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49)
48마왕의 곤경
용이 아직 남아 있던 먼 옛날.
신과 악마의 전쟁이 있었다.
불길의 강이 대륙의 십분의 일을 태우고, 바다에서 일어난 해일이 산을 집어삼키고, 대지가 갈라져 끝없는 계곡이 생겨나는 나날이 이어지길 수십 년.
대륙의 태반이 황폐해지고, 마지막 용이 사라지며, 숱한 신들이 죽어 나간 끝에 아흔아홉 악마들이 봉인됨으로써, 전쟁은 신들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악마를 봉인한 봉인구를 세상에 뿌리고.
신들은 치료를 위해 천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신들의 봉인은 완벽하지 않았다.
신들이 자신을 믿는 신관들에게 힘과 권능을 나눠 줌으로써 인간을 보살피듯.
악마들은 봉인을 비틀어 자신이 선택한 인간들에게 힘과 지혜를 전한 것이다.
그렇게 악마의 힘을 얻은 99명의 인간을.
사람들은 경외하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이능, 봉인구를 통해 악마의 힘을 사역하는 능력을 이렇게 칭했다.
‘마법’이라고.
“위대한 폭염의 지배자 아크넬이여.”
악마를 부르는 것은 힘을 끌어내는 의식.
스스로가 악마에게 선택받은 자이자, 악마를 사역함을 증명하는 주문이니.
그 과정을 통해, 본래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힘인 마력을 일깨울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대가 토해 낸 화염의 숨결.”
마력을 깨우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통제되지 않는 힘은 없느니만 못한 법.
하지만 마력을 다룰 방법은 주문뿐이며, 그렇기에 마법사의 능력은 얼마나 많은 주문을 습득했는지로 판별된다.
“강물을 말리고 바다를 끓게 만드는 폭염의 열기라.”
치이익―!
주문을 끝맺은 순간, 마력이 손끝에서 화살처럼 뻗어 나와 성 하나를 불태워 버릴 수도 있는 강대한 힘으로써 구현된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이 바로 그 마법의 결과물이었다.
좋아. 잘 익었어.
좀 전까지만 해도 차갑게 식어 있던.
하지만 이제 모락모락 김을 뿜어내는 당근 수프를 보며 내가 고개를 끄덕일 때, 부엌문을 열고 한 여인이 들어왔다.
예쁜 금발을 푸른 리본으로 장식한 미녀는, 호수 같은 눈동자에 곤혹스러움을 담아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제가 너무 늦었나요?”
“…아니.”
세레나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일이 불을 피우거나 하는 게 귀찮아 마법으로 수프를 끓인 내가 빨랐을 뿐, 그녀가 늦은 건 결코 아니었으니까.
내가 그렇게 답할 줄 알았다는 듯, 세레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머지 요리는 제가 하도록 할게요.”
“…그냥 내가 할게.”
“아리스가 모두 다 해 버리시면 제가 할 일이 없으니까요. 대신 식탁 준비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
나처럼 어린애를 상대하면서도, 결코 강압하지 않고 부탁해 오는 세레나의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에 나는 결국 그녀에게 나머지 요리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모르겠어.
대륙 서쪽 끝의 시골 마을 세이나르.
이곳에서 세레나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나라 하나 말아먹을 절세의 미모는 기본.
행동거지나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품격.
무엇보다 도적 수십 명을 베는 검술까지.
이 모든 것을 두루 갖춘 시골 처녀? 솔직히 시골 마을은커녕, 제국의 수도라도 세레나 같은 여인이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하지만 나는 그 의문을 꺼내지 않았다.
정체가 무엇이든 그녀는 내 가족이다.
게다가, 정체불명으로는 세레나보다 더한 인물도 있었으니까.
…그래, 이 사내라든가 말이지.
따스한 수프와 밀가루를 얇게 데친 빵과 말린 과일을 담아 둔 식탁에 앉아, 나는 힐끔 시선을 돌렸다.
싸늘한 눈과 무표정한 얼굴 때문인지.
흰색이 머리의 삼분의 일이나 됨에도, 전혀 노쇠한 느낌이 없는 사내.
무너진 왕국의 폐허에서 나를 구해 주고, 세레나를 이런 곳까지 찾아오도록 만든 이 인간 사내야말로, 내게는 최대의 의문 거리였다.
