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not a hero, he's a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83)
183화 – 봉인(2)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린 남자.
새하얀 백골이 몸을 일으켜 세운다.
교차하는 시선 속, 파라켈수스의 눈빛에 의혹이 서린다.
“넌 대체 누구지?”
“폴 뷔마.”
“..모르는 이름이군.”
폴이 스스로를 소개했음에도 의혹은 여전했다.
하기야 파라켈수스로선 당연한 일일 것이다.
수백만을 넘어선 실험체의 이름들을 일일이 기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날 모르는 건가? 서운하네 정말. 나는 이날만을 기다려 왔는데.”
물론 지금까지 몰랐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아니, 아마도 파라켈수스는 죽는 날까지 폴의 이름을 잊지 못할 테지.
폴의 양 손바닥이 파라켈수스를 가리킨다. 하늘을 물들이는 어둠.
짙은 장막이 파라켈수스의 눈을 가린다.
그를 구속하던 사슬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한 건 그와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니, 자세히 보면 강해진 건 사슬이 아니다.
“빛의 정령이..”
이 순간, 파라켈수스는 제 몸속의 정령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차마 손 쓸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바알..그 작자가..!”
파라켈수스가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 어둠의 정령. 배신을 준비하고 있었던 건 그만이 아니었다는 거겠지.
확실히 오랜 시간을 견뎌온 적답게 뼈가 아픈 반격이었다.
“하지만 이게 전부라면 실망이군. 고작 이 정도로 나를 쓰러트릴 작정이었나?”
그러나 아직 좌절할 필요는 없었다.
설령 빛의 정령이 약해졌다 해도 그에게는 아직 두 정령의 힘이 남아있었으니까.
“그럴 리가.”
문제는 폴의 공격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까드득.
적막한 가운데, 무언가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폴의 명령에 따라 쓰러졌던 친위대장의 시신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몸을 일으키는 무수한 해골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별짓을 다 하는군..!”
파라켈수스의 손이 뻗어진다. 내뿜어진 독이 언데드들의 전신을 뒤덮는다.
아무래도 이대로 시신을 녹여버릴 작정인 것 같다.
“..이게 무슨.”
그런데 어째서일까. 놀랍게도 언데드들은 파라켈수스의 독을 덤덤히 견뎌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어둠이 독을 막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아아아아아!”
그러나 언데드들의 활약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달려가 파라켈수스의 몸을 짓누르는 언데드들.
이윽고 그들이 품고 있는 어둠이 파라켈수스의 빛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파라켈수스의 눈에 처음으로 당혹이 서리는 순간이다.
“조금만 더 버텨! 놈을 봉인하려면 조금 더 힘을 깎아내야 해!”
그것을 본 칠검들이 한층 더 강한 힘을 불어넣으며 사슬의 결속력을 높였다.
노림수는 지극히 간단했다. 이대로 파라켈수스의 힘을 줄여 봉인하는 것.
“알고 있어..!”
물론, 파라켈수스의 목숨을 앗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결말이긴 하다.
그러나 조금 전 파라켈수스의 팔이 재생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지금 파라켈수스의 몸 상태는 어딜 봐도 정상이 아니다.
한때 태양신을 따르던 마족들에게 아직 ‘재생’의 힘이 남아있는 것처럼.
파라켈수스 역시도 재생의 힘..아니, 불사의 힘을 가지게 되어버렸다는 거다.
“지금이야!”
그렇기에 봉인은 피치 못할 선택이었다.
아니, 봉인이라도 하면 다행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
여기서 파라켈수스를 놓쳤다가는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다.
“티타르!”
“알고 있어!”
용사들의 힘이 사슬을 통해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힘을 아우르는 것은 티타르가 가진 천둥의 오러였다.
뒤엉키는 일곱 개의 열쇠.
비록 성검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일곱 용사가 행하는 봉인은 더할 나위 없이 견고함을 가지고 있었다.
“멍청하긴.”
그러나 파라켈수스 역시 쉽게 당하지는 않았다.
하기야 파라켈수스는 용사의 힘을 무려 삼 천년 간이나 연구해 온 남자다.
칠검이 선택할 수 있는 수단 정도는 진작에 예측하고 있다는 거다.
