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28)
128화 – 아르나드.
턱 밑까지 차올랐던 죽음.
그러나 타오르는 불꽃이 나를 살렸다.
최후의 순간 간신히 되돌아온 마기와 혼신을 다해 펼친 반격기.
그랜드 크로스가 클라리스의 공격을 되돌리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새삼 발두르를 얻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아마 다른 검을 들고 있었더라면 훨씬 더 힘들었을 거다.
검은 부러졌을 테고, 나 역시 큰 충격을 입었을 테니까.
“그래, 대단하긴 하군.”
그러나 당장의 위기를 넘겼다고 해서 상황이 반전된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나 치명적인 공격이지 클라리스의 입장에서는 적당히 힘 빼고 쏘아낸 공격일 뿐이니까.
콰앙!
아니나 다를까. 클라리스는 내 회심의 반격을 어렵지 않게 부숴버리고 있었다.
상처를 입기는커녕 옷에 먼지 하나 붙지 않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확실히 용사는 용사인가 보구나.”
하기야 클라리스의 실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솔직히 그녀가 마음만 먹었으면 이 싸움은 진작 끝나고도 남았을 거다.
그만큼 클라리스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뒤집을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제 알았겠지?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도 저항하겠다는 거냐?”
“그러는 나야말로 묻고 싶군.”
나는 검을 든 채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새어 나오려는 감정을 억누른 채 소리쳤다.
“왜 그 아이를 죽이려는 거냐. 너 역시 파라켈수스의 희생자라면 그 아이의 고통과 슬픔을 알 거 아니냐.”
사적인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데이브 클락에게는 그 자격이 없었으니까.
분노건 슬픔이건, 하다못해 그리움이건 간에.
이 감정을 털어놓는 건 어디까지나 벨제뷔트의 몫이다.
“개인적으로 동정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행히 클라리스는 내 감정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이상은 아니라는 거군.”
“관심이 없다는 게 맞겠지. 연금술사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것. 예나 지금이나 내 관심사는 그거 하나뿐이니까.”
그나저나 한숨이 나오는 대답이다.
내가 알던 그녀였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말.
“클라리스 아르나드.”
“또 그 이름으로 날 부르는군. 애초에 아르나드가 무슨 뜻이지?”
“네가 잃어버린 이름이지.”
“..글쎄. 썩 신뢰가 가는 말은 아니군.”
그렇겠지. 지금 네 눈에 보이는 나는 고작해야 수십 년을 살아온 애송이에 불과할 테니까.
그런 내가 무려 수천 년을 살아온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다니.
그야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하지 않겠나.
“마왕성에 가본 적 있나?”
“아니, 그런 적 없다. 관심도 없고.”
“기억을 잃어버리긴 한 모양이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정립되지 않은 이야기 속, 분기점이 찾아왔다.
아마도 여기서 내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뀌겠지.
어쩌면 이 위기를 넘길 수도 있을 테고, 반대로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을 거다.
‘지금의 나로선 클라리스를 이길 수 없어. 아무래도 마족들한테 이 짐을 좀 덜어내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일단은 눈앞에 닥친 위기부터 해결하고 봐야 할 것 같다.
마족들에게는 미리 사과해 두자.
물론, 의도한 대로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마왕 벨제뷔트에게 네 모습을 보여라. 네가 잊고 있던 기억을 되찾을 수 있게 될 테니까.”
“..그게 저 꼬마를 살려두는 거와 무슨 상관이지?”
“오히려 묻고 싶군. 기억도 없는 주제에 뭘 믿고 저 아이를 죽이려는 거지?”
“궤변이군. 상황을 모면하려는 게 뻔히 보여.”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그녀의 말처럼, 나는 지금 내 생존을 위해 마족을 팔아넘기고 있었으니까.
“..지나치게 솔직하기도 하고.”
“속이는 게 의미가 없다면 속일 필요가 없지.”
“그러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냐고 묻는 거다.”
나는 클라리스의 말에 행동으로 답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꼬마를 기절시켜 금속의 정령을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우리는 정령의 제작을 저지하고 싶다.”
“..인공 정령을 말하는 건가?”
그런데 설마 인공 정령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건가?
확실히 그동안 연금술사를 쫓고 있던 만큼 알고 있는 게 꽤 많은 것 같다.