이 사내가 ‘쌍검자’의 후예라거나, ‘프리 나이츠’의 마지막 수장이라거나, 웃는 법을 모른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
그 외에는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이렇게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적은데, 가족으로서 함께 살 수는 있다니.
새삼 신기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사내의 옷자락이 벌어지며 그 안쪽에서 힐끗 드러난 하얀 붕대는, 내 모든 의문을 사그라지게 했다.
저 붕대에 감싸인 상처야말로, 나와 세레나가 저 사내의 가족이라는 더없이 분명한 증거였으니까.
딸칵.
그가 숟가락을 놓고 식사를 마치자 세레나는 빈 접시를 부엌에 가져갔고, 나는 찬장에서 약 단지를 꺼내 들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집안일을 함께해 오며, 자연스럽게 역할이 나눠진 행동이었다.
하지만 약 단지를 열어 본 순간.
나는 그대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원래 약이 들어 있어야 하는 단지 안이 텅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약… 떨어졌구나.
나는 눈앞이 막막해지는 것을 느꼈다.
28대지에 서는 자의 계략에 당했을 때도, 홀로 적월의 육 기사를 상대했을 때도, 이토록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결국 이긴 것은 나였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
고작 텅 빈 약 단지 하나가, 나를 막막하게 하고 있었다.
…어쩌지?
사내의 부상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검에 찔린 데다가 화상까지 입었으니까.
꾸준히 치료해서 좀 나아졌다고는 해도, 아직 약을 끊기에는 시기상조였다.
한참의 고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해답도 찾아내지 못한 나는, 결국 식탁에 앉아 있던 사내 앞에 텅 빈 약 단지를 내려놓았다.
“약이 떨어졌나.”
“…….”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두 마디 말을 내뱉는 사내를 보며,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상처를 치료할 약이 바닥났는데 이토록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니.
이 사내에게 감정이라는 게 있기는 할까?
덕분에 사내의 몫까지 걱정을 맡은 듯한 스스로도 이유 모를 초조함 속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약, 구해 올게…요.”
냉정하게 생각하면.
굳이 내가 약을 구해 올 필요는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가 알아서 할 일이고, 그에게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부상에는 내 책임도 있다.
무엇보다 이 사내가, 고작 이런 상처 따위로 힘겨워하는 모습 따위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사내를 대신 약을 구해 오려 했다.
그러나 그런 나의 결심은, 사내의 말에 그대로 부서졌다.
“그럴 필요 없다.”
“하지만, 상처가 아직 안 나았잖아…요.”
“내 상처를 신경 쓸 여유가 있다면, 그동안 요리 공부나 더 열심히 하도록 해라.”
“내 요리가 어때서…요?”
나는 무심코 언성을 높였다.
고기, 야채, 버섯, 계란, 크림까지.
최근 요리의 폭을 넓혀 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냉혹한 답변은 나의 입을 다물게 했다.
“사람이 하루 세끼 수프만 먹고 살 수는 없다.”
“…….”
확, 마법이라도 날려 버릴까?
주먹을 바르르 떨길 잠시.
나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수프 요리밖에 못 하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모처럼 걱정해 주는 사람한테 이렇게 냉정한 말밖에 하지 못하는 걸까, 이 사내는?
“…마을, 다녀올게…요.”
나는 사내의 옆을 쌩하고 지나쳤다.
그리고 바구니를 챙겨 집을 나섰다.
어차피 장을 봐야 하기도 했지만, 이대로는 화를 참다못해 집이든 숲이든 날려 버릴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집을 나선 뒤,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돈… 안 가져왔구나.
화가 나서 곧장 나온다는 것이, 돈마저도 안 챙겨서 나왔던 것이다.
물론 약을 사다 줄 생각은 없지만, 장만 본다고 하더라도 돈은 필요했다.
다시 돈을 받아 오기에는 자존심이 상한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이런 진퇴양난의 상황에, 마을을 서성거리던 나는 또 하나의 의문에 잠겨 들었다.
왜 약을 구할 필요 없다고 한 걸까?
냉정한 사내지만 이유 없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하물며 아직 치료도 안 끝난 처지에, 약을 구하지 않는 이유가 뭔지.
고민에 잠겨 있던 내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왜 그러고 있는 거냐. 아리스.”
…이런.
여관의 문짝을 떼어 내던 중년인, 벤을 본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마을을 서성이다가 여관까지 온 것이다.
