 의미가 있었을 술자리를 망친 내게 돌아올, 싸늘한 시선을 각오하고.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사내는 나를 보지 않았다.
단지 한 손에 빈 잔을 든 채, 공허한 눈으로 벽난로를 보았을 뿐.
나는 묻고 싶었다.
대체 그 술이 무슨 의미인지, 저 여자는 누구인지.
어째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허무한 눈을 하고 있는지.
하지만 그 모든 물음은, 이어진 그의 행동에 막혀 버렸다.
스륵.
머리에 닿은 손은 거칠고 투박했다.
그런데도 그 손이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 것을, 나는 막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막고 싶지 않았다.
“수프가 아깝게 됐군.”
깨어진 술병도.
버려진 술도.
그는 입에 담지 않았다.
내가 열심히 만든 수프를 언급했을 뿐.
감히 내 머리에 손을 댄다는 불쾌감도, 날 위로하려 든다는 분노도 없었다.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던 마음의 응어리가, 스르륵 풀어질 뿐이었다.
“… 수프, 다시 해 올게.”
굳이 수프를 다시 할 필요는 없었다. 빵과 샐러드는 남아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굳이 나선 이유는….
특별히 없다.
단지, 그러고 싶었을 뿐이다.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사내의 손을 머리에서 떼어낸 뒤, 나는 부엌에 들어와 냄비에 남은 수프를 끓였다.
안 그래도 부족하던 건더기가 아예 찾아보기조차 힘들게 된 밋밋한 수프가, 그에게 처음 배운 요리라는 걸 새삼 떠올리는 이유는 무얼까.
다시 끓은 수프를 접시에 담아 갔을 때.
식탁은 이미 깨끗하게 정리돼 있었다.
그리고 무심히 벽난로를 바라보는 그의 오른편에는, 하얀 원피스로 갈아입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여인을 바라보았다.
좀 전에는 보기만 해도 불쾌했는데 지금 내 마음은, 스스로가 신기할 정도로 평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리스. 같은 가족에게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
같은 가족…이라고?
벽난로를 보고 있던 사내의 예상 못 한 말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가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단어가, 내게 쓰이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내게 있었던 것은 왕국뿐.
가족 같은 건 없었으니까.
그게 바로 내가 짊어진 숙명이자, 운명이었고.
하지만 이제 왕국은 사라졌고, 내게는 숙명도 운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일까?
“세레나에게 사과하거라.”
나는 여인을 돌아보았다.
이유도 없이 꺼려지던 인간 여자.
그러나 이 여인도 나처럼 사내의 ‘가족’이라는 말을 들은 뒤부터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따스한 온기에 힘입어 나는 여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아뇨. 괜찮아요.”
여인의 부드러운 미소에 가식은 없었다.
지금의 나와 비슷한…. 아니, 거의 똑같은 온기가 묻어나는 미소가 그녀의 심정을 알려 준다.
그가 숟가락을 드는 것을 따라.
살짝 맛본 수프는 평소보다 밍밍했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만든 것 중, 가장 만족스러운 요리임은 분명했다.
어쩌면 내일부터는 아침을 차리는 게 더 즐거울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을 떠올리며, 나는 그렇게 ‘가족’과 식사를 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