“인공 정령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 놈들의 목적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는 거군.”
“..그래.”
“네 말은 잘 알겠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아무래도 이쯤 되니 그녀 역시 내 말에 납득한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야.”
그런데 어째 납득만 한 것 같은데?
그녀의 검이 다시금 겨눠진다. 검에 담긴 살의가 심장을 찔러 든다.
절로 막막함이 드는 순간이다.
이길 수 없다는 확신이 머릿속을 물들인다.
설마 여기까지인가?
‘그렇겐 안 되지.’
아니, 포기하기엔 이르다.
설득이 먹히지 않은 건 아쉽지만 나 역시 순순히 죽어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나는 그대로 발두르를 들어 올렸다.
보랏빛으로 물드는 검. 검 위로 석양이 덧칠된다.
“..그 검은 뭐지? 너는 마족이었나?”
그런데 어째 황혼검을 보는 클라리스의 표정이 묘하다.
설마 검에 깃든 마기를 알아본 건가?
확실히 파라켈수스와는 수준이 다르군.
“하프 데몬이다. 엄밀히 따지면 마족도 인간도 아니지.”
“..뭐라고?”
왜 저렇게 놀란 얼굴을 하는 걸까.
아니, 아무래도 놀란 것만이 아닌 모양이다.
여명의 빛이 사그라드는 그녀의 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 말, 거짓은 아니겠지?”
그녀는 드물게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얼떨떨할 수밖에 없는 반응이다.
“이 마기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거냐?”
“하긴.. 평범한 인간이 마기를 사용할 수는 없겠지.”
클라리스가 수긍한 듯 검을 거뒀다.
간신히 끌어모았던 각오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그렇게 대화하자고 할 때는 들어먹지도 않더니?
애초에 내가 하프 데몬인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히려 전직 용사였던 그녀라면 나를 죽이려 드는 게 정상 아닌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지?”
고민 끝에 내뱉은 질문에 클라리스는 침묵했다.
생각이 깊어 보이는 얼굴이다.
“..하프 데몬인 것치곤 인간과 썩 다르지는 않군.”
“그야 몸 자체는 인간이니까.”
“그래, 어쩌면 그래서 파라켈수스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감시라고? 파라켈수스가 하프 데몬을 감시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래, 파라켈수스는 너희 하프 데몬의 탄생을 두려워하고 있다.”
“도대체 왜?”
“이유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파라켈수스는 지난 이천 년간 꾸준히 마족과 이종족의 혼혈들을 살해해 왔다. 아마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 거겠지.”
나는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놀라 입을 벌렸다.
설마 파라켈수스 그 자식, 3천 년 전의 그 사건 이후로도 하프 데몬을 죽여왔단 말인가?
심지어 인간만이 아니라 이종족과의 혼혈에게도?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설마 삼천 년 전의 그 사건은 단순히 인간과 마족의 싸움을 일으키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건가?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허나 단 하나 분명한 것이 있다면, 너라는 존재는 분명 파라켈수스에게 독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는 건.”
“그래, 이번 한 번만, 너의 말을 믿어주마.”
이 말을 듣고 안심을 해야 하는 건가 자존심이 상해야 하는 건가.
한때 호적수라 불렸던 이에게 자비를 구걸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새삼 내 삶이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 든다.
“빛의 정령을 찾으러 간다고 했나? 그럼 어디로 가려는 거지?”
“흰 모래의 마경. 백사 지옥이다.”
“..죽고 싶은 거면 말하지 그랬나. 멀리 갈 필요 없이 이 자리에서 죽여줬을 텐데.”
“농담하는 게 아니다. 생각해 봐라. 흔한 곳에 있었다면 우리보다 네가 먼저 발견하지 않았겠냐.”
“..그것도 그렇군.”
내 말을 한동안 곱씹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나야 고작 몇 년 정도를 쫓고 쫓겼을 뿐이지만, 클라리스의 추격은 단위 자체가 다르다.
무려 이천 년간, 벨제뷔트의 인식 밖에서 벌어지던 모든 사건에 개입해 온 것이다.
그런 그녀가 모르는 아지트라면 위치가 한정될 수밖에 없다.
“이만 가봐야겠다.”