안 그래도 고민에 잠겨 있는 상황인데 참견꾼인 벤을 만난 게 내키지 않았다.
아니, 잠깐.
나는 생각을 전환했다.
어차피 혼자 해결하기 힘든 고민이라면,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으니까.
“벤, 아픈 사람이 약을 필요 없다고 하는 건 무슨 경우야?”
“으응?”
벤은 내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턱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글쎄다.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약이 소용없든가, 아니면 약을 살 돈이 없든가.”
…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집을 사고 옷을 새로 장만하는 등.
생각해 보면 사내는 많은 돈을 사용했다.
아무리 ‘프리 나이츠’의 수장이었더라도 ‘프리 나이츠’가 해체되던 와중에 자금을 챙기진 못했을 테니, 재정적인 부담을 느낄 만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돈 때문에 약을 사지 않는다고?
“약, 비싸?”
“음? 으음. 글쎄다. 약술사가 있는 큰 도시나, 약초가 많이 나는 마을이라면 몰라도 이런 곳에서는 꽤 비싼 편이지. 더구나 시기도 시기니… 종류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약 한 봉지면 대략 이 정도 될 거다.”
…농담이지?
대략적인 약값을 들은 뒤,
나는 벤을 불신 어린 눈으로 보았다.
시세에 익숙하지 않던 전이라면 몰라도 달걀값까지 익숙해진 지금의 내게, 그 가격은 농담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벤은 농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약이라는 게 우리 마을같이 외진 곳에나 수요가 있지 어지간한 도시 같은 곳이면 신전을 찾아가서 치료를 받으니 별로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다. 약을 만드는 약술사들도 치료 약 같은 것보다는 부자들 보약이나 지어 주는 게 돈벌이가 되니, 워낙 치료 약이 드물어서 약값이 비싼 거지.”
“…….”
논리정연한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태생부터가 신전과 적대적이었기에, 약을 썼던 ‘로드 오브 킹덤’과 달리, 일반인들은 아프면 일단 신관을 찾는다.
성력은 가장 싼 만병치료 약이니까.
그런데도 그는 신관을 찾아가지 않았다.
부상으로 거동이 불편해도 마차를 빌리면 신전에 갈 수 있는데.
굳이 비싼 약으로 상처를 치료해 가면서, 집에서 요양하는 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로드 오브 킹덤’의 생존자인 내가, 만에 하나라도 신관과 마주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바보같이.
돈이 부족해서 약도 사기 힘든 주제에 고작 나 같은 계집애를 배려한답시고 묵묵히 부상을 끌어안고 있던 그에게 내심 한마디 말을 속삭이며, 나는 벤을 돌아보았다.
“약, 있어?”
“글쎄. 상처에 바르는 약 정도는 있다만… 아, 그러고 보니 코드 씨가 도적들 때문에 다쳤다고 했지?”
나는 살짝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 사내가 도적 소굴에 뛰어든 것도.
그곳에서 큰 화상을 입게 된 것도.
모두 나 때문이라는 사실이, 왠지 마음을 무겁게 했다.
“흐음. 미안하지만 아무리 아리스 너라도 그냥 약을 내주기는 힘들구나. 이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상비약이기 때문에, 소비되면 되는 대로 바로 사 놔야 하거든.”
“…그래?”
벤의 대답에도 나는 실망하지는 않았다.
공짜로 약을 받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고작 돈 몇 푼 때문에, 약을 살 수 없다는 현실은 나를 갑갑하게 했다.
그런 내게 벤은 뜻밖의 제안을 내놓았다.
“그럼 외상으로 하면 어떠냐?”
“외상?”
“그래. 일단 약을 줄 테니 대신 아리스 네가 그만큼 우리 여관에서 일해 주면 된다. 마침 여관도 새 단장 중인 데다, 얼마 뒤에 방랑 상단이 올 예정이라 일손이 필요했거든.”
벤의 제안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사내의 약을 사기 위해 일해야 할지.
그것을 과연 사내가 승낙해 줄 것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망설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면 돼?”
반승낙이나 다름없는 내 질문에, 벤은 씨익 웃어 보였다.
왠지 좀 음흉하게까지 느껴지는 표정.
그걸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나는 이어진 벤의 반문에,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손님 접대, 할 수 있겠니?”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