“겨우 이게 전부였더냐? 역시 너희는..!”
“그럼 이건 어때?”
필사적으로 봉인에 임하는 칠검을 조소하는 파라켈수스.
허나 그런 파라켈수스조차 예상하지 못한 경우가 존재했다.
“..스승님?”
저 멀리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익숙한 얼굴이 그 정체였다.
차갑게 얼어붙은 눈빛이 파라켈수스를 노려본다.
클라리스 아르나드.
파라켈수스의 눈빛에 당혹이, 그리고 분노가 서리는 순간이다.
“스승님이 왜 여기에..네놈들은 대체 스승님께 무슨 짓을 한 거냐..!”
“무슨 짓?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구나. 파라켈수스.”
“스승님..설마 기억이..?”
“돌아왔지. 그게 이상한가?”
“하, 하지만 그럼 왜 저를..”
“숨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나는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
“데이브 클락..!”
파라켈수스의 눈에 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모든 일들이 데이브의 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곧 죽어도 그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겠지.
까드득.
파라켈수스의 분노가 치솟는다. 일순 잦아드는 것 같았던 떨림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뜯어질 것처럼 거칠게 흔들리는 사슬.
그 모습을 본 칠검들의 표정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붙잡아!”
다행히 폴의 명령이 그들을 도왔다.
순식간에 쇄도한 그의 양 팔이 파라켈수스의 몸을 바닥으로 짓누른다.
그 역시 독의 영향을 받지 않는 언데드였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콰직!
비록 오래 견디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클라리스가 다가올 시간을 벌기엔 충분했다.
새하얀 빛을 내뿜는 클라리스의 검.
“이걸로 끝이다. 파라켈수스.”
“..아뇨, 틀렸습니다. 스승님.”
그러나 작별을 전하기엔 아직 일렀다.
최후의 순간, 불현듯 파르르 떨리기 시작하는 클라리스의 검.
그녀의 검은 어느덧 허공에 멈춰 있었다.
‘직접 공격하는 게 아니면 괜찮은 거 아니었나?’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클라리스의 눈이 부릅떠진다.
“스승님은 아직도 저를 모르시는군요..스승님께서 도망쳐 계셨던 지난 2천 년 동안..제가 그냥 손을 놓고 있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육체가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클라리스의 검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그녀의 목을 겨눈다.
물론 클라리스 역시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심상이 그녀의 육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멋대로 몸이 움직이는 일은 없을 테지.
“젠장.”
문제가 있다면, 그 대처가 조금 늦어버렸다는 점에 있었다.
클라리스의 빈틈을 노려 구속에서 벗어난 파라켈수스.
이어지는 폭발에 폴과 언데드들의 몸이 튕겨 나간다.
“크윽.”
폴의 몸이 바닥을 나뒹군다.
고개를 들어보면, 어느덧 파라켈수스의 손이 클라리스를 향해 뻗어지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길함이 느껴지는 손길이다.
“어서 막아!”
그 모습에 다급함을 느낌 칠검이 곧장 파라켈수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뒤를 잇는 것은 폴과 사라, 그리고 탕 티르였다.
“안타깝군요. 스승님. 아무래도 지난 이천 년은 당신에게도 긴 시간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빠르게 달려본들 한계는 존재했다.
진녹색의 광채가 세계를 물들인다.
* * *
같은 시간, 대륙 역시도 전쟁의 여파를 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라나와 엘리아가 발 빠르게 상황을 전달하였지만 그녀들의 말을 믿는 사람은 적었고.
발할라와 레온하트가 그나마 발 빠르게 대처하긴 했지만 완전한 대응은 할 수 없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준비를 했느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적들의 힘은 하나하나가 소드 마스터를 넘어서고 있지만, 인간들에게는 그만한 강자를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쏴라! 쏴!”
“공격해!”
하지만 선택받은 용사나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라 해도 영웅은 될 수 있었다.
위기의 순간, 세계 각국에서 영웅들이 등장하며 기계 군단의 공격에 맞섰다.
“일반 병사들은 대포에 집중해라! 시간은 내가 벌겠다!”
할거하는 영웅들. 그 속에서도 팔레아스의 이름은 두드러졌다.