“저 꼬마는 두고 가. 노드릭이 찾던 퀸의 육체가 아무래도 저 꼬마의 안에 있는 것 같으니까.”
“..딱 그놈이 할법한 짓이군.”
클라리스는 가볍게 혀를 차며 떠나갔다.
“에휴.”
그래도 어찌저찌 견뎌내긴 한 모양이다.
나는 검을 집어넣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직하게 토해지는 한숨.
“거 참 드럽게 힘드네.”
아무래도 하루라도 빨리 그랜드 마스터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억울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 * *
간신히 버텨낸 하루.
그런데 어째 조르디네스의 반응이 묘하다.
왜 아까부터 나와 눈을 못 마주치고 있는 거지?
“..야, 그 꼬마 어딨냐?”
가만 보니 조르디네스에게 맡겨두었던 꼬마의 모습도 보이질 않는다.
분명 잘 데리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던 것 같은데.
설마 놓친 건가?
“그게.. 갑자기 눈이 아파서.”
“..뭐?”
“..미안하다.”
설마 저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나는 설마 했던 조르디네스의 배신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라나라고 했던가? 그 아이를 보는 순간 갑자기 눈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더라고.”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던 조르디네스가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니 또 납득하지 못할 내용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신룡의 눈이 반응했다는 건 또 무슨 소리지?
신룡이 언제부터 아르카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단 말인가.
‘가만, 어쩌면..’
나는 불현듯 드래곤과 연금술사 간의 약속을 떠올렸다.
신룡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이뤄지지 않았을 불공정한 약속.
“어쩔 수 없지. 우선 저 꼬마와 이야기해 보자고.”
그러나 민감한 이야기를 하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저 눈이 있는 한, 신룡 역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을 테니까.
어쩔 수 없지. 나는 짐짓 모른 척 넘어가며 꼬마에게 다가갔다.
그나저나 노드릭 저 녀석.
아까 전부터 넋이 나간 것만 같은 얼굴로 꼬마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 심경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정신을 잃어버린 꼬마의 모습을 보니 확실해진 사실이 있었다.
뱀파이어 퀸, 라이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저 이름 모를 꼬마와 완벽하게 합쳐지고 만 것이다.
“아르카나의 그릇. 그런 거였군.”
“데이브, 그게 무슨 뜻이야?”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아르카나를 담는 순간 터져버리겠지. 하지만 완충재가 있다면 어떨까?”
“그래서 뱀파이어를 잡은 거구나..”
니콜라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전에 말한 것처럼 뱀파이어의 힘만으론 아르카나의 힘을 견뎌내지 못할 거다.
그렇기에 파라켈수스 역시 지금까지 이 꼬마를 그릇으로 쓰지 않았던 걸 테고.
그리고 그런 파라켈수스가 이제 와서 이 꼬마를 꺼낸 이유는 아마..
“결함품.”
“..라나.”
“아르카나는 그 아이를 그렇게 불렀어요.”
“..아르카나와 대화한 거냐?”
내 질문에 라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필이면, 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상하군. 지금까지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어째 아르카나에 대한 구속력이 점점 약해지는 기분이다.
아무래도 라나를 조금 더 면밀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물론, 니콜라스라는 억제력이 있는 한 아르카나가 완전히 각성하는 일은 없겠지만..
‘척마의 가호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위협적이지.’
무엇보다 라나 스스로 그 힘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조금 전의 라나는 빈말로라도 정상이라 보긴 힘들었으니까.
“아저씨. 그 아이.. 곧 죽을 거예요.”
“그래, 저번에 보니 태양 빛에 약한 것 같았으니 주의해야지. 곧 태양이 뜰 테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시한부라는 건가?”
라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꼬마의 얼굴을 쓸어내린다.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정신을 잃고 있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라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파라켈수스는.. 이 아이를 죽이려고 보낸 걸 거예요. 이프리트를 찾으라고 한 건 그 전에 조금이라도 더 써먹기 위해서였겠죠.”
“파라켈수스가 이 아이를 죽일 이유가 있던가?”
“그건 아마..어?”
대화를 하다 말고 일어서는 라나.
고개를 돌려보면, 줄곧 기절해 있던 꼬마가 눈을 뜨고 있었다.
“아르카나!”
꼬마가 라나에게로 손을 뻗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