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62)
61마왕의 절망(1)
세상의 누구도 두려워한 적 없다.
어떤 전투에서도 물러난 적 없다.
그렇지만 그 장소에서 나는 도망치고 있었다.
마구간으로부터. 공포로부터. 나 자신으로부터.
들키고 말았다. 보이고 말았다. 피하고 말았다.
내가 마족이란 사실을, 피를 빨아 먹는 모습을, 숨겼던 추악한 본성을.
얼마 달리지 않았는데도 숨이 막히고 심장이 요동쳐 온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아니, 절대 멈출 수 없다.
차라리 목이 찢어지고, 심장이 터지는 게 낫다.
왜냐하면, 그를 봐선 안 되니까.
왜냐하면, 그를 볼 수 없으니까.
나의 추악한 정체를 안 그의 눈동자가 경멸과 혐오로 물드는 것을 보면 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기에.
나를 구해 주고, 도와주고, 받아 주었던.
그를 지금까지 속였던 것을 들키고도 더 이상 그를 마주할 용기가 없기에.
탁탁탁.
달리고, 달린다.
어디든지 좋다.
그가 있는 이 마을만 아니라면,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콰당!
발이 뭔가에 부딪히며, 세상이 뒤집힌다.
잠시 후에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을 깨달았지만, 까진 무릎과 팔꿈치의 통증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아픈 것은… 가슴.
너무 달렸기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었다.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각오한 순간부터, 내 심장은 조여 오기 시작했으니까.
이제 그 거친 손을 잡을 수 없다.
이제 그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제 그 차가운 눈동자를 볼 수 없다.
그 단순하면서도 잔혹한 미래가, 나를 괴롭게 한다.
“모든 것은 신의 섭리일지니….”
땅에 무릎 꿇을 꿇은 채, 가슴을 움켜쥐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한 줄기 냉혹한 음성과 함께, 골목길의 끝에서 모습을 드러낸 순백의 인영이 마음속에서 분노와 절망을 불러들인다.
“마여, 겨울바람 속에 잠들 때가 왔소.”
나지막이 말을 끝맺으며 미끄러지듯 거리를 좁혀 오는 놈.
이를 악물고 마력 장벽을 일으킨다.
견딜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두 호흡.
그사이 다른 주문을 외우지 못하면, 죽음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늦기 전에 주문을 영창하려던 순간.
놈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뭐지?
내가 의구심을 느낄 때.
바람처럼 허공으로 가르며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선 하나의 인영이, 놈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더 이상 제 가족에게 손을 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세레나….”
평소의 미소나 따스한 음성 대신 예리한 눈빛으로 놈을 쏘아보는 여인 세레나를 보며 나는 신음을 흘렸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좀 신비하지만 아름다운 시골 처녀가 아님을.
적월의 육 기사와도 비교할 수 있을 만한 일류 검사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의가 아니오. 그래도 그 길을 가시겠소?”
놈의 엄숙한 말에, 나는 입술을 깨문다.
그렇다.
마란 감싸는 것도, 돕는 것도, 심지어 동정하는 것조차 안 되는 존재.
그 금기를 어기면 누구든 파멸하게 될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막아야만 한다.
세레나가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도, 놈은 ‘겨울 폭풍의 세례’의 극을 이룬 자.
맨손으로 검자와도 버금가는 저 괴물을, 검사 혼자 상대하다니.
죽은 광검자가 살아 돌아온다면 모를까.
그 외에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한 줄기 음성은, 내게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했다.
“설사 마라고 해도 아리스는 분명한 저의 가족입니다. 그리고 가족을 버리는 것은, 저의 정의가 아닙니다.”
아….
그것은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릴지라도 절대 꺾이지 않을 강인한 신념이고 의지.
난공불락처럼 단단히 쌓은 마음의 벽에 작게나마 금을 가게 만드는 말의 화살에, 나는 그녀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것이 그대의 뜻이라면….”
조용히 한 발을 내밀며 양팔을 들어 기수식을 잡는 놈과 그에 대응해 검을 수평으로 드는 세레나.
입 안의 침이, 바짝 말라 온다.
검술이나 체술에 대해 잘 모르는 나조차 본능적으로 숨소리를 죽이게 만드는 기세라고밖에 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들 사이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우르릉!
툭…투두둑.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먹구름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빗줄기.
그 첫 번째 빗방울이 세레나의 검 끝에 닿는 것을 기점으로, 정적은 가차 없이 깨져 나갔다.
채앵―!
“……!”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싶은 순간.
놈의 앞에 나타나 검을 휘두르는 세레나.
그것을 본 나는 신음을 삼켰다.
잔영만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검과 권각을 교환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안 가는 인지를 초월한 싸움을 지켜보며 내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단 하나.
‘지상 최강의 인간’이라 불리는 빙설관.
레닌을 상대로, 세레나가 백중세의 접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이럴 수가…!
놈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던 만큼, 나는 이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일인지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로드 오브 킹덤에 속했던 수백의 용병, 그리고 수십 명의 검사를 동원하고도 발목조차 잡지 못한 놈이었다.
그런 레닌을 혼자 상대하다니.
대체 세레나의 정체는 뭐지?
검자라도 되지 않는 한, 저놈과 싸우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인데….
…그래, 검자가 아닌 이상은….
그제야 한 줄기 실마리를 잡은 나는, 오히려 더 깊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세상에 현존하는 검자는 극소수뿐.
그나마도 많은 소문이 과장되기에 실제로 일당백의 실력이 있기는커녕, 실존하는지 의심스러운 검자조차 있다.
마검자만 하더라도 정말 실존하는지 의심하는 이들도 많으니까.
그 몇 안 되는 검자 중 여성.
그것도 고작 20대에 불과한 검자라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 명뿐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다른 검자도 아닌 ‘그녀’가 이런 시골에서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면서 시골 처녀처럼 지내 왔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니까.
퍼엉―!
내가 상념을 헤매는 사이.
빗방울을 폭풍처럼 흩뿌려 내며,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공방을 교환하던 놈과 세레나가 폭음과 함께 양쪽으로 떨어져 나왔다.
원피스가 칼로 벤 듯 잘린 세레나와 왼쪽 소매에서 붉은 핏방울을 흘리는 놈.
그 모습은, 좀 전의 접전에서 이득을 본 것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보여 준다.
저 레닌을 상대로 상처까지 입히다니.
‘그녀’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세레나가 ‘그녀’라면, 어쩌면 레닌을 이길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거리를 본 순간, 나는 다급히 경고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
영웅&마왕&악당 [3권]
지은이 무영자
발행일 2020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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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90769-52-5 [05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