이번 전쟁에서 검왕의 이름을 가지게 된 오테 팔레아스와 그의 아들 크리스 팔레아스.
순식간에 휘둘러지는 검격에 안드로이드들의 몸이 밀려난다.
그러나 고작해야 생채기 정도를 남겼을 뿐, 안드로이드를 부수기엔 위력이 부족했다.
“지금이다!”
콰아앙!
허나 오테 역시도 아무 생각 없이 공격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쏟아지는 포환의 비가 안드로이드를 휩쓴다.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하는 것만 같은 위력의 공격.
그러나 인류의 반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물러서! 감전된다!”
파지지직!
격중과 동시에 터져 나가는 뇌전의 폭탄.
삽시간에 공간을 가로지르는 뇌전이 안드로이드들의 부품을 망가트린다.
‘하르트 공방’에서 제작된 대 안드로이드용 병기의 진가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지금이다! 밀어붙여!”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의외의 얼굴들이었다.
전장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엘프의 집단.
이전의 엘프들을 생각해 보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협력이었다.
쏟아지는 화살이 적들의 몸을 밀어붙인다. 정령사들이 나선 것은 그 순간의 일이었다.
지금껏 미동조차 하지 않았던 기계 군단에 처음으로 균열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엘리아 그 녀석..그냥 도우라는 말만 하고 떠나버리다니..”
가장 선두에 나선 것은 최근 엘프들의 장로가 된 쿠단이었다.
한때는 세계수를 배신하고 엘프들의 신뢰를 잃었던 그.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런 쿠단이 엘리야 다음의 장로가 된 까닭은.
확실히 운명이란 참 알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네 말을 듣는 건 자존심이 상하지만..어쩔 수 없지. 이것이 세계수 님의 뜻이라면..!”
쿠단이 양팔을 벌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숲의 대정령이었다.
* * *
“강철이 더 필요하다.”
같은 시각. 하르트와 지그문트의 공방은 밤낮없는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연신 망치를 두드리며 쉴 새 없이 병기를 만들어 내는 하르트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런 하르트의 말에 곧장 재료를 가지러 달리는 아이온과 드모어.
그 뒤에선 지그문트가 하르트가 만든 무기에 마법을 새겨넣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침입자야.”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하르트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 그의 등 뒤로 모습을 드러내는 건 한때 보리스에 의해 부활한 과거의 용사 란이었다.
“..나가봐야겠어. 아무래도 대장간 앞까지 온 것 같아.”
“그래, 부탁하마.”
하르트와 란의 짧은 대화가 오간다.
내용 자체는 별거 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묘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두 사람이다.
보아하니 그간 제법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녀올게.”
란이 빙긋 웃어 보이며 대장간을 나선다.
비도를 꺼내 들며 나서는 그녀의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스산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기긱..긱..”
그런 그녀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무수한 안드로이드의 대군이었다.
겨우 대장간 하나를 공격하기 위해 모였다기엔 지나치게 많은 숫자다.
아무래도 뭔가를 알고 찾아온 것 같다.
“설마 아직도 첩자가 남아있는 건가? 하긴, 그래봤자 소용없겠지만.”
가볍게 휘두른 손에 투명한 와이어가 거미줄처럼 펼쳐진다.
고요한 일격이었다. 순식간에 잘려 나가는 안드로이드들의 몸.
“자..시작해볼까?”
이윽고 란의 몸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달려오는 검은 형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단숨에 잘려 나가는 몸.
이윽고 초원 위로 쓰러지는 것은 거대한 크기의 마수였다.
“어, 어떻게 혼자서 그 괴물을..”
경악 섞인 목소리에 뒤돌아보면, 익숙한 얼굴의 호루스족이 나를 향해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솔리아인 것 같은데.”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시는 거죠?”
“태양신의 성녀잖아.”
“네? 성녀요?”
내 대답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문하는 솔리아.
설마 아직 태양신의 성녀가 아닌 건가?
그러고 보니 솔리아의 모습이 전에 봤던 것보다 어리다.
‘그럼 대체 여기는 어디라는 거야?’
나는 혼란을 숨기지 못한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길을 단단히 잃어버린 모양